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고 나면 줄거리가 남는 영화가 있고, 장면이 남는 영화가 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후자에 가깝다.
〈친절한 금자씨〉를 떠올리면 나는 먼저 이야기를 기억하지 않는다. 붉은 눈화장을 한 금자의 얼굴, 새하얀 두부, 눈이 내리는 거리,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 케이크 위의 촛불 같은 이미지들이 먼저 떠오른다.
이것이 박찬욱 감독이 영화를 찍는 방법을 이해하는 첫 번째 열쇠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야기를 설명하기 위해 화면을 사용하는 감독이라기보다 화면 자체가 이야기를 말하게 만드는 감독이다.
그래서 그의 영화에서는 대사를 듣기 전에 색을 보게 되고, 인물의 마음을 이해하기 전에 공간의 모양을 느끼게 된다.
〈친절한 금자씨〉는 복수에 관한 영화다.
그러나 박찬욱은 복수를 단순하게 찍지 않는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찾아가 응징하고 끝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는 복수를 아름답게 찍고, 우스꽝스럽게 찍고, 잔인하게 찍었다가 갑자기 슬프게 만든다.
그래서 관객은 어느 순간 자신이 무엇을 느껴야 하는지 혼란스러워진다.
바로 그 혼란이 박찬욱 영화의 힘이다.
박찬욱은 감정을 설명하지 않고 보여준다
보통 영화에서는 슬픈 사람이 울고, 화난 사람이 소리를 지른다.
그러나 박찬욱의 인물들은 그렇게 친절하게 자신의 감정을 설명하지 않는다.
특히 금자는 그렇다.
금자는 웃는다.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한다.
말투도 차분하다.
그런데 그 얼굴 안에는 전혀 다른 감정이 숨어 있다.
분노와 죄책감, 복수심과 슬픔이 동시에 들어 있다.
이영애의 얼굴은 그래서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가 된다.
박찬욱 감독은 그 얼굴을 이용한다.
우리가 알고 있던 이영애의 단정하고 우아한 이미지를 가져와 그 위에 붉은 눈화장을 입힌다.
그리고 말한다.
“너나 잘하세요.”
이 짧은 말은 금자가 어떤 사람으로 변했는지를 긴 설명보다 정확하게 보여준다.
박찬욱 감독은 인물의 마음을 대사로 해설하기보다 얼굴과 색과 행동으로 번역한다.
그에게 영화는 설명하는 예술이 아니라 보여주는 예술이다.
붉은색과 흰색이 싸우는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색이다.
특히 빨강과 하양이다.
붉은 눈화장에는 복수가 있다.
피가 있다.
욕망이 있고 분노가 있다.
반면 흰색에는 순수와 구원이 있다.
영화 초반의 두부가 그렇고, 후반부의 눈과 케이크가 그렇다.
그러나 박찬욱은 색의 의미조차 단순하게 만들지 않는다.
흰색이라고 해서 완전한 순수는 아니다.
금자는 출소하면서 두부를 받는다. 흔히 출소자에게 두부를 먹이는 것은 앞으로는 깨끗하게 살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금자는 그것을 거부한다.
아직 자신에게는 깨끗해질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영화가 끝날 무렵 다시 흰색이 등장한다.
이번에는 눈이다.
눈은 세상을 하얗게 덮는다.
하지만 눈이 내린다고 과거의 죄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박찬욱의 미학은 흥미로워진다.
흰색은 용서를 뜻하지만 용서받았다는 뜻은 아니다.
구원을 갈망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도 아니다.
박찬욱 감독은 색 하나에 이렇게 여러 의미를 겹쳐놓는다.
아름다운 화면 속에 끔찍한 것을 넣는다
박찬욱 영화의 가장 독특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잔혹한 이야기를 아름답게 찍는다는 것이다.
보통 끔찍한 사건은 끔찍하게 찍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박찬욱은 반대로 간다.
카메라는 정교하고 화면은 아름답다. 공간은 치밀하게 배치되어 있고 배우들의 위치까지 계산되어 있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화면 안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
그래서 관객은 불편해진다.
