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하다하다 못해서 결국 이렇게 올립니다.
김 총무님, 미안합니다.
69, 62, 57
사실 키는 165가 채 안되는데 몸무게는 69가 넘었다. 사십대를 지나면서 슬그머니 나도 모르게 비만이 되고 말았다. 그랬는데, 1년 만에 30년의 세월을 거슬러 20대 초반의 몸매로 돌아갔다. 작년 4월에 69였는데 10월에는 62로, 올 6월에는 드디어 57까지 몸무게가 줄었다. 이만하면 다이어트에 대성공이다. 이전에도 뱃살을 줄여 보려고 나름 노력했는데, 효과를 못 보다가 1년 사이에 엄청난 되돌림이 일어났다. 재작년까지는 바지 치수를 늘이려고 세탁소 출입을 했는데, 요즘은 다시 줄이느라고 바쁘다. 35인치에 가까웠던 허리 치수가 이제 32인치 아래로 줄었으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넉넉하게 허리를 감쌌던 뱃살이 말끔히 사라진 비결은 암 수술이다. 처음 암 진단을 받았을 때는 착잡했다. 터무니없는 낙관정신이 발휘되어 무조건 잘 될 거라 여유를 부렸지만, 한 편으로는 이런저런 계산을 하기도 했다. 내가 스물넷 되던 해에 아버지가 뜻밖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뜨셨는데, 큰 아이가 이제 겨우 열아홉이라 아직은 너무 이른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간 의사선생님의 일정에 의해 약물 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4개월 동안 받았는데, 어려움도 견딜만했고 치료 효과가 너무 좋았다. 4월초에 주치의선생님이 상당히 심한 3기라고 진단했는데, 정말 신기할 정도로 호전되어 생활에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대변도 잘 보고 운동도 꾸준히 하면서 하고 싶은 일은 다했다. 평소에 약을 멀리해온 것이 이런 때에 약발을 받는 구나 여겼다. 오히려 수술날짜가 다가오는 것이 부담스러웠고 이렇게 그냥 지내도 좋은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술을 받지 않아도 암을 극복할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이런저런 고민을 했지만, 주치의 선생님과 상의한 후에 결국은 수술을 받기로 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과정인 수술을 망설인 까닭은 일단 수술을 받으면 평생 또는 상당한 기간 동안 배변주머니를 착용해야 한다는 것 때문이었다. 유홍준 선생은 ‘아는 만큼 보인다’고 말했지만 내 경험으로는 겪은 만큼 보이는 것 같다. 내가 암을 겪으면서는 암과 연관된 모든 일이 예민하게 포착되었다. 작년 여름 우연히 TV에서 대장암 수술을 받은 어떤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보았다. 40대 초반에 대장암 수술을 받고 평생 배변 주머니 신세를 지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좌절감에다 적응도 안 되어서 죽고 싶은 마음 뿐 이다가 몇 년 간의 어려운 고비를 넘고 이제는 마을회관에서 요가 강사를 하며 제2의 인생을 즐겁게 20년 가까이 살아왔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나는 어떻게 될까?
작년 10월, 추석이 지나자마자 입원하여 이틀 후에 수술을 받았고 배변 주머니와 함께 하는 나날이 시작되었다. 3주를 머물다가 퇴원을 하니 몸무게가 62가 되었다. 대장을 45센티 이상 잘라냈으니 그 무게만도 상당했을 것이다. 몸은 날씬해졌지만 고난은 시작되었다. 아무래도 몸에 익지 않다보니 배변주머니 관리가 불편했다. 자주 비워주어야 하기도 했지만 그 부위가 따가우면서 아플 때가 많았다. 다시 항암치료를 받느라 입, 퇴원을 되풀이하면서도 마음은 배변주머니를 제거할 복원 수술 날짜만 손꼽았다. 수술 전에는 항암 치료를 별로 어렵다 느끼지 않았는데, 웬걸 이번에는 4박5일로 입원할 때마다 지루하고 메스껍고 식욕감퇴로 고생했다. 입원을 12회나 해야 한다는 말에, 먹는 약으로 바꿔보려 했더니 약은 보험 혜택이 되지 않아 1회에 60만 원 정도를 부담해야 해서 포기하고 말았다. 어찌 되었건 6개월이 지나서 복원 수술을 받을 날짜가 다가왔다. 그런데 담당간호사가 복원 수술 받고나면 한동안은 ‘왜 내가 이 수술을 받았지?’하면서 후회한다는 말이 기억났다.
