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수수 급식 빵의 유혹/박철영
1학년이어도 학생이었다. 집에 있을 때와 달리 학교에서 해야 할 공부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공부가 끝나면 정책적으로 내려온 급식 빵이 있었다. 1968년에 입학을 했으니 6.25 전쟁이 끝나고 미국의 지원 물자였을 것이다. 학교가 끝날 때면 급식으로 배정된 옥수수빵을 나눠주었다. 빵은 두부 모처럼 사각형으로 자른 건데 김이 모락거리며 올라오는 향기가 좋았다. 약간의 우유 맛도 나고 옥수수 특유한 향과 노릇노릇 거친 알갱이가 눈으로 봐도 입맛을 돋웠다. 그런데 그 맛있는 빵을 1학년이라고 전체 아이들에게 다 주는 것이 아니었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은 매일 타 먹었는데 나는 그런 정도는 아니라 일주일에 한 번 정도만 타 먹었다. 교무실 뒤쪽 개복숭아가 열린 수돗가 옆 작은 건물이 있었다. 그곳에서 옥수수빵을 쪄냈다.
학교에는 물을 마실 수 있는 곳이 딱 한 곳이 있었다. 우물에 작두 모양의 장치를 설치해놓아 우선 그렇게 마실 수 있는 우물이 신기하게 보였다. 문제는 두레박을 사용하지 않아 좋긴 하였는데 단점이 있었다. 작두 우물을 길어 올리는데 어린아이들한테는 힘이 들었고 어려움이 있었다. 우선 작두같이 생긴 손잡이가 물을 빨아올리는 곳의 고무 빨판을 움직이게 되어 있었다. 그 빨판은 우물 안으로 박힌 파이프 상단에 고정되어 바가지로 물을 부으면 고무 빨판이 물을 가뒤 진공상태가 되도록 하였다. 그런 진공 상태를 유지하도록 열심히 펌프질을 해줘야 물이 올라오는 것이다. 힘에 부친다고 펌프질을 멈춰버리면 올라오던 물이 다시 밑으로 쏙 빠져 버렸다. 이런 때는 최고로 난감했다. 그래서 친구 하나는 물바가지를 들고 서 있다 얼른 물을 부어줬다. 그런 노력으로 작두 우물에서 물이 콸콸 쏟아지면 입으로 대고 물을 마셨다.
그 우물은 시멘트로 만든 둥그런 롯깡 위에 판자로 만든 똥그란 뚜껑이 덮여있었다. 하늘색 뼁기가 칠해져 있던 판자를 덮어 위생상 관리가 되고 있었다. 군데군데 뼁기 칠이 판자에서 일부는 일어나 벗겨졌지만, 월락초등학교의 우물을 보며 학교는 확실히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우물에 칠해진 뼁기도 교실이 있는 교사 동을 칠하고 남은 것으로 칠했을 것이다. 당시만 해도 그 지역에서 가장 좋은 시설이나 건물이 학교 아니면 관공서였다. 마찬가지로 우리 동네에서 볼 수 없는 시설들이 우선 좋았다. 그 뼁기도 나에게는 신기한 것이고 으레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뼁기라는 것이 요샛말로 치면 페인트를 가리키는 말이다. 우린 국어 선생에게 국어인 한글을 열심히 배운다. 그러나 국어를 선생님으로부터 배우기 이전에 부모로부터 모음의 언어를 배워왔다. 그토록 소중한 생활 언어인 식정리에서 사용한 말은 학교에서 가르쳐 주질 않았다. 오히려 표준어라는 괴물을 주입해서 내 머릿속을 하얗게 지워나갔다. 나는 그래서 우리 고향의 흩어지고 사라져 가는 일들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기억을 되살려 기록을 하고 있다. 사라져 간 언어는 내 고향 사람들의 소중한 생활 언어였고 그 사람들의 한 번뿐인 소중한 삶 전부였기 때문이다.
