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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준의 ‘축제’와 임권택의 ‘축제’에 대한 비교 고찰
Ⅰ. 서론
1. 주제설정에서의 문제의식
2. 주제의 설정
3. 주제설정과정
4. 주제 접근 방법에 관해
Ⅱ. 줄거리
Ⅲ. 이청준의 ‘축제’
1. 중심사건
1) 장례식
2) 손사래질
3) 옷보퉁이
2. 중심인물
1) 이준섭
2) 어머니
3) 이용순, 외동댁, 장혜림
3. 소결
Ⅳ. 임권택의 ‘축제’
1. 중심사건
1) 장례식-제목 ‘축제’와 관련하여-
2) 동화 - 할미꽃은 봄을 세는 술래란다-
3) 사진
2. 중심인물
1) 주인공 준섭과 임권택 감독
2) 용순
3) 어머님
4) 장혜림 기자
5) 기타 인물
3. 소결 -주제의식-
Ⅴ. 두 작품의 비교
1. 객관적 차이 -매체에 의한 차이-
1) 시간적 제약에 의한 차이
2) 인물의 내면심리 묘사에 의한 차이
2. 주관적 차이 - 작가에 따른 차이-
1) 어머님
2) 준섭
3) 용순
4) 기타 인물
5) 사진
3. 차이의 원인 분석-개성 차이의 원인
4. 동시진행의 영향
Ⅵ. 결어
Ⅰ. 서론
1. 주제설정에서의 문제의식
감각은 언제나 이해를 수반한다. 그 이해는 또다시 다른 무엇인가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만들어진 그 무엇인가는 다시 한 번 어느 누군가의 감각을 거쳐 이해의 단계로 넘어가게 된다. 이러한 순환적인 형태의 표현과 수용의 체계 속에서 개개인이 가지는 개성은 이해의 과정에 개입하게 된다. 다르게 표현한다면 개개인의 개성은 하나의 존재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준거 틀의 형태로 의미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개성이라는 준거 틀에 의해 같은 존재에 대한 다양한 이해의 양상이 나타날 수 있음이 이를 설명한다. 그리고 이해의 다양성은 다시 재창조의 과정에서 다양한 형태의 재창조물을 생산한다.
이해와 재창조의 준거 틀로서의 개성은 다양한 의미를 내포한다. 기본적으로 개인이 가지는 감각의 능력치에서 부터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 내지는 세계관까지도 아우르는 포괄적인 개념이다. 개인의 성장과정, 그 속에서 가지고 있는 트라우마(trauma)1), 혹은 단순한 기억에 이르기까지 개성의 양상은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 또한 그 개인이 주로 사용하는 표현수단 역시 개성의 한 부분이 될 수 있다. 재창조에 있어서 그 개인이 주로 사용하는 의사표현수단에 가장 적합한 형태와 내용에 치중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단순하게 개성을 한정짓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는 일반적인 개성의 모습을 모색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구체적으로 제기되는 이해와 재창조의 과정에서 그 주체가 되는 창조자의 개성을 탐구하는 태도이다.
2. 주제의 설정
이러한 전제에서 우리는 시간적으로 그리고 공간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공통된 사건에 대한 개인이 가지는 개성의 발현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따라서 이해의 차이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사료되는 사건에 대해 특정 인물의 이해의 차이를 발견한다면 개성의 존재가 명확히 두드러질 수 있다는 생각에서이다.
우리는 논문을 통해 이청준의 ‘축제’와 임권택의 ‘축제’를 비교 고찰함으로서, 두 인물의 개성의 차이가 이해와 재창조에서 어떠한 형태로 발현되는지를 살필 것이다. 그 결과는 단순히 두 인물의 개성 차이의 발견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모든 사람들의 개성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음으로 이어질 것이다.
3. 주제설정과정
이청준의 ‘축제’와 임권택의 ‘축제’를 비교 고찰하기로 한 데에는 그들이 주목한 사건에서 이 동일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어머니’와 ‘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장례식’이라는 동일한 사건에 대한 이해와 재창조였다는 점에서 우리의 문제의식의 전제를 충족할 수 있었다. 일반인 역시 공통된 경험의 과정을 겪을 수 있고, 겪어야만 한다는 사실도 주제와 적합함을 보여주었다.
