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라, 그림책버스 5

[【패랭○l꽃】]

달려라, 그림책 버스 ⑤
잃고, 다시 얻다
  
이상희(시인/그림책 작가)

 시청 제출용으로 만든 사업계획서는 여러모로 요긴했다. 무엇보다도 나 자신을 위해 그림책버스의 공공(公共)적 의미가 정리되었고, 폐차를 기증 받기로 한 버스 회사를 비롯한 여러 업체와 단체 및 개인에게 후원 의사를 타진할 근거 자료가 되었다. 시청 문화체육과에 이어 버스회사와 원주 MBC 사장실에까지 사업계획서를 보냈다. 방송 원고 쓰던 시절의 담당 국장이 지난해에 이곳 사장으로 부임해 왔다는 소식을 듣고도 인사를 못하고 있던 터에 어차피 지역 언론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이라는 계산속에서 느닷없이 메일을 보내자니 살짝 얼굴이 붉어지긴 했다. 전화를 걸어 여의도에서 뵙곤 하던 아무개가 메일로 용건을 띄웠다고 하니 "어떻게 원주에 와 있느냐, 잠깐 들어와서 무슨 얘긴지 해보라"고 하는 통에 마감 닥친 원고 하나를 급히 끝내고 벌서는 심정으로 갔으나 뜻밖에 큰 도움을 받았다. 당장 도울 일을 묻길래 폐차 사용 문제로 원주 교육청에 협조문을 받아야 하는 일이 당면과제라고 했더니 곧바로 전화를 걸어 교육장과 통화를 하게 해주었다. 간략히 인사하고 곧바로 사업계획서를 보낼 테니 검토해보시고 교육 목적으로 폐차를 사용할 수 있도록 협조 공문을 시청으로 보내주십사 부탁했다. 전화를 끊고, 가슴 위에 놓여있던 바위덩이 하나를 치운 듯 개운해졌다고 감사를 드렸으나 모든 사안을 단숨에 처리할 수 있도록 시장을 뵙게끔 주선해주시겠다는 말씀에는 정중히 사양했다. 지름길로만 달려가다가는 차후에 그림책버스를 만들어갈 이들에게 제대로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없겠다 싶어서였다.        
 이 즈음 어머니그림책교실에선 마지막 순서인 "내가 만드는 그림책" 과정이 끝나 평생교육정보관 주최 합동 전시회에 나름대로 멋진 결과물을 선보였다. 그러자 지역방송사와 신문사에서 직접 그림책을 만든 어머니들을 격려하는 인터뷰와 취재가 이어졌고, 때마침 원주시 문화체육과에서도 토지문학공원 안에 부지가 마련될 듯하다는 반가운 소식이 날아든 중에 동아일보 김진경 기자가 정보관에서 진행하는 토요일 프로그램 "그림책버스"와 그림책버스 부지 등을 취재하러 왔다.
 사실 인터뷰 내용은 비슷비슷하다. 기자들에게 특별히 강조하는 점도 몇 가지 정해져 있다. "그림책버스"는 폐차를 재활용하고 지역사회인들의 협력과 후원 단체 개인의 힘이 바탕이 되는 최소 비용 도서관을 지향한다는 것, 그러나 내용은 그림책교실 회원 어머님들이 애써 골라 뽑은 세계 명작 그림책을 읽고 소개하는 최고를 지향한다는 것, 이를 위해 그림책교실 회원들은 일정 기간 어머니그림책교실 교육 과정을 이수하고 지속적으로 공부해야 한다는 것, 그림책버스 아이디어를 먼저 실현해서 전국을 순회하는 그림책버스 뚜뚜가 있으므로 "최초의 그림책버스"라는 표현을 사용해선 안 된다는 것, 그림책버스가 설립되고 원활히 운영되면 문화적 열세 지역인 소도시 농어촌에서 그림책버스를 세우려는 분들에게 설립 준비와 운영 경험의 노하우를 제공한다는 것 등이 그것이다.