월락초등학교가 한 학년에 2반씩이 있었으니까 6학년까지 12개 반이 있었다. 양철통에 담긴 빵을 타러 가면 간혹 빵이 늦어질 때가 있었다. 급식 빵을 먹고 싶은 아이들을 내심 초조하게 만들었다. 여의치 않을 때는 그냥 하교를 시킨 적도 있었기에 그랬다. 한참을 기다렸다 빵이 담긴 양철통을 들고 오면 옥수수빵에서 풍기는 향기가 배고픈 아이들에는 말할 수 없이 좋았을 것이다. 옥수숫가루가 거칠어서인가 빵을 먹으면 씹히는 감이 거칠었고 거친 알갱이를 씹어 먹는 질감이 좋았다. 그 빵은 한꺼번에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아까워 조금씩 뜯어 먹었다. 지금도 맛있던 무첨가 된 빵이 간혹 생각이 난다.
계절이 바뀌어 월락초등학교의 옥수수빵을 만들던 곳 주변에 있던 복숭아가 군데군데 빨갛게 익어가고 있었다. 아이들 손보다 클 정도의 개복숭아 삼촌쯤 되는 복숭아였다. 그것이 익어가면 고학년 선배들은 키 높이만큼 눈치껏 하나씩 따 먹은 것을 보았다. 그러고 며칠이 지나 학교에서 그것을 다 따서 옥수수빵을 나눠 주듯 한 두 개씩 배분해줬다. 잘 익은 것을 한입 베어 물면 복숭아의 단맛이 오래도록 배어 나왔다. 마지막 손에 남은 복숭아씨가 엄청 크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어른 사회나 아이들 사이나 먹는 것이 절박해지면 다들 거칠어진다. 학교에서 급식한 빵이란 먹거리가 알게 모르게 은연중 힘이 있는 곳으로 모아졌다. 어린 내가 그토록 먹고 싶은 옥수수빵이었지만, 내 마음대로 먹을 수 없었다. 어린 여덟 살짜리 친구의 말발 쎈 氣에 눌린 것이다. 어린아이들은 한번 기에 눌리면 헤어날 수가 없다. 내가 그랬다. 잘나가던 내가 어느 순간에 갈치 입구 삼거리 외딴집에 사는 남영이 한테 학교에만 가면 주눅이 들었다. 그래서 어렵사리 한 번씩 타 먹는 빵을 남영이한테 줘야 했다. 지금은 세월이 흘러 웃음뿐이지만, 그 빵을 남영이는 어떻게 했을까. 남영이네 종식이 형이 싸움을 그리 잘한다고 했었다. 그 말은 아마 환춘이한테 덤으로 들었다. 여하튼 뭐 남영이를 잘못 건들면 가차 없이 갈치 입구 삼거리에서 기다렸다가 그 형한 테 엄청 맞는다고 들었다. 갈치 선배 누구누구도 그렇게 당했다는 사례까지 곁들여졌다. 학교를 마치고 우리 마을을 가려면 갈치 입구 삼거리를 꼭 지나야만 했다. 외통수 길이었으니 어린 마음에 도통 다른 수가 없었다. 나중 고등학교 때쯤인가 종식이 형을 보고 웃음이 났다. 그만큼 순진무구한 시절 이야기였다. 그러다 보니 쌈 잘하는 형이 있는 남영이에게 겁을 먹었다. 1학년 때는 학교 가는 것이 그래서였을까 별로 재미가 없었다. 월락초등학교 1학년 때 최정수 선생님이 담임이었다. 그분은 갈치 입구 삼거리를 지나 하갈치에서 출퇴근을 하였다. 오십 대 정도는 되어 보였고 그분은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선생님 사시는 곳이 바로 옆 동네였는데 나의 힘든 학교생활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런 남영이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남산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그 친구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안이 어렵다 보니 서울에 먼저 올라가 있었다. 나중 알게 된 남영이의 가슴 아픈 사연 때문이어서일까. 남영이는 질긴 생의 인연의 고리 속에서 많은 번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한 사람으로 태어나 살아가야하는 삶이란 것이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전생의 업으로 여겨 담담하게 풀어내야 끝이 나는가. 지금은 강원도 어디에선가 출가해 그마저 연락이 끊겨버렸다.
