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양오행의 거울에 비추어 본 삶과 예절
2026년 9월 18일 경남유교대학 강의를 하신 분은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이신 조민환 교수였다.
주제는 ‘주역(周易)과 동양문화’ 였다.
주역의 주요 개념인 음양(陰陽)과 고화(古畫)에 그려진 남녀의 위치로 본 양(陽)과 음(陰)의 구별, 태극(太極)이 음양(陰陽)으로 변화하고, 또 사상(四象)으로 변한 후 팔괘(八卦)로 만들어지는 순서를 PPT로 설명했다.
그리고 사람의 음양관계를 설명할 때 좌양우음(左陽右陰)을 전제로 男左女右, 左東右西, 紅東白西로 강의하셨는데 음양오행의 견해에서 보면 배치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것을 제외하고는 자료 준비도 충분하고 세심하여 만족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강의는 주역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분에게는 공염불이 되었을 개연성도 농후하다.
아무튼 글쓴이가 들은 강의 내용을 한국전례원에서 연수를 받아 이미 알고 있는 사실과 결부시켜 고쳐 피력하고자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거대한 숨결이 끊임없이 출렁인다. 아침에 해가 떠오르면 만물이 눈을 뜨고, 밤이 깊어지면 고요히 적막 속에 안긴다.
동양철학의 근간인 『주역』은 이를 두고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라 했다. 한 번은 양의 기운으로 오르고, 한 번은 음의 기운으로 내리는 것, 그것이 바로 우주가 운행하는 변치 않는 길이다. 이 거대한 우주의 질서는 비단 하늘의 운행에만 그치지 않고, 우리 인간의 일상과 가치관, 그리고 대대손손 이어져 내려온 전통 예절 속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유학을 관심 깊게 지켜본 필자의 눈으로 바라볼 때, 오행(木·火·土·金·水)은 단순히 옛 선조들이 나누어 놓은 학문적 분류가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과 몸속에 고스란히 투영된 살아있는 생명력이다.
봄이면 새싹이 위로 솟구치듯 솟아남은 陽(木·東·靑·肝臟·仁)의 발동이고, 여름이면 불꽃처럼 타오르며 만물을 키우듯 약동시킴도 陽(火·南·赤,心臟·禮)의 은덕이다, 가을이면 결실을 맺고 거두어들이는 수확은 陰(金·西·白·肺臟·義)의 작용 때문이고, 겨울이면 깊은 땅속으로 기운을 갈무리하듯 DNA를 내재시킴은 陰(水·北·黑·腎臟·智)이 베푼 소산(所産)이다.
우리의 감정과 오장육부, 나아가 일상의 행동 양식까지 모두 이 오행의 순환 궤도 안에서 호흡하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 활기차게 움직이는 것은 양의 작용이요, 밤에 누워 깊은 숨을 쉬며 안정을 찾는 것은 음의 작용이다. 이처럼 오행과 음양은 우리의 밥상 위에 올라오는 오색 찬란한 음식의 조화이자, 삶을 대하는 태도의 지침이다.
이러한 음양오행의 철학이 가장 극적이고 엄숙하게 구현되는 현장이 바로 가정의례, 그중에서도 제례(祭禮)다. 제사상은 단순히 돌아가신 이에게 음식을 올리는 허례허식이 아니라, 산 자와 죽은 자가 우주의 질서 안에서 만나는 거룩한 통로이자 철학적 공간이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예절 방향은 엄격하게 반대로 설정된다. "사람이 죽으면 남녀의 음양 방향은 반대로 바뀐다"는 명제 아래, 제사상 방위의 원리가 정립된다. 우리가 제사상 앞에 서서 바라볼 때, 왼쪽(서쪽)이 할아버지의 자리요, 오른쪽(동쪽)이 할머니의 자리가 된다. 생전에는 남자가 동쪽(양의방향), 서쪽(음의방향)에 여자가 위치했으나, 저승의 질서 속에서는 음양의 기운이 역전되기 때문이다. 잔을 올릴 때도 왼쪽(서쪽)에 계신 할아버지께 먼저 잔을 드리는 것은, 조상님을 모시는 순서와 우주 기운의 흐름을 일치시키는 깊은 배려의 소산이다.
우리는 의례를 향할 때 예절의 방향과 자연의 방향은 전혀 다른 원칙이 적용됨을 알아야 한다. 제례에는 제사상이 차려진 쪽을 무조건 북쪽으로 간주하고, 제관이 선 방향이 남쪽이 된다. 이럴 경우 제관이 신위를 바라보았을 때 오른쪽이 동쪽(양의방향), 왼쪽이 서쪽(음의 방향)이 된다.
산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산소가 소재한 산줄기를 자연의 방향에 관계 없이 북쪽으로 간주한다. 이것 역시 산소를 바라보아 오른쪽을 동쪽(양의 방향), 왼쪽을 서쪽(음의 방향)으로 본다. 할아버지 묘와 할머니 묘가 쌍분일 경우 왼쪽 묘가 할아버지 묘이고, 오른쪽이 할머니 묘다. 사람은 죽음과 동시에 음양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과거의 事例를 보면 사람이 병들어 위급할 때 머리를 동쪽이나 남쪽으로 향하게 하고 병구원을 한다. 이는 양의 방향 생기를 받아 소생하라는 의미다. 그러다가 절명하면 머리를 서쪽이나 북쪽 방향으로 옮겨 눕혔다. 이는 이미 서쪽으로 갔기에 음양의 바뀜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산 사람의 경우 예절 방향은 부모가 앉은 자리나, 주례가 선 자리, 선생님이 강의하는 자리, 주빈(主賓)이 위치한 자리가 북쪽이다. 주빈(主賓)을 보았을 때 오른쪽이 동쪽이고 양의 방향이다. 결혼식 때 객석에서 보아 오른쪽에 신랑이 위치하고 왼쪽에 신부가 위치함은 음양의 방향 때문이다.