또 하나 주목한 것은 그들이 견지한 각각의 의사표현수단이다. 이청준의 경우 사건을 표현함에 있어 ‘소설’이라는 형식을 차용했음에 반해, 임권택의 경우는 ‘영화’라는 형식을 사용함으로서 이해와 재창조의 과정을 밟아갔다. 단순히 영화와 소설의 형식 비교로서의 연구가 아닌 동일한 사건과 동일한 소재에 대하여 영화와 소설이라는 의사표현의 차이를 통해 어떤 것이 취해지고 어떤 것이 사해지는 지를 살피고자 한 점이다. 의도적으로 주제에 ‘소설’이나 ‘영화’라는 단어를 집어넣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형식을 개인이 가지는 개성의 일부로 볼 뿐 그것이 사건의 이해와 재창조에서 전면적인 차이를 가져온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전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청준과 임권택이 ‘장례식’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창작활동을 하면서 끊임없는 소통을 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대부분의 경우 소설의 영화화라든가 영화의 소설화과정은 선후관계가 명확한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선후가 명확한 경우 나중에 창작되는 것은 단순히 앞선 창작물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그리고 나중에 창작되는 창작물에 의해 재구성될 따름이기에 두 작가사이에 개성의 차이를 명확히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이청준과 임권택의 경우 이청준의 소설의 창작과 임권택의 영화촬영이 동시에 진행되었고, 임권택과 이청준 사이에 계속되는 소통을 통해 ‘동시창작‘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창작활동을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청준의 ’축제‘와 임권택의 ’축제‘는 상당한 관점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으며 이해와 재창조 과정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결국 이청준의 ’축제‘와 임권택의 ’축제‘는 완전히 다른 주제의식과 인물해석을 보여주고 있다.
4. 주제 접근 방법에 관해
결정된 주제에 대하여 접근 방법을 모색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3명의 공동작업이라는 성격을 십분 활용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우리가 취한 방법은 각자의 영역을 가지는 것이었다. 우선 한 명은 이청준의 ‘축제’만을 읽었으며, 다른 한 명은 임권택의 ‘축제’를 보고 생각을 정리하는 것으로 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그 두 가지를 모두 보고 각자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소설만을 읽은 사람은 이청준의 주제의식과 내용과 주된 소재에 대해 평가하고 영화만을 본 사람은 임권택이 ‘장례식’이라는 것에 접근하는 방식을 평가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차이가 나는 것을 두 가지를 모두 본 조원이 조율하는 방식을 택했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방법론은 긍정적이었다고 본다. 우선 같은 소재의 영화와 소설을 모두 읽었을 경우 두 가지의 내용과 주제의식이 흐려지고 혼합되는 경우를 배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청준과 임권택이 ‘장례식’을 바라보는 관점과 이해의 방향성의 차이에 대해 좀 더 명확한 결론을 가질 수 있었다. 논문에 관한 이야기를 마치고 집필을 바로 앞두고 한 가지만을 분석한 조원들은 나머지 한 가지를 읽거나 보는 방법으로 그 차이를 다시 확인을 하는 방향으로 진행한 우리의 접근 방법은 상당히 긍정적이었다.
Ⅱ. 줄거리 - ‘축제’는 어떤 내용인가
중년의 소설가 준섭은 어머니를 생각하며 쓴 동화집을 완성하여 그것을 막 출판하려는 참이다. 어머니는 노인 치매를 앓고 있으며 종종 몰래 집을 나가곤 해서 가족들은 난처하게 만든다. 시골집에서는 준섭의 형수가 어머니를 보살피고 있지만, 너무 성가신 나머지 방에 자물쇠를 걸어 잠그곤 해서 친척들 사이에 평판이 썩 좋지는 않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가 들이나 바닷가에 멍하니 서 있는 것을 이웃 사람들이 데려오곤 한다. 어머님은 지금은 가족들을 힘들게 하고 있지만 원래 인품이 좋아서 존경을 받았음직한 인물이다. 그런데, 시골집으로부터 준섭에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화가 걸려온다. 그는 곧장 아내와 초등학생인 딸을 데리고 차를 몰아 고향집으로 향한다. 도착해 보니 이미 죽었다던 어머니가 숨을 되돌렸다고 해서 가족들이 법석을 떨고 있었으나, 이내 진짜 숨을 거두게 된다. 거기서 장례의식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준섭은 차남이지만 맏형이 이미 죽고 없어 그가 맏상주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사람들에서 크게 알리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신문에 부고 기사가 실리는 바람에 서울의 저널리스트나 지방의 정치가 등이 조문을 오고 해서 장례식의 규모는 저절로 커져 버렸다.
그 가운데 한 명, 혈육이면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젊은 여성이 신문을 보고 찾아온다. 과거에 방탕한 큰형이 아내를 집에 놔둔 채 떠돌아다니다 술집 여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용순인 것이다. 용순은 아버지가 죽자. 어린 나이에 아버지 집으로 와서 살게 되는데, 큰어머니는 그녀를 너무도 매섭게 대하고 거의 식모취급을 하였다. 그로 인해 반항적이 된 용순은 얼마간의 돈을 훔쳐 달아나 버렸다. 하지만 그 당시에도 죽은 할머니만은 그녀에게 자상하게 대해 주었으므로 어떻게 해서든 장례식만은 참석하고 싶어서 찾아 온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본처를 비롯해서 가족들은 그녀를 외면하고 그녀도 앵돌아지거나 뻣뻣하게 맞서는 등 저항을 계속한다.
장례식은 우여곡절 끝에 무사히 마무리짓게 되고 마지막으로 가족 친지들이 모여 기념사진을 찍으며 하나의 추억이 된다.
