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와 예술, 세계와의 부조화
‘달과 6펜스’를 읽고
이민숙
삶의 행복은 조화에 있다, 라고 한다면 극단적인 표현일까?
너와 나, 사랑하는 사람과 나, 친구와 친구, 남자와 여자, 한국인과 일본인, 남편과 아내, 예술가와 예술.....그 많은 관계들로 이루어진 우리네 삶의 구조를 생각해본다. 그 구조야말로 본래 운명을 뛰어넘어 또다른 구조를 만들어가는 인간사회의 필연적 관계가 아닌가. 그 누구도 그러한 외부적 환경인 삶의 구조를 외면할 수 없다. 그 구조는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또한 어쩔 수 없이 만나야 하는 환경의 부산물이기도 하다. 그 와중에서 우리는 자기 정체를 고무시켜주는 관계 속에서 삶의 풍요를 경험하며 행복해한다. 그러나 또한 만남이 어찌 모두 원만하고 서로 사랑하며 서로 격려해주는 그런 관계로만 이루어질 수 있을까.
서로 사랑하다가 미워하게 되고, 헤어지게 되고, 서로 사랑하다가 피비린내 나는 갈등을 겪기 다반수다. 인간사 고(苦)의 바다! 부처는 그래서 삶을 고행이라고까지 했다. 그 고통의 안에서부터 밖으로 휘몰아치는 수레바퀴를 끊임없이 타고 달려야 하는 시간들을 우리는 매일 살아간다.
그러나, 고통이라 해도 이런 고통은 어떨까. 남들의 이목은 전혀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자기만의 삶! 그 어떤 외부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삶을 고집하며 기어코 독특한 아집, 또는 자유를 포기하지 않는 삶!
“ 남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정말 전혀 상관 않는 사내가 여기 있었다. 그러니 인습 따위에 붙잡혀 있을 사내가 아니었다. 이 사내는 온몸에 기름을 바른 레슬링 선수처럼 도무지 붙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자는 도덕의 한계를 넘어선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 이런 말을 했던 것을 기억한다.
“이것 보세요. 모두가 선생처럼 행동한다면 세상이 어찌 되겠습니까?”
“어리석은 소리를 하는군. 나처럼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은 줄 아오? 세상사람 대부분은 그냥 평범하게 살면서도 전혀 불만이 없어요.”
“아무래도 이런 격언을 믿지 않으시는군요. [그대의 모든 행동이 보편적인 법칙에 맞을 수 있도록 행동하라]는 격언 말입니다.”
“들어본 적도 없거니와 돼먹지 않은 헛소리요”
“칸트가 말했는데요”
“누가 말했든, 헛소리는 헛소리요”
작가 서머싯 몸은 소설 속 등장인물 스트릭랜드를 통하여 인간의 지독한 에고와, 또한 그 에고를 통해 자신만의 삶을 통렬한 예술적 경지로 끌어 올리고 있는, 세계와는 끝내 불화할 수밖에 없는 한 존재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행복한가, 불행한가!
소설 속에서 우리가 눈치챌 수 있다면, 그의 삶을 통틀어서 보여주는 화두로써 ‘인생이 행복한가, 불행한가’라는 명제는 크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가 한 마디로 무시해버리는 철학적 명제인 ‘양심과 행동의 보편법칙’은 이미 쓰레기와 같은 헛소리일 뿐이다. 그가 자신의 새로운 삶을 위하여 하루아침에 버린 부인에 대한 마지막 행동 뿐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서 역시 보편성을 찾아볼 수는 없다는 점이다. 보편성과 예술성, 양심과 도덕법칙의 인간과 예술성, 뭐 그런 관계를 보여주면서도 작가는 한 봉우리 너머 어떤 삶의 비밀스러운 추상적 구체성을 표현하고자 그 탁월한 문체를 모두 동원하고 있다고 보여지는 것이다.
작가는 한 인간을 이렇게 묘사하며 독자에게 스트릭랜드라는 특수한 인간형을 이해하도록 안내하고 있다.
“그러고 난 지 이삼일 후에 스트릭랜드는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뼈와 살가죽뿐이었다. 옷을 입은 모습이 허수아비에 누더기를 걸쳐놓은 꼴이었다. 덥수룩한 턱수염에 길게 자린 머리칼, 늘 실제보다 커 보이던 이목구비가 앓고 난 뒤엔 더욱 두드러져 기이한 모습으로 보였다. 어찌나 기이한지 못나 보이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그는 못생겼지만 어쩐지 범상치 않은 데가 있었다. 그가 주는 인상을 뭐라고 표현해야 정확할지 모르겠다. 육체의 휘장은 속이 비쳐 보일 듯이 투명했지만, 분명하게 보이는 그것이 딱히 영성(靈性)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어딘지 원시성 같은 것이 있었다. 그리스인들이, 목신 사티로스처럼, 반인반수(半人半獸)의 형상으로 의인화했던 자연의 불가해한 힘들을 그도 함께 나누어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감히 신과 대적하여 노래 실력을 겨루려고 했다가......스트릭랜드도 신비로운 화음과 아무도 시도해 본 적 없는 양식을 가슴에 품었던 것일까. 이 사람도 고통과 절망의 종말을 맞이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자신의 주변에 대해 그처럼 철저히 무관심한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달과 6펜스> / 민음사/ P138)
그의 성격은 그러므로 세계를 무시해버린, 즉 신의 명령도 단칼에 거부해버린 거대한 반항의 한 인간형이다. 그가 거부한 건, 아내도, 친구도, 도덕법칙도, 아닌 한 인간이 짊어져야 할 운명에의 거부라고 보여진다. 그러면서 철저히 스스로가 하고 싶은, 인간이면서 그 삶을 뛰어넘었을 때나 도달할 수 있는 예술적 경지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어쩌면 예술 역시 그가 추구한 한 대목의 보편적 유형으로서의 언어 형태일 뿐, 그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완전 순수의 욕망을 보여주기에 충분한 비평적 언어는 아닐 수도 있다.