1학년이어도 방과 후에는 교실 청소를 했다. 교실 바닥을 쓸고 이어 창틀에 두 명씩 걸터앉아 마른걸레를 손으로 움켜쥐며 유리창을 닦았다. 다 닦고 나면 선생님에게 검사를 받아 합격해야 집에 갈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에 대해 불평 같은 것은 없었다. 선생님의 무리한 지시가 있어도 아예 불평해야 하는 줄을 몰랐다. 선생님 말씀은 다 지켜 져야 하고 당연히 지시에 따라 해야 하는 순박한 세상이었다. 요즘 학교에서 벌어지고 있는 학생과 선생님 사이에 심심찮게 올라오는 사건을 보면 과연 그 잘못이 누구로부터 시작된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해볼 때가 있다. 나는 안다. 그 문제의 시발이 어디에서 시작되어 교권이 무너지고 학생들이 그렇게 변해버렸는가를, 창틀에 걸터앉아 고사리손으로 닦은 유리창에는 월락 초등학교의 푸른 하늘이 여지없이 멋진 사진처럼 박혀있었다. 내가 봐도 너무 깨끗했다.
그런 교실에서 공부하면서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을 것이다. 문제는 성장하기 위해서는 진통이 따르는 법이다. 2학년이 되어서도 한글 받아쓰기를 못 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그런 아이들은 수업이 끝나도 학교에 남아 과외 비슷한 보충 수업을 했다. 나는 점수가 많이 나오지 않아 그렇지 아예 깜깜이는 아니었다. 안양으로 시집간 작은 누나가 내 머리를 쥐어박으면서 가르친 덕분일 것이다. 그 누나한테 쥐어박힌 꿀밤을 만약에 가마니에다 담아본다면 한 가마니는 되지 않을까. 받아쓰기를 못 한 아이들을 몇 명씩 묶어 책임지워서 나도 남아야 했다. 어렵게 그 시절을 넘긴 친구들 이름을 들춰본다면 펄쩍 뛸 것이다. 절대 자기들은 아니라고. 그중 한 친구의 도꾸리 옷을 입은 모습이 떠오른다. 당시는 도꾸리란 옷이 유행했다. 털실로 짠 옷이다. 오래 입으면 색이 바래 빨간색은 연 핑크가 되어 나중에는 마저 염색물이 빠져버려 멀리서 보면 희끗희끗한 흰색처럼 보였다. 남자아이들이나 여자아이들이나 그랬다. 그런 아이들이 자라 지금은 공무원이 되었고 의사가 되어 사회에서 한가락씩 하는 친구들이 되었다. 그래서 되짚어가는 추억은 아름답다.
첫댓글 옥수수빵 맛 있었지. 나는 육상부 후보선수라 옥수수빵을 더 좀 얻어먹을 수가 있었지. 그 시절 추억을 복기하기로 작정한 모양이구나. 좋다!!
되돌아가고 싶은데 그럴 수없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사실 사람이 그리운거지요.
형도 육상 선수였나봅니다
저도 한때는 좀 날았는데요
남들은 제 다리가 안 보인다고들했으니까요~~^^
@박철영 육상선수 후보였다네. 후보에 방점이 있네. ㅎㅎ
@안준철 지금처럼 당시도 긴 다리가 있어 좋았겠는데요.
@박철영 옷이 나팔바지였나 봅니다. 다리가 안보일 정도니 ㅎㅎㅎ
@우리윤아 그런 뜻이 아니고 다리가 빨랐다는 뜻 나도 육상선수였거든요
@박철영 에고 웃자고 한 얘기에 정색을 하시면 제가 뻘쭘 하지요 ㅎㅎㅎ
@우리윤아 아 난 역 캄인줄 알았네~~^^
에고 박시인님 복붙을 두번이나 하셨네요. 역시 사투리는 정확한 표기가 어렵죠. 도꾸리라 해서 설명을 읽고 알았네요. 우리 동네에선 독고리라고 했던 기억이 나네요. 펌프질 펄쩍 뛰어서 온몸으로 매달려 누르던 기억이 ㅎㅎㅎ 그래도 펌프 있는 집들이 엄청부러웠답니다. 저희는 우물물 길어 먹었지요. 우물은 새암이라고 불렀고 펌프는 뽐쁘라고 불렀답니다.
그러게요 하다보니 ~^^
독고리라~~^^
저희 때는 옥수수나 우유가루 무상급식이 없어서 도시락 못 싸오면 영락없이 수돗물 신세였답니다.
