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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고구려 토론방 Re:백제, 고구려의 당항성 공모에 대한 오해(수정)
한단인 추천 0 조회 493 07.08.21 07:38 댓글 17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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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7.08.21 09:08

    첫댓글 그럼 고구려와 백제는 아예 군사적 동맹을 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하나요? 좀 아리송하군요;

  • 07.08.21 12:09

    허헛...청풍계입니다...^ㅡ^;

  • 작성자 07.08.21 13:52

    아우,, 민망,, ^^;;

  • 07.08.21 12:18

    아예 고려할 수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봅니다. 다만 당시의 국제관계에서 지속적인 동맹의 유지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당시 고구려는 당과의 대결구도 뿐 아니라 연개소문의 정변등 국내정세 등으로 남방에 대한 관심 자체가 절대적이지 않았습니다. 반면 고구려와 당이 상호 대결하는 틈을 이용한 백제의 신라 공격이 한반도내 주된 흐름이었다는 거죠. 실제 려제간 비밀회동이나 암묵적 지지 같은건 지금으로선 밝혀낼 수 없습니다. 소설을 쓰지 않는 이상 추론에 의한 추론은 무의미하다는 겁니다. 다만 가능성만 열어두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ㅋ

  • 07.08.21 15:32

    120년 나제동맹설 같은 것도 '정설'로 통했었는데 당시엔 동맹의 유지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식의 이야기는 새삼스럽네요. 정세상 분명 여제는 일정한 상호 연결을 필요로 했고 이루 헤아리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기록에서 고려와 백제의 연대가 보이는데 이걸 단순히 신라 측의 정치적 선전으로만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것도 납득할 수 없습니다. 여제간 회동도 일본서기에 보입니다. '비밀'이랄것까지도 없죠. 추론에 의한 추론이 무의미하다면 사료가 없는 고대사의 연구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한심한 결론만 나올 뿐이군요.

  • 작성자 07.08.21 20:16

    본문에서 642년의 고구려, 백제간 연대에 대해 일부 허구성이 존재할 수도 있음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실제 고구려가 백제와 연계해 신라를 공격한 것은 655년뿐이고 그조차도 정식기록으로 남은 형태는 아닙니다. 644년 1월 이전에 연개소문이 신라성 2개를 점령했으나 이를 당에 대한 도발행위, 혹은 정권 지지를 구하기 위한 정치적 제스쳐라고 해석할 수도 있어 백제와 '연계' 수준으로 보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만약 동맹이었다면 백제에서도 동시에 군사행동을 보였어야죠. 고구려에서 백제와 동맹형태로 신라를 압박했다는 설명이 더 작위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정치적 제스쳐를 취한 것과 실무적 동맹이 취해진 건 엄연히 다릅니다

  • 작성자 07.08.21 20:21

    일본서기에 기재되어 있다는 여제간 회동이 언제적 기사인지 몰라 그러는데 어디에 나오는지요? 일본서기는 그다지 밝지 못해서,,

  • 07.08.21 23:26

    지금 새로쓰는 연개소문 전을 다시 살펴보니, 일본서기 황극천황 원년 기록에 643년 2월 고구려 사신과 백제 사신이 함께 행동한 기록이 보인다고 적혀있군요. 이건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요?

  • 07.08.22 11:13

    원래 동맹이란게 기본적으로 '정치적 제스처'입니다. 실제로는 철저하게 실리에 따라 움직이는거고. 655년 전쟁이 '정식기록'이 아니라 함은 넌센스입니다. '정식기록'의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은 뭔가요? '동맹'이란 용어를 써야 되느냐에 대해서는 당연히 논란이 있을 수 있지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용어 문제에 불과한거고, 너무나 분명하게 보이는 여제의 연계를 작위적인 논리를 동원해가며 부정하려는 이유가 궁금할 뿐이네요.

  • 07.08.22 11:25

    일본서기의 여제간 회동은 티얼님께서 말씀하신 그 기록입니다. 이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겠습니다. 백제와 고구려 사신이 4일 간격으로 왜국에 옵니다. 그리고 저마다 자기 나라의 급박한 정세변동을 이야기합니다. 의자왕의 친위쿠데타와 연개소문의 혁명이지요.(덧붙여 백제 사신이 곤륜 사신을 바다에 던져 죽인 사건도 이 때 벌어진겁니다.) 그리고 왜국에서는 두 나라의 사신을 한 자리에서 대접하였고, 두 나라의 사신은 한 날짜에 나란히 귀국합니다.