Ⅲ. 이청준의 ‘축제’
이청준 소설 ‘축제’2)는 제목과 어울리지 않게 ‘죽음’을 다루고 있는 소설이다. 어머님의 죽음과 그 초상(初喪)을 통해 드러나는 ‘이준섭’의 생각을 읽어내고, 자칫 죽음이라는 ‘일상’적일 수 있는 일을 이준섭에게는 ‘경건하고 특별한 일’로 표현해내고 있다. 이 소설에 특징이 있다면, 영화(임권택 ‘축제’, 1996년 작)와 함께 집필되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겠으나, 여기서는 영화와의 관계는 고려하지 않고, ‘이청준’ 소설에서 나타나는 여러 사건과 인물에 대한 분석을 해보고자 한다. 이청준의 소설 ‘축제’에서 과연 무엇이 ‘축제’인가를 살펴보는 것이 다음의 영화에서 임권택이 말하는 ‘축제’의 의미를 규정하는데 지침이 될 수 있다.
1. 중심사건
소설의 시작은 어머니의 부고로 시작된다. 어려운 어린 시절을 살아온 주인공 이준섭에게 있어서 어머니의 존재는 특별한 것3)이어서 이미 준비해 오던 것이기는 하지만 일종의 혼란으로 다가오게 된다. 그래서 이 소설의 시작과 끝은 어머니의 ‘초상’의 시작과 끝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 초상의 과정에서 준섭이 어머니와 만나는 지점은 준섭이 학업을 위해 광주로 떠날 때의 손사래질과 군대에서 어머니께로 보낸 옷보퉁이의 기억이다. 다음에서 주요사건인 장례식과 그에 나타난 손사래질 ․ 옷보퉁이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겠다.
1) 장례식
소설의 시작과 끝인 ‘초상’은 아이러니하게도 이 소설에서는 중심사건이 되지 못한다. 주인공 이준섭은 어머니의 초상을 치루는 상주이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절차를 통해서 다시금 어머니를 회상하고 당신에게 가지고 있던 일종의 ‘부채’를 떨쳐버리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그래서 그 자신만이라도 엄숙하고 경건4)하게 어머니에 대한 회상을 장례식 속에서 끊임없이 하면서 어머니와 자신 사이에 있던 ‘짐’들을 하나씩 해소해 나가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하지만 장례식 절차를 밟아나가면서, 용순의 등장, 가족 간의 갈등, 술에 취해 흐느적거리는 문상객들 사이로 혼잡해진 식장 등, 준섭의 마음가짐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등장하고 그런 상황이 가중될수록 준섭은 더욱더 자신의 마음을 다잡으려고 노력하게 된다. 결국, 장례식 절차를 마무리해 갈수록 준섭의 어머니에 대한 회상도 막바지에 이르게 되고 장례식의 끝과 준섭의 회상은 동시에 마무리짓게 된다.
소설의 마지막은 엉뚱하게도 가족사진을 촬영하면서 마무리하게 된다. 이청준씨는 이것이 임권택 감독의 요청에 의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제껏 보여준 이준섭의 태도와는 사뭇 상반된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2) 손사래질
소설에 나타난 손사래질은 어머니가 준섭에 대해서 가지는 단오함의 표현이다. 가세가 기울게 되면서 준섭의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되었다. 더군다나 상급학교를 광주로 진학하게 된 준섭은 이때부터 어머니와 떨어져 살게 된다. 하지만, 고향집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준섭은 어머니를 찾아뵙게 되었고, 이 때 손사래질을 통해 어머니는 아들에게 단호함을 보여주게 된다. 당신은 아들에게 짐이 될 수 없다는 표현으로서의 손사래질은 그 이후로 계속 준섭의 머리에 남아 어머니에 대한 일종의 부채로 남게 되는 것이다. 그런 손사래질의 경험이 바로 어머니를 모실 수 없는 것으로 발전되었던 것이었다.
그날도 노인은 전에 늘 그래왔듯, 준섭이 차로 오를 때나 차 속으로 들어가 밖을 내다봤을 때나 뒤에서 연신 그 손 사래질5)을 쳐대며 그를 재촉하였고, 그러다 그 경황없고 망연스런 손사래질과 함께 순식간에 어둠속으로 파묻혀 사라져가 버린 것이었다. (같은 책, 76p)
작가가 표현하듯이 그러한 손사래질은 역설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소설에서도 준섭은 초상에서의 어머니와의 대화(회상)를 통해서 다시금 손사래질의 의미를 되새겨 가며, 부채를 덜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바로 그 오연스런 노인의 손사래질, 그러니까 준섭은 당시 상상도 못한 일이었지만, 돌이켜보면 노인은 그 비정한 손사래질 속에 이미 그 당신만의 은밀스런 부끄러움의 씨앗을 숨기고 있었던 모양이었다.(210p, 손사래질에 대한 준섭의 회상)
3) 옷보퉁이
옷보퉁이는 어머니가 준섭에 대해서 가지는 그리움의 표현이다. 소설에서 준섭이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쫓기듯이 입영을 하게 되었다. 훈련소에서 바깥옷들을 소포로 고향으로 돌려보내게 되었는데, 어머니는 준섭의 그 옷을 당신이 돌아가실 적 까지 고이 간직하고 계셨다.