스트릭랜드의 ‘사랑’도 우리가 추구한 형태의 인간적 면모를 확인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어떤 여자에게서 느끼는 신선한 정신적 만족감이 한 순간을 채워주고 나면 또다시 그의 원시적 에로스성은 새롭고도 고통스러운 창조열망 속에서 스러져야 했던 것이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채찍질했을까......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스트릭랜드는 타히티 연인 아타와 함께 자신의 그림을 불태워버리라 했고, 아타는 그 마지막 유언에 따라 기어코 영원히 볼 수 없는 한 예술가의 그림을 불에 태우는 장면이 나온다. 그걸 두고 작가는 말한다.
“스트릭랜드 본인도 그게 걸작인 줄 알았을 겁니다. 자기가 바랐던 걸 이룬 셈이죠. 자기 삶이 완성된 거예요. 하나의 세계를 창조했고, 그것을 바라보니 마음에 들었어요.*) 그런 다음 자부심과 함께 경멸감을 느끼면서 그걸 파괴해 버린 거죠”
( *예술의 창조를 신의 창조에 빗대어 말하고 있다는.... 역주) 작가는 스트릭랜드를 통하여 신의 경지에 오른 한 예술가의 영혼과 삶, 세계와 화해하지 못한, 결국은 신의 권능을 저주하며 죽어간 그러한 절대의 세계가 인간에게도 가능하다는 걸 이야기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숭엄하고 초연하고 아름답고 잔인한 자연 예찬, 공간의 무한성과 시간의 영원성이 섬뜩하게 느껴지는 그런 그림, 마치 거기에 잡힐 듯 잡힐 듯 하면서도 영원히 잡히지 않는, 무슨 영혼이나 신비가 숨어 있는 것 같은......눈에 익은 색채들일망정 저마다 어떤 고유의 의미가 있는 그러한 색채들.....거기에 있는 원시의 본능 상태,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었다고 말한다. 결국, 천재가 보여준 모든 예술적 색채는 다름 아닌 인간 본연의 자리, 지금 이곳의 삶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사람은 예술을 창조한다. 그러나 그 예술 속의 삶은 언제나 현실이다. 그 현실은 영원을 바라보며 시간을 채색한다. 추상과 구체, 영원과 순간, 그 모든 불화의 세계는 또한 우리가 가슴 깊이 받아들일 때, 이해하지 못한 세계마저 사랑하려고 할 때, 서로를 화해시킬 수 있는 것이다. 한 인간 스트릭랜드 역시 타히티의 아타와 함께 스스로가 해결할 수 없었던 운명적 천재성을 한 여인에게 의지하고 서로 사랑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술은 사람을 사람답게 한다. 그 예술의 창조적 고통을 짊어지고 살아갔던 스트릭랜드를 그 누구 아닌 독자인 우리가 이해와 수용으로 받아들일 때 세상은 원초적 불화를 아름답게 극복할 수 있도록 부드럽게 우리의 삶을 쓰다듬어 줄 것이다. 너의 삶에 대한 이해, 용서만큼 내 삶이 아름다워지는 일은 없다는 것을, 작가는 친절하게 세밀하게 고통스럽게 써 나가고 있는 것이다. 스트릭랜드, 아니 고갱이라는 화가가 보여준 건, 화가의 삶뿐만이 아니라 모든 예술가의 삶, 그것을 뛰어넘어 세계 속에서 불화하며 끝없이 고독한 삶을 살고 있는 모든 인간들의 대표성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고개 끄덕인다. 그 주체적 불완전성을 완성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예술적 도전! 그 삶은 바로 우리들의 삶 그 자체인 것이다.
첫댓글 예술가 스트릭랜드와 그냥 사내 희랍인 조르바의 캐릭터가 겹치지요. 원초적인 생명력과 마초 기질이 있는 이 두 남자들을 페미니스트들은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했던 적이 있어요. 혹은 그들이 소설적 인물이 아닌 내가 그들과 동등한 주체로서 살을 영위해가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그들의 무례와 이기적 열정을 위대한 예술 정신의 발로로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지...좀 재미 없는 생각을 하면서 글을 읽었네요. ㅎㅎ
누구나 갖고 있는 자신만의 가치!상대적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한 인간을 두고 볼 때 절대적인 평가는 있을 수 없잖아요 선생님....그러나 우리의 삶은 기어이 어떤 도덕 기준을 두고 살아야 행복하다고 해 왔지요. 행복론! 그 선을 넘어서는 삶의 자유에 대해 응원 보내고 싶었습니다. 페미니스트라는 가치도 아름답지만, 한 인간에 대한 사랑이 더 탁 트일 수 있는 그런 사상에 마음이 갑니다. 더 넓게 더 깊게 걸으면서 더 자유롭게.....조르바도 찰스 스트릭랜드도, 고갱도....뭐 그런 선상에서 사랑스런 남자들입니다.....그런 선상에서 매일 산책하고 여행하는 선생님도....ㅎㅎ 즐거운 하루 보내십시오!
백프로 공감!! 한 번 해본 말이랍니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