  • 작성자 07.08.22 19:49

    지면이 모자란 관계로 제가 추가적인 설명을 미쳐 하지 못한 점을 사과드립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위에서 정치적 제스쳐라는 표현은 그 상황을 표현하기에는 너무 포괄적인 것 같더군요. 비슷한 예를 들어서 설명하겠습니다.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나치)당은 공산주의와는 양립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전력분산을 바라지 않는 전략 때문에 소련의 스탈린과 불가침조약을 맺었죠. 그리고 나서 상호 합의에 의해 폴란드를 동시 침공해서 영토를 분할했습니다. 그러나 이건 실질적인 군사동맹의 형태는 아니었습니다. 즉, 서로의 필요에 의해 임시로 연계했고 불가침 의지만 밝혔을 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의무적'으로 돕는 동맹은 아니었습니다

  • 작성자 07.08.22 20:17

    때문에 필요에 의해 맺어진 연계는 언제든지 필요에 의해 깨어질 운명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가 되죠. 실제로 서부전선이 히틀러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자 히틀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스탈린의 뒤통수를 쳤습니다. 640년대 여제 관계는 동맹의 형태일 개연성도 있지만 위에서 언급한 형태일 수도 있습니다. 고구려와 백제는 부여의 계승자라는 타이틀에 대한 경쟁관계였기 때문에 반전이 벌어지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또 영류왕 때까지 백제와 고구려는 외교적 마찰과 국지적 전투를 벌이고 있었으니까요.(사행길을 막았다는 내용이 전투를 벌였다는 것과 병용되는 점, 국경을 마주하지 않아 해상에서 산발적 전투를 벌였다고 생각을 합니다.)

  • 작성자 07.08.22 20:17

    동맹에 대한 근거로 나오는 일본서기 기록은 고구려와 백제 사신이 회동했고 귀국일이 같다는 정도의 내용일 뿐입니다. 과거 적대적 관계는 거의 동시적으로 진행된 양국간 정권교체로 인해 전환의 가능성이 높아진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원래의 적대적 관계가 쉽게 동맹으로 전환되려면 상호간 적대적 선입견을 확고히 뿌리칠만한 이득이 서로에게 주어져야 하지만 양국간 동맹이 그 정도까지 확실한 이득을 준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히틀러와 스탈린의 관계와 같이 필요에 의해서 일정한 합의를 통해 '불가침 의지'를 밝혔고 필요에 의해서 신라에 대한 임시적 연계를 맺은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 작성자 07.08.22 20:23

    즉, 양국 간에 4세기 이전의 화의를 회복했다는 의미가 될 순 있어도 동맹에 대한 증거가 되긴 어렵다고 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양국이 신라에 대한 적대적 행위를 공유할 수는 있지만 어느 한편의 군사행위를 반드시 지원해야할 의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백제는 당에 대한 이해관계 충돌이 없는 만큼 백제가 고구려를 도와 당을 적대적으로 대할 의무는 없다는 것이 여제 동맹에 대한 개념적 반론의 요지입니다. 다시 말해 '여-제 vs 나-당'이라는 대립구도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고 여제의 외교적 관계가 나당의 동맹적 관계와 일치하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동북아의 횡축과 종축의 충돌이라는 건 없다는 거죠.

  • 작성자 07.08.22 20:52

    더불어 청풍계님의 말씀 요지는 한국사라는 색안경을 통해 보기 때문에 고당전쟁을 억지로 한반도 패권전쟁의 연장으로 해석하는 건 지양해야한다는 주장과 연결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지금 모대왕님은 그 요지를 마치 고구려와 백제의 군사적 '연계'조차도 없다는 걸로 인식하신 듯 한데 그렇지는 않다는 것을 밝힙니다. 그리고 동맹에 대한 증거로 보는 입장은 정황 증거를 동맹이라는 일관된 관점의 틀로 일본서기 기사를 해석한 것에 불과합니다.(물론 그 일본서기 기사에 대한 제 입장도 마찬가지입니다.) 해석을 증명할만한 다른 근거가 발견되지 않는다면 그 실제상황이 해석된 상황과 다를 수도 있기 때문에 근거로 활용하기 어렵습니다.

  • 작성자 07.08.22 20:29

    패권전쟁 연장으로 억지로 해석한다라는 저의 입장에 대해 오해하실까봐 미리 말씀드리지만 고당전쟁의 결과가 그것을 의도하고 벌어진 전쟁이 아니었고 신라의 한반도 통일은 의도되지 않은 결과 때문이라는 걸 밝힙니다.

  • 07.08.22 20:56

    한단인님 살짝 삼천포로 빠지는 질문이긴 하지만, 무왕 8년에 무왕이 수나라에게 고구려 좀 밟아달라고 한 적 있다가 고구려가 경고성이 짙은 공격을 한 후 백제는 고구려와 밀통을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실제로 수나라가 망할 때 까지는 고구려와 백제는 아무런 마찰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당나라가 일어난 후 즉 고구려에서는 영류태왕이 즉위한 뒤 얼마 안가 무왕은 또 다시 고구려를 밟아달라는 요청을 당에게 합니다. 무왕이 잘 지낸다면 잘 지내고 있던 고구려를 쳐달라한 이유는 영류태왕의 정책과 관련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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