“그런디 하루는 그 옷보퉁이가 주인 잃은 물건마냥 참나무골에서 이손저손 몇 달을 헤매다가 어찌어찌 그 구평마을 나한테까지 찾아 당도하질 않았겄냐…그때까장도 나는 저 아가 군대살이를 들어간 중은 감감 모르고 있다가 엉덩이에 이곳저곳 맨흙자국진 저 후진 입성가지들을 지 본 듯 앉았다 보니, 늙은 것이 아무리 마음을 모질게 먹을래도 자꾸 눈물이 앞을 가려 오는구나. 그런다고 그 처지에 이웃 눈도 부끄럽고 청천한 대명천지 하늘도 부끄럽고, 누구보다 딸자식 사위자식부터 부끄러워 어디 한번 마음 놓고 울어 볼 수나 있었겄냐…그래 언제 한번 이거나마 부둥켜안고 속시원하게 울어볼 때라도 올까 싶어 나 혼자 간직해 온 것이 오늘에까지 이르렀구나…”(같은 책 215p, 준섭 처와 어머니의 대화에 대한 회상 중에서)
아들을 손사래질로 보내고서는 다시금 아들을 잊지 못해 그 옷보퉁이를 돌아가실 때까지 간직해 오셨던 모습에서 준섭은 어머니의 한과 역경을 이해하고 또 이해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회상들을 통해서 준섭은 어머니와 다시금 대화를 하게 되고 질퍽하게 흘러가는 초상집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게 경건하게 자신의 절차를 진행해 나가게 된다.
2. 중심인물
축제로서 표현되는 초상의 과정은 이청준에게 있어서는 이미 돌아가신 어머니와 그의 아들 준섭과의 새로운 대화의 장이었다. 그래서 중심인물을 논하자면, 어머니와 이준섭이겠는데, 이용순과 외동댁 등 여타 다른 인물들은 그러한 어머니와 이준섭의 ‘대화’에 이용된 소설적 ‘소재’로서 기능한다고 볼 수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이용순이다. 이용순은 이준섭의 형의 태외자식으로 집안의 문제로 통했다. 하지만, 할머니의 장례를 계기로 잊혀진 문제에서 현재의 문제로 등장하게 되고 그것이 이준섭의 어머니와의 대화에 있어 플러스 요인(두 개의 옷보퉁이)이 되기도 하고 마이너스 요인(삼촌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발로된 적대감)으로도 작용하면서 긴장관계를 이루고 있다.
1) 이준섭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준섭은 장례식을 엄숙하고 경건하게 이끌어가려는 인물이다. 그래서 그는 장례식의 규정된 절차가 어떤 것이고, 그런 것들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6) 그래서 어머니에 대해서는 철저하게도 자신의 정성을 다 쏟아 부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결국 염습7)과 동화책으로 그 마음을 표현하게 된다.
2) 어머니
어머니는 어린 시절 유복한 집에서 태어나 고이 자란 인물이지만, 지나가던 스님의 예언으로 인해 박복한 인생을 살아왔던 인물로 묘사된다. 어머님 자신이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식들은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 나가시길 원하기에, 손사래질을 통해 때로는 모질게, 옷보퉁이를 통해 때로는 모정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자신의 자존심은 ‘비녀’를 통해 표현되고 있으며, 결국 그 비녀로 표현되는 자존심이 무너지면서 치매로 고생하시다 돌아가시게 된다.
3) 이용순, 외동댁, 장혜림
이 소설에 등장하는 갈등의 주체들이다. 이용순의 경우는 어릴 적 가출을 해 소식도 모른 채 살아오다가 갑자기 할머니 장례식에 등장하여 이준섭의 ‘엄숙한’ 장례식을 방해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준섭은 어머니가 가지고 있으셨던 옷보퉁이를 통해 용순을 자신의 생각 속으로 이끌게 되고, 용순도 장혜림이 건네준 동화를 읽고 다시금 준섭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외동댁은 준섭이 모셔야할 어머니를 대신 모신 인물이다. 노인이 치매로 접어들면서 노인의 머리를 잘라버린다던지, 비녀를 빼앗아 버린다던지 등, 갈등의 요인이 되었었다.
장혜림은 문학관련 잡지기자로 이준섭의 소설을 다 읽어본 사람이다. 그 만큼 이준섭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데, 이준섭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어머니의 장례식을 취재하러 나선 인물로 등장한다. 이준섭을 따라다니면서 궁금한 점을 이것저것 물어보는 통에 준섭은 귀찮은 점을 느끼기도 하지만, 장혜림은 준섭과 용순의 갈등을 풀어주는 실마리를 제공하기도 한다.