‘이 장면을 아름답다고 느껴도 되는가?’
그 질문이 생긴다.
나는 이것이 박찬욱 감독의 중요한 영화적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폭력을 단순히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폭력을 바라보고 있는 관객 자신의 시선까지 의심하게 만든다.
잔혹한 장면인데 눈을 떼기 어렵다.
끔찍한데 화면은 아름답다.
그 순간 관객은 안전한 구경꾼으로 남을 수 없다.
복수극을 찍다가 갑자기 회의를 시작한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내가 가장 흥미롭게 본 것은 후반부다.
금자는 백 선생을 찾아낸다.
이제 관객은 기다린다.
‘드디어 복수가 시작되는구나.’
보통의 복수영화라면 여기에서 주인공의 통쾌한 응징이 시작될 것이다.
그런데 박찬욱 감독은 갑자기 영화의 속도를 바꾼다.
피해 아동의 부모들을 불러 모은다.
그리고 그들에게 선택하게 한다.
경찰에 넘길 것인가.
아니면 직접 복수할 것인가.
여기에서 영화는 복수극에서 이상한 회의영화로 변한다.
사람들은 둘러앉아 의논한다.
망설이고, 질문하고, 서로의 눈치를 본다.
너무나 끔찍한 상황인데 이상하게 일상적이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에서 자주 나타나는 것이 바로 이런 잔혹함과 일상성의 충돌이다.
사람들은 복수를 결정하면서도 현실적인 문제를 이야기한다.
누가 먼저 할 것인지,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한다.
관객은 웃어야 할지 긴장해야 할지 알 수 없게 된다.
박찬욱은 바로 그 불편한 틈을 좋아하는 감독이다.
관객에게도 칼을 하나 건네준다
후반부의 복수 장면에서 박찬욱 감독은 더 무서운 일을 한다.
관객을 복수에 참여시킨다.
백 선생의 범죄를 알게 된 순간 우리는 분노한다.
그가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피해자 부모들의 심정에 공감한다.
그러다 그들이 직접 복수하기로 결정하면 처음에는 그것이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실제 복수가 시작되는 순간 마음이 달라진다.
‘과연 이것이 옳은가?’
박찬욱은 그 질문을 관객에게 돌려준다.
당신도 조금 전까지 이 남자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느냐고.
그렇다면 당신은 이 장면과 아무 관계가 없는가.
이것이 박찬욱 감독의 잔인함이다.
그는 관객에게 편안한 도덕적 자리를 주지 않는다.
가해자를 미워하게 만들고 복수를 바라게 한 다음, 실제 복수를 보여주면서 우리가 품었던 욕망을 되돌아보게 한다.
말하자면 박찬욱은 관객의 손에도 보이지 않는 칼 하나를 쥐여준다.
잔혹한 순간에 왜 웃음이 나오는가
박찬욱의 영화에는 이상한 웃음이 있다.
배꼽을 잡고 웃는 코미디가 아니다.
웃어서는 안 될 것 같은 순간에 갑자기 튀어나오는 웃음이다.
〈친절한 금자씨〉에서도 그렇다.
끔찍한 복수를 앞두고 사람들이 현실적인 대화를 나누거나 예상하지 못한 행동을 할 때 웃음이 발생한다.
그러나 웃고 나면 곧 불편해진다.
‘내가 지금 왜 웃었지?’
이 감정의 이동이 중요하다.
박찬욱 감독은 관객을 한 가지 감정에 오래 머물게 하지 않는다.
슬픔 속에 웃음을 넣고, 아름다움 속에 폭력을 넣으며, 복수의 통쾌함 속에 죄책감을 집어넣는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감정적으로 편하지 않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래 기억된다.
음악은 장면을 설명하지 않고 배반한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에서 음악 역시 중요한 연출도구다.
〈친절한 금자씨〉의 음악은 단순히 감정을 강조하는 배경음악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때로는 화면의 잔혹함과 어울리지 않을 만큼 우아하다.
그 불일치가 오히려 장면을 더 섬뜩하게 만든다.
