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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영동 딱새 블르스
거리에는 돈이 되는 쓰레기와 돈이 되지 않는 쓰레기로 양분되어 있었다. 돈이 안 되는 쓰레기는 눅눅한 비린내로 썩어갔지만 돈이 되는 쓰레기들은 반들반들 윤을 내면서 상큼한 향기를 쏟아내었다. 그랬다. 돈이 되는 쓰레기는 대개 썩지 않고 오래도록 보존되었으므로 일단 종이건 고철이건 모아놓는 게 상책이었다.
노끈으로 몇 묶음씩 고물상에 넘기고 ‘달고나’나 ‘삼립빵’ 한 조각을 떼어먹고 나머지 동전 몇 개는 아버지에게 바쳤다. 홀아비인 아버지는 일곱 살 지능의 지적 장애인이었지만 다행히 나와 기순이까지 모두 초등학교 성적은 좋은 편이었다. 어쨌든 나는 어린 날부터 물리적 생존에 눈을 떴었다. 만약 까마귀 양아치만 만나지 않았으면 넝마줍기로 더 오래 버텼을 텐데, 어느 날.
“일루 와 바라. 얼라야.”
원조 넝마에게 목덜미가 딱 잡히면서 종을 쳤다.
나(14세)보다 목 하나쯤 큰 놈이 새까만 손에 쥔 갈고리를 휙휙 흔들며 손가락을 까딱이는 중이다. 갈고리 끄트머리만 봐도 아랫도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도망쳐봤자 어차피 다음에 걸리면 깨질 게 뻔하므로 뾰족한 수가 없었으므로 어기적어기적 다가갔다. 머리통이 당장 고깃덩이처럼 너덜너덜 뜯어질 것 같았다.
“한번만 더 걸리면 이 갈고리로……알간?”
귀퉁배기 한 방 맞보기로 끝날 수도 있었는데.
‘각자 능력껏 줍는 거지. 썅칼. ’
분명히 속으로 삭힌 건데 입술에서 ‘썅칼’이란 소리가 툭 튀어나왔나 보다.
“뭣! 시발. 죽을라고 아주 빽을 쓰는구나.”
‘시발’이 아니라 ‘썅칼’이었는데, 라고 항의할 수 없었다. 오히려 눈을 흡 치켜떴다고 핵꿀밤 두 대를 더 맞으면서 정수리가 불룩 부어올랐다.
“눈 깔아. 눈깔을 빼서 당구장 쓰리쿠션으로 돌린다.”
나는 도저히 반항할 수 없었으므로.
‘빨리 나이를 먹어서 저런 놈들을 아작내야지. 아데메치한 놈, ‘10월 유신’도 반대하게 생긴 더러운 관상이야.’
복수의 다짐으로 물러선 다음 구두닦이로 방향을 틀었다. 두 살 더 먹은 친구 지상이(나와 키가 똑같음)가 점박이형에게 소개시켜 준 것이다. 오야지인 점박이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똘망똘망은 해보이는 데 오래 해먹겠나? 기집애처럼 생겨가지고. 잉.”
갸웃갸웃 했다. 그렇게 끼어든 게 어제 같은데 순식간에 6년 세월 캥거루밥을 먹게 된 것이다.
구두닦이들은 보통 오야지 하나에 딱새가 두셋, 찍새가 서넛씩 붙는다.
찍새, 딱새의 ‘새’는 짭새처럼 인칭을 나타내는 비속성 접미사이다. 오야지까지 졸개들의 돌림자 ‘새’를 사용하면 체통이 서지 못하므로 대신 ‘아버지’ ‘막리지’의 극존칭인 ‘지’를 붙이는 거라고 가르쳐 주었다. 동병상련의 패거리가 생기면서 내 환경이 완전히 달라졌다. 환영식 때는 점박이 형이, 사춘기 쫄다구들에게 막소주도 한 잔씩 따라주었다. 고추에 거웃이 날락말락한 우리는 최초로 ‘남영동 찍새로 한 몸이 되었다’는 생각으로 아주 잠깐 우쭐해졌다.
찍새는 주로 어린 쫄다구들이 맡는데 서너 명 정도가 각자 따로따로 흩어져서 다방이나 식당 같은 데를 훑으면서 손님을 찾아낸다. 구두를 얼마나 찍어오느냐에 따라 배당 몫이 달라지므로, 뭉치면 죽고 흩어져야 사는 게 찍새들의 철칙이다. 보통 걷어온 구두의 3분의 1 정도에 해당하는 돈을 떼어 준다. 네 명이서 열 개의 구두를 찍어오면 찍새들이 30프로씩 가져가 각자 나누고 70프로 중 딱새에게 떼주는 월급을 제외한 나머지를 오야지가 챙긴다.
