이번 한 주, 삼무곡에서는 일상이 역사라는 주제를 가지고 4박 5일간 경주로 신라 역사 기행을 다녀왔다. 10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신라, 그 안에서 각자 개별적으로 인물을 한 명씩 정한 후, 그 인물의 상징적인 장소를 골라 공부하고 직접 가이드하는 형식으로 배움의 길을 나섰다. 이번 여행을 통해, 나는 무엇을 배웠는가. 이 이야기는 신라 역사 기행에 대한 나의 배움 이야기이다.
첫 번째 답사지는 나정이었다. 나정은 머나먼 옛날, 신라가 아직 국가의 형태를 이루기 전, 여섯 부족의 연방채로서 존재하던 시기에 여섯 부족의 영토가 맞닿아 있는 중앙 광장과 같은 장소였다. 당시 사람들은 나정에서 물을 길어가기도 하고, 장을 열어 물건을 사고 팔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신라의 건국 신화에 따르면, 이 나정에서 박의 모양을 한 알이 발견되었고, 그 알에서 태어난 박혁거세를 필두로 신라가 건국되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정을 이번 역사 기행 중 가장 먼저 방문한 것이었다. 신라는 어떻게 건국된 나라인지, 그 첫걸음을 살펴보기 위해서 말이다.
이때 현곡은 신라의 건국 신화에 대한 자신의 개인적인 가설을 들려주셨다. 왜 어린 박혁거세를 필두로 여섯 부족의 지도자들은 신라를 건국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그들에게 편애와 편견 없는 공명정대한 왕이 필요했기 때문이리라. 자신들 사이에서 절대적 권력을 지닌 지도자를 선출하게 되면, 그 인물은 자신의 출신에 따라 불공평한 정치를 할 위험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나정에서 발견된 이국적 외모의 아이, 아직 어떤 사상도 가지지 않고, 여섯 부족 중 어느 핏줄도 이어받지 않은 박혁거세를 왕으로 세우고 가르침으로써 통합된 하나의 국가로 발돋움하는 과정을 거친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나는 이 이야기의 진위 여부에 상관없이 가설이라는 전제만으로도 정말 인상적이게 들었다. 국가의 건국에 대한 정형화 되어있는 방식이 없던 시기에, 스스로 이상적인 공동체의 형태에 대한 고찰을 가지고, 이후 직접 시행착오를 거쳐서 마침내 민주적 절차를 통해 군주정을 도입했다는 이야기. 이는 나에게 있어서 정치에 대한 또 다른 시각을 보여주는 듯했다. 과연 신라가 이러한 뜻으로 세워진 나라인지 알 수는 없지만, 결국 의지는 계승되게 되어있다. 혹은 이어지거나, 변화하고, 잊히거나 왜곡될 수 있다. 그러한 변화의 과정을 굉장히 인간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역사일 테니, 앞으로의 신라 역사 기행을 통해서 알아낼 수 있는 부분 또한 분명히 있으리라. 왜냐하면 내가 생각하기에 역사란 결국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답사지는 포석정이었다. 포석정은 신라시대 귀족들이 음주 가무를 즐기던 곳으로도 유명하지만, 그 외로 포석정에는 불교의 상징인 남산으로 제사를 드리는 용도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신라는 국교가 불교인 만큼, 불교와 어우러진 역사 속 장면들이 굉장히 많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번 역사 기행에 앞서서 공부했었던 양이, 신라에 대한 것 보다 불교에 대한 것이 훨씬 더 많았다. 물론 내가 고른 인물이 김대성이고 장소가 불국사와 석굴암, 월정교였던 데에도 이유가 있었지만, 그만큼 신라가 불국토로서의 자부심과 뿌리 깊은 종교적 색채가 강한 나라였던 것도 한목 했으리라 생각된다.
포석정에서는 어느 한 가이드분께서 개인적으로 우리에게 시간을 내주셔서 포석정과 신라에 얽힌 여러 자질구레한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무언가 감명 깊거나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없었지만, 선의로 들려주시는 이야기였기 때문에 이 또한 낭만적인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세 번째 답사지는 분황사였다. 분황사의 창건은 삼국시대가 한창이던 시절, 27대 왕 선덕여왕이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 당에서 선덕여왕에게 꽃을 그린 그림을 선물로 보내온 사건에서 시작되었다. 그 그림에는 아름다운 꽃이 그려져 있어 선덕여왕의 아버지인 26대 왕 진평왕은 몹시 기뻐했으나, 정작 당사자였던 선덕여왕은 심드렁했다고 한다. 이에 진평왕이 이유를 묻자, 선덕여왕은 “이 꽃은 향기가 나지 않는 꽃입니다.”하고 말하였다. 왜냐하면 꽃에 향기가 났다면 꽃 주변에 벌이나 나비들이 날아다녀야 하는데, 이 그림에는 벌과 나비가 전혀 그려져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에 진평왕이 직접 그림 속 꽃의 씨앗을 들여와 길러보았더니, 정말로 꽃에서는 향기가 나지 않았더랬다. 이후 선덕여왕은 왕위에 오르고 3년 뒤 황룡사 옆에 작은 절, 분황사를 세움으로써 자신이 향기 있는 여자임을 시인한다. 이러한 일화는 선덕여왕의 영험함을 나타냄과 동시에 잊지 않고 실천하는 모습 또한 나타낸다. 이후 당으로 유학을 떠나려던 원효는 해골 물 일화가 있고 분황사에 들어와 지내며 분황사 주지의 자리를 역임하게 된다.
