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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이에서 하롱베이까지 / 박철영
누구나 한 번쯤 가보고 싶은 베트남이다. 막연한 동경은 시골 동네에 월남전에 참전했던 형님들로부터 시작되었다. 동네 형들은 자신들 가슴에 숨겼던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놓았고 어린 마음에 멀고 먼 나라의 호기심이 더해졌었다. 그런 기회는 우연히 찾아와 길가에 늘어선 야자나무와 월남치마와 아오자이를 다시 떠올렸다. 그래 보았자 내가 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70년대까지 내전이 있었고 미국과 싸워 승리한 나라라는 것이 전부였다. 영종도 하늘을 이륙한 지 네 시간을 지나 도착한 노이바이 국제공항. 늦게 도착한 하노이의 밤하늘은 금방 지나온 비행기의 활주로마저 지우고 어둠만이 우릴 맞았다. 멀리 라이트를 켜고 마중 나온 현지 버스와 가이드가 어둠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베트남을 보기 위해 어둠을 건너온 사람들을 어둠은 단번에 지워버릴 수는 없었다. 어둠에 싸인 도시에도 길은 열려있다. 예상대로 공항을 빠져나가면서부터 한국의 초여름처럼 후끈 달군 열기가 상하의 나라임을 알려주는 듯했다. 버스를 타고 공항을 빠져나가자 버스 앞을 비추는 불빛이 사라지는 속도에 비례해 공항은 우리와 멀어지고 있었다.
공항이 들어선 입지가 하노이 외곽일 거라는 추측이 가능한 도로를 타고 도착한 호텔에 여장을 풀고 나니 몸이 노곤하다. 내 몸이 노동하여 고달픈 것이 아니고 첨단의 기술로 만들어진 비행기가 대기권을 날면서 기압이 오르내릴 때마다 동체가 흔들렸고 그 충격을 흡수하느라 몸이 힘든 하루였다. 거기다 순천에서 인천까지 거의 다섯 시간 넘게 달려와 노이바이 국제공항에 한국 시각으로 치면 밤 열한 시가 넘어 도착했으니 그럴만했다. 타자에 의한 노동도 노동이라면 인간의 하루 노동 시간은 더 많은 체력적인 한계 검증이 필요한 것이라고 본다. 한국과 시차가 두 시간이었고 시차만큼을 우리에게 덤으로 되돌려 잃어버린 시간을 보상하는 듯했다. 베트남에 당도한 첫 느낌은 맨 먼저 공항에서부터 별을 단 제복의 사내들이 번득이는 눈으로 나를 스크린했다. 입국 심사대에 근무하는 공항 경찰쯤 되어 보이는 청년의 표정은 굳은 듯했지만, 이방인에게는 차갑고 날카로워 보였다. 눈빛이 예리한 창끝처럼 보였던 것은 꼭 깡마른 작은 체구 때문은 아니었다. 볼펜을 들고 여권을 체크하는 폼은 자신들이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사회주의의 자부심일 것이고 내 몸에 밴 자본주의적 속물근성을 단번에 꿰뚫은 듯했다. 그런 것을 커버라도 하려는 듯 굳히기 식으로 밀어붙이는 업무처리를 보며 은근히 죽음과 바꿔 지켜낸 그들만의 가치를 강요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물론 내가 생각한 것이 잘못된 것인지는 모른다. 내가 그들을 보며 받은 인상이 그랬다는 것이고 아주 개인적인 생각임을 밝힌다. 어차피 베트남의 낯선 환경을 체험하기 위한 여행이기에 모든 것을 의미 있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순서대로 입국 심사대를 빠져나와 화물을 찾는 컨베이어 벨트로 이동 했다. 그 주변에는 벌써 비행기에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이 화물에 찍힌 숫자를 확인하며 화물 컨베이어 벨트를 지켜보고 있었다. 기다린 동안 화물 벨트는 쉼 없이 돌아갔고 찾아든 가방은 또 다른 이국의 절차를 밟고 있었다. 모든 것은 속도가 아닌 절차라는 것을 깨달아가는 순간이다. 화물을 찾는 외국인들 틈에서 의외로 베트남 말을 하는 젊은 사람들 말이 귀로 들어왔고 그들은 남녀가 뒤섞여 자연스럽게 이방인의 눈에 또 다른 모습으로 비췄다. 베트남 사람들의 말은 오랫동안 중국 한자를 사용했고 성조 음이 있는 억양은 천박한 듯 소란스럽게 들렸다. 유커처럼 베트남 사람도 소란스러운 소리 언어를 통해 그들만의 진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어차피 사람은 소리를 통해 생을 시작하고 죽음을 통해 소리 같은 생을 마친다. 세상에 태어나 울음으로 존재감을 알리고 살아가는 동안은 악착같이 살아야겠다는 필연을 누군가에게 소리 질러 재확인시켜주고 있었다. 호치민이 국가라는 틀에서는 베트남을 통일했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본래 모습마저 사회주의 사상으로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공항에서 찾아가는 화물은 그들에게 외부 세계로부터 실려온 단순한 짐이 아니었다. 공항 화물 벨트에 실려 온 새로운 문화를 매일 한 아름씩 찾아가고 있었다. 문화에 포장된 사람 냄새를 맡도록 그들을 길들이고 있음을 아직은 모를 것이다. 그것은 먼 훗날 또 다른 그들만의 문화가 될 것이다. 자유와 자본주의는 포장되질 않는다. 그래서 그들을 가끔 혼란스럽게 한다는 것은 당연히 모를 것이다.