딱새는 ‘닦는 사람’이란 뜻이다. 칫솔로 구두창 진흙이나 먼지를 털어내고 구두약을 칠하는 역할인데 경륜이 쌓이면 오야지로 올라가거나 중간에 따로 독립하기도 한다. 월급제로 보통 삼만 원 정도 (2012년 기준으로 100만 원 정도) 받는데 대개 스무 살이 넘으면 다른 구역을 찾아 오야지로 독립하려 한다. 나는 찍새 생활 1년 만에 딱새로 초고속 승급했고 3년 후에 독립된 구두박스를 가질 수 있었다.
광은 당연히 오야지가 낸다. 이는 고난도 기술의 상징성이자 권위의 표상이 된다. 딱새가 굵은 솔로 구두약을 듬성듬성 발라서 넘기면 오야지는 헝겊을 좌르르 돌리며 광내기 작업에 돌입하는 것이다. 그는 확실히 달랐다. 오야지가 뱉는 침은 끈적거리지 않고 물방울처럼 매끄르르 구르는 것이다. 오야지는 대우를 받는 만큼 딱새들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으므로 다른 구역과의 전쟁이 터지면 목숨을 걸고 사수해야 한다. 아령과 샌드백 치기의 주먹단련도 필수이고 여차하면 연장도 집어든다.
나는 구두를 닦으면서도 밤마다 책과 씨름했다. 헌 책방에서 산 참고서를 자정까지 손에서 떼지 않았고 일요일엔 시립도서관도 출입했다. 군면제 학력이라서 제도권 공부도 가능했지만 결정적으로 잘못 풀린 패가 있었으니.
첫 번째는 ‘흥부네 선물세트 제 발로 날려 차기’였다.
밑천 없이 일자리를 구할 수 있다는 게 밑바닥 인생의 장점이다. 구두닦이건 넝마주이건 몸으로 때우다 보면 푼돈이 쥐어지는 것이다. 구두닦이는 넝마주이와 달리 자기 패거리라는 소속감이 강했다. 그래봤자 손바닥 발바닥으로 마르고 닳도록 닦고 닦아도 세 식구 겨우 풀칠하는 정도였으니 열심히 일해서 부자가 되는 세상이 절대로 아님을 안다.
“공장가기 싫어. 요샌 여자라도 중학교까지는 나와야 한대.”
기순이만큼은 중학교는 물론 대학교까지 가르치고 싶었다. 돈을 모아 일단 여동생부터 가르치되 나도 같은 해에 대학에 입학하리라 마음만 먹어보았다.
'복권만 당첨되면 단박에 해결될 텐데.'
남몰래 복권을 사면서 일확천금을 노리기도 했다. 그렇게 5년 세월이 넘었는데 어느 날 기적이 일어났으니.
내 복권이 2등으로 당첨된 것이다. 보았다. 일간 스포츠의 고우영 연재만화 수호지 바로 아래 칸에 선명하게 박힌 내 복권번호를 분명히 보았다. 복권을 펴서 눈 비비고 다시 확인해도 틀림없는 내 번호였다.
1등 한 명은 삼천만 원이고 2등은 오백만 원짜리가 다섯 명인데.
그 다섯 명 중에 내가 딱 걸릴 줄은 하느님도 몰랐을 것이다. 그동안 복권에 날린 돈 총액인 오천 원의 1,000배가 넘는 행운이 하늘에서 호박덩굴처럼 쿵,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심장소리가 뱃고동처럼 두근두근 울리기도 처음이었다.
'일체 비밀로 해야 한다. 기순이만 빼놓고.'
복권을 구두통에 넣고 처음으로 기름 냄새 잘잘 풍기는 치킨도 한 마리 샀다. 날마다 건너던 한강다리 가로등이 갑자기 환하게 밝아졌다. 강물은 물안개를 뽀얗게 내뿜었고 교각 너머로 네온싸인도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다. 이 세상 모든 물상들이 나만을 축복해주니 그게 바로 천국이었다. 열두 시에 만나요 브라보콘 둘이서 만나요 브라보콘 살짝이 데이트를 해태 브라보콘.
방 두 칸짜리 전셋집으로 옮기고 빨리 학원 등록을 한 다음 검정고시를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 구두통도 나와 고락을 함께 했지만 이제 작별이다. 기회가 왔을 때 과감하게 실행해야 하므로.
"구두통아 안녕. 나중에 양복쟁이 신사가 되어 손님으로 만날 거야."
난간 위에 올려놓고 돌려차기로 날려버렸다. 그런데도 구두통이 강심을 향해 빙글빙글 돌다가 ‘풍덩’ 소리를 낼 때는 하마터면 현기증으로 쓰러질 뻔했다.
“아버지 오백만 원 짜리 복권이 당첨되었어요. 저는 내일 당장 학원에 정식으로 등록해서 공부를 시작할 거예요.”
아버지는 오로지 통닭 때문에 눈이 휘둥그레질 뿐이다. 영문을 모른 채 아들이 들고온 치킨다리를 허겁지겁 뜯으며 헤실베실 웃는 중이다. 여동생 기순이가 흥분을 감추며.