주치의 말씀대로 수술은 비교적 간단하게 끝났다. 통증도 훨씬 가벼워 무통주사 없이도 견딜만했다. 먼저는 세로로 35센티 정도의 자국이 남았는데, 이번에는 가로로 7센티 정도였다. 회복도 빨라서 열흘 만에 돌아왔다. 그런데 간호사가 알려준 것처럼 배변주머니를 달고 있을 때 보다 훨씬 어려운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건 뭐 도대체 맘 편히 앉아 있을 시간이 없었다. 입과 위의 기능은 지극히 정상인데 오로지 장의 기능만 부실해서 소화만 되면 항문으로 직행하는 것이었다. 먹는 것은 한 번에 먹었는데 나오는 건 한 번이 아니었다. 찌질 찌질 나오고 또 나왔다. 끊임없이 나왔다. 24 시간 중에 화장실에서 머무는 시간이 제일 많았다. 대장을 대부분 잘라냈으니 도대체 변을 저장을 못하는 것이었다. 들어가면 나오니 이제는 먹는 일이 부담스러워졌다. 화장실 가는 걸 줄여보려고 하루 식사를 두 끼로 줄였다. 물도 마시지 않게 되었고 정 힘들면 한두 모금 목이나 적실 따름이었다. 늘 배가 고팠고 목이 말랐다. 고민 끝에 생각한 게 오이였다. 시원한 오이가 갈증을 푸는데 큰 도움이 되었고 배고픔도 적당히 달래주었다. 우연히 지난달에 몸무게를 달아 보았다. 4월에 퇴원하고서도 분명히 62 정도였는데 눈금이 57에서 서있었다. 나도 적잖이 놀랐다. 본의 아니게 20 초반의 몸무게로 돌아갔다.
누구나 어려운 시절이 있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도 있다. 미래에는 좋아지겠지 하면서 오늘의 어려움을 견딘다. 경험자들의 말대로 1,2년 지나면 나도 지금 보다는 많이 좋아질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 하면서 지금의 어려움을 고통스럽게 받아들이는 자세가 바람직하지 않을 수도 있다. 문득 30년쯤 전에 읽었던 정현종 시인의 ‘고통의 축제’라는 시가 생각났다. 그래 마음먹기 따라 고통으로 축제를 할 수도 있겠지. 오래 뜸 들였던 이 글을 오늘 몰아서 쓰는데 날씨가 참 변덕스럽다. 소나기가 갑작스레 내려 창문을 닫으니 바로 햇빛이 나며 비가 그친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려 다시 연다. 잠시 후에 다시 빗소리가 나서 창문을 닫는다. 이 짓을 스무 차례는 되풀이 한 것 같다. 처음 겪는 특이한 날씨이다. 지금은 햇빛을 받으면서 소나기가 내리고 있다. 비도 좋고 햇빛도 좋다. 두 가지를 다 즐기려한다. 거품이 피어나는 시원한 맥주 한 잔 마셔도 좋을 그 날을 기다리면서 오늘을 즐겨보겠다. 그나저나 우선 화장실부터 빨리 가야한다. 급하다.
엄기영에게 보내는 편지
1. 그는 누구인가?
- 본인의 홈페이지에서
* 1951.8.5 강원도 인제 출생
(위키백과에는 충북 충주 출생으로 표기됨)
* 1962~1969 춘천중, 춘천고 입학 및 졸업
* 1970 서울대 사회학과 입학
* 1974 문화방송 보도국입사
* 1985-1988 MBC 파리 특파원 활동
* 1989~1996 9시 뉴스데스크 앵커
* 2008.3~2010.2 보도국장 등을 거쳐 MBC 대표이사 사장
* 2005.5 제1회 참언론인 대상 앵커부문(언론인연합회)
* 2007.2 서울대 언론인 대상(서울대학교)
- 위키백과에서
* 2011년 4월 엄기영의 신고 되지 않은 선거운동원들이 강원도지사 재보궐선거에서 신고되지 않은 건물에서 선거 활동한 것이 밝혀졌다. 이들은 엄기영 후보 지지를 부탁하는 문자메시지와 전화 운동을 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현재까지 드러난 위법 사실만 보더라도 공직선거법 제89조 유사선거사무소 설치 금지 조항을 분명히 위반한 것으로 보고 있으나, 엄기영은 연관성을 부인했다.