공항을 나오며 소란스럽던 베트남 사람들을 생각해 본다. 그들이 추구하는 삶의 지향을 짐작해보며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한 시간여 동안 생각에 젖다 피로를 풀기 위해 호텔에 들어서며 사사로운 생각을 다 내려놓기로 했다. 베트남에 왔으니 내 생각만 하지 말고 보고 또 보고 그 사람들 입장과 관점에서 접근하고 이해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봤다. 내가 그들 속에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배우겠다는 마음으로 들여다보기로 했다. 저녁을 늦은 기내식으로 때워 출출하던 차에 마침 현지 가이드가 돼지고기 수육과 열대 과일 바구니를 준비해 하나씩 넣어 주었다. 베트남의 돼지 수육 맛은 독특하고 담백했다. 그 차이는 돼지고기에 있는 것이 아니고 고기를 다루는 사람에게 있을 것이다. 돼지고기를 다루는 솜씨는 베트남 사람들이 한국인보다 한 수 위 같았다. 다들 소주에 고기 몇 점씩을 하다 보니 무거운 눈까풀이 천근처럼 내려앉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타국의 밤을 재울 수 있는 호텔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더워진 낮의 뜨거운 열기는 어둠이라는 긴 밤의 시간이 지나야 식혀진다. 긴 밤은 열기뿐만이 아니고 지친 사람들마저 어루만져 피로를 풀어낸다. 나도 어찌 보면 오늘 밤엔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처럼 내 맡겨지고 싶었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잘 살고 못 사는 것을 어둠을 밝히는 조명 계수로 비교하는 버릇이 있다. 한밤에 도착한 하노이 시가지는 어두워도 너무 어두웠다. 그 시간이면 불야성을 이뤄야 하고 그래야 좀 사람이 사는 것처럼 느껴질 텐데 그렇질 않았다. 그것은 내가 학습한 자본주의적 사고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어둠 때문에 행복해지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베트남을 알게 된다. 가족과 떨어져 못다 한 낮 동안 이야기들을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으며 저녁을 먹는 풍경은 바로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즐겼던 과거였고 진솔했던 삶의 풍경이었다. 작금으로 변해버린 우리 사회는 산업 사회의 톱니바퀴에 쫓겨 도저히 되돌아갈 수 없는 꿈 같은 풍경이 되었는데, 그들은 당연한 듯 여전히 누리고 있었다. 우리보다 못 산다며 바라본 베트남 사람들은 우리가 이루지 못한 이상을 현실로 즐기며 사는 자연인이었다. 저녁 아홉 시 전후 밤거리를 비즈니스라는 일터가 아닌 다음 날의 건강한 삶을 위해 완충지대로 비워두는 여유. 우리가 필요 없다고 느낀 어둠 속 밤을 그들은 온전하게 비워두고 있었다. 내 고향에서 마당에다 여름날 모깃불을 피워놓고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어떤 때는 별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럴 때 깜깜한 하늘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으면 보이지 않던 별이 하나씩 고개를 내밀곤 했다. 