폐백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부모가 앉은 자리가 북쪽일 경우 아버지는 앞에서 보아 오른쪽(양의 방향) 어머니는 왼쪽(음의 방향)이고, 폐백을 드리는 신랑과 신부도 같은 방향에 선다. 아버지 앞에는 신랑, 어머니 앞에는 신부가 서는 것이 전통의 예법이다. 우리 영남 지방은 이 전통을 잘 고수하고 있다. 그런데 서울의 경우는 신랑을 서쪽에 세운다. 이는 서양 풍습에 따라 신랑과 신부를 세우기 때문이다. 과거 전례원에서 연수를 받을 때 교수님께서 이렇게 지적하며 힐책했다. 요즈음 결혼식장에서 신랑 신부가 서는 위치를 보면 영혼 결혼식 같은 생각이 든다고...
경북궁 근정전(勤政殿)앞 품계석(品階石) 위치에도 음양오행의 원리가 반영되어 있다.
근정전(勤政殿)을 앞에서 바라보는 기준으로 동쪽(오른쪽)에는 문관(동반)이, 서쪽(왼쪽)에는 무관(서반)이 정렬했는데 이 두 집단을 합쳐 '양반'이라 불렀다. 문관을 양(陽)의 방향, 무관을 음(陰)의 방향에 배치하여 은영중에 문관을 더 중시했다.
개인 한 사람에게도 예절의 동서남북이 있다. 개인의 북쪽 방향은 등이다. 등을 나타내는 등배(背)에 북녘 북 글자가 들어있다. 등이 북쪽이면 그 사람의 왼손 방향이 東이고 왼손이 陽이 된다. 자연히 오른손은 서쪽이 되고 陰이 된다. 절을 할 때 남자는 陽인 왼손으로 오른손을 잡고 여자는 반대이다.
상가에 조문갔을 때는 흉사이기에 공수의 위치가 반대이다. 제사는 길사이다. 이유인즉 자손이 있기에 제사를 지내기 때문이다, 제사의 공수는 평소와 같다.
또한 제사상의 제수 진설도 이런 원칙 적용되고 있음을 과거 기록에서 볼 수 있다.
율곡의 제의초(祭儀鈔), 성종조의 국조의례의(國朝五禮儀), 김장생의 가례집람(家禮輯覽), 도암 이재의 사례편람(四禮便覽)의 도해 그림을 요약하여 일반인들이 쉽게 외울 수 있는 숙어를 만들었는데 이를테면 좌반우갱(左飯右羹), 서포동해(西脯東醢) : 醢는 염장된 조기, 어동육서(魚東肉西), 두동미서(頭東尾西), 생동숙서(生東熟西)가 그것이다. 과일 진설법으로 조율리시(棗栗梨柿), 홍동백서(紅東白西)가 언급되고 있으나 옛 기록에는 제일 앞줄에 ‘果’자만 쓰여 있을 뿐이다.
위 東西나 左右의 방향은 제수를 진설하는 사람이 본 방향이다.
제례상 하나에도 오행의 방위와 음양의 기운이 정교한 질서 속에 숨 쉬고 있다.
지방(紙榜)에 적힌 '현고학생부군신위(顯考學生府君神位)'와 '현비유인본관신위(顯妣孺人本貫神位)'라는 글자 한 자 한 자에도, 벼슬길에 오르지 못했으나 학덕이 높았던 선비에 대한 존경(학생)과 내명부의 품계에서 유래한 아내에 대한 예우(유인)가 담겨 있다. 절을 올릴 때 산 사람의 배인 두 번(남성 2배, 여성 4배)을 올리는 이유 역시, 음양이 교차하는 저승의 법칙을 존중하는 예법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상가 등 흉사에서는 평상시 길사 때에 손을 맞잡는 공수법(拱手法)마저 남녀가 반대로 뒤바뀌어(남성 오른손이 위, 여성 왼손이 위), 슬픔과 이별의 상황 속에서도 우주의 이치를 잃지 않으려 했던 선조들의 눈물겨운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참고로 덧붙이면 장례식장 빈소(殯所)도 신위를 모신 방향이 북쪽이다. 남자 상주는 양(陽)이기에 오른쪽(동쪽)에 도열하여 문상객을 받고, 여자 상주는 음(陰)이기에 왼쪽(서쪽)에 도열하여 문상객을 받는다. 이것도 음양오행의 예(例)에 따른 의례다.
결국 전통 예절이란 겉치레의 형식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우주가 숨 쉬는 방식 그대로 내 몸을 움직이고, 자연의 순환 속에서 조상을 공경하며, 이웃과 조화를 이루어 살아가고자 했던 우리 선조들의 가장 우아하고 깊은 삶의 철학이었음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