* 2010년 6.2지방선거에서 이광재의원이 강원도지사에 당선됨에따라 그의 지역구였던 태백, 영월, 정선, 평창 지역구가 공석 상태가 되면서,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엄 전 사장을 7.28 보궐 선거에 앞서 공천에 영입하려하였으나, 불참의사를 밝혔다. 다만 엄 전 사장은 7월 25일에 철원, 화천, 양구, 인제 지역구에 출마한 한나라당 한기호 후보의 양구연락사무소를 방문하여 한 후보를 격려하였다. 이어 엄 전 사장은 강원도 정선군으로 가서 태백, 영월, 정선, 평창지역구에 출마한 한나라당 염동열 후보를 방문, 염 후보와 저녁식사를 함께하며 염 후보를 격려하여 주목을 받았다. 일각에서는 이광재 강원도지사가 직무정지 처분을 받은 상태인데, 대법원에서 당선 무효로 확정되면 한나라당 후보로 보궐선거에 출마할 것이란 시각도 있지만, 자신은 이를 부인했다. 다만 엄 전 사장은 소속 정당이 중요한 게 아니며, 자신은 단지 고향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입장만 밝혔다. 이러한 행보에 대해 민주당은 민감한 시기에 한나라당 후보들의 사무실을 방문한데에 다소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신경민 전 MBC 뉴스데스크 앵커는 7월 27일에 자신의 트위터에 엄 전 사장이 아무 생각이 없거나 복잡한 행보일 수 있다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조갑제는 한나라당의 엄기영 영입설에 대해 "MBC는 2008년에 터무니없는 광우병 선동으로 국민을 내몰아 3개월 동안 대한민국의 심장부를 무법천지로 만든 원흉이다. 이런 정권이라면 표가 된다면 한상렬도 영입할 것이다. 창녀의 윤리도 없다."고 비난했다.
- 조선일보(2011.3.19), 한국일보(20011.4.27, 3.08) 등에서
엄기영<사진> 전(前) MBC 사장이 사퇴 이후 지난 11개월 동안 MBC로부터 매달 1000만원의 월급과 150만원의 활동비, 에쿠스 차량, 운전기사 등을 지원받아오다, 이달 초 강원도지사 출마설이 나오면서 차량을 반납한 것으로 확인됐다. 그동안 받았던 월급과 활동비는 반납하지 않았다. 엄 전 사장은 김재철 MBC 사장의 자문 역할을 하는 명분으로 지원을 받았다. MBC 전직 사장 중 이런 예우를 받은 것은 엄 전 사장이 처음이다. MBC의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의 한 이사는 18일 "김재철 사장이 전직 사장을 예우하겠다고 보고한 후, 이런 지원을 한 걸로 안다"고 말했다. 이 이사는 "엄 전 사장이 정치적 행보를 한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MBC 경영진이 엄 전 사장과 상의해 지원을 끊었다"고 말했다.
MBC의 이진숙 홍보국장은 "사장은 고문·자문위원 등을 둘 수 있다는 회사 규정에 따라, 엄 전 사장에게 자문 역할을 맡긴 것"이라고 말했다.
- 세상을 보는 다른 눈 "뷰스앤뉴스"(2011.3.8)에서
신경민 "엄기영은 옳은 일에 앞장 선 적 없다"
"그는 지독한 망설임과 속내 감추기로 '엄 햄릿' '엄큼이'라 불렸다"
신경민 MBC 논설위원이 8일 작심하고 엄기영 전 MBC사장을 융단폭격하고 나섰다.
신경민 위원은 앞서 엄 전 사장의 한나라당 출마설이 나돌 때만 해도 "원래 그렇거든요"라는 짤막한 멘트만 남기고 더 이상 구체적 언급을 피했다. 신 위원은 그러나 8일 <기자협회보>에 기고한 글을 통해 정치권의 엄기영 영입 논란을 지적한 뒤, "그러나 함께 일해온 MBC의 선·후배들은 당혹스럽지만 혼란스럽진 않다. 이런 미래를 예견했기 때문"이라며 포문을 열기 시작했다.