3. 소결
이청준은 소설에서 자신의 감정을 이입한 이준섭을 통해서 어머니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다시금 정리하려고 노력했다. 여기서 소설의 주제로 표현되는 축제는 과연 어떻게 표현되었는가가 중요할 것이다.
원래 ‘축제’라는 제목은 임권택 감독이 이청준씨에게 요구했던 사항이었다. 임권택이 영화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제목에 담아서 그대로 표현하고자 했는데, 이청준은 그다지 탐탁해 하지 않았던 것 같다.8) 하지만, 소설을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 분석해 보건데, 이 소설에서 ‘축제’가 가지는 의미는 2가지로 다가온다.
첫째, 이준섭과 어머니의 ‘축제’로서의 장례식이다. 결국 이준섭은 엄숙하고 경건하게 장례식을 치러 나감으로 다시금 어머니를 회상하며 어머니와의 부채를 청산해 나가는 몸짓을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이준섭의 입장에서는 돌아가신 노인을 위한 뜻 깊은 장례식, 그리고 당신을 편히 씻겨 보내드릴 수 있는 하나의 효의 발로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준섭이 회상을 통해서 많은 부분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둘째, 일반적으로 보여지는 ‘축제’이다. 축제를 일종의 ‘어울림’으로 본다면, 이 어울림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어울림에는 ‘모임․갈등․해소․즐거움’등이 한데 모여 화음을 만들어내는 과정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청준을 제외하고 장례식에 모인 인물들이 보여주는 모습이 바로 이러한 ‘어울림’의 과정이다.
소설에 나타난 축제의 이중적 의미에서 결국 부각된 것은 첫 번째 이미지이다. 이상에서 여러 가지를 논하기는 했으나, 이준섭이 장례식을 통해서 말하고자 했던 의미는 화합으로서의 축제가 아닌 어머니를 다시금 생각해보는 의미로서의 장례식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렇게 소결을 내림으로서 우리에게 분명하게 다가오는 것은, 소설에서 중심소재였던 ‘장례식’은 이준섭에게 있어서 어머니와 대면하게 해줄 수 있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Ⅳ. 임권택의 ‘축제’
임권택 감독의 ‘축제’는 소설 ‘축제’와 사뭇 다른 느낌을 가지고 있다. 인물이나 사건이 크게 다른 것은 아니지만 그 느낌은 크게 다른 것이다. 여기서도 소설 ‘축제’를 분석한 것과 같이 중심사건과 중심인물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1. 중심사건
1) 장례식-제목 ‘축제’와 관련하여-
본 영화의 제목은 ‘축제’이다. 영화 제목 ‘축제’는 임권택 감독의 생각이었다.9) 이 제목자체가 임권택 감독의 장례식에 대한 전체적인 생각을 함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전통적 가치관에서 ‘효’는 큰 의미를 갖는다. 이 ‘효’를 가장 선명하게 나타낼 수 있는 것이 바로 ‘장례식’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러한 전통적 의미에서의 장례식은 엄숙하고 경건함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장례식을 다룬 영화에서 ‘축제’라는 의미를 부여한 감독의 의도는 장례식이 가진 또 다른 의미에 착안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임권택 감독이 ‘축제’라고 표현하였다고 하여 전통적 의식인 ‘장례식’을 표현하는데 있어 경박하거나 저속하지 않다. 이와 비교되는 1984년의 일본 영화 ‘장례식’에서처럼 상주의 덤불 속 정사장면 같은 상업적이고 자극적인 내용이 나올 법도 하지만 실제 영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엄숙하지도 경건하지도 않게 보이는 ‘장례식’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엄숙한 동시에 경건한 장례식이라는 것이다. 이 영화는 임권택 감독이 자신의 어머님께 받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2) 동화 - 할미꽃은 봄을 세는 술래란다-10)
동화는 영화의 또 다른 축으로 중간중간에 삽입되어 있다. 본 동화는 치매의 의미와 할머님의 의미에 관해 어린 딸에게 설명해 주는 내용으로 영화에서는 준섭과 그의 아내가 딸은 은지에게 설명해주는 방식으로 되어있다.
3) 사진
장례식의 마지막은 가족사진으로 마무리된다. 가족 간의 갈등은 사진을 찍는 과정에서 화해를 이루고 화목을 되찾는 모습을 보인다. 이 한 장의 사진으로 감독은 가족 간 사랑의 회복을 함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2. 중심인물
1) 주인공 준섭과 임권택 감독
본 영화는 언급했다시피 임권택 감독이 자신의 어머님께 받치는 영화이기도 하다. 여기서 임권택 감독은 주인공인 이준섭으로 나타난다. 임권택 감독은 주인공 준섭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영화에서 준섭역을 맡은 안성기는 시종일관 무표정한 연기로 일관한다. 그가 우는 장면도 초경 때 단 한 번뿐이다. 감독은 자신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보여 주는 방식 대신에 중간중간 삽입되어 있는 동화-할미꽃은 봄을 세는 술래란다-를 통해 준섭의 내면을 표현하는 간접적인 방식을 택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의 선택은 간접적이고 여운을 남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주인공이며 상주인 준섭이 초상집을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전통적 의식인 ‘상’을 관찰하는 관찰자적 입장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주인공 준섭의 의미는 약해지고 그 내면 표현인 동화와 장례식의 의미가 강화되는 효과를 갖게 하였다.