정말 어려운 환경이었네요
그러고보면 감사히 생각해야겠습니다
저도 집에 쌀이 떨어져서 식빵을, 무 깍두기가 없어서 인삼으로 깍두기를 담아먹고, 멸치가 없어서 녹용으로 마른반찬을 도시락으로 싸갖던 암울한 기억이 떠오르네요. 제가 우리집이 정말 가난하다고 느낀적은 식모가 3명에서 2명으로 줄었을 때인데, 친구들에게 그걸 숨기느라고 누나를 식모라고 불렀던 일은 두고두고 부끄럽네요
@정성권 이 유머는 해학으로 담아들을 격을 갖췄다고 보네
이런 정도 후속을 먼 훗날 들려주시길~~^^
@정성권 그래도 다행입니다. 대용할 먹거리라도 있었으니 저희 집은 먹거리는 하나도 없었고 있는거라곤 금수저 은수저 다이아몬드반지 금궤짝 그런것 뿐이더라고요 먹을게 없으니 허구헌날 쫄쫄 굶었답니다.
나도 육상 했는데 오래 달리기 ㅋ 중삼때 전국 체전 나갔는디 ㅋㅋ 6명 출발했는디 삼천미터.... 일등도 아무도 박수를 안 쳐 주었는디 내가 꼴뜽으로 들어 오는데 그 관중들 다 일어나서 박수 쳐 주고 여기 저기서 이리 오라고 하면서 음료수 하나 딸아 주고... 내가 꼴찌였지만 3등이었다는... 1등하고 나하곤 께임도 안 되었지요. 1등은 아마 3등 들어 오기를 기다리며 지루했을 걸 ㅋㅋ 뛰다가 쓰러지고 싶었지만 어느 순간 보니 1등 2등 다 들어가고 나머진 죄다 포기 ㅎㅎ 누구 그러데 준한아 너 결승점에 들어가기만 하면 3등이다 짜씩아 포기만 안하면 된다//// 뒤 지는 줄 알았다니깐 거의 걷다 싶히 뛰다 싶이 그렇게 들어간 결승점...
오기의 사나이었죠....... ㅎㅎ 그 오기가 아직까지 이렇게 남아 잇어 끝장을 보고 싶다는 ㅎㅎㅎㅎ 내가 죽나 문학이 죽나 어디 두고 보자 썅!!!!
초등학교 5학년때엔 교내 줄넘기 대회 ㅎㅎ 전교에서 2등 했다는 한참 줄넘기를 넘고 있는데 ㅎㅎ 다 꼬꾸라지고 저 편에 6학년 선배하고 나하고 단 둘 남았다는 ㅎㅎ 전 맨발로 줄을 넘었는데요 ㅎㅎ 아주 영화였죠 강단에서 선생님이 네 저 맨말의 사나이 대단합니다 ㅎㅎ 주인공이 된다는 느낌 ㅎㅎ 얼마나 황홀한지... 만인이 나를 지켜 보는데 ㅎㅎ 앗 그런데 젠장 걸리고 말았네 내 발까락에 망할 줄이 ㅎㅎㅎㅎㅎ 그런 저런 에피소드도 아직도 난 쓸 글이 많다는 것 ㅎㅎㅎ
어떤 강사자가 엊그제이런 말을 하데요 자신감과 용기는 어디서 나오죠 현재 과거 미래.... 나에게 너무나 쉬운 문제였는데 거기 청중들은 말을 못하더만요 당연 과거에서 나오는 것 아녀요... 과거의 경험들을 통해..... 사람들은 내가 헛바람 잡는다 하지만 첫만에 전 그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망하지 않고 더욱 빛났었는 걸요..그런 경혐을 한 번 더 해보고 싶다는 것이 어찌 과대망상일까요^^ 하핫....
현대인들에게 과거는 정말 용기의 원천이죠
지혜로웠던 우리 선조들은 그래서 과거시험도 치고 그랬잖아요
과거가 좋아야 벼슬도 내려주고
@정성권 헐 ㅋㅋ 과거 시험 켁!! 저도 그 과거시험 잘 봐서 벼슬 받을랍니다 ㅋㅋ
@정성권 과거속의 과거 나도 시험보면 힘든적이 많았지~~^^
그 결과가 지금이야
그거 아세요 노력이 사람을 얼마나 감동시키냐면요.... 중학교 그때 나의 그 모습을 본 선배들이 아무도 그 이후로 절 안 건드리드라고요 ㅎㅎㅎㅎㅎㅎㅎㅎㅎ 괜히 저 자슥 건드려봤자.. 머리 아프다 ㅎㅎㅎㅎㅎ 음 하하...
그런 마음으로 열심히 살아서 아롱이같은 딸도 갖는 삶을 살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