그는 "엄기영씨가 화려한 장수와 출세를 누린 이유는 많다. 수려한 외모와 드문 미성으로 남녀노소에게 파고들었고 실질적으로는 권력을 포함해 누구에게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아 적을 만들지 않았다. 그런 탓에 그는 민주화 이후 13년 동안 국민과 호흡하면서 앵커의 이미지를 주었지만 의미 있는 말을 선물하지 못했다"며 "굳이 어록을 들자면 '어처구니가 없습니다'가 거의 유일하다. 모진 소리를 하지 못하는 좋은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이어 "이런 점은 엄기영의 천성에서 비롯한다. 속마음을 절대로 끝까지 내놓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동조했다. 그래서 나쁜 짓에 앞장서지 못했지만 옳은 일에 앞장서지도 않았다. 종국에는 올바르고 바람직한 결정보다는 당시 유리하다고 여겨지는 결론을 택했다"며 "지독한 망설임과 속내 감추기로 ‘엄 햄릿’ ‘엄큼이’라고 불리었다"며 엄 전 사장의 별명을 소개하기도 했다.
그는 더 나아가 "앵커 전후해서 엄기영은 회사 내외의 권력을 따랐고 사장 이후에는 일관되게 자리 지키기에 유리한 쪽을 택했다"며 "피디수첩 방송에 대한 즉각 사과, 앵커와 백분토론 손석희 교수의 교체 등으로 분명히 나타났다"며 엄 전 사장의 사장 때 행보를 상기시켰다.
그는 또 "이해하지 못할 대목은 2010년 2월 방문진과의 불화 끝에 엄 사장이 퇴임하던 날이었다. 회사현관에서 농성 중이던 노조 집행부에게 손 하트를 만들면서 회사미래를 당부했다"며 "선후배들은 지금도 이 제스처가 즉흥적이었는지, 의도적이었는지 궁금하게 여긴다. 다만 이 제스처가 당시 그에게 유리했을 것으로 본다"고 꼬집기도 했다.
그는 사장 퇴임후 행보에 대해서도 "정치입문 과정에서도 엄기영씨는 망설이는 듯하면서 유리한 쪽으로 행보를 취했다"며 "지방선거 이전에는 당선 가능성이 희박한데다가 성향에 맞지 않는 야당의 출마제의를 언론인으로 남겠다면서 거부했다"며 엄 전 사장이 민주당 영입 제의를 거부했을 때 발언을 상기시켰다.
그는 이어 "(그러나) 야당 도지사의 정치생명이 시한부에 들어서자 재빨리 강원도로 주민등록을 옮겼고 정치입문이 분명한 상황에서 이를 부인했다"며 "이미지만 아는 사람들은 다시 인식의 혼란을 겪었지만 그 나름으로 일관된 행보였다"고 힐난했다.
그는 결론적으로 "그의 특이한 사례에서 우리는 이미지와 실체가 도저히 만날 수 없는 간극을 본다"며 "내실을 갖지 못하는 이미지를 몇 십 년 묵히거나 그럴듯하게 포장해도 이미지일 뿐 실체가 될 수 없다"며 엄 전 사장이 '이미지 덩어리' 뿐임을 강조했다.
그는 "그런 점에서 이번 강원도 선거에서 이미지와 실체 중 어느 쪽이, 얼마나, 어떻게 지배할지 언론인으로서 궁금하다"며 강원도민의 선택에 비상한 관심을 기울이며 "선거 과정과 그 이후 엄기영과 강원도 그리고 우리 정치와 언론에 줄 영향도 궁금하다"고 덧붙였다.
2. 그에게 보내는 편지
엄선생,
오래 전부터 이 날을 기다려왔소이다.
진작부터 인사를 드리고 싶었는데
연평도에 구제역에 일본 지진까지
숨 가쁜 일이 너무 많아 이리 늦었습니다.
너그러이 받아 주시고 또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당신은 정말 잘 떨어졌습니다.
