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사람 마음에는 간사한 구석이 없잖아 있다더니 틀린 말은 아닌가 보다. 평소에는 무신론자인 듯 행동하거나 신에 대해 그닥 의식조차 않던 대개의 사람들도 제 마음 다급한 일이 있다거나 어딘가에 기대고 싶을 때는 여지없이 아이고, 하느님 부처님 조상님을 부르고 하다못해 돌무덤을 보고도 손을 모으더라고.
내게도 그런 날이 있었다. 급기야는, 장롱 깊숙이 넣어 뒀던 배냇저고리까지 찾던 날. 아들이 어떤 관문을 통과하느냐 못하느냐 기로에 선 시험을 앞에 두었던 날이다.
큰아이를 낳던 날이다.이른 새벽부터 아랫배가 뭉근히 아파 오기 시작하더니 짧은 간격으로 난리를 일으키는데 눈앞이 노래질 지경이었다. 출근하려던 남편은 마음이 안 놓이는지 어서 챙겨 나가자고 했다.
어디로 갈 거냐고 묻는 나를 재촉하며 "어디긴, 산파한테 가야지."했다.
나는 출산일에 즈음해서 늘 머리맡에 준비해 뒀던 출산 준비 보따리를 들고 그이의 커다란 화물차에 실렸다. 조산원에 당도하고, 산파가 진찰을 하더니 "아이고, 아직도 멀었어, 내일이나 되어야 순산하겠는 걸..." 하며 남편을 바라보았다. 남편은 산파의 뒷말이 채 나오기도 전에 "암튼 맡기고 갑니다."
그렇게 무슨 짐짝이라도 맡겨 놓는 듯 하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일터로 갔다.
그런데 뱃속의 아이는 무엇이 그리 급한지 숨조차 쉬기 힘들 정도로 태동을 하며 시간을 바짝바짝 조여 오는 게 아닌가.
"고놈 참 성미도 급하다" 는 산파의 소리가 가물가물하게 들리던 오후 세 시 이십 분, 으앙! 앙! 앙! 아이는 드디어 우렁찬 울음을 쏟아 냈다. 산파의 손에 가지런히 두 발목이 잡힌 채 거꾸로 매달려서.
아들인지 딸인지 궁금함에 얼른 무어냐고 묻는 내게 산파가 뽀얗게 웃으며 답을 했다.
"아들이다, 아들!"
순간 "와-, 와-" 소리와 함께 나도 모르게 손이 모아지고 박수가 터졌다.
이런 내 모습을 본 산파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툴툴댔다.
'둘째도 아니고 첫아이인데 어떻게 아무도 따라오지 않을 수가 있느냐. 이런 법은 없는 거다. 그런데도 어찌 박수가 나올 수 있는 거냐. 속도 참 좋다......'
한참을 그렇게 구시렁대다가 내 눈치를 살피더니 그만 입을 다물어 버렸다. 눈물이 맺혀 있는 내 눈을 보았기 때문인 듯. 하긴 이제야 하는 소리지만 그이가 그때 분명 그랬었다. 아들을 못 낳으면 친정집에 보내 버릴 거라고. 요즘이야 임신을 하면 흔히들 병원에서 왕자니 공주니 하며 낳기도 전에 아이의 성별을 미리 가르쳐 주지만 그때는 그저 낳아 봐야 안다고 했다. 한데 맏며느리라는, 더군다나 시할머니에서부터 시부모님에 이르기까지 하나 달고 나와야 한다는 노골적인 손자 타령이 열 달을 꼬박 채웠다.그렇다 보니 어떻든 첫아들을 낳아 그 기대에 부응을 해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감이 컸었다.
거기다가 유독 아들을 원했던 남편마져 내 배를 바라볼 때마다 아들이어야 할 텐데, 소리를 하곤 했다.
그런 상황에서 불러오는 배만큼 내 걱정도 불러왔음이랴, 기쁜 나머지 안도에서 오는 박수며 눈물이었으리라.그렇게 내게 기쁨을 안겨주며 세상으로 나온 내 분신, 내 아들.
이 아이를 낳던 그날, 알기라도 한 듯 뜬금없이 친정 엄마가 그 먼 길을 내려오셨다. 지난밤 꿈자리가 하 수상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더란다. 아버지 얼굴도 모르는 막내로 어렸을 적부터 당신께는 늘 목에 가시같이 걸리는 막내라고 했었다.그런 막내가 층층시하 맏며느리로 고생하고 사는 것도 안쓰러운데 아이 낳고 미역국도 제 손으로 끓여 먹는 거 아닌가 싶어 오셨노라고. 그랬을 것이다.
엄마가 안 오셨으면 시동생 둘까지 데리고 있던 터에 뜨신 미역국에 산후 조리는 고사하고 시동생들 뒷바라지며 이 눈치 저 눈치에 눈에 눈물 좀 뺐을 게 불 보듯 뻔한 노릇이었으니. 그렇게 오셔서 삼칠일을, 나를 방에서 꼼짝 못하게 하고는 수발을 다 들어주셨다. 그리고는 가시기 전날, 깨끗이 삶아 빨아 개놓았던 배냇저고리 하나를 가리키시며 말씀 하셨다.
"어멈아, 이 옷을 작아서 더는 못 입겠다 싶을 때까지 입히고 나거든 고이고이 간직해 두려무나. 그랬다가 이다음에 이 아이가 커서 어떤 시험이든 어려운 시험이 있을 시에는 잊지 말고 옷섶에 달아 주거라."
융으로 된, 낳고는 맨 처음 입혔던 옷, 초유를 먹일 때부터 옷이 작아 못 입을 때까지 입혀서인지 깨끗이 빨아 삶았는데도 목둘레며 앞깃이 싯누렇게 변색되어 있는 저고리. 그렇게 해서 간직하게 되었던 배냇저고리는 이 아이가 비평준화 지역인 이곳에서 고등학교 시험을 보던 날 교복 등판 안쪽에 꿰매 달아 줬었다.
게다가 "매듭을 지으면 문제가 잘 안 풀린다니 실 끝에 매듭은 짓지 말거라" 하시던 당부가 생각나서 매듭은 짓지 않았었다. 그리곤 결과, 아주 흡족했다. 그게 처음 사용이었고, 두 번째는 공무원 임용 고시가 있던 날이었다. 역시 결과가 좋았다.아들 말에 의하면 시험을 치루는 내내 마음이 그리 따듯하고 편안할 수가 없더란다. 물론, 노력의 대가가 더 컸을, 그리고 우연의 일치 일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것을 말하기 앞서 엄마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그것이 이 아이의 마음을 따듯하고 편안하게, 그래서 시험을 잘 치룰 수 있는 최적의 마음 상태를 갖게 해 주었다는 사실이다.
얼마 전,이 아이가 진급 시험을 보러 가기 위해 대문을 나서는데 갑자기 그 배냇저고리 생각이 났다.
얼른 장롱의 서랍 속에 고이 간직된 것을 찾아내어 가방에 넣으려는 순간 아들이 보고는
"앗! 또 그 배냇저고리?"
"응..."
우리 둘은 마주보며 햇살 같은 미소를 지었다.
아들아, 엄마 맘 알지?
첫댓글 참 대단 하세요 여직 그 배냇 저고리를 간직하고 게셨네요 전 여러번 이사를 다니면서 아이들 어렸을때 버렸는데...
위 글을 대하고나니 자식 사랑하는 정성이 부족한것같아서 아이들에게 미안한 맘이 듭니다.
부르는 것만으로 힘이 되는 아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