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꾼 선사 수월스님은 스승 경허선사 만큼이나 세속인이 엿보기 어려운 인물이다.
경허 선사의 맏상좌(첫제자)로 그 시대 가장 존경받은 선사였지만, 그는 글 하나 법문 하나 남기지 않았다.
근대의 고승 중 가장 알려진 게 없는 인물이다.
수월은 인근 고을에서 머슴을 살다가 30살이 다 되어 천장암의 불목하니(절 머슴)로 들어왔다고도 하고,
10대에 입산했다고도 전해진다. 만해 한용운이 발행하던 <불교>는 수월이 북간도에서 열반한 6개월 뒤에야
열린 추도식에 즈음해 ‘전 조선을 통하여 현대의 유일한 대선지식이신 전수월 대선사께서 열반하셨다’고 보도해
그가 1928년 열반한 것은 확실시되지만, 그가 태어난 때는 확실치 않다. 경허보다 9살 적은 1855년생설이 주로 전해진다.
수월은 낮에는 나무하고 밤엔 방아 찧어 스승과 절 식구들 뒷바라지를 했다. 글을 몰랐던 그는 경전 공부도 못하고,
‘천수다라니’(산스크리트 원어로 된 불경)만을 외워 삼매에 들었다.
누구고 가릴 것 없이 중생에게 베푼 그의 정성은 하늘도 감동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절에 손님이 오면 발 감싸개인 감발을 벗겨 손수 빨아서 불에 말렸다가는 아침에 신도록하고,
밤새 몸소 만든 짚신 3~4켤레를 바랑 뒤에 메워주었다고 한다. 그의 사제로 당대 최고의 선사로
존경받던 만공은 생전에 “수월 형님만 생각하면 난 늘 가슴이 뛴다”고 말할 정도였다.
수월은 늘 머슴처럼 일만 했지만 밤에 아랫마을에서 산불이 난 줄 알고 달려올 정도로
방광(빛이 남)을 일으키곤 했다. 그래서 그는 가는 곳마다 조실로 모셔졌으나 누가 조실로 부르던
머슴으로 부르던 아랑곳 없이 오직 머슴처럼 일만하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옮겨가 숨곤 했다.
북녘을 유랑하던 수월은 57세인 1912년 두만강을 넘어 간도로 갔다.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낸 효봉과
초대 총무원장을 지냈던 청담은 젊은 시절 각기 따로 스승을 찾아 북간도까지 가서 그를 만났다.
당시 간도엔 비적이 들끓어 집집마다 송아지만한 만주개를 길러 집과 마을을 지켰다고 한다.
그 개들은 모르는 사람이 밤에 나타나면 다짜고짜 물어뜯을 만큼 사나왔지만 수월에게만은 꼬리를 흔들며
엎드리더라는 것이 그들의 증언이었다.
수월의 행적을 듣기 위해 예산 덕숭산 정혜사 선원장 설정 스님을 찾았다.
설정 스님은 “지금은 열반했지만 수월 선사와 같은 마을 출신이었던 ‘지선 노스님’으로부터
‘수월 선사가 천장암 아래 갈산 사람으로 세간에 알려진 ‘全’씨가 아닌 ‘田’씨이며 독자인데
아주 어려서 출가한 것’으로 들었다”고 전했다.
또 수월의 행적을 좆아 1989년 중국을 답사했던 설정 스님은 “수월 선사가 살던 옛 간도의 고을에서
80~90살 든 노인들은 수월에 대해 자기는 없고 중생만을 위했던 자비의 화현보살로 기억하고 있었다”며
수월이 간도로 갔던 이유를 전했다.
“나라 잃고 고향을 잃은 백성들이 쫓기고 쫓겨서 간 곳이 간도였지요. 고갯마루에서 상처입고 지친
사람들을 기다렸다가 따뜻한 물과 밥 한술을 먹이고, 신을 삼아 보내며 생애 마지막 수십년을 헌신하다
그는 소리 없이 떠나갔습니다.”
생전에 한 번도 대우를 받으려하기는 커녕 오직 남의 손발 같은 머슴으로 살았던 수월은 자신의 손길이
필요한 곳에서 조용히 헌신하다 자취 없이 떠난 바람이었다.
(한겨레 신문 조연현 기자가 쓴 글입니다)
(청담스님의 회고)
1년 동안 만주에서 수월스님을 모시고 정진하던 청담(靑潭, 1902~1971)스님이 주먹밥과 짚신을 받아들고
수월스님에게 마지막 절을 올렸다. 그러자 수월 스님은 갑자기 청담에게 곳간에 가서 괭이를 가져오라고 시켰다.
괭이를 가져오자 수월 스님은 바로 눈앞에 보이는, 마당에 박혀 있는 돌멩이를 가리키면서 이렇게 물었다.
“저게 무엇인가?”
“돌멩이입니다.”
청담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수월 스님은 괭이를 빼앗아 들더니 돌멩이를 홱 쳐내 버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들판으로 나갔다.
청담 스님은 수월 스님에게서 받은 이 공안을 일생 동안 화두로 삼아 공부했다고 한다.
이 공안은 수월 스님이 청담에게 준 가르침이기에 앞서, 당신이 세상에 내어 보인 마지막 법문이었다.
그로부터 한 해가 못 되어 수월 스님은 열반에 들었던 것이다.
(김진태 지음- 달을 듣는 강물)
첫댓글 수월스님이 간도에 계실 때는 한 조그만 절에서 머슴 중으로 일했다고 합니다. 낮에는 농사를 지으며 절일을 하고, 저녁에는 피난민 동포들을 위해 짚신을 매고 밥을 지었습니다. 고갯마루에 주먹밥과 짚신을 나무가지에 그냥 걸어 두어 피난민 누구라도 편하게 먹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스님은 머슴 중으로 살면서 젊은 중국 주지에게서 냉대를 많이 받았다고 하니, 모든 난관을 묵묵히 넘기신 수월스님의 수행이 놀랍습니다.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