강원도를 위하여
자라나는 아이들을 위하여
또, 길이 전해질 우리 역사를 위하여
당신은 정말 잘 떨어진 겁니다.
바바리코트 깃을 올리고
에펠탑을 배경으로 9시뉴스에 등장하던
파리특파원 시절의 당신은
시골 중학교 선생으로 웅크려 살던 나에게는
부럽고 달콤한 로망이었습니다.
차마 털어놓기 부끄럽고 낯 뜨겁지만
아, 나도 저런 거 한 번 하고 싶은데 하면서
꿀떡 침을 삼키며 부러워했소이다.
당신은 아주 오래 9시 뉴스 앵커를 하다가
보도국장을 거쳐 드디어 사장 자리까지 올랐고
정권과의 불화로 퇴진 압력에 시달리는 것으로 비쳐졌는데
아마 그 때가 당신 인생의 정점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돌이켜보면 정말 아찔한 일이었습니다.
불법 콜센터에서 담요를 뒤집어쓰고 끌려나오는
일당 5만원에 혹한 아줌마들의 처연한 사진이 아니었다면
당신의 그 어처구니없는 쇼는
조금 더 진하고 독하게 진행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름다운 목소리 뒤에 숨어있는 거짓 미소가
강원도를 주무르고 대한민국을 희롱하면서
3년은 더 찬란하게 빛났을 겁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자신도 모르게 어디엔가 남아있던
희미한 양심 하나가 그만 처절하게 터져 나오면서
역사와 정의를 위하여
우리에게 담요를 뒤집어쓴 콜센터를 보여준 것입니다.
엄선생,
당신은 정말
살신성인의 자세로 자폭해 버린 거지요?
그렇지요?
*** 지난 번 정동기 때도 그랬지만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정상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을 희롱하며 공정사회를 좀 먹는 이른 바 사회지도층 인사를 기억하며 내 나름대로 역사를 기록하기 위함이지 한 개인에 대한 부러움이나 미움 또는 질투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둔다. 지금 같은 정치문화에서는 선거는 좋은 후보를 뽑는 경우보다는 덜 나쁜 후보를 뽑아야 하는 경우가 많다. 어찌되었든 강원도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말씀 드리고 싶다. 흐뭇한 마음으로 이 시를 쓸 수 있게 되어서......
내 생애 가장 아찔했던
거친 바다에서 배를 탄 것도 아니고, 험한 전쟁터를 누비지도 않았지만 나에게도 너무나 아찔해서 잊히지 않는 순간들이 있다. 우선 가장 최근의 치명적인 사건부터 시작해본다.
2년 전 요맘때 일이었다. 그해 4월초 대장암 진단을 받고 격주로 항암치료를 받고 있었다. 영양제와 각종 주사약이 4박5일 동안 구석구석 돌고 나면, 메스껍고 입맛이 없고 가끔 구역질도 났다. 그런데 정작 더 불편한 일은 퇴원 한 후에 사나흘씩 설사를 매우 심하게 하는 것이었다. 변비로 고생하는 환자도 꽤 많은 모양이던데, 내 경우에는 물만 마시면 경부고속도로 달리듯 쭉 내려갔다. 나중에는 약을 처방받기도 했지만, 어쨌건 며칠 동안은 초 긴급 상황이 자주 발생해서 아예 외출을 삼가는 것이 상책이었다. 나는 암 발생부위가 항문에 매우 가까이 있어서 변과 관련해서 웃을 수 없는 난처한 일이 기왕에도 몇 차례 있던 터였다.
하지만, 사람 사는 일이 늘 내 뜻대로 되는가? 네 차례의 항암치료가 끝나고 사흘째 되는 날, 피할 수 없는 약속이 있어 천안 터미널 근처에 가게 되었다. 미리미리 수분 섭취를 자제하고, 최대한 사전조치를 취한 후에 천안으로 나갔다. 차를 내리니 약속장소까지는 200m 정도, 시간으로는 3, 4분정도 거리였다. 다행히 난감한 사태는 일어날 것 같지 않은 분위기였다.