“구경이나 좀 하자.”
“비밀로 해야 한다. 일체.”
기순이의 입술에 손가락을 붙이고 눈을 부라렸다. 입방정 잘못 내다가 멀쩡한 쪽박도 깨지게 되므로 돌다리도 두들겨봐야 했으나.
“복권 좀 보자니까.”
“뻥이야, 한강에 던져 버렸지.”
그런 생뚱한 농담을 던지는 찰나 아차, 머리를 지찧고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복권을 구두통에 넣은 채 앞차기로 한강물에 날려버린 걸 깜빡한 것이다. 후닥탁 주머니란 주머니를 죄다 뒤졌으나 당연히 없다. (기순이는 지금도 오빠가 짜증나는 농담을 던졌던 줄만 안다.) 하루 동안에 천국과 지옥을 번갈아 경험하면서 심장이 더 강해지면서 이를 옹물고 구두닦이에 매진하게 되었지만.
두 번째인 ‘깨어진 첫 사랑’도 구두통 때문이다.
나는 구두를 닦으면서 일요일마다 남산도서관에 다니는 건강한 근로청소년이었고 숙희는 친구들 무더기에 섞여 중간고사를 준비하는 단발머리 여고생이었다. 일요일 오전 열한 시, 나는 ‘정통종합영어’를 보고 있었고 숙희는 ‘수1의 완성’을 푸는데 골몰하고 있었다. 아카시아꽃이 지루하게 늘어지던 봄날, 내가 먼저.
“콘사이스 좀 빌려주시겠어요.”
그 말이 불쑥 튀어나온 것도 운명이다.
소녀의 눈동자가 호수처럼 출렁이면서 창문 너머로 치렁치렁 매달렸던 아카시아 무더기가 하얀 꽃비처럼 우수수 떨어졌다. 만나서 행복했다. 시립도서관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솜사탕을 떼어먹다 보면 그렇게 둘만 남고 이 세상 모든 물상들이 사라지는 것이다. 빠빠빠바빠 보리테엔 젊음이 넘치는 거리마다 사랑과 우정이 만날 때는 보리텐 보리텐 우리의 맛, 난 정말 보리텐 사랑할 수밖에 없어.
숙희는 검정고시생을 사법고시생처럼 특별하게 취급했었는데 나는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 가부를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열일곱부터 열아홉 살까지 2년 동안 손 한번 잡지 않은 채 청순하게 사랑하리라 마음만 먹었다. 그러면서 왠지 검은 마(魔)가 끼어들면서 이 깨꽃 같은 행복이 와장창 깨어질 것 같은 가위눌림도 있긴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열아홉 오월 이후 플라토닉 첫 사랑이 된서리를 맞았으니.
경수형과 딱 한번 부닥친 게 벼랑 끝 추락의 이유인데.
이웃집 대학생 경수형은 제일 먼저 뒷모습이 기억난다. 한 마디로 차원이 달랐다. 넝마를 메고 가다가 그의 2층집 창틀 너머로 돌부처처럼 움직이지 않고 책과 씨름하는 뒷모습을 훔쳐보기도 했다. 두꺼운 책을 옆구리에 끼고 골목길 저쪽으로 꺾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가물가물 바라보면 가슴이 싸하게 황홀했다. 하지만 골목길에서 마주칠 때마다 창수형이 우연히 던지는.
“열심히 살아라.”
그 말이 싫었다. 열심히 사는 것보다 열심히 공부하고 싶었다. 그러면서 나도 검정고시를 통과하면 반드시 대학생이 되리라 주먹을 쥐곤 했다. 나도 두툼한 책을 옆구리에 끼고 생머리 여대생과 종소리 울리는 계단을 내려오고 싶었다. 우윳빛 살결 포동포동한 캠퍼스 친구들 틈에 섞여 사랑과 낭만에 젖고 싶은 것이다. 해변가에 사내아이 계집아이 둥그렇게 모여앉아 기타 치고 노래하는 풍경이 신기루로 떠오르면 황홀함으로 몸이 자르르 떨렸다.
“사람을 패더라도 학삐리는 건드리지 마라. 우리랑 수준도 다르지만 주먹잡이도 체통이 있지. 공부하는 애들을 건드리는 건 하빠리 주먹들 짓이다. 쪽팔리면 안 돼. 이.”
점박이형이 그렇게 대학생들을 특별히 봐주었다. 그게 아니었더라면 우리 구역에서 멋모르고 술 먹고 토악질하던 학삐리들을 벌써 여러 차례 손보았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골목길에서 어깨가 부딪쳐도 슬쩍 넘어가주었다.
주택은행 동자동 지점 출입문 옆에서 ‘나 홀로 딱새’로 독립한지 바야흐로 한 달차인데.
“창길이니?”
