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재 수박밭을 기억하나요./박철영
남원에서 열차를 타고 찾아가는 전주 동산 촌은 참 멀고도 길었다. 길었다는 것은 기차가 길었다는 뜻이다. 전주까지 가는 동안 열차는 조그만 간이역을 원 없이 다 쉬고 지나갔다. 특히 임실에서 관촌을 지나 신리 역까지는 산과 산 사이로 난 기다란 협곡을 따라 뱀처럼 지나갔다. 그러다 보니 버스가 다니는 길과 기차가 다니는 철로가 나란히 달렸고 어느 곳에서는 손에 잡힐 듯이 버스가 지나갔다. 그럴 때는 서로 반대로 달려가며 멀어지는 속도만큼 나만의 스릴이 있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철로 가에 있는 나무 전봇대가 기차 쪽으로 다가왔다 눕듯 뒤로 사라져 갈 때도 어린아이에게 이상한 나라를 찾아가는 듯 상상력을 이끌어주었던 것 같다.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어렸을 적 완행열차를 타고 전주를 가던 추억을 떠올리면 즐겁다. 그런 나에게 어머니는 수없이 많은 당부를 하였다. 열차 칸에 타서는 창문으로 손을 내밀지 말아라, 열차 칸 사이에 서 있지 마라, 열차 칸 사이 바깥쪽으로 매달리지 마라. 기차가 달릴 때 바람에 휩쓸려 떨어질 수 있다는 둥 많은 주문이 있었다. 동생과 둘이서 찾아가는 전주는 나에게 상상할 수 없이 위험하고 아주 먼 곳이었다.
하기야 더 어렸을 적 어머니 손에 이끌려서 간 기억은 나에게는 아련할 뿐이다. 전주 동산촌에 어머니를 따라간 기억이 있으니 말이다. 당시에 외할머니 집에서 잔치가 있었던 것으로 희미하게나마 기억된다. 울타리에 여주가 심겨 있었고 여주 껍질이 노랑 빛을 띤 걸 보면 한여름 정도였을 것이다. 외갓집에서 빠져나와 좁은 길을 건너가면 모정이 있었다. 그 모정에서 외 사촌 형들과 놀았던 기억이 있다. 들 논두렁에는 빨간 뱀 딸기가 붉어져 눈에 더 잘 띄었고 뱀이 먹는 거라는 말에 소름이 돋았다. 어릴 적의 희미한 기억은 나이가 들수록 또렷해졌다. 어머니의 긴한 당부를 잊지 않고 잘 따라 남원에서 기차를 타고 동산촌역에서 내리면 빛바랜 연둣빛 역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을 벗어 나왔고 잘 정리된 논을 사열하듯 어머니가 싸준 보따리를 양손에 들고 걸어나갔다. 그렇게 한참을 나가면 버스 타는 곳이 나왔다. 어렵사리 버스에 올라타도 버스는 금방 떠나지 않아 출발을 기다려야 했다. 기다리는 동안 몇 대의 버스가 어디론가 떠나갔다. 출발하는 버스가 내 차 옆을 지나갈 때면 순간 울렁증이 일면서 멀미가 느껴졌다. 내가 타고 있는 정차된 버스가 움직이는 것처럼 착시가 되었기 때문이다. 동산촌 외할머니댁을 찾아가면 사촌 형이 눈빛으로 반겼다. 좀 있다 형은 작은 방에 들어가 손바닥을 펼쳐 방바닥으로 이리저리 옮겨가며 무언가를 중얼중얼 연습을 했다. 뭐 하는 것인가를 물으면 그저 웃기만 했다. 나이 들어 알게 된 것인데 댄스나 지루박을 배우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벌써 환갑을 넘어 칠십 바라보는 사촌 형의 잘 나가던 훤칠한 미소와 어우러졌을 현란한 스텝을 상상해본다. 봄날 아지랑이처럼 피었다 사라지는 것이 한 갓 인생이니 모든 것이 일장춘몽이다. 나나 모든 사람이 한 때를 멋지게 살고 싶어 남다른 생각으로 안달하며 산다.