2) 용순
영화의 또 다른 중심인물은 용순이다. 준섭의 형의 딸인 용순의 어머니는 술집여자로 용순을 버리고 집을 나간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용순은 어린 시절 전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아 학대받던 인물이다. 가족의 돈을 훔쳐 달아나 가족들과 화해하기 어려운 갈등을 가진 인물로 친척들에 의해 가문의 수치로 여겨지고 있다.
이러한 용순의 존재는 영화의 주제인 ‘장례식’을 통한 가족 간 화합회복을 이루는 한 도구로 쓰이고 있다. 용순과 가족 간의 갈등은 ‘장례식’이라는 의식을 통해 해소가 되고 왜 ‘장례식’이 다른 의미에서는 ‘축제’인지를 알려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용순이 가족과 화합을 이루는 과정을 이해하는 것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다. 용순이라는 인물의 성격이 다소 모순적이고 입체적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초반부에 용순은 할머니만을 의지하고 살아 온 인물처럼 보였다. 할머니는 어렵고 힘들었던 용순의 기억 속에 단 한 명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 준 인물로 나온다. 그러나 감독의 의도는 다르다. 용순이 할머니에 대해 좋은 기억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일뿐이라고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용순이는 치매에 걸린 할머니를 만난 적이 없음으로 그런 것뿐이라고 한다. 이는 영화 중반 소리꾼을 술을 먹여 초경에 소리를 못하게 만들고도 별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는 용순의 모습에서도 단편적으로 확인 할 수가 있다. 실제 용순이가 의지한 것은 준섭이라고 감독은 말하고 있다. 할머니 장례식에 참석한 용순은 할머니의 사랑에 대해 그다지 자각이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장례식을 치러가면서 또 준섭의 동화를 보게 되면서 진정한 할머니의 사랑을 알게 되고 결국 가족 간 화해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그 중심에 서 있는 것은 ‘장례식’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용순을 통해 본 가족 간 화합의 달성도 바로 장례식이라는 전통의식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3) 어머님
소설에서는 중요한 축을 이루고 있는 어머님은 영화에서 그다지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고 있다. 가끔씩 일화를 통해 그 인품을 알려주고 있지만 소설에서처럼 강렬하지 않고 단순한 인물 설명정도에 그친다.
4) 장혜림 기자
장기자는 잡지사 기자로 준섭에게 관심이 있고 준섭의 소설을 빠짐없이 읽었으며 준섭의 마음을 부인보도다 더 잘 알고 있는 존재로 나온다. 영화에서는 소설과 다르게 장기자는 준섭과 친한 사이로 묘사가 되며 준섭의 부인과 또 다른 갈등의 축을 이루게 된다.
소설에서는 그다지 큰일을 하지 않는 장기자는 영화에서 큰 역할을 갖는다. 인물설명을 하는 설명자의 역할과 용순에게 동화를 전하며 준섭의 마음을 알려주며 용순과 가족 간의 화해를 이루게 하는 중재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5) 기타 인물
영화에서 초상집에 참석한 인물들은 각양각색의 인물 군상을 형성하고 있다. 술 먹고 낚시하고 놀음하고 청탁을 하고 등등 다양한 모습이 나타난다. 이들 중 몇 가지 갈등을 살펴보면 먼저 준섭의 부인과 준섭의 형님의 부인인 외동댁간의 갈등이 있다. 이는 어머님을 모시지 않는 준섭의 부인에 대한 외동댁의 불만이 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준섭의 부인과 장혜림 기자 사이의 갈등도 있다. 용순과 온 가족 간의 갈등도 나타난다. 이러한 준섭 가족 간의 갈등 외에 윷놀이를 하는 사람간의 갈등이 나타나고 고스톱을 하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도 나타난다. 또 군수와 마을 사람들 간의 갈등도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은 ‘축제’인 장례식이 끝나감에 따라 차차 해결된다. 윷놀이하며 싸운 사람들이 함께 곡을 하며 갈등을 해소하고 가족 간의 갈등은 마지막 사진을 찍으며 서로의 옷매무새를 만져주는 장면으로 해소를 된다.
그러나 장례식을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 즉 ‘축제’에 불참한 이단자들의 갈등은 그 해결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즉 모인 조의금을 빼들고 장례식 중간에 근처 여관에서 고스톱을 치던 사람들은 결국 마지막 입관에 참여하지도 않은 채 놀음을 하고 있고 결국 서로가 나가지도 못하게 한 채 계속 끝도 없는 놀음에 빠져드는 모습에서 그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이 모습은 장례식의 ‘축제’로서의 모습을 보다 선명하게 나타나게 해준다.