별들은 그곳에 촘촘히 박혀있는데 다만 사람 눈에 띄지 않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하노이의 밤거리에 지나다니는 사람이 안보인다고 사람이 살만한 곳이 못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어둠에 길들여진 베트남 사람들의 저녁 이후는 단지 거리를 배회하지 않을 뿐이었다. 밤 하늘에 잠든 별처럼 있어도 없는 듯이 자연이 배열한 자전 법칙에 충실한 삶을 사람답게 살 뿐이다. 컴컴한 밤하늘에서 총총 빛나는 별 빛 아래에서 불 꺼진 집들이 사람처럼 말을 걸고 있다. 사람답게 살고 있다고, 어둠은 밝음이 남긴 마지막 여유다. 그렇다면 저들이 온전하게 누리고 있는 어둠이 삶의 여유임은 분명하다. 생각보다 낯선 풍경은 시야에 빠르거나 늦게 다가왔다. 군데군데 보이기 시작한 길가 특이한 건축물을 보며 의아했다.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었을까. 의문은 금세 풀렸다. 건물의 크기와 모양 속에 숨어있는 주거 환경이 국가 권력에 의해 시행되었고 현재도 지켜지고 있다는 것을, 1975년 사이공을 함락시킨 뒤 호치민 시대가 열리자 대다수 국민은 사회주의의 근거인 분배의 공평성을 들고 나왔단다. 농사지을 땅은 가족 수대로 나누어주니 크게 이의가 없었단다. 그런데 집을 지을 땅은 달랐다. 접근성이 좋은 도로 쪽을 달라고 아우성치니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혜택이 가도록 하는 묘수가 지금의 주거 환경을 만들었단다. 도로와 접한 땅의 넓이는 4m로 못 박고 층수와 뒤쪽은 규제를 두지 않고 집을 지어 살도록 한 것이다. 이방인의 눈에 비친 이상한 건물들은 베트남 사회주의가 만들어낸 독특한 주거 양식이었다. 사회주의 한계는 아직은 유효해 보였다. 내 눈에는 4m의 폭이 답답할 것 같아도 나름 만족할 만하다는 것이다. 살게 되면 살아지는 것이 사람의 특징이다. 불편해도 무더운 더위를 참듯 사는 것 같지는 않았다. 똑같이 불편하니까 불편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 건축 양식은 1800년대 말 프랑스 제국주의의 식민화 야욕에 우리나라가 일본에 당한 것처럼 베트남의 응우옌 왕조의 뜨뜩 황제도 실질적인 국가 통치에서 실권하게 된다. 이후 프랑스의 전권을 부여받은 총독체제는 베트남의 모든 생활 환경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 그중 하나가 여행 중 수시로 보았던 유럽풍의 폭 4m 짜리 건축 양식이었다. 삼 세기에 걸쳐 변화되어가는 건축양식은 지금도 프랑스풍을 유행처럼 따르고 있었다. 물론 농촌의 주거양식은 이것과는 사뭇 다르다고 들었다. 서양의 건축 양식은 층수를 높이는 데 유리하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좁은 땅에다 가장 효과적인 생활 터전을 활용하기 위한 베트남 사람들의 주거 의식은 어디까지 층수를 높여갈지 궁금하다. 그렇지만 위보다는 옆으로의 확장을 꿈꾸는 사람들이 가끔 눈에 띄었다. 국가에다 땅값을 당당히 지불하고 구입한 사유지에다 멋있는 집을 짓고 있었다. 그들도 자본주의의 돈 냄새를 맡고 있었다. 사람은 항상 잉여가치를 추구하고 축적하는 습성이 있다. 다람쥐도 도토리를 주우면 자신만의 굴속에 저장한다. 하물며 사람은 다람쥐보다 더 많은 축적을 원한다. 호치민이 통일 이후 농지와 주거지는 무상 분배를 해주면서 소유권은 국가라고 규정했다. 반면에 건물에 대한 지상권은 보장해주는 자본주의 제도를 절충해 국가 통치의 틀을 정한 듯했다. 오가며 보이는 길가의 집들이 정해진 폭을 최대한 이용해 증축이나 신축을 자유롭게 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사유재산의 인정으로 사람마다 빈부차가 커질 것은 자명하다. 그 빈부 차이를 도로의 차량 속도로 완급을 조절하고 있었다.