외할머니 집은 동산촌 조촌초등학교와 몇 집 건너 뒤에 있었다. 더 들어가 뒤쪽으로 밭길을 따라 걸어가면 팔복동 발용리 이모 집으로 갈 수 있는 지름길이 있었다. 가던 길 중간에 저수지가 있었는데 그곳에는 거머리가 내 손가락처럼 엄청 커 시골에서 큰 나도 그것을 본 순간 질겁을 했다. 외사촌 동갑 진규는 그런 나를 보며 웃고는 우쭐대기도 했다. 거기다 저수지가 우리 고향 요천수처럼 흐르는 물이 아니고 갇힌 물이었다. 남원 우리 고향 요천수 말바위와는 환경이 달랐다. 그런 곳에서도 노는 것은 아이들이라 가리지 않았다. 사촌 동갑내기와 물놀이를 하다 보면 배가 출출해졌다. 발용리 이모 집에 가서는 밥보다는 빨간 수박을 잘라 원 없이 먹고 놀았다. 밤이면 수박을 지키는 원두막에서 잠도 자보고 그야말로 남원 집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호사를 하며 놀았다. 그렇게 놀다 밤이 되면 멀리 전주 제지에서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고 신기했다. 잠결에도 일정한 시차를 두고 마을 안까지 쿵쿵하는 기계소리가 파고들었다. 그곳 사람들은 일상이라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지만, 나에게는 신기하고 도시라는 것이 그런가보다고 지레짐작을 했다. 우리 고향에는 공장에서 기계 돌아가는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단순하게 소리라고 친다면 남원 시내에서 한낮의 정오가 되면 굴속 깊숙이서 우는 듯 우우웅거리며 빠져나오는 소리가 점점 커지면서 우리 마을까지 번져오는 오포 소리가 전부였다. 그 소리의 여운은 오래도록 고향의 골목과 산 그리고 들녂을 맴돌다 스며들 듯 사라졌다. 그러고 나서 얼마 있다 흙 먼지를 일으키며 삼남 여객이 신작로를 타고 올라와 지나쳐 가곤했다. 사람들은 삼남 여객을 보며 점심 밥때가 되었음을 알아챘다.
그렇게 어려운 여건에서 전주 이모 집을 다녀와서는 한동안 이모와 이모부 얼굴이 생각났다. 이모는 내 어머니와 쏙 빼닮았고 똑같은 환경에서 자란 이모는 참 편하게 사셨다. 그런 환경은 우선 이모부의 유유한 성품을 봐도 알 것 같았다. 집안 분위기가 그래서인가 확연히 달랐고 한눈에 봐도 우리 아버지와는 너무 달랐다. 이모부는 일도 별로 열심히 하지도 않으신 것 같았다. 집에서는 뒤 방문을 열어놓고 판소리 레코드판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흥이나 따라 부르기도 하셨다. 이모 집은 우리 집과는 확연히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동갑 진규가 팽팽 놀아도 뭐하나 일을 시키는 것이 없었다. 환경이 분위기를 만들고 삶도 달라진다는 것을 막연하게 알 것 같았다. 그렇게 며칠을 놀다 남원으로 떠나올 때는 꼬깃꼬깃한 지폐를 이모는 차비하라며 주머니에 넣어주셨다. 