이상에서 보듯 장례식이라는 ‘축제’는 사람들을 화합하며 갈등을 해소하는 힘을 가진 존재로 나타나고 있고 이것이 임권택 감독이 생각하는 장례식의 의미라고도 할 것이다.
3. 소결 -주제의식-
이 영화는 장례식을 소재로 하고 있다. 특히 전통적 의미에서의 장례식 과정을 그 바탕으로 하여 전개를 해 나가고 있다. 그런데 위에서 알아본 바와 같이 두 주인공인 준섭과 용순은 영화 전체를 주도하기보다는 그 흐름을 따라가는 존재로 묘사됨으로 하여 장례식의 의미가 더욱 강화되고 있다고 하겠다. 결론적으로 영화의 중심은 ‘장례식’에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다. 이 영화 ‘축제’를 분석한 일본 영화평론가 사토 다다오도 이점에 착안하여 이 영화가 장례식에 대한 다큐멘터리라고 평가한 바 있다.11) 그러나 이 영화가 단순히 장례식에 그러나 이 영화가 단순히 장례식에 대한 다큐멘터리는 아니다. 설령 이 영화가 겉으로는 다큐멘터리처럼 보일지라도 감독의 의도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이 영화에서 장례식의 전 과정을 마치 다큐멘터리로 오해받을 정도로 자세히 다룬 감독의 의도는 모든 과정을 꼼꼼히 자세히 하여 장례식에 대해 생각을 해보도록 유도하기 위함이었다. 즉 전통적 유교와 도교 그리고 무속신앙이 뒤죽박죽 섞여 있는 전통장례를 보여줌으로 하여 전통장례의 허례허식을 비꼬려 했던 것이 감독의 의도였다. 즉 유교적 ‘효’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굳이 유교적 전통이 아닌 다른 전통까지 해가며 허례허식으로 장례를 치루는 우리네 장례풍습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기 위해 그러한 형식을 취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영화에 중심에 장례식과 장례식과정에 있다고 하여 그 과정에 초점을 두어 다큐멘터리로 이해한다면 중요한 점을 놓치게 된다. 영화에서 주인공의 역할을 줄이면서까지 장례식을 강조한 이유는 바로 장례식자체가 감정이기 때문이다.12) 이 영화의 핵심이 장례식인 것은 맞다. 하지만 단지 그 과정이 문제가 아니라 거기에 담긴 감정이 핵심인 것이다. 또 그러한 감정을 보조하기 위해 동화가 쓰이고 있다. 영화가 소설과는 달리 내면묘사가 어려운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동화로 내면세계를 나타냄으로 하여 하나의 완성된 감정을 나타내고 있다. 즉 중심인 장례식과 보조인 동화를 연결하여 하나의 완성된 감정을 표현하였고 그 감정의 표현이 ‘축제’라는 제목으로 나타나고 있다.
Ⅴ. 두 작품의 비교
두 작품 소설 ‘축제’와 영화 ‘축제’는 같은 대상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두 작품의 작가와 감독이 다름으로 하여 차이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러한 차이는 두 작품의 작가와 감독이 다르기 때문에 발생한 차이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두 작품이 하나는 소설이고 다른 하나는 영화라고 하는 매체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우리의 관심인 두 작가의 개성차이를 확인하기 위해 먼저 그 객관적 차이를 확인하고 그것을 제외한 차이를 주관적 차이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1. 객관적 차이 -매체에 의한 차이-
소설과 영화라는 다른 매체를 이용하고 있는 두 작품은 작가와 크게 관련이 없는 차이가 드러날 수밖에 없다. 이는 비단 ‘축제’여서가 아니라 다른 소설과 영화의 관계에서도 들어 날 수밖에 없는 점이라 하겠다. 여기서는 크게 시간적 제약에 의한 차이와 인물의 내면묘사라는 점에서 생기는 차이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1) 시간적 제약에 의한 차이
영화는 2시간에서 길게는 3시간이라는 시간제약성을 가지고 있다. 물론 연작 영화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소설보다 시간적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은 한계는 영화 ‘축제’에서도 나타낸다. 많은 가족의 묘사와 그 관계 설명을 위해 영화는 기자 장혜림를 이용한다. 장혜림은 영화 내에서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형식으로 인물 군상들에 대해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소설에서는 단지 귀찮은 존재로 여겨지는 장기자의 존재가 영화에서는 인물 설명의 매체이며 가족화합의 중재자로서 나타나고 있다. 영화에서 이와 같은 다양한 역할을 장혜림에게 맡김으로 하여 시간을 절약하고 있다. 그러나 소설에서는 이러한 부분을 작가 서술로 대체함으로서 차이가 나고 있다.
결국 매체의 차이는 시간 절약이라는 과제를 주게 되었고 그 해결을 위해 소설과 영화에서 차이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는 다른 소설과 영화의 경우에도 발생할 수밖에 없는 차이라 하겠다.