폭력적인 장면에 폭력적인 음악을 넣으면 관객은 쉽게 받아들인다.
‘무서운 장면이구나.’
하지만 잔혹한 화면 위에 아름답고 우아한 음악이 흐르면 관객의 감정은 갈라진다.
눈은 끔찍한 것을 보고 있는데 귀는 아름다운 것을 듣는다.
그 틈에서 불안이 생긴다.
박찬욱은 그 불안을 영화의 감정으로 사용한다.
복수의 끝에는 왜 눈이 내리는가
영화의 마지막에 가까워질수록 금자의 얼굴에서 복수의 열기는 조금씩 사라진다.
복수는 끝났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통쾌하지 않다.
그녀가 오랫동안 바라던 일을 해냈는데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왜일까.
복수는 상대를 없앨 수 있지만 과거를 없애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을 되살릴 수도 없고, 상처받은 시간을 원래대로 돌릴 수도 없다.
그래서 박찬욱 감독은 복수의 끝을 승리로 찍지 않는다.
눈이 내린다.
하얀 세상 속에서 금자는 서 있다.
영화 초반부터 반복되었던 흰색의 이미지가 다시 돌아온다.
금자는 순수해지고 싶었을 것이다.
씻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눈이 내려도 인간의 과거를 완전히 덮을 수는 없다.
그것이 박찬욱이 생각하는 복수의 끝인지도 모른다.
박찬욱은 정답을 찍지 않는다
〈친절한 금자씨〉를 보고 나서 나는 박찬욱 감독이 영화를 찍는 방법을 한 문장으로 생각해 보았다.
그는 관객에게 무엇이 옳은지를 가르치는 대신, 옳다고 믿었던 마음을 흔든다.
금자는 피해자인가.
그렇다.
금자는 가해자인가.
그렇기도 하다.
백 선생은 처벌받아야 하는가.
그렇다.
그렇다면 피해자의 가족이 직접 죽여도 되는가.
그 질문부터 대답이 어려워진다.
복수하고 나면 정의가 완성되는가.
영화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듯하다.
박찬욱 감독은 바로 그 애매하고 불편한 지점에 카메라를 세운다.
그리고 아름답게 찍는다.
너무 아름다워서 눈을 돌릴 수 없게 만든 뒤, 그 아름다움 속에 인간의 가장 추한 욕망을 넣어놓는다.
그래서 그의 영화에서 미장센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색도 장식이 아니고, 음악도 장식이 아니며, 배우의 표정도 장식이 아니다.
모든 것이 질문이다.
빨간 눈화장은 묻는다.
복수는 인간을 무엇으로 만드는가.
하얀 두부는 묻는다.
인간은 과거를 씻고 다시 깨끗해질 수 있는가.
피해자 부모들의 복수는 묻는다.
정의와 복수의 경계는 어디인가.
마지막의 흰 눈은 다시 묻는다.
죄를 씻는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래서 〈친절한 금자씨〉를 보고 난 뒤 남는 것은 복수의 쾌감보다 이상한 쓸쓸함이다.
어쩌면 이것이 박찬욱 감독이 영화를 찍는 방식의 핵심인지도 모른다.
그는 관객을 울리려고 슬픈 장면을 만들지 않는다.
놀라게 하려고 잔혹한 장면을 만들지도 않는다.
아름다움과 잔혹함, 웃음과 슬픔, 선과 악을 한 화면 안에 함께 집어넣는다.
그리고 카메라 뒤로 물러선다.
판단은 관객에게 남겨둔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의 불이 켜진 뒤에도 그 판단은 쉽게 끝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이 박찬욱 영화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그에게 영화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이기 전에 관객의 마음속에 불편한 질문 하나를 아름다운 이미지로 심어놓는 일이다.
그래서 〈친절한 금자씨〉는 복수를 보여주는 영화이면서 동시에 복수를 바라보는 우리 자신을 보여주는 영화다.
금자의 붉은 눈을 바라보고 있었던 줄 알았는데,
영화가 끝나고 나면 어느새 그 붉은 눈이
우리 쪽을 바라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