그러시면서 우릴 몇 번을 더 쓰다듬어 주셨고 고생하는 어머니에 대한 안타까움을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후에도 몇 번은 더 이모 집을 갔었고 마지막은 전주로 고등학교를 진학하려고 시험을 보러 갔던 때였다. 물론 다른 일로 다녀온 적은 있었지만, 이후 더 치댈 수는 없었다. 시험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지나온 시간을 되짚어보면 기억에서도 가물거려 긴가민가할 때가 있다. 그런 경우는 그저 안타깝다는 생각뿐이다. 우리 고향에도 논농사 이외 망골 동산 넘어 태기형네 밭에 수박이 심어졌고 우리 새 논의 수로를 거슬러 올라가면 상훈이네 아버지가 해마다 참외를 심었다. 상훈이네 아버지는 그 당시 서울대 농대를 나왔다고 들었다. 초등학교 때 부모 학력란에 그렇게 선생님이 기재를 했다. 그래서 상훈이 아버지를 대단한 분으로 생각했다. 그래서일까 우리 동네에서 유일하게 참외 농사를 지었고 해마다 노랗게 익은 참외를 여름이면 니어까에 가득 싣고 새벽마다 시내로 나갔다. 이른 새벽 새 논 물고를 보러 가다 보면 참외를 실은 니어까와 농롯길에서 마주쳤다. 참외를 실은 니어까가 내 곁을 지나가면 단내가 논길 풀 사이로 길게 번져나갔다. 거기다 식정에서 살다 점촌으로 이사 간 문재양반이 요천수 물 건너에 수박을 심었다. 어렵게 아이들과 어울려 수박을 사 먹으러 가면 설익은 수박을 따줬다. 수박 농사가 서툴러 그랬을 것이다. 씨앗 주위만 빨개지다가만 수박을 칼로 잘라주며 수박 종자 탓을 해도 우린 맛있게 먹었다.
그 시절에는 무엇이든 다 맛있었다. 여기서도 빠질 수 없는 것이 수박 서리다. 서리도 아무 때나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주인 입장과 달리 우리에게는 행운의 여신이 함께 해야했다. 친구들의 성공담은 누구나 한 번쯤 수박 서리를 꿈꾸게 했다. 그런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삼 년 위 기영이 선배가 지나가는 나를 은밀하게 불렀다. 당시만 해도 기영이 선배와는 별로 친하지도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봐도 묘하기도 하여 그래서 우연히란 말이 맞다. 기영이 선배가 말한 거북 재를 거슬러 올라갔고 지금껏 알지 못한 거북 재가 능선 안쪽 펀치볼 같은 지형에 수박밭이 있었다. 수박 밭은 그리 크지 않았고 지금 생각해보면 여유 땅에다 수십 포기를 심었던 것 같다. 긴장한 탓이었을까 수박 서리는 제대로 성공했고 그 수박밭은 월남을 갔다 와 세상 편하게 살아가는 운선이 양반네 밭이었다. 거북재 산 안쪽 옴팍한 분지에다 수박을 심었는데 지금껏 친구들도 알지 못한 곳이었다. 산에 심어 그런가 수박이 엄청 달았고 둘이서 그것을 다 먹지 못했다. 기영이 선배와 둘만의 비밀은 잘 유지되었고 애먼 동네 다른 친구들 이름이 오르내리다 그해 여름 더위가 한풀 꺾이더니 이내 그마저도 잠잠해졌다.
