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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해님의 글을 읽으면서 내심 '글을 허투로 쓰면 안되겠다' 라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 고구려가 백제에 대해 취한 것이나 백제가 고구려에 대해 취한 것은 엄밀한 의미로 군사동맹이라고 보긴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청풍해님이 언급하신 것처럼 백제군이 고구려군과 함께 당군과 싸운 것도 아니니까요. '동맹'이라는 시대를 이해하기 위한 개념틀에 휘둘려서 어디까지나 가능성에 불과한 것을 실제 사실로 규정한 저의 잘못입니다.
단지, 이 당시에 동맹까지는 아니겠지만 고구려와 백제가 암묵적인 전략적 제휴를 했을 가능성은 있을 것입니다. 즉, 고구려는 남부전선의 안정을 위해 백제에게 신라를 공격하는 것에 대한 암묵적 지지를, 백제는 당과 연계되지 않겠다는 수준이겠죠. 655년에 고구려와 백제가 신라를 공격하긴 했습니다만 고구려에서 이를 정식 기록(월 기록도 없이 한 사건에 대한 배경으로 설명한 것이 고작)으로 기록하지도 않은 것으로 봐서 고구려에서도 신라에 대해 큰 비중을 갖고 대한 것 같진 않아보입니다.
애초에 고당전쟁에서 한반도 국가의 패권전이라는 이론틀을 도입하는 것은 한국사의 입장일 뿐, 세계사적 시각에서 보면 한반도지역에서의 패권 양상이나 동맹(?)의 결속 정도는 그리 중요하지도, 단단하지도 않은 듯 합니다. 따라서 여제 동맹에 대해 크게 비중을 두고 볼 것은 없을 듯 싶습니다. 고구려의 입장에서 백제의 역할은 당나라 도모를 위한 대 전략에 필요한 사전 전제에 불과할 뿐이니까요. 더 중요한 곳은 한반도 남부가 아니라 북방 유목민의 동향입니다. 따라서 여제 동맹이라는 것을 오늘날의 없으면 죽고 못사는 혈맹 수준(감정적인 것이나, 혹은 실리적인 것이나)으로 바라보거나 고당전쟁의 승패를 가름한 필수였다라고 보는 점은 성급하다는 것을 밝힙니다.
(예전에 백제 동맹의 이익으로 백제 수군이 고구려군을 도와줄 수도 있다는 저의 추론은 성급했던 결과론적 해석일 뿐입니다. 642년에는 해상을 통한 대규모 상륙전을 생각할 수 없으니까요. 고구려에서 백제에게 위급시에 그런 요청을 할 수는 있겠지만 백제가 그걸 받아들이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점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이는 저의 잘못이니 바로잡습니다.)
그러나 이 둘을 현대의 군사동맹처럼 오인하게 한 것은 백제가 멸망하고 난 후 고구려가 백제부흥군에 대한 지원을 한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합니다.(물론 저도 무의식적이긴 하지만 그런 이미지로 이 둘의 관계를 규정지었으니 할말은 없습니다.)
어쨌거나 백제와 고구려가 근대적 군사동맹을 맺은 것처럼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당항성 공모에 대해 사료를 제가 나름 분석한 글입니다. 참고하시길,,
(2년 정도 지난 뒤에 다시 글 을 살펴보니 터무니없는 실수를 했더군요. 내용 일부를 수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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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당항성 공격에 대한 기사는 신라본기와 백제본기가 1년의 기록 오차를 보이고 있다. 이 기사는 고구려와 백제의 대 신라 군사동맹과 관련한 주요 근거 사료로 이용되고 있는 중요한 기록인 만큼 신중히 다뤄져야 할 것이다. 비록 1년의 오차이지만 연개소문의 정변 사건으로 인한 정권교체 시기와 맞물려 고구려의 대외관계 방향과 관계있기 때문이다.
