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습·형식 틀 깬 또 하나의 프랑스혁명”… 전문가들이 본 올림픽 개막식
이태훈 기자 님의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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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올림픽 개막식을 지켜본 전문가들은 ‘프랑스와 파리가 일궈온 문화예술의 성취를 향해 부르는 찬가이자 3시간을 훌쩍 넘는 러닝타임이 지루할 새 없는 한 편의 영화와 같았다’고 찬사를 보냈다. “자유롭고 창의적이며 예술적인, 스타디움 개막식의 패러다임을 바꾼 작품”(손진책 전 국립극단 예술감독)이며, “모든 예술장르를 아우르며 스케일과 디테일이 조화를 이룬 감동적 드라마”(안호상 세종문화회관 사장)였다.
“정해진 관습과 규칙, 형식의 틀을 깨뜨린 또다른 프랑스 혁명”(박명성 신시컴퍼니 대표)이자, “소수자가 주인공 되고 개별적 삶에 주목한 재미있는 쇼”(고선웅 서울시극단장)였으며, “문화적 다양성과 디테일한 미장셴, 프랑스다운 위트의 조화로 이룬 120년 지속된 클리셰를 깨뜨렸다”(장유정 연출가)는 평가였다.
◇영화처럼… 영상·라이브액션 융합
26일(현지시각) 열린 프랑스 파리 올림픽 개막식의 도입부, 프랑스 게임 '어쌔신 크리드'의 주인공 '아르노'(배 뒷쪽 남자)와 아이들이 센 강 위로 보트를 타고 성화를 나르고 있다. /AP연합뉴스© 제공: 조선일보
개막식 도입부 영상, 프랑스 축구의 전설 지네딘 지단에게 성화봉을 넘겨 받은 아이들이 프랑스 게임 ‘어쌔신 크리드’의 주인공 ‘아르노’의 배에 타고 기차역 지하 수로를 따라 나오면 영상은 센 강 위 배에 탄 아르노와 아이들의 실제 상황과 바로 연결됐다. 프랑스 남동부로 가는 관문인 파리13구의 오스테를리츠역에서 출발한 ‘아르노’는 이후 센 강을 따라 개회식의 대미를 장식한 트로카데로 광장까지 영상 속으로 들어갔다 현실 속으로 나오기를 반복하는 장장 6km의 모험을 보여줬다. 앵발리드 광장과 그랑 팔레, 루브르 박물관과 유서깊은 다리들이 번갈아 등장했다.
손진책 전 국립극단 예술감독은 “철저한 영상 콘티로 다양한 장르를 하나의 흐름 속에 일관성있게 조화시켰다”고 평했다. 그는 “영상으로 개막식을 보는 전세계 시청자들을 우선했다. 돈 있고 힘 있는 사람만 스타디움에서 볼 수 있었던 개막식을 센 강변에 나온 파리의 시민부터 전세계 시청자들이 함께 공유하도록 했다. 그것 자체가 민주주의이고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이라고 했다.
◇센 강 따라 파리 전체를 무대로
26일(현지시각) 열린 프랑스 파리 올림픽 개막식 중 프랑스 학술원과 루브르 박물관을 잇는 퐁데자르 다리 위에서 공연하는 아프리카 말리계 프랑스인 가수 아야 나카무라. 금색으로 디자인된 의상과 미장셴은 올림픽 메달의 색을 형상화한 것이다. /AFP연합뉴스© 제공: 조선일보
4시간에 달하는 개막식이 진행되는 동안 영상과 실제 센 강 풍경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번갈아 비추며 94척의 배에 탄 1만500여명의 선수단도 이 스토리텔링의 일부로 포함시켰다. 프랑스혁명 때 귀족들을 가뒀던 콩시에르주리에선 헤비메탈 밴드 ‘고지라’가 연주하고, 프랑스 학술원과 루브르 박물관을 연결하는 퐁데자르 다리 위에선 공화국수비대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맞춰 아프리카 말리계 프랑스인 여가수 아야 나카무라가 노래했다.
안호상 세종문화회관 사장은 “예술 도시 파리의 자부심을 그대로 펼쳐보인 종합 예술 퍼포먼스였다. 샹송, 팝음악, 뮤지컬, 오페라, 발레, 캉캉, 브레이크 댄스, 미술, 조각, 패션, 서커스, 레이저쇼, 수어 공연 등 가능한 예술 장르를 모두 아우르며 세계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개막식을 만들어냈다”고 했다.