경수형의 말꼬리에 ‘-니’라는 끝말부터 호사스러웠다. 부동산 사업을 하는 부친이 재개발 사업 붐을 타고 돈 좀 만졌다는 소문도 들었던 차이다. 그는 지금 준비 중인 사법고시에서 이미 1차를 두 번 붙은 상태라, 동네 사람들 모두 내년에는 결정될 테니 일찌감치 돼지 잡을 준비나 하라며 성화 중이었다.
광을 내기 위해 구두코에 침 뱉는 순간.
뒷골이 땡기는 이유가 분명히 있었다. 나는 광내기 침을 뱉을 때 가끔씩 울컥 치밀어 오르곤 했었는데 그 장면에서 딱 만나버렸다. 반질반질한 구두코에 하필 경수형의 매끈한 얼굴이 비치면서 환하게 밝아질 때부터 불편했다.
“열심히 사는구나.”
위로하기 위해 다시 던져주는 ‘열심히’란 단어가 정말 싫었다. 나는 ‘열심히’를 의심하고 미워했다. 아무리 열심히 구두를 닦아도 날아간 복권을 찾을 수 없었고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경수형네 2층집을 가질 수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신고 있던 구두를 벗어주고 은행으로 들어가면서 동네 후배를 위한 측은지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 역시 슬리퍼를 가장 좋은 걸로 골라 내주면서 경수형의 발바닥 냄새를 지성으로 털어내었다. 고시생의 구두 속 발고랑내에는 책 냄새가 얼마나 섞여있을까, 흠흠 맡아도 보았다.
구두통 안에 솔은 두 종류인데.
칫솔까지 포함하면 세 가지로 늘어난다. 칫솔은 구두창 밑바닥의 흙을 터는데 사용하고 두꺼운 솔로 굵은 먼지를 처리하며 가느다란 솔로 나머지 먼지 알갱이까지 샅샅이 제거한다. 펜치는 구두에 박힌 못을 뽑는 도구이고 쇠뭉치는 구두창 발꿈치 안에 거꾸로 받쳐서 망치로 못을 칠 때 사용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헝겊을 쫘악 펴서 본격적으로 광을 내는 것이다.
구두약 뚜껑이 열리지 않아 뜻밖의 낭패를 볼 때가 있다.
경수형 구두를 끝낸 다음 은행 대리의 구두약을 바를 때도 그랬다. 꽉 낀 뚜껑이 아무리 잡아당기고 손톱으로 밀어도 움쩍도 않는 것이다. 펜치로 틈새를 찍어 밀어내다가 미끄러지는 바람에 손등이 벗겨지면서 벌겋게 피가 맺히는 순간이다. 통장 정리를 마친 경수형이 반들반들하게 닦여진 구두를 요모조모 아주 꼼꼼하게 훑어보더니.
“니는 이 계통으로 성공할 것 같다. 열심히 노력해라.”
점잖게 웃는다. 진심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진정성 서린 위로가 표창처럼 얼굴을 쿡쿡 찍어 누르는 것이다. 마침내 부글부글 끓이던 울화가 한꺼번에 팡 터져버렸다. 구두약을 팽개쳐버리자 ‘짱’ 소리와 함께 꽉 닫힌 뚜껑 틈새가 벌어지면서 사람들의 눈길이 우수수 쏟아지기 시작했다. 뜨악해하는 그를 노려보며 나는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이게 수단이지 목적이 아닌데요.”
울멍울멍 표창을 돌려주었다. 목적과 수단은 분명히 다른 것이다. 나는 언젠가 대학생이 되고 시인이 될 꿈으로 부풀어있는데, 열심히 구두를 닦아서 성공하란 소리가 모욕스러운 것이다. 구두닦이는 입에 풀칠만 해줄 뿐 장래의 전망이 전혀 없다. 오야지로 오륙년을 더 버티더라도 결국 밑바닥 왕초일 뿐이므로 나머지 인생은 분명히 바뀌어야 한다.
“나가시오. 당장.”
쨍강쨍강.
구두약 뚜껑이 홀라당 열리면서 바닥으로 끈적끈적한 액체가 시커멓게 쏟아졌다. 경수형의 얼굴이 흙빛으로 바랜 채 원망스럽게 한 마디 했다.
“너를 욕되게 한 게 아닌데……섭섭한 놈.”
“대학생이 될 거라구요. 지금도 주경야독 중이요.”
하얗게 질려 버린 경수형이 둥그렇게 벽을 쌓은 사람들 속으로 슬금슬금 뒷걸음질 친 게 끝이다. 어쨌든 그 소문이 은행 안으로 퍼지면서 여기저기 구두를 모아 챙겨주는 부메랑의 덕도 짭짤하게 챙기기도 했다. ‘섭섭한 놈’이란 표현이 경수형이 뱉을 수 있는 최대의 독설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훨씬 더 큰 아킬레스 사건은.