백제와 고구려 연합군에 의한 당항성 공격이란 이 사건을 두고 신라본기는 642년 8월, 백제본기에서는 643년 11월로 기록하고 있다. 우선 신라본기를 기준으로 시간 전후를 따지면 642년 7월에는 백제가 미후성을 비롯한 서변 40여성을 공취한 것으로 나오고 그해 8월에 백제 윤충이 대야성을 함락해 품석을 살해한 것으로 나오고 있다. 이상한 것은 신라본기에서 백제와 연합을 했다던 고구려에서는 정작 백제본기에서 언급한 643년 11월을 포함해 관련 기록이 전혀 보이질 않는다는 점이다. 단순한 기록누락이라고 보긴 어렵다면 이는 신라의 인식이 그랬다는 것이고 실제로 고구려군은 움직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신라본기의 642년 8월 기사에서는 고구려와 더불어 당항성을 빼앗으려는 ‘계획’이 있기 때문에 왕이 사신을 보낸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시점의 주체는 계획의 확인이 아니라 사신을 보낸 시점이다. 계획 자체가 8월에 있었다거나 계획의 확인이 아닌 사신을 보낸 시점이 8월이라는 점은 신라 조정에 적어도 8월 이전에 이러한 ‘소문’ 내지는 ‘첩보’를 입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7월의 서변 40여 개성 함락과 '소문'이 인과관계에 있을 가능성이 있다.
즉, 백제에서 신라에게 고구려를 의식하게 하고 서북변에 위치한 당항성에 시선을 집중하게 한 뒤에 서남부에 있는 40여개 성과 대야성을 함락시키기 위한 계략에 불과하다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무왕 때까지도 신라에 대한 어떤 국력상의 우위를 점하는 수준까지는 아니었던 백제가 신라에 대해 이런 일방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었던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계획의 확인이 8월이라고 하더라도 대야성 공격에 대한 시선돌리기가 주 목적이라고 봐야한다.
그렇다면 고구려가 백제와 ‘공모’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연개소문의 정변이 발생한 것은 일본서기를 따르면 642년 9월의 일로 공모의 주체가 되는 건 연개소문이 아니라 아직 영류왕과 대당온건파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영류왕은 대당온건 정책을 펴고 있어 당나라와 외교적 마찰을 일으키는 것을 기피하던 인물이다. 626년 당 태종이 영류왕에게 백제와 신라를 공격하지 말라고 경고하자 영류왕이 앞으로는 그러지 않겠다며 양국 간의 화평을 구했던 기사를 보면 알 수 있다. 더군다나 영류왕은 백제와도 마찰을 일으켜 백제 무왕이 당에 사신을 보냈기 때문에 백제와 공모해서 당항성을 공격했다고 보긴 어려울 것이다. 물론 영류왕이 당을 염려해 신라를 공격하지 않는다면 638년에는 왜 신라 칠중성을 공격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남을 수 있다. 그러나 이때는 전쟁을 통한 전공을 쌓기를 원하는 대당 강경 계통의 무장세력들을 무마시키기 위한 정치적 제스쳐에 불과하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영류왕은 당나라와의 외교마찰을 바라지 않기 위해서라도 백제와 공모해 신라를 공격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보인다.
그렇다면 백제 본기에 나와있는 643년 11월의 기사는 어떻게 된 것일까? 언뜻 생각하기에는 삼국사기의 편자가 연대를 1년 착오하여 기록했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월(月)이 다르기 때문에 연대오차로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기록 자체를 허위라고 보기에는 신라에서 이 때문에 당에 사신을 보냈다고 하는 점이 걸린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신라본기에서 백제와 고구려의 전쟁 공모에 대한 사신을 보낸 것은 11월 이후가 아니라 643년 9월이라는 점이다. 즉, 신라에서는 백제본기에서 기록한 643년 11월의 당항성 공격에 대해 사신을 보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두 기사는 동일 사건이 아닌 별개의 사건으로 봐야 한다. 신라 본기642년 8월 기사는 백제에서 대야성 공격을 위한 정보 조작에 신라가 속아 넘어간 것이고 643년 11월의 백제 본기 기사는 실제로 백제가 당항성 공격을 고구려에 제안했으나 당에서 상리현장이 도착하여 항의하자 그만 둔 것을 말한다. 즉, 신라에서는 백제본기에서 기록한 643년 11월의 당항성 공격 시도를 ‘그때야’ 접하고 사신을 보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제 조정의 도발 시도가 9월 이전에 있었고 신라 조정에서 모종의 경로로 그걸 눈치 챈 후 9월 출병설이 퍼져있었던 것이 신라 조정의 인식이었던 거 같다.