네 번째 답사지는 황룡사지였다. 황룡사는 제 24대 왕 진흥왕에 창건된 대규모 사찰이다. 그때 당시 황룡사가 지닌 상징성은 막강했으며, 이후 선덕여왕이 재위 기간동안 당으로 유학을 다녀온 자장율사의 간청으로 황룡사 9층 목탑을 지음으로써 그 웅장함이 한층 강화되었다. 황룡사 9층 목탑은 높이가 80M가 넘어가는 초대형 건축물이었으며, 높이가 높은 건축물이 없던 경주(서라벌)에서는 어디서나 눈에 띄는 랜드마크였다. 거기에 총 9층까지 높게 쌓아 올린 층수는 신라 주변국 여덟 나라를 모두 신라 밑에 무릎 꿀리겠다는 배포를 의미하며, 당시 백제,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난세였던 시기에 백성들의 마음을 몹고 사기를 복돋고자 하는 의미 또한 담겨 있었다.
그러나 정작 백성들로서는 그저 바라보기밖에는 할 수 없는 탑이기도 했으니, 그 이유는 황룡사가 진골 이상의 신분을 지닌 자만이 드나들 수 있는 신분제 사찰이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황룡사 바로 옆에 세워져 있는 분황사는 시민들의 입장에서 황룡사에 드나들 수 없는 만큼 대체제로 다니는 절이 되었다. 황룡사만큼 화려한 사찰은 아니지만, 시민들로서는 분황사를 다니며 자신의 처지에 맞게 종교 생활을 한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부분에서 굉장히 모순적인 감정을 느꼈다. 왜냐하면 내가 이번 신라 공부를 하며 알게 된 사실 중 하나로, 석가모니 부처님은 신분제의 폐지를 실천하던 분이셨기 때문이었다. 석가모니불이 활동하던 시기, 인도에서는 상투를 높이 올림으로서 자신의 신분을 나타냈다. 그랬기에 신분제에서 벗어난다는 의미로 석가모니불은 자신을 따르는 수행자들에게 머리를 깎도록 시킨 것이다. 그런데 정작 불교를 국교로 삼은 신라에서 역으로 불교를 이용해 신분제를 강화하고 있으니, 참 아이러니 하면서도 올바르지 못한 방식으로 계승되는 의지를 마주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다섯 번째 답사지는 흥륜사지였다. 흥륜사는 신라에 처음으로 세워진 불교 사찰이다. 그렇기에 신라에서 처음으로 불교를 들여온 상징적 의미가 담긴 사찰이기도 했다. 삼국시대, 적국 백제와 고구려 모두 불교를 받아들이며 민중의 단합을 이끌어 내는 것을 보고 신라의 23대 왕 법흥왕은 불교를 들여오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나 모태신앙이 강했던 그 당시 신라에 불교를 들여오는 것은 정신적, 정치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고, 계속되는 신하들의 반발에 법흥왕은 골머리 썩히던 와중이었다. 이때 법흥왕은 자신이 가장 아끼는 사람이었던 이차돈에게 흥륜사를 짓도록 시킨다. 그러나 외부로는 법흥왕의 명령 없이 개인적 결단으로 흥륜사를 짓는 것이었던 이차돈은 법흥왕의 명에 따라 사형에 처한다. 이차돈은 죽기 전, 유언으로 자신이 죽을 때 어떠한 신비한 일이 일어나리라 말했으며, 이후 망나니에 의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목이 잘려 죽게 된다. 그 순간, 꽃이 흩날리고 목이 잘린 이차돈의 몸에서 새하얀 피 분수가 치솟는다. 이런 신성한 사건에 힘입어, 법흥왕은 흥륜사 건설을 계속해서 마침내 신라에 불교를 들여오게 된다.
법흥왕은 재위 기간 동안 자신의 왕명대로 법을 흥하는데 다양한 정책을 펼쳤다. 특히 그 방법으로 신라에 불교를 들여와 국교로 삼음으로써 민중이 가진 종교를 향한 신앙심을 이용하였던 것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그 말인즉슨, 신라에 불교가 들어오게 된 계기는 애초부터 왕권 강화와 민중 의식의 단결을 이루기 위한 용도로 사용하는 데 있던 것이다. 당초에 종교를 향한 신앙심만큼 사람의 마음을 직설적이고 단순하게 만드는 것은 달리 없었으니 말이다. 물론 법흥왕의 입장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법흥왕은 자신의 역할에 따라 왕으로서의 선택을 한 것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제 와 역사를 되새겨 보면, 정말 모순적이지 않을 수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람을 다스리는 정치의 관점을 살펴보면, 우리가 흔히 들이대는 잣대인 선악과 잘잘못에 대한 판단이 알맞게 맞아 떨어지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보다 보면 어떠한 선택도 의미 없는 결단인 경우가 없고, 무엇이든 무수히 많은 사건의 연계 중 한순간을 채우고 다른 사건을 발생시키는 기반이 되어준다. 그렇다 보니 결국 내가 생각하기에 역사란 그저 이야기일 뿐이라는 것이다. 내가 무어라 판단할 만한 문제지가 아니라, 그저 읽고 그에 따라 감상을 가지고 살아가면 되는 이야기. 그저 그런 이야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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