동순이 때문이다. 격분의 순간 구경꾼 틈에 숙희의 친구 동순이가 잠깐 비쳤다가 슬쩍 사라지면서, 딱새의 정체가 탄로난 것이다. 큰일 났다. 사라진 그림자를 찾아 재빨리 치달렸으나 엎질러진 물이 되었으니.
숨긴 것도 아니고, 단지 실토하지 않았을 뿐인데 하늘이 와르르 무너졌다. 나는 머리가 하얘진 채 앞을 가로막았고 동순이는 전신주를 껴안은 채 괜히 죄인처럼 웅크리는 중이다.
“내가 직접 얘기할 테니 먼저 얘기하지 마요. 절대로.”
으름장으로 당부했고, 동순이도 연신 손바닥 비비면서 그러마고 했다. 그러나 사랑의 반전의 드라마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중에 기반을 잡은 후로도 나는 어느 여자도 만난 적이 없다.)
착한 여자 숙희는, 차마 나를 내치지 못하고 그냥 친구 사이로 유지하자고 제안했다. 나는 어항처럼 흔들리는 머리를 반듯하게 세운 채 입술을 반달형으로 치켜 올렸을 뿐이다. 뽕짝풍 타협을 제시한 그미도 나의 ‘웃는 입술과 글썽이는 눈빛’을 읽었을 것이나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첫 사랑은 원래 깨지라고 생긴 것이다. 여자가 없을수록 홀가분해야 한다. ’
그러면서 밤 새도록 시를 썼다. 애인이 아닌 그냥 친구가 된 숙희를 향한 마지막 연시(戀詩)의 제목은 ‘투명화’인데.
하얀 호수 비춰준 샛별은 눈물일까
비바람에 깎일까 잠 못 이루네
두 줄까지는 썼는데 더 이상 이을 수가 없었다. 손톱 끝에 구두약이 새까맣게 낀 손가락으로 똑같은 문장만 수십 번 고쳐썼다. 그랬다. 봄바람과 아지랑이와 갈매기를 수십 번 넣었다가 결국은 싸그리 빼었다. 그녀도 샛별처럼 잠을 이루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그게 끝이다. 아픈 가슴을 글로 표현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처음 알았다.
동자동 오야지 강상철(24세)은.
곱슬머리에 옹니다. 레슬러 근육질에 경상도 사투리까지 곁들여서 누가 뭐래도 생김새만큼은 확실한 터프가이였다. 그는 광을 내는 중에도 김정호의 ‘하얀 나비’, 조영남의 ‘앞으로 봐도 아가씨가 최고’, 훠시스터즈의 ‘커피 한 잔 시켜놓고’ 등을 부르며 딩가딩가 싯다운 고고(sit dawn gogo) 동작으로 흔들곤 했다. 동자동 패들은 그의 양배추 헤어스타일 때문에 강배추 형이라고 불렀는데 남영동 패거리는 ‘형’자를 빼고 그냥 강배추라고 불렀다. 문제는 그가 생김새와 다르게 음습한 잔머리를 자주 굴렸다는 점이다. 가끔 똘마니 병규(16세)에게.
“촌놈 신사 하나 골라 뒷굽박기 씌워버리자.”
오다를 때려주면 병규는 가차없이 실행에 옮겼다. 그랬다. 강배추는 딱새에서 오야지로 승격되자마자 이따금 찍새들에게 ‘강짜배기 뒤축수선’을 연출시켜 난감한 상황을 만들곤 했다.
굽이 닳은 쪽을 잘라내고 새것을 갈아 접착제로 붙이고 자투리까지 반지르르 쳐낸 다음 헝겊으로 문지르면 멀쩡한 새 구두가 된다. 사람들은 앞창 바꾸기인 ‘야기쓰끼’보다 주로 뒷창 갈기인 ‘뎅까’를 주문하면서 구두 수명을 몇 년씩 연장하곤 했다. 강배추는 그걸 노렸다. 구두 닦는 것보다 열 배쯤 비싼 그 ‘어거지 뎅까’를 만드는 것이다.
병규가 선발대다. 일단 만만하게 생긴 손님 구두를 요리조리 돌려보며 ‘먹잇감이다’ 판단되면 오그르르 달려가 배꼽 인사를 올린 뒤.
“사장님 이거 뒷굽 수선하시죠? 완죠니 새 신발이 됩니당.”
구두만 닦을 심사였던 촌신사는 잠깐 멍 때리다가 아차, 당황해서 엉거주춤.
“아니야, 수선하지 마. 닦기만 할 거야.”
그럴수록 병규는 머리를 팽팽 굴린다. 환하게 웃으며.
“넵, 잘 알았습니다. 확실하게 수선하겠습니닷.”
다른 손님까지 죄다 들리도록 동문서답을 던져놓고 다음 말이 나오기 전에 냅다 줄행랑치는 것이다. 강배추는 이차구차 보고를 받은 다음.