(여기서 또 재밌는 점은 백제는 신라에서 당에 사신을 보낸 것을 어떻게 알고 군사를 철병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11월에 침공했는데 신라가 바로 사신을 보냈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거니와 그 사실이 백제 조정에 전달되는 시간차가 있었을 것인데도 불구하고 침공한 달 그 즉시 철군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상당히 의아한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 의아한 상황에 대한 설명은 익년 1월 기사에 나와있다. 백제가 644년 1월에 당에 사신을 보내면서 신라를 침공한 것에 대한 사죄의 사신을 보내는데 사신을 보낸 배경에 대한 설명이 뒤따르고 있다. 즉, 당이 상리현장을 고구려와 백제에 파견하여 신라 공격을 중지할 것을 경고했는데 고구려본기에서는 상리현장이 고구려에서 당으로 귀국했다는 표현으로 봐서 먼저 백제를 들른 것으로 보인다. 신라가 당에 구원요청을 한 것이 643년 9월이었고 상리현장이 출발한 것이 역시 9월이었으니 백제에 11월 즈음에 도착해서 경고를 하는 것은 무리가 아닌 것이다. 물론 백제본기는 644년 1월 기사에 상리현장의 항의를 수록하고 있다. 그러나 기록된 주체는 상리현장의 항의 사실이 아닌 당에 사신을 보냈다는 사실이고 따라서 상리현장 기사는 사신을 보낸 원인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임으로 상리현장은 11월에 백제에 도착했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고구려 본기의 644년 1월 기사에 등장한 상리현장도 마찬가지다. 즉, 상리현장의 고구려 '도착' 시점은 1월 이전이고 고구려가 당에 정월사를 파견한 것에 대한 이유로서 기사가 등장하는 것으로 해석해야한다.
그런데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조금 유의해서 읽어야한다. 왜냐면 644년 1월 기사 다음에 상리현장의 고구려 파견 기록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라의 정월사 파견이 이것과 직접적인 개연성이 있다고 판단할 수 없는 바 이 기사는 1월에 상리현장과 '연개소문'의 회담 사실을 전하는 별개의 기사로 생각된다. 즉, 상리현장의 고구려 도착은 643년 11월 이후에서 1월 전이며 연개소문을 만난 시점이 1월이라고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결론을 내리면 상리현장의 이동 경로와 시점은 구당서 태종 본기를 참고로 했을 때 상리현장은 9월에 출발해 11월에 백제에 도착해서 항의한 후 11월 말과 익년 1월 이전 사이에 고구려 평양성에 도착, 1월 초에 연개소문과 만났고 2월에 장안으로 복귀하게 된다. 구당서 태종 본기에서 상리현장이 귀국할 때 고구려에서 돌아왔다는 기사에서도 상황의 유추가 가능하다. 당 장안성과 평양성 사이의 거리를 생각해본다면 만난 시점은 1월 초, 장안성 도착은 2월 말이 된다고 생각된다.)
단, 여기서 고구려와 실제로 공모를 한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데 기록에서는 고구려와 화친하고 당항성을 공격해서라는 것이 반드시 연합군을 구성한다는 보장은 없다는 점을 주지해야한다. 즉, 영류왕 때 백제와 마찰을 일으켜 신라를 공격하는데 부담을 가지는 상황을 막고자 고구려와 화친만 맺어 배후에 대한 불안을 없애고 백제 단독으로 당항성을 공격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여기에 대해 고구려 본기에서는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는 것을 보면 연합군을 구성해 신라를 공격한 건 아니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이 당시 고구려는 실제 군대까지 움직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고구려 본기에 직접적인 공격 기사는 보이지 않으나 익년인 644년 정월 기사에서 상리현장이 고구려 경내에 도착하기 전에 연개소문이 신라 북변 2개 성을 공격하고 있다는 기사가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살펴본 상리현장의 이동 경로 및 시점을 감안한다면 양국은 동시에 신라로 쳐들어갔지만 그에 항의하러 온 상리현장이 백제를 먼저 들러 항의를 했기 때문에 백제는 침공을 하지 못했고 연개소문은 신라 북변 2개성을 공격한 뒤 항의를 받은 보장왕의 명에 의해 퇴각한 것으로 생각된다
다시 정리하자면 적어도 642년 8월 이전에는 백제가 신라를 속여 서변을 취할 속셈으로 고구려와 공모했다는 허위 사실을 유포한 것이 신라조정에 알려졌고 그것이 기사로 남았다. 그러다 고구려에 연개소문 정권이 들어서면서 신라에 적대적인 태도라는 것이 신라 조정에 받아들여지면서 신라에는 고구려, 백제 공모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졌고’ 그 때문에 643년 9월에 당에 구원요청을 해 당에서는 11월 즈음에 상리현장을 백제와 고구려로 파견, 경고를 했다. 이때 백제에서는 642년의 허위사실 유포에 불과하던 것을 실제로 실행에 옮기고자 9월에 계획하고 11월 즈음에 거병하였으나 마침 백제를 방문한 상리현장의 경고 때문에 당항성에 대한 공격 시도만 하다가 철군한 것으로 판단된다.