도시와 도시를 이어주는 도로의 자본 이동 수단인 차량의 속도와 오토바이의 공존을 통해 빈부 차이의 체감 속도를 최대한 늦추고 있음을 난 간파했다. 베트남은 왕복 4차선이든 2차선이든 오가는 차량은 40km 속도를 준수토록 했다. 요즘 들어선 고속도로는 80km까지 허용되는 예외도 있다. 그것을 어길 때는 권력을 잡아 쥔 교통경찰이 수시로 그림자처럼 따라붙게 되어있단다. 도로에 차와 오토바이가 뒤엉켜 다녀도 차량 속도를 40km로 규제하고 있어 경제 성장보다는 국민의 삶을 존중하고 있는 통치자의 의도를 엿볼 수 있었다. 그런 국민의 삶이 언젠가는 경제속도에 밀릴 것은 자명하다. 하노이 인근에 이미 들어섰거나 들어서고 있는 자본을 앞세운 다국적 기업들이 많아진 것이 현실이다. 물론 한국 대기업들도 베트남의 경제성장에 기여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저렴한 인력 시장을 통한 끝없는 이윤추구에 사활을 걸 것이다. 한인 사회의 급속한 성장은 월남전 이후 제2의 베트남 특수의 재판인지도 모른다. 베트남전에 수많은 한국의 장병들이 국부를 위해 피를 흘려 달러를 벌어들인 것처럼 지금은 기업이 그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야자나 바나나가 심어졌던 땅에 도로와 공장이 들어서느라 메워지거나 파헤쳐지고 있었다. 언젠가는 경제발전의 대가로 윤택해진 삶의 질이 피폐해진 환경과 정신적 여유의 박탈이라는 부메랑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런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국민의 삶을 우선시하는 수준 높은 통치의식이 요구되는 권력에 있다. 그 권력을 우리는 국민의 의식 수준이라고 한다.
어느 시대에나 통치 권력은 국민 통합이라는 절대적인 명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중 하나가 언어생활이다. 언어는 그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가장 빨리 다가갈 수 있어야 한다. 베트남도 오랫동안 중국 한자 문화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한자 문화권의 영향 하에 휩쓸려 중화中華를 시도한 중국과 국경을 맞대면서 천 년 가까이 지속된 위기의 시대도 있었다. 그러한 우려를 전쟁이 끝난 뒤 호치민이 해결한다. 그것은 멀리 있지 않았다. 1600년대 프랑스 선교사가 들어와 선교활동을 위한 프랑스식 알파벳을 보급하게 된다. 선교사의 의도와는 달리 시작은 하찮았지만, 결과는 복음보다 컸다. ‘쯔놈’이라고 불리는 구어口語 체계는 베트남에서 글로 표현되는 한자와 말로 표현되는 베트남어 사이의 간격을 메우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쯔놈 출현 시기를 명확히 보여주는 증거도 역사 자료를 살펴봐도 애매하다. 알파벳이 우리나라의 이두처럼 차음 형태로 운용되면서 “쯔놈”이라는 실용 언어가 베트남인에게 자연스럽게 전파된다. 종전 이후 호치민은 중대 결단을 내린다. 전 국민의 문맹률을 낮춰 국가 통합을 이루려는 마지막 방점을 과감히 찍고 만다. 화룡점정이다. 소수의 유식한 한자를 익힌 사람을 위한 것보다는 유식하진 않지만, 다수의 국민 사이에 더 많이 통용되는 쯔놈을 선택했다, 베트남의 거리는 온통 붉은색으로 새겨진 쯔놈의 알파벳 천지다. 알파벳은 베트남인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호치민의 구체화한 위민정신의 결과다. 거리 풍경을 통해 보이는 현실을 보면 우선은 국가 통합에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하노이에서 짱안으로 가는 동안 구호성 간판이 드문드문 우릴 스쳐 지나갔다. 구호는 어디까지 사회주의 속도를 뛰어넘지 못했다. 베트남은 고속도로도 시속 40km였다. 버스는 네 시간여를 달려갔다. 우리네 70년대 시골 풍경을 연상하게 했다. 어느 지점에서는 철로가 도로와 나란히 놓여있었고 지나가는 기차는 끝내 볼 수 없어 아쉬웠다. 프랑스 식민시대에 깔린 철로로 우리보다 좁은 협궤 철도란다. 우리처럼 대중교통 시설로 이용하기에는 모든 조건이 열악한 것 같았다. 철로가 녹이 슬어있는 것이 보였고 철로 가에는 부지런 사람이 심어놓은 바나나 묘목이 일정하게 심어진 곳도 있었다. 모든 것이 여유로워 그런지 우리나라처럼 빈터가 있으면 살뜰하게 일궈 먹는 것 같지는 않았다. 대충 심어놔도 무엇이든 잘 자란다니 복인지 화인지는 모르겠다. 달리는 동안 도로 주변에 논들이 보였고 벼들이 일부 심겨 있다. 한낮이 아니어서인지 논에는 삼각형의 베트남 특유의 전통 모자를 쓴 분들이 보였다. 삼각형의 모자는 여성의 신분을 뜻한다. 힘든 노동일은 거의 남자가 아닌 여자의 몫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벼는 보통 4개월 정도면 다 자라 일 년이면 3번을 수확하니 복 받은 나라다. 그것도 보리도 아니고 쌀농사가 그렇단다. 환한 낮이라 어젯밤에 보지 못했던 도로변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논 가운데 보이는 이상한 탑이나 시멘트로 된 작은 구조물이 보인다. 어떤 곳은 상당한 규모로 일정하지 않은 모형이 많이 모여 있었다. 공동묘지거나 사유지에 쓰는 묘란다. 베트남은 물이 드는 볏논 한쪽 귀퉁이에 묘를 쓴다. 우리네 상식으로 이해가 안 간다. 감히 조상의 묘를 물이 찬 논에다 쓰다니, 지형적 특성이 산보다는 펑퍼짐한 평야 지대가 많아서인지 그쪽 관습으로는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또한, 열대성 기후라 시신이 충분히 부패가 될 것으로 추측할 수 있었다. 같은 유교 문화권인데도 조상 봉분을 삼대까지 모시고 그 이후는 파묘를 해 원상복구를 한다니 우리보다는 합리적이다. 거기도 우리 사회와 마찬가지로 봉분도 사회적 지위와 부에 따라 화려하거나 크게 꾸민 차이가 확연했다. 빈부의 차이는 우리나 똑같이 죽은 사람을 편안히 놓아주지 않고 있다. 죽어서도 차별받는 영혼을 생각해보았다. 사후가 있다면 영혼의 세상에서는 그렇지 않기를 바라면서 부질없는 것 같아 고개를 저어버렸다.