“한 놈 걸렸다. 툭툭 털어서 쇳가루 좀 뽑아내자.”
뒤축부터 뚝 떼어내니, 구두닦이에서 구두수선공으로 변신하는 순간이다.
삼백 원짜리 구두닦이가 졸지에 삼사천 원짜리 구두수선으로 바뀌는 것이다. 완전히 새 구두를 만들어놓았으니 솔직히 손님 입장에서도 마음만 바꾸면 꼭 손해만은 아니지만 어차피 싸움은 터지게 되어있다.
자, 이제 병규가 시골 신사와 오픈게임을 벌일 시간이다. 망설임은 일체 거세한다. 아닌 게 아니라 ‘구두닦이 소년이 내 말을 잘못 알아들은 것 같은데’ 하며 불안해하는 손님 앞에 가서 구두를 척 돌려주며, 아주 당당하게.
“삼천 원 되겠습니다. 원래는 사천 원인데 특별 서비스 기간이므로 대폭 세일입니다. 아싸, 삐빱바 눌라. 우리 손님 구두가 바뀌니 완전히 영국 신사임당.”
“이 자식아, 내가 언제 구두 뒤축 갈으라고 했어?”
병규는 일부러 ‘아, 머여’하는 표정으로 눈을 둥그렇게 뜬 채 갸웃갸웃하는 척.
“싸-사장님이 해오라고 하셔서 제가 ‘넵, 잘해오겠습니다’하고 뛰어갔잖아요. 들으셨죠?”
“내가 언제 …… 그냥 구두만 닦으라고 했잖아.”
“신사분이 왜 그러세요? 귀가 포경인가요.”
“이런 고얀 놈이, 어른 앞에서 뭣, 포경.”
촌신사가 벌떡 일어나 멱살잡이로 늘어지는 타이밍에 강배추가 시불시불 등장하는 것이다. 일단 덩치로 기선제압을 하겠다는 듯 고릴라 가슴 쿵쿵 치며 촌신사 앞에 우뚝 선다. 곱슬머리에 옹니빨 그리고 문신과 근육이 혼재된 팔뚝이 금세 벽돌이라도 뽀갤 기세다. 얘기를 듣는 척하다가 상대방이 한 마디라도 실수하면 꼬투리 잡을 심사지만 반응이 마뜩지 않으면 강배추가 일찌감치 선수를 치기도 한다. 일부러 코딱지를 후비며.
‘그 자식 참.’
들릴락말락 욕설 미끼를 던지는 것이다. 가뜩이나 옴팍 쓴 바가지에 열이 받친 손님이.
“왜 나한테 욕이횻?”
욱, 반발하는 순간 낚시코를 확 잡아챈다.
“내가 언제 욕했어?”
“당신이 금방 내 앞에서 ‘그 자식 참’ 이라고 했잖소? 여기 나 말고 또 누가 있어?”
“나 혼자 해보는 소리야. 우리 찍새 꼬봉이 구두를 똑바로 걷어왔어야지. 고물짝 구두 지성껏 고쳐 샘삥 상품으로 창조해주고 이런 꼴을 당하니 화가 안 나냐구. 홧김에 혼잣말로 ‘그 자식’이라고 한 거야. 시헐. 민주주의 국가에서 혼자 하는 욕도 죄다 결재 맡은 다음에 시동 걸어야 하나? 엿 같네.”
싸움의 방향키를 엉뚱한 쪽으로 돌릴 즈음 다방 마담이나 다른 사람들이 우르르 뜯어말린다.
“이왕 고친 건데 되돌릴 수도 없잖아요. 아저씨가 참으세요. 삼촌도 이번엔 특별히 오백 원만 깎아주면 타협이 되겠네. 한 발씩 양보해야 흥정이 되지.”
마담의 중재로 마무리되기도 했다. 그렇게 상황이 종료되면 강배추는 병규에게 오백 원을 뚝 떼어 팁으로 주곤 했는데, 문제는 그 바가지 소문의 후유증이다. 언제부터였나, 구두수선 강매가 골목골목 소문나면서 손님들이 병규 앞에서는 아예 구두를 벗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손님이 가물어가면서 예전보다 훨씬 초조해진 강배추 패거리가 갈월동 경계를 넘어 남영동까지 침범했으니.
원래 갈월동 굴다리를 경계로 강배추네 동자동과 점박이네 남영동으로 구역이 나뉘어 있었다. 구역 침범은 절대 금기 사항이므로 상황이 터졌다 하면 즉각 선전포고가 된다. 하필 점박이형이 권투선수를 마감한 울화증의 다음날 일이 벌어진 것이다. 결국 강배추 형의 머리가 한 방에 움푹 패였으니, '꿩 잡는 게 매’다.
점박이형(23세)은 얼굴에 점이 없다.