첫댓글 그럼 고구려와 백제는 아예 군사적 동맹을 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하나요? 좀 아리송하군요;
허헛...청풍계입니다...^ㅡ^;
아우,, 민망,, ^^;;
아예 고려할 수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봅니다. 다만 당시의 국제관계에서 지속적인 동맹의 유지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당시 고구려는 당과의 대결구도 뿐 아니라 연개소문의 정변등 국내정세 등으로 남방에 대한 관심 자체가 절대적이지 않았습니다. 반면 고구려와 당이 상호 대결하는 틈을 이용한 백제의 신라 공격이 한반도내 주된 흐름이었다는 거죠. 실제 려제간 비밀회동이나 암묵적 지지 같은건 지금으로선 밝혀낼 수 없습니다. 소설을 쓰지 않는 이상 추론에 의한 추론은 무의미하다는 겁니다. 다만 가능성만 열어두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ㅋ
120년 나제동맹설 같은 것도 '정설'로 통했었는데 당시엔 동맹의 유지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식의 이야기는 새삼스럽네요. 정세상 분명 여제는 일정한 상호 연결을 필요로 했고 이루 헤아리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기록에서 고려와 백제의 연대가 보이는데 이걸 단순히 신라 측의 정치적 선전으로만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것도 납득할 수 없습니다. 여제간 회동도 일본서기에 보입니다. '비밀'이랄것까지도 없죠. 추론에 의한 추론이 무의미하다면 사료가 없는 고대사의 연구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한심한 결론만 나올 뿐이군요.
본문에서 642년의 고구려, 백제간 연대에 대해 일부 허구성이 존재할 수도 있음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실제 고구려가 백제와 연계해 신라를 공격한 것은 655년뿐이고 그조차도 정식기록으로 남은 형태는 아닙니다. 644년 1월 이전에 연개소문이 신라성 2개를 점령했으나 이를 당에 대한 도발행위, 혹은 정권 지지를 구하기 위한 정치적 제스쳐라고 해석할 수도 있어 백제와 '연계' 수준으로 보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만약 동맹이었다면 백제에서도 동시에 군사행동을 보였어야죠. 고구려에서 백제와 동맹형태로 신라를 압박했다는 설명이 더 작위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정치적 제스쳐를 취한 것과 실무적 동맹이 취해진 건 엄연히 다릅니다
일본서기에 기재되어 있다는 여제간 회동이 언제적 기사인지 몰라 그러는데 어디에 나오는지요? 일본서기는 그다지 밝지 못해서,,
지금 새로쓰는 연개소문 전을 다시 살펴보니, 일본서기 황극천황 원년 기록에 643년 2월 고구려 사신과 백제 사신이 함께 행동한 기록이 보인다고 적혀있군요. 이건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요?
원래 동맹이란게 기본적으로 '정치적 제스처'입니다. 실제로는 철저하게 실리에 따라 움직이는거고. 655년 전쟁이 '정식기록'이 아니라 함은 넌센스입니다. '정식기록'의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은 뭔가요? '동맹'이란 용어를 써야 되느냐에 대해서는 당연히 논란이 있을 수 있지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용어 문제에 불과한거고, 너무나 분명하게 보이는 여제의 연계를 작위적인 논리를 동원해가며 부정하려는 이유가 궁금할 뿐이네요.
일본서기의 여제간 회동은 티얼님께서 말씀하신 그 기록입니다. 이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겠습니다. 백제와 고구려 사신이 4일 간격으로 왜국에 옵니다. 그리고 저마다 자기 나라의 급박한 정세변동을 이야기합니다. 의자왕의 친위쿠데타와 연개소문의 혁명이지요.(덧붙여 백제 사신이 곤륜 사신을 바다에 던져 죽인 사건도 이 때 벌어진겁니다.) 그리고 왜국에서는 두 나라의 사신을 한 자리에서 대접하였고, 두 나라의 사신은 한 날짜에 나란히 귀국합니다.