  그림책교실회원들과 나는 프로그램이 어수선해지는 불편과 미안함을 감수하고 그림책버스 설립 준비를 널리 알리는 데 도움이 되리란 생각에서 애써 즐거운 마음으로 취재에 응하곤 했으나 때로는 어처구니없는 횡포를 당하기도 했다. 10여 개월 가까이 한 번도 빠짐없이 토요일마다 진행해온 프로그램을 방송사 녹화일정상 목요일로 당겨달라고 조르는 통에 할 수 없이 회원 어머님들 댁 아이들만 모아 별도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자니 당일 그 시간이 닥쳐서야 전화로 녹화 일정이 취소됐다고 통보해 오는가 하면, 기껏 인터뷰를 하고서는 녹음기 배터리가 떨어진 줄 몰랐으니 다시 시간을 내라 요청하기도 했다.
 사실은 기쁜 일이 더 많았다. 드디어 시청 문화체육과에서 부지를 확정했다고 연락해왔고  담당 과장 및 직원과 함께 답사에 나선 날엔 토지문학공원 관리소 바로 뒤쪽의 햇빛 잘 드는 돌담 쪽으로 그림책버스가 자리잡는 모습을 그려보면서 가슴이 뛰었다. 김서정 선생의 힘찬 독려로 엔솔로지 출간도 착착 진행되어갔다. 문학과지성사에 가서 엔솔로지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고, 뚜뚜 버스 조준영 선생이 우리 그림책버스를 후원하고 실물을 보이기 위해 원주에 오기로 했다. 마침 시청에서 세부 운영 계획서를 보내달라던 차여서 5월 2일 개관을 목표로 3월 20일 뚜뚜 방문 행사 등등을 넣어 월별 진행계획표를 세웠다. 실제 운영 계획을 짜보니 버스 내부 시설이나 운영 방법 등 여러 가지가 궁금해져서 2월 하순에는 내가 먼저 부천 중앙공원을 찾아 전화 통화만 했던 조준영 선생이랑 뚜뚜를 만났다.  
  봄 풀빛이 저만치 어른거린다 싶으면 어김없이 꽃샘바람이 한번 맵게 부는 법이다. 점차 모양을 잡아가던 그림책버스 일이 크게 일그러지는 일이 생겼다. 예정부지에다 폐차 앉히는 일을 진행하던 김종근 문화체육과 담당 직원이 태창운수에 절차와 일정 협의차 전화를 했더니 그새 연락이 없어서 기증할 폐차를 없앴다더란 것이다. 서운하고 분한 마음을 애써 가눈 채당장 버스회사에 전화를 걸어, 사업계획서 보내고 잘 봤느냐고 확인 전화한 게 불과 2주 전이었는데 어찌 된 일이냐 묻자 새로운 폐차가 4월 20일에나 한 대 나올 것 같으니 그때 보자는 심상한 목소리가 되돌아올 뿐이었다. 화를 가라앉히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지만 낙담이 되지는 않았다. "이 버스 회사가 좋은 일 할 기회를 잃었군" 하는 생각으로 마침표를 찍고 다시 시작하리라 마음을 다졌다. 그러자 잃은 버스가 곧 다시 와주었다. 
 3월, 문학과지성사 편집부에서 일찌감치 섭외된 일러스트레이터 한태희 선생과 김서정 선생과 함께 삽화 회의를 마치고 헤어진 다음 미리 약속된 그림책 회의 자리에 참석중인데 원주 시청 문화체육과에서 전화가 왔다. 버스 내부 장치에 대해 이것저것 묻는 양이 새 버스를 구한 듯한 눈치였으나 캐어묻지 않고, 나머지 약속을 위해 "김진 디자인"의 김진 실장을 찾아갔다. 뜻밖에 아이들과 그림책을 읽고 난 다음 독후활동할 때 쓸 종이를 제지회사에서 후원 받게 애써주겠다는 약속까지 얻어 의기충천해 있었기 때문일까, 밤 기차를 타고 돌아오는 내내 좋은 느낌이 들었다. 과연 그 다음 다음 날, 폐차장에서 직접 버스를 기증 받기로 했으니 가보자는 연락이 왔다. 이번에는 결코 잃어버리지 않으리란 결심으로 구석구석 폐차를 돌아보고 일일이 사진을 찍었다. 엔진 없는 채로 견인해 오는 문제를 고민하다가 돌아오는 길에 내처 공원에 들러선 버스 자리에 앉힐 때 걸림돌이 되는 구조물 제거 방안을 논의하고, 무료 견인해줄 카센터를 찾아 후원해 줄 것까지 약속 받았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