하롱베이에 앞서 짱안을 보기로 했다. 그곳은 석회암으로 형성된 지반을 갖고 있다. 그러다 보니 오랫동안 물이 흐르며 침식이나 융기를 통해 깎아 지른 절벽이 만들어졌다. 융기된 지형에서 발견되는 화석류는 그곳에 오래전 바다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지금은 계곡 아래로 강물이 흐르며 또 다른 산과 산이 동굴 수로를 통해 아찔하게 이어져 있다. 보트를 타고 그런 동굴 수로를 돌아 나오는 체험 투어는 충분한 스릴도 있었고 그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호기심을 끌어내 이방인을 충족시켜주었다. 선착장 주변에는 6인 정도가 이용할 수 있는 보트가 수없이 많았다. 보트 측면에 찍힌 넘버가 1000번을 넘어선 것을 보면 규모가 대단한 것을 알 수 있다. 기업형 관광이 이뤄지는 곳이었다. 보트의 노를 저으며 수입을 얻어가는 여성들도 연령층이 다양했고 대부분 근처에서 농사를 짓는 여성분으로 일종 투잡이란다. 연약한 여성들은 대 여섯 장정을 보트에 태우기도 힘들 텐데 두 시간여 보트 투어를 시키면서 내색하지 않는 어머니들의 강한 모습에 그저 놀라울 뿐이다. 환경에 강한 것은 무릇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사람 손을 타지 않고도 홀로 자라 열매를 달고 있는 바나나 나무를 보며 이곳이 본래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린 잠시 보고 가는 데 불과하고 나를 보트에 태워준 아주머니도 나와 다를 바가 없다. 보는 것도 그래서 조심스럽게 보아야 한다. 그런 강인함은 여자들의 노동 우위에서 비롯되었단다. 베트남의 오랜 역사가 만든 아이러니라니 그것 또한 안타까웠다. 베트남은 알게 모르게 내 외부적 요인에 의해 전쟁을 많이 했던 나라다. 오랜 전쟁은 나라를 피폐 시켰고 결국은 전쟁으로 목숨을 잃게 되는 남자 수가 급격하게 감소하였고, 과부가 급증하는 사회문제가 발생된다. 전쟁으로 남자가 귀해지다 보니 자신의 소중한 남편을 과부가 많은 주변에서 보호하려는 우려에서 여성의 노동이 시작되었단다. 그것은 굴레처럼 이어져 여성이 힘든 경제를 책임져 사는 관습이 되었고 보편적인 국민의식이 되었단다. 일단 결혼하면 남자는 집에서 빈둥거리며 놀아도 여성들이 알아서 벌어먹인단다. 그것은 당연히 농촌 사회 풍습이 되었고 여자는 삿갓 모양의 모자를 쓰고 논에서 일을 했고 지금도 심심찮게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러는 시간 동안 남자는 늦게 일어나 동네 남자들과 어울려 식사 겸 반주로 소일하는 것이 일과라니 남자들이 살기 좋은 천국이란 생각이 들어 부럽다면 잘못된 생각일까. 여자는 새벽 네시면 일어나 집안을 어느 정도 마무리하고 쌀국수를 삶아 먹고 논에 나가 일을 시작한다. 그 시간에도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남편은 숙면을 취한다니 우리가 간혹 맛으로 먹는 베트남의 쌀국수에 생각이 미쳤다. 여성들이 논에 나가 조금이라도 일을 더 하려고 간단 조리해 먹는 음식이라니 식도락으로 즐겨 먹을 일은 아니다. 베트남 여성의 고달픈 인생의 험로를 이기려는 고픈 배를 채우는 국수 가락이니 말이다.