지면이 모자란 관계로 제가 추가적인 설명을 미쳐 하지 못한 점을 사과드립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위에서 정치적 제스쳐라는 표현은 그 상황을 표현하기에는 너무 포괄적인 것 같더군요. 비슷한 예를 들어서 설명하겠습니다.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나치)당은 공산주의와는 양립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전력분산을 바라지 않는 전략 때문에 소련의 스탈린과 불가침조약을 맺었죠. 그리고 나서 상호 합의에 의해 폴란드를 동시 침공해서 영토를 분할했습니다. 그러나 이건 실질적인 군사동맹의 형태는 아니었습니다. 즉, 서로의 필요에 의해 임시로 연계했고 불가침 의지만 밝혔을 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의무적'으로 돕는 동맹은 아니었습니다
때문에 필요에 의해 맺어진 연계는 언제든지 필요에 의해 깨어질 운명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가 되죠. 실제로 서부전선이 히틀러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자 히틀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스탈린의 뒤통수를 쳤습니다. 640년대 여제 관계는 동맹의 형태일 개연성도 있지만 위에서 언급한 형태일 수도 있습니다. 고구려와 백제는 부여의 계승자라는 타이틀에 대한 경쟁관계였기 때문에 반전이 벌어지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또 영류왕 때까지 백제와 고구려는 외교적 마찰과 국지적 전투를 벌이고 있었으니까요.(사행길을 막았다는 내용이 전투를 벌였다는 것과 병용되는 점, 국경을 마주하지 않아 해상에서 산발적 전투를 벌였다고 생각을 합니다.)
동맹에 대한 근거로 나오는 일본서기 기록은 고구려와 백제 사신이 회동했고 귀국일이 같다는 정도의 내용일 뿐입니다. 과거 적대적 관계는 거의 동시적으로 진행된 양국간 정권교체로 인해 전환의 가능성이 높아진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원래의 적대적 관계가 쉽게 동맹으로 전환되려면 상호간 적대적 선입견을 확고히 뿌리칠만한 이득이 서로에게 주어져야 하지만 양국간 동맹이 그 정도까지 확실한 이득을 준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히틀러와 스탈린의 관계와 같이 필요에 의해서 일정한 합의를 통해 '불가침 의지'를 밝혔고 필요에 의해서 신라에 대한 임시적 연계를 맺은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즉, 양국 간에 4세기 이전의 화의를 회복했다는 의미가 될 순 있어도 동맹에 대한 증거가 되긴 어렵다고 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양국이 신라에 대한 적대적 행위를 공유할 수는 있지만 어느 한편의 군사행위를 반드시 지원해야할 의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백제는 당에 대한 이해관계 충돌이 없는 만큼 백제가 고구려를 도와 당을 적대적으로 대할 의무는 없다는 것이 여제 동맹에 대한 개념적 반론의 요지입니다. 다시 말해 '여-제 vs 나-당'이라는 대립구도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고 여제의 외교적 관계가 나당의 동맹적 관계와 일치하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동북아의 횡축과 종축의 충돌이라는 건 없다는 거죠.
더불어 청풍계님의 말씀 요지는 한국사라는 색안경을 통해 보기 때문에 고당전쟁을 억지로 한반도 패권전쟁의 연장으로 해석하는 건 지양해야한다는 주장과 연결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지금 모대왕님은 그 요지를 마치 고구려와 백제의 군사적 '연계'조차도 없다는 걸로 인식하신 듯 한데 그렇지는 않다는 것을 밝힙니다. 그리고 동맹에 대한 증거로 보는 입장은 정황 증거를 동맹이라는 일관된 관점의 틀로 일본서기 기사를 해석한 것에 불과합니다.(물론 그 일본서기 기사에 대한 제 입장도 마찬가지입니다.) 해석을 증명할만한 다른 근거가 발견되지 않는다면 그 실제상황이 해석된 상황과 다를 수도 있기 때문에 근거로 활용하기 어렵습니다.
패권전쟁 연장으로 억지로 해석한다라는 저의 입장에 대해 오해하실까봐 미리 말씀드리지만 고당전쟁의 결과가 그것을 의도하고 벌어진 전쟁이 아니었고 신라의 한반도 통일은 의도되지 않은 결과 때문이라는 걸 밝힙니다.
한단인님 살짝 삼천포로 빠지는 질문이긴 하지만, 무왕 8년에 무왕이 수나라에게 고구려 좀 밟아달라고 한 적 있다가 고구려가 경고성이 짙은 공격을 한 후 백제는 고구려와 밀통을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실제로 수나라가 망할 때 까지는 고구려와 백제는 아무런 마찰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당나라가 일어난 후 즉 고구려에서는 영류태왕이 즉위한 뒤 얼마 안가 무왕은 또 다시 고구려를 밟아달라는 요청을 당에게 합니다. 무왕이 잘 지낸다면 잘 지내고 있던 고구려를 쳐달라한 이유는 영류태왕의 정책과 관련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