◇다양성과 톨레랑스… 가장 프랑스적인
26일(현지시각) 열린 프랑스 파리 올림픽 개막식 중 센 강 강변에서 춤추는 무용수들의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제공: 조선일보
프랑스인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톨레랑스’와 다양성의 정신을 전면에 부각시킨 개막식이었다는 점도 높은 평가를 얻었다. 에펠탑이 바라다보이는 드빌리 인도교 위에 펼쳐진 패션쇼 런웨이엔 중년의 남성, 드랙퀸, 비만 여성 등 기존 패션쇼에서 볼 수 없던 다양한 사람들이 무대에 섰다. 이어진 춤 공연 무대서도 이전 국제행사에선 보기 어려웠던 소수자들이 등장했다. ‘강직인간증후군’을 앓고 있는 셀린 디온이 프랑스 국민가수 에디트 피아프의 노래를 부른 피날레는 올림픽과 인간 승리의 상징과 같았다.
하계유니버시아드와 축구 U-20월드컵 등의 개폐막식 총연출을 맡았던 박명성 신시컴퍼니 대표는 “다양한 배경과 국적, 인종의 사람들, 장애·비장애인이 자연스럽게 하나의 이야기 속으로 녹아들었다”며 “아픔을 딛고 잃어선 디바의 목소리로 부른 ‘사랑의 찬가’는 오래 사람들 마음에 남게 될 것”이라고 했다.
◇위압 없는 위트로 대중적 재미 확보
26일(현지시각) 프랑스 파리 올림픽 개막식을 팬 존에서 스크린 영상으로 지켜보고 있는 관중들. /AP 연합뉴스© 제공: 조선일보
이번 개막식엔 또 브레이크 댄서이기도 한 오페라 가수 야쿠브 요제프 오를린스키, 파리오페라 발레 최초의 아프리카계 수석무용수 기욤 디오프 등 예술의 벽과 경계를 허문 상징적 인물을 두루 등장시켰다. 잘린 목을 든 마리 앙투아네트가 노래하고, 루브르의 미술품 속 낯익은 인물들이 관객을 향해 눈짓하는가 하면, 성화를 든 ‘아르노’는 열기구를 타고 가는 영상 속에선 세계 영화의 역사를 연 프랑스의 자랑 조르주 멜리에스와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의 소행성까지 등장했다.
올림픽기를 망토처럼 휘날리며 은색 말을 탄 기수가 센 강 위를 질주하며 등장해 비둘기 날개까지 자연스럽게 등장시키는 종반부의 미장셴은 올림픽 개막식의 프로토콜이라 할 요소들을 위트있게 살리면서도 관습적 틀과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명장면이었다.
/그래픽=이연주© 제공: 조선일보
2018 평창 동계올림픽 개·폐회식의 부감독과 폐회식 총연출을 맡았던 장유정 연출가는 “센 강을 따라 입장하는 각국 선수단이 탄 배의 모양까지 다양했다. 문화유산과 전통, 역사를 녹여내면서도 고압적 태도를 피하고 위트를 잘 살렸다. 뤼미에르부터 미니언즈까지 프랑스 영화를 경쾌하게 이어붙이는 등 재미와 대중성을 확보한 연출”이라고 평했다.
작가 리베카 솔닛은 “파리의 거리를 걷는 일은 종종 책을 읽는 것처럼 묘사되곤 하는데, 그건 이 도시 자체가 거대한 이야기들의 모음집과 같기 때문”(‘걷기의 인문학·2000)’이라고 했다. 파리 올림픽 개막식은 마치 페이지마다 새로운 놀라움을 숨겨 놓은 팝업북처럼 파리와 프랑스의 이야기를 펼쳐 보였고, 세계는 이 장대한 프랑스의 문화적 자부심 속으로 속절 없이 빠져들었다.
토마스 바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은 개막식에서 “피에르 드 쿠베르탱이 태어나고 근대 올림픽을 창안한 빛의 도시 파리, 마법 같은 환영을 해주신 사랑의 도시 파리와 프랑스에 감사드린다”며 이렇게 말했다.
“올림픽의 마법을 전 세계가 함께 나누기에 파리보다 더 아름다운 곳이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