본명이 ‘석전반’이라서 그냥 이름자를 변형시켜 점박이형이라고 불렀다. 그도 원래 주먹잡이 쪽이지만 본성이 착하다는 평을 듣는다. 특히 노량진에서 단 둘이 사는 할머니에게 꼬박꼬박 밥을 챙겨준 다음 출근하는 효자이기도 하다.
점박이 형은 스스로 삼류복서임을 인정했다. 스무 살 때부터 샌드백을 두들겼고 3라운드 짜리 오픈 게임을 여섯 번 치른 관록자인데도 그렇다. 챔피언을 목표로 헝그리를 감수하는 게 아니라 링에 오르는 스릴 자체를 즐기려 했었고 실제로 땀이 범벅이 되도록 샌드백을 두들겼지만 성적은 시답지 않았다.
골목 주먹과 링의 세계는 등급이 다른 것이다. 데뷔전 한 판만 이겼고 나머지 다섯 판을 스트레이트로 패했으며 한번도 TV에 나오지 못했으니, 홍수환이나 유제두를 꿈꾸기에는 물 자체가 다른 하류 복서다. 스피드에 비해 물주먹이라는 공론이었는데 모두 판정패인 걸 보면 그나마 맷집은 좋았던 셈이다. 그 역시 한계를 인정하면서 마지막 한 판을 벼르는 중이었다.
삼각지의 용상 체육관은 교실 두 칸 정도의 낡은 공간이었는데 주먹의 고수를 노리는 청소년들로 바글바글 땀이 튀었다. 주로 구두닦이, 중국집 배달원, 노가다 등 가난한 사람들이 고아원처럼 북적거렸지만 더러는 권투 전공으로 체육과 대학생으로 진학하려는 중산층 고등학생들도 있었다. 어느 날 점박이형이.
“이번에는 텔레비전에 나온대.”
벌겋게 상기된 표정으로 나타났었다. 그렇게 딱 한번 오픈 게임으로 방영된다는 소문으로 가슴을 설레게 했지만, 그게 글러브와의 마지막 작별이었다.
신인왕전 후보 밴텀급 16강전은 막장 복서끼리의 벼랑 끝 대결이었다.
홍코너의 38세 노장 자동차 정비소 아저씨는 3전3패로 전패의 기록이었고 청코너 23세의 구두닦이 석전반 선수는 6전1승5패로 그나마 1승 보유의 관록으로 링에 올랐으니, 피차간에 ‘늙은 꼬마 싸움’인 셈이다. 이기는 사람은 4전1승3패나 7전2승5패를 가져가는 것이고 지는 사람은 4전4패나 7전1승6패의 밑바닥 기록이 되는 것이다.
일단 생김새에서는 점박이 형이 유리해 보였다. 점박이형은 키가 크고 근육질이었는데 상대방은 그냥 땅딸한 중년의 아저씨였을 뿐이다. 어쨌든 양 선수 모두 한번만 밀리면 진짜 ‘영원한 아웃’이므로 양쪽 선수 모두 바득바득 전의를 다듬는 중이다. 문제는 홍코너 늙은 복서의 ‘때리고 껴안는’ 작전이 그럭저럭 먹혔다는 점이다.
세컨 아웃, 땡-.
종이 울렸다. 두 무명 복서가 사각의 복판에 서서 죽을 동 살 동 주먹을 휘둘렀다. 38세 복서는 땅땅한 체격답게 인파이터로 접근하려 했고 키가 한 뼘 이상 큰 점박이 형은 링 바깥쪽으로 빙빙 도는 아웃복서 전략이다. 둔탁한 펀치가 작렬하면서 코피가 터지고 또 그로기 상태로 로프에 기대기도 하면서 사활을 건 경기가 판정으로 끝이 났다. 날리는 주먹도 치열하고 맞는 아구통도 치열했지만, ‘늙은 땅딸보와 젊은 장다리의 대결’은 장다리의 패배로 마감되었다. 원투를 치며 밀고 들어와 재빨리 끌어안는 땅딸보 복서의 클린치 작전에 점박이 형이 번번이 감점을 당한 것이다.
결국 두 선수에게 4전1승3패와 7전1승6패의 새로운 캐리어를 만들어주었다. ‘자동차병원 대표’가 ‘구두병원 대표’를 이기고 마침내 ‘중년의 첫 승리’ 포효를 지르자 관중들이 우레와 같은 격려 함성을 보태주었다.
그날 밤 점박이형의 눈빛이 가장 예민하게 번들거렸는데.
“물주먹으론 진짜 권투를 못해먹겠다. 캥거루밥 먹다가 싸움판에선 망치로 찍어버리란 팔잔가 보다.”
씨익 웃는가 싶더니 금세 눈물을 뚝뚝 흘렸는데, 그 와중에도 돈을 아꼈다. 점박이형은 대전료 삼만 원을 톡 털어 할머니에게 주겠다며 서랍에 채워넣고 따로 동전을 꺼내더니 감자깡 한 봉지로 소주 네 병을 비웠다.