세상은 어찌 보면 묘한 것이다. 땀 흘려 키운 수박을 누군가가 대가 없이 따 먹어 버렸으니 말이다. 물론 생업으로 하는 농사도 아니었고 수박 하나 따 먹었다고 그 집이 망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 쳐도 난 요새 들어 세상 사는 것이 그냥 살아지는 것이 아니란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인연도 없던 사람들이 불쑥 뛰어들어 와 내 삶의 중심에 있을 때는 사람의 인연이 무엇인가를 수없이 되묻곤 한다. 요즘은 수박을 아무 때나 먹을 수 있고 하우스 시설 재배로 수박 맛도 다디달다. 그러다 보니 여름 한 철 맛보던 그 시절처럼 특별하지도 않은 과일이 되었다. 하지만 여태껏 그때처럼 맛있는 수박을 맛보지 못했다. 꿀맛이었다면 이해할 것이다. 그런 꿀맛 같은 수박을 먹고 나서 기영이 선배와 나는 잠시지만 속에 있는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있었다. 당시 기영이 선배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장래에 대해 고민을 할 시기였지 않나 싶다. 그런 기영이 선배가 묻지도 않는 말을 했다. 자기는 평생 담배는 피우지 않겠단다. 그 돈을 아껴 잘 살겠다는 각오를 말하는 데 눈빛은 단단한 결심을 지지해주고도 남았다. 지금도 약속을 지키며 살고 있을 거라 믿는다. 사실 기영이 선배네 집도 여느 집처럼 어렵게 살았다. 집은 이 씨 종산이 있는 산자락에 있었고 사랑 골로 넘어가는 길목의 맨 꼭대기에 있었다. 동로골 사람들이 나무하러 사랑골을 넘어갈 때는 그 집을 지나가야 했다. 기영 선배 집은 아예 대문도 없었고 탁 트인 마당으로 들어가면 집이 있는 왼쪽으로는 나무꾼들이 지나다니도록 길이 아예 뚫려 있었다. 요즘 같으면 어림없는 일이다.
당시는 서로가 서로에게 불편을 인정으로 이해하며 살던 시대였다. 사람 좋은 기영 선배 아버지는 말 수도 없이 항상 그대로였다. 오히려 당찬 기영 선배 어머님이 훨씬 강한 성격을 가졌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기영이 선배도 어머니 얼굴을 빼닮았다. 나무하러 다니는 겨울철은 사람들이 하도 자주 드나들다 보니 집을 지키던 개새끼마저 사람이 걸어 들어가도 짖지 않고 오히려 반긴 듯했다. 그렇게 사람 좋은 기영이 선배 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때 세상을 등졌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 환경을 지켜나가느라 그 집도 참 많은 고통이 있었을 것이다. 작은 집에 버거웠을 많은 식구들이 있었는데 세월이 이만큼 지나서도 기영이 선배가 어찌 사는가 궁금하다. 식정리란 마을은 지형이 배산임수의 전형이었다. 앞으로는 요천수를 따라 들판이 널따랗게 펼쳐졌고 뒤로는 골목 끝닿는 곳으로 산으로 들어가는 길이 이어졌다. 그 주변을 에워싼 산에서 겨울철에는 나무를 해 아궁이에 불을 지펴 고픈 생을 꾸려갔다. 그런 산길을 눈 밟히도록 올라다닌 사람들은 죽어서 다시 그 산에 묻혔다. 삶과 죽음이 유별하지 않은 곳이 식정리다. 그런 사람들이 살던 고향의 골목들이 텅텅 비워지고 외지에서 들어온 낯선 사람들이 큰 길가에다 보기 좋은 집을 짓고 있다. 물론 그 사람들도 나중에는 고향이란 또 다른 추억을 자식들에게 물려줄 것이다. 그렇지만 안타까워하는 것은 골목 안 헐어 없어진 집처럼 사라져 가는 사람의 오랜 인정들이 그립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지워져 간다는 것은 그래서 슬픈 일이다. 더 늦었다고 생각하기 전 지워진 기억들을 되살려내고 싶은 마음에 조바심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첫댓글 참 아름다운 기억이 이렇게 펼쳐지다니....대단하네요!
잊혀지고 사라질 수밖에 없는 과거 시간과 인연들을 붙잡고,
나긋나긋 따끈따끈 이야기를 끌어가는 철영씨의 심사에 한 잔 막걸리라도 부어주고 싶은 독자!
잘 읽었어요! 수고 많았습니다~^^
그냥 심심해서 적어보았습니다. 적다보니 기억속에서 잊고 지냈던 사람도 생각나고 좋은 점도 있었고요.
하여간 동네 이야기는 최대한 정리를 해볼 요량입니다.
바쁜 눈으로 글을 읽고 올려주신 글 감사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