일전에 베트남의 거리를 메우는 여자들의 화보에서 아오자이를 본 적이 있었다. 그런 미적 환상은 현지에서 거의 사라지고 없는 귀한 풍경이 되었음을 확인했다. 공항에서 외국인을 위한 보여주기 식 착의는 볼 수 있었지만, 내가 기대한 만큼의 만족을 할 수 없었다. 당연히 내 눈은 아오자이를 입은 여성에게 눈길이 갈 수밖에 없었다. 혹시 나에 대하여 관음류의 이상한 관점에서 볼 필요는 없다. 이국의 환상에서 비롯되었지만, 좀 더 많은 문화를 이해하려는 의도성 접근이라고 보면 되겠다. 우리나라 전통 의류는 한복 문화다. 물론 시대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었다. 조선조만 보더라도 여성이 입은 한복은 신윤복의 그림이나 김홍도의 화첩을 보면 농염한 여성의 몸을 가려주는 문화다. 그런데 내가 본 베트남의 아오자이는 그 지역에서 풍족하게 생산되는 실크를 이용해 만든 옷으로 여성의 몸매를 드러나게 하는 문화 차이가 확연하다. 그것도 양 허리선을 따라붙어 날렵하게 한 뒤 엉덩이 위쪽에서부터 트임을 줘 움직일 때마다 들춰져 감춰진 허리까지 드러내 보이는 기회를 반복한다. 나름 왜일까 의문을 던졌고 그 이유를 생각해보았다.
먼저 조선의 여인들도 지금처럼은 아니겠지만, 몸매의 성숙이 빨리 이루어졌고 신체적 중요 부위의 볼륨이 있어 성숙한 처녀임을 쉽게 알아챌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당시의 통치 유교 이념과 맞물려 감싸는 한복 문화가 강압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렇게 감춰도 드러나는 여성성만으로도 충분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베트남을 가보면 대다수 여성의 체격이 왜소함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여성들의 작은 체구를 구분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우리처럼 가려지는 복식으론 숫처녀로 늙어야 할 지 모른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남자들 눈에 성숙한 처녀로 보이기 위해 몸매를 드러나게 하는 옷을 입혔을 것이다. 사실 베트남 여성을 보면 체구가 작다. 우리나라로 본다면 초등학교 3학년이나 4학년 정도 여학생처럼 보여 도통 성숙한 여성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화장을 하고 나름 복장을 꾸며 가슴선을 살려놓으면 확연히 달라 보인다. 그렇다고 베트남 여성 전체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대다수가 그렇게 보였다. 그러다 보니 아오자이에 눈길이 갔었고 특성과 형성 과정을 나름 추측해 적어 보았다. 아오자이의 뜻은 전통 의상으로 아오는 허리 위였고 자이가 허리 아래 긴 다리 쪽을 나타낸다고 했다. 그렇다면 내가 들었던 이유는 충분하다고 본다. 그 옷을 입혀야 완벽하게 살아나는 여성성이다.
또 하나 궁금한 것이 맛사지 문화였다. 조선조나 그 이전의 역사 속 궁중 비사에는 기록되어있는지 모르겠으나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맛사지 문화는 아예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는 남녀가 칠 세 이상이 되면 함께 있지 못하도록 남녀유별을 따라야 하는 사회적으로 엄한 분위기였다. 그런데 태국을 비롯한 동남아에서는 맛사지가 하나의 생활 문화처럼 전래했다. 왜 그게 가능했고 그 사회에서는 유지 될 수 있었을까. 그것도 여성들의 작은 체구가 장점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보았다. 만약에 체형이 큰 여성이 나에게 다가와 맛사지를 해준다면 우선 편안한 느낌보다는 부담이 되지 않을까 싶다. 가냘픈 여성들이 하는 맛사지는 그런 부담에선 자유로울 수 있다. 하지만 갓 스물 어리기만 한 베트남 아가씨의 맛사지는 피로를 풀어준 대신 나에게 안타까움을 남겼다. 나는 잠시 즐거움으로 찾아간 맛사지였지만, 그 아가씨는 먹고사는 방편이었다. 그런 미래가 결코 밝지 않을 것 같고 먼 훗날에도 미소를 잃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거리를 지나다 보면 붉은 깃발에 금색 별 하나가 그려진 깃발이 간간이 보인다. 금색 홍기라는 베트남의 국기라고 했다. 도로 가 집에 매달도록 일 년에 한번 국가에서 나눠준단다. 그래서 그런가 유달리 집집이 국기를 매달아 놓고 있었다. 베트남이 가진 사화주의적인 정체성과 맞물려 붉은 깃발이 주는 감상은 남달랐다. 북한의 붉은 색깔의 호전적 이미지와 맞물려져 벌로 보이지 않았다. 깃발뿐만이 아니고 건물에 새겨진 가게 이름들도 거의 붉은 색으로 되어 있었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의 사상적 근원은 사람 몸속의 빨간 피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역사적으로 세계사에서 전쟁은 수없이 있었다. 그렇지만 저토록 붉은 색깔로 도배하다시피 한 전쟁이나 혁명사를 나는 알지 못한다. 그 당시의 전쟁이나 혁명도 크게 보면 이데올로기적인 사상과 다르지 않았다.