다음날 동자동 찍새들이 우리 구역에 슬쩍 침범한 게 사단이 되었으니.
점박이형은 원래 술은 싼 걸 마셨는데 담배는 고급을 피웠다. 그날도 300원짜리 거북선을 사기 위해 바깥에 나왔다가 희야 다방 계단에서 신사 한 명과 우연히 마주친 것이다. 주머니 속에서 백동전의 까끌까끌한 부분을 만지작거리는데 어럽쇼, 담배를 사려는 신사의 양말에 걸친 게 분명히 슬리퍼였다. 양복 정장에 슬리퍼를 신은 복장은 누군가에게 구두를 맡겼다는 표시인데.
‘…… 우리 애들이 구두를 가져온 적이 없는데’
동자동 패거리가 번쩍 떠오르며 와장창 터져버린 것이다. 남영동까지 침범해서 구두를 닦았으니 이런 선전포고는 절대로 피할 수가 없다. ‘울고싶은 놈 싸대기 때린’ 격이랄까. 그는 쉽게 싸움을 걸지는 않지만 일단 상황이 터지면 완전히 종칠 때까지 물불을 가리지 못하는 체질이다.
양쪽 패거리 딱새들은 ‘뽕 곱슬 대 자연산 곱슬’의 한 판 대결이 될 거라며 조마조마했다. 176센티 날렵한 꽃미남인 점박이형도 파머를 해서 곱슬머리처럼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너무 싱겁게 끝나버렸다. 한강 다리나 백사장 어디쯤에서 똘마니들이 둥그렇게 모인 가운데 영화 장면 같은 숑방숑방 맞장 대결이 펼쳐질 줄 예상했으나, 그 이전에 한 방에 끝장났다. 점박이형이 짜장면을 먹던 강배추의 뒤통수에 그대로 망치를 날려버린 것이다.
그때 나는 딱새 생활을 정리하고.
주택은행에서 ‘나 홀로 부스’의 아늑한 독립 영업소를 이루는 중이었다. 그런데 점박이형이 구두박스에 불쑥 들어오더니 무표정하게.
“창길아, 망치.”
대답도 듣지 않고 구두통의 망치를 꺼내들고 튀어나가는 것이다. 이상하다. 눈빛이 뒤집어졌다는 생각도 얼핏 들긴 했으나 구두가 세 켤레나 밀린 바쁜 상황인지라 붙잡을 생각은 할 수 없었다. 그랬다. 너무 순식간에 끝난 일이라 정말 아무 겨를이 없었다. 불과 십 분 뒤에 나타난 점박이 형에게 피 묻은 망치를 돌려받고도 나는 그냥 구두 닦는 일에만 몰입했을 뿐이다. 곧바로 경찰들이 출두한 다음에야 강배추의 두개골이 손톱만큼 패었다는 걸 알게 되었는데.
문제는 경찰들이 점박이형을 끌고 가기 위해 장발족 머리를 당기면서 또 엉뚱하게 형량이 높아진 것이다.
“강배추 새끼가 잘못한 건데 왜 나만 건드려.”
그러거나 말거나 백곰 형사들이 팔을 비틀며 바닥에 찍어누르자 욱하는 마음에.
“남의 구역을 침범했으니 삼팔선 넘은 김일성보다 더 나쁜 새끼야.”
그 말 한 방에 ‘김밥 옆구리 터지듯’ 막걸리 보안법이 추가된 것이다. 경찰들이 있는 자리에서 감히 ‘김일성보다 나쁜 놈’ 운운한 게 갈고리가 되었다. 북괴의 학정을 겪지 못한 사람들에게 북괴는 대한민국보다 나은 행정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게 된 것이며 그곳에서 살아보겠다는 의사도 내포된 것이어서 반국가 단체를 이롭게 하는 이적행위가 된다는 것이다. 나는 그때까지 전혀 몰랐던 더 무서운 사슬이 세상을 묶고 있음을 새롭게 알면서 입을 따악 벌려버렸다.
그래도 점박이형은 의연했다. 면회장 철창 너머로 태연한 표정을 지으면서 오야지의 품격을 지키려했던 것 같다.
“맨 땅에 헤딩은 예나 거기나 마찬가지니 쫄 것 없다. 한 달에 두 번 노량진 할머니 좀 챙겨줘라. 그 대신.”
그렇게 나에게 남영동을 통째로 맡기는 바람에 하마터면 눈물이 쏟아질 뻔했다. 이제 점박이형의 구두박스에서 여섯 명의 쫄다구들을 건사해야 한다. 대학 진학의 꿈이나 막걸리 보안법의 고포는 당분간 구두 통에 숨겨놓고 본격적으로 똘마니들을 보호하고 영역을 지켜내야 한다. 오랜 가뭄이 끝나고 태풍경보가 들이치는 진부한 칠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