그런데 차안에서 잔뜩 긴장한 상태로 가만히 앉아있을 때는 괜찮더니 2,30m를 걸으면서 팔다리를 앞뒤로 흔들게 되니 자연스레 복부에도 진동이 전해지고 상황은 돌변하기 시작했다. 아랫배가 싸르르 하더니 도무지 통제할 수 없는..... 큰 일 났다. 저녁 7시경,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대로에서 멀쩡한 남자가 정장을 입고 똥을 싸게 생겼다. 이 일을 어찌할 것인가? 약속한 곳까지 간다는 것이 이미 불가능하다는 걸 내 몸은 잘 알았다. 최단거리에 있는 화장실을 부리나케 찾으면서 머릿속은 하얗게 변했다. 미용실과 피자집, 그리고 생맥주 집이 보였다. 그래도 생맥주 집이 제일 여건이 좋을 듯해서 그리로 향했다. 2층인지라 목표지점까지는 30m 정도. 간신히 참고서 계단을 올라가 종업원의 인사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짜고짜 화장실부터 찾았다. 예상했던 대로 맥줏집 화장실은 찾기 쉬웠고 시설은 풍요로웠다.
“휴우, 이젠 살았다” 하며 노크를 하는 순간, 먼저 자리 잡은 부지런한 분이 있었다. “야, 빨리 나와!” 말도 못하고 옆집을 두드렸지만 거기도 이미 먼저 들어선 또 다른 손님이 있었다. “아이고, 화장실 앞에서 난리가 나는구나. 아니, 사내자식들이 초저녁부터 뭘 먹었기에” 멱살을 잡고 끌어내든지 아니면 사정을 하고서 합석이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정말 어찌해야 옳으냐?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대략 10초나 지났을까? 더 버티다가는 댐이 터질 지경이었다. 아니 터지는 중이었다. 남자 칸을 나와서 무조건 여자 칸으로 들어갔다. 막 손을 씻던 여자가 이게 무슨 일이냐며 비명을 지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노크를 한다. 이쪽도 분주하긴 마찬가지여서 첫째 칸, 둘째 칸은 이미 업무를 보고 있었고 천만다행으로 마지막 칸이 노크에 응답이 없었다.
아이고. 한 많은 이 목숨 아직 죽을 때는 아니구나. 만약에 남은 이 한 칸마저도 사용 중이었다면 나는 어찌 되었을까? 아마 그 아름다운 정경이 옛날 같았으면 선데이 서울에 나왔을 것이고, 요즘이라면 인터넷에 3박 4일은 떴을지도 모르겠다. 최악의 비극은 간신히 면했지만, 바지를 내리는 순간 댐은 이미 방류를 시작하고 있었다. 무언가 뜨뜻한 국물이 조금 흘러나왔다. 하지만, 나도 이제는 어지간히 세상 경륜을 쌓은 자랑스러운 58 개띠! 이 정도 일로 좌절하거나 인생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변기에 앉아 본격적으로 물꼬를 터서 흘려보내고 심호흡을 하면서 난국을 헤쳐 갈 최선의 방책을 생각했다. 방류를 완전히 마치고 조심조심 바지를 벗어 고리에 걸었다. 그런 후에 가능한 한 소리를 낮추어 성실하게 수습을 했다.
모든 과정을 세세하게 묘사하는 것은 너무 비장한 기분이 들 것 같아 그 다음은 상상에 맡긴다. 바지를 도로 입고 면밀하게 바깥 동정을 살피다가 아무도 없을 때 여자 화장실을 무사히 빠져 나왔다. 비명소리는 한 번으로 족했으며 체류 시간은 20분 정도였다. 종업원 두어 명이 조금 이상하다는 눈길을 보냈지만, 그래도 깔끔한 정장을 입은 지라 변태나 범죄자로 여기지는 않았다.
태연하게 맥줏집을 나오면서 나중에 형편이 호전되면 꼭 다시 와 가장 비싼 메뉴를 택해 반드시 은혜를 갚으리라 다짐했다. 품위유지에 큰 문제는 없었는지라 약속시간에 꽤 늦기는 했어도 미리 문자를 보내 양해를 구하고 업무를 잘 마쳤다. 그 날 밤 10시경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 내가 누린 행운을 조용히 되새기며 즐거운 샤워를 했다.
아마 내 삶에서 이 보다 더 짜릿한 사건은 여간해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