우리와 베트남은 닮은 점이 많았다. 오래전부터 중국이라는 거대한 대륙에 인접해 있어 중국의 안정 이후에는 정벌을 통한 속국화의 대상에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중국의 한나라 때 우리의 부여 조선 옥저 동예를 복속해서 한 사군을 설치하여 신하의 예를 갖추도록 했듯이 베트남도 마찬가지 역사를 갖고 있다. 한나라 때에 안남이라는 중국의 속국으로 시작해 천 년 통치를 받으면서도 흥망을 거듭했다. 그런 가운데 중국 세력권을 벗어나기 위한 투쟁은 잊지 않았다. 그러한 노력으로 새로운 왕조를 열지만, 오래되지 않아 제국주의 시대 산물인 팽창주의의 희생양이 되는 비운을 맞는다.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어 팔십 년 가까이 우리와 똑같은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끝없이 이어지는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승리를 쟁취한 베트남은 프랑스군의 완전 철수로 그야말로 근대국가로 새롭게 탄생한다. 그러나 멀지 않아 남북이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로 나뉘면서 내전에 휘말리게 된다.
호치민의 끈질긴 게릴라전으로 승리를 기어이 쟁취하고 만다. 그때가 1975년 4월 30일로 베트남을 통일한 호치민의 영웅적 치적을 기리는 날이란다. 수염을 기른 호치민의 얼굴이 그려진 깃발도 눈에 쉽지 않게 띄었다. 베트남 국민이 내심으로 가진 자부심의 일면을 보여주었던 공항 입국 심사대의 그 사람의 눈빛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세계사에서 끝없이 강요해온 중국 왕조의 거대한 야욕과 제국주의 팽창주의에 맞서 식민지라는 오명을 스스로 벗어 던져 독립을 쟁취한 나라가 베트남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미소 냉전 시대의 대리전 양상으로 전개된 남북 전쟁에서도 미국을 당당히 물리친 나라가 내가 찾아간 베트남이다. 줏대가 있되 마냥 자존심만 내세우지 않는 나라가 베트남이다. 프랑스의 선교사가 선교 목적으로 프랑스의 알파벳을 이용 베트남 사람들의 생활언어인 한자어를 사용이 용이하게 만들었다는 지금의 언어체계인 쯔놈을 도입한 것만 봐도 그렇다. 다수의 행복을 위한 권력은 오랫동안 유지되어도 국민은 의아해하지 않는다. 우리와 같은 도 단위가 그곳은 성省 단위란다. 도심에 있는 공산당 당사에 적혀있는 구호성 글이 너무 붉다. 저 붉은 색깔이 바랠 때쯤이면 베트남은 얼마나 변해있을까를 상상해본다. 그런 변화는 사람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외부 힘에도 변하지 않는 베트남만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한낮부터 오후 2시까지 낮잠을 자는 나라다. 국민들 전체가 휴식을 취해도 국가가 유지되고 아무리 바빠도 하루 세끼를 즉시 밥을 해서 먹는 식문화도 이방인에게는 호기심의 대상이다. 물론 기후가 덥다 보니 음식을 보관할 수 없어 그렇다 치지만, 찰기 있는 쌀밥보다 찰기 없는 알량미라는 밥이 맛있다는 나라다. 베트남만이 갖는 독특한 문화적 가치는 언제까지 유지될까 궁금했다. 그것은 시간 문제라고 보았다. 이미 변화하고 있으니 말이다. 베트남의 거리는 오토바이가 대세다. 모든 이동 수단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거기다 여성들도 오토바이를 이용해 논으로 일을 나간다거나 직장으로 출퇴근하는 중요 이동수단이다. 걷지 않는 문화는 사람이 걷는 거리를 한가하게 만들었고 차도는 빈틈만 보이면 비집고 들어가야 하는 전쟁터 같았다. 베트남 여성도 오토바이를 즐겨 타는 바지 족은 불편하지 않지만, 최근 들어 멋있는 치마를 입은 게 흐름이란다. 오토바이는 여성에게 장단점을 동시에 보여주는데 짧은 치마를 입고 오토바이를 탄다는 것은 자유와 개방성을 동시에 보여준다. 남자들은 멋있는 여성들을 보며 아찔한 기회를 가질 것이다. 다만 거기까지다. 앞쪽을 가리는 치마랄까 그런 옷을 두르고 오토바이를 타는 여성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아쉬움은 이국의 정취와 맞물려 향수를 부른다.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베트남의 밤은 마냥 길지 않았다. 야자와 바나나 같은 열대 과일은 밤에도 익어가며 맛을 돋울 준비를 하고 있다. 독특한 맛과 정취는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만 찾아가는 행운이고 잊지 못할 기회임은 분명하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식민지의 유물인 하노이의 구도심을 우리나라와는 달리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치욕의 역사를 가르치는 살아있는 교과서였다. 부끄러운 과거를 지우기보다 되돌아가 배우는 베트남인들의 역사의식은 닫힌 빗장도 풀어버렸다. 우린 다행스럽게도 개방을 주도하고 있는 베트남을 찾아가기만 하면 된다. 하노이 신도심에서 남원 골이란 간판을 걸고 식당을 운영하는 고향 분을 만났다. 말로만 듣던 이역만리란 곳이 베트남일지 모른다. 그분은 베트남에 살며 어떤 생각으로 살아갈까. 답이 없는 물음을 던지고 싶다. 어디서든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사실이다.
첫댓글 좋구나!!! 청년 박철영 홧팅이다! 베트남의 자존감은 호야 아저씨에 대한 신뢰가 팔할일거라고 생각해. 복이 믾은 민족이지!!
보이는 것 이상이 있는 나라의 자존심은 들춰보지 못하고 왔네요
아름다운 경치에 눈호강, 맛있는 진수성찬에 입호강 부럽습니다.
저도 언젠가 베트남은 꼭가고 싶어요.
보는 것 이상을 봐야하는데 부족한 눈으로는 그걸 못 보았어
하여튼, 좋은 거는 다 하고 다니누만! 이 사람아! 너무 그러지말게.
죄끔 해보았네
겁나서~^^
베트남 저희 큰형수님이 베트남 사람입니다. 붉은색은 호치민의 이념적 사상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붉은색이 복을 가져다 준다는 주술적 의미도 있어서 붉은색을 많이 사용한답니다. 사진에 보이는 꽃게ㅎㅎㅎ
형이 베트남에 다녀와서 얘기하는데 저 꽃게가 귀한 손님에게만 내 놓는 최고의 대접식품이라고 하네요
참고로 저희집은 글로벌 가족ㅎㅎ
제 아내는 몽골
형수님은 베트남
사촌제수씨는 중국
근데 웃기는건 이 세 나라가 원수라는거 아세요.
절대 한 자리에 셋이 안모인답니다. ㅎㅎㅎ
재밌는 가족이네요
최고의 대접을 받고 왔으니 한동안 미련이 남네요
삼식씨 가족같은 사람이 늘어나야, 국가차별, 인종차별, 민족차별이 없어지고
세계평화가 앞당겨질거라고 생각합니다.
미치것다 안준철 샘이 말 한 것이 저거 였군요 ㅎㅎ 저도 오른쪽 아가씨 보고 침 흘렸는데 ㅎㅎㅎ 우와 부럽 부럽 ㅎㅎㅎ 아 동기부여 자극 ㅎㅎㅎ돈 마이 벌어서 ㅋ 이쁜 베트남 아가씨에게 장가가야 것다는 ㅎㅎㅎ
멋지다요 박 시인님! 베트남 한 번 가보고 싶당~! 어떻게 저런 기행문을 쓸 수 있을까? 감탄!
누구나 그곳에 가면 그럴겁니다. 자신과 그들을 보면서 무슨 말을 해야하는가를 알겠더군요.
베트남과 베트맨은 아무 상관이 없는거지요?
베트녀가 예쁘네요
@정성권 예쁘다는 기준을 바꾸도록 한 기회였거든
찔레꽃이 피어있는 느낌
@정성권 이런 개그 그만 베트~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