2) 인물의 내면심리 묘사에 의한 차이
소설과 영화를 비교할 때 영화의 또 다른 한계는 인물의 심리묘사라고 하겠다. 인간 심리의 직접적 묘사가 가능한 소설과 그것이 불가능하고 비효율적인 영화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물론 영화에서도 심리를 직접적으로 내레이션으로 처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을 모두 내레이션으로 처리한다면 영화의 의미를 반감시킬 수밖에 없다. 소설에서 작가는 전지적인 능력으로 준섭의 내면을 담담하게 설명한다. 작가는 모든 것을 알고 있고 자신의 입으로 글로 그 모든 것을 설명할 권한을 부여받는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감독이 직접적으로 영화에 개입할 수 없다. 다만 영상으로 그리고 영화 내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로 그 인물들의 내면심리를 드러내야 한다. 상황을 보여주고 나머지는 관객의 느낌에 기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소설과 영화 ‘축제’에서 등장하는 ‘동화’의 존재는 상당히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소설에는 없어도 크게 상관이 없는 동화가 영화에서는 인물 특히 준섭의 심리를 표현하는 데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즉 동화의 존재는 준섭의 내면적 심리를 간접적으로 나타내는 도구로서 사용되고 있다. 이 두 개의 작품에서 주인공 준섭에 대한 심리묘사가 갖는 의미는 지대하다. 장례식에 대한 이중적 감정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 준섭이고 사실상 작품의 주인공이며 두 작가 투영인 동시에 한편으로 주제의식을 나타내는 매개체인데 이 인물에서 중요한 것이 심리의 묘사인 것이다. 직접적 묘사가 가능한 소설은 동화의 도입이 불필요한 반면 영화에서는 긴요한 요소가 동화인 것이다. 결국 인물의 내면 묘사를 해야 한다는 과제가 소설과 영화의 또 다른 차이를 만들어 낸 것이다.
2. 주관적 차이 - 작가에 따른 차이-
작가가 다르면 작품이 달라지기 마련이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일 것이다. 이러한 차이 중, 작가마다의 개성 차이에서 온 부분을 밝히고 그 차이의 원인을 살펴보기 위해 위에서 살펴본 객관적 차이를 제외한 부분을 인물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어머님
소설에서 어머님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매개체는 옷보퉁이와 비녀라고 할 수가 있다. 비녀는 어머님의 자존심의 상징으로 옷보퉁이는 준섭과 용순에 대한 짐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이 부분이 그다지 부각되지 않으며 옷보퉁이는 부적으로 바뀌어져 있다. 소설에서 옷보퉁이는 준섭이가 군대시절 보내진 것으로 나온다. 한편 비녀에 관해 영화에서는 그다지 비중있게 다루지 않지만 소설에서는 비중있게 다루어진다. 소설에서는 비녀가 유언으로 나타나지만 영화에서 그러하지 아니하다.
또 하나 어머님과 관련된 부분은 손사래질이다. 소설에서의 손사래는 준섭의 어머니에 대한 부채의식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소설 전반에 깔려있는 준섭의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과 부채의식은 손사래를 통해 극대화 된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맏딸에 대한 손사래만이 나타나고 있을 뿐 언급되어지지 않는다. 즉 큰 의미를 두지 않은 것이다. 이는 두 작가가 그 의미와 중요성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의 차이로 빚어진 결과라 하겠다.
2) 준섭
소설에서의 주인공은 준섭이라 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준섭을 중심으로 전개가 되며 준섭의 회상이 큰 축이 되고 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준섭은 주도적 위치보다는 관찰자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준섭이라는 인물이 작가 이청준과 감독 임권택을 투영한 인물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차이는 각 작가의 생각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소설의 준섭은 어머님에 대한 기억과 회상을 표현하는데 중심을 두는 반면 영화의 준섭은 준섭의 내면적 감정을 표현하는데 중심을 두고 있다.
3) 용순
소설과 영화의 용순은 상당히 큰 차이를 보인다. 무엇보다 큰 차이는 그 비중상의 차이라고 할 것이다. 소설에서는 용순이는 단지 장례식을 엄숙하게 치르려고 하는 준섭에 대해서 장례식을 망치는 인물로밖에는 더 이상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가족을 화합을 이루는 중심인물로서 다루어지고 있다.
4) 기타 인물
두 작품 소설과 영화는 두 작가가 장례식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많은 차이를 발생시켰다. 특히 장례식을 ‘축제’로 바라 본 임권택 감독에 대해 처음에는 부정적 견해를 가졌던 작가 이청준은 후에는 제목에 동조한다는 의견을 보이지만 전체적인 작품은 그다지 적극적 동의를 보이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차이는 기타 인물 군상의 묘사에서 잘 드러나는데 소설에서는 별로 비중 있게 다루어지지 않은 여러 인물군상들이 영화에서는 자세히 다루어지고 그 사람들 간의 갈등을 표현함으로 하여 장례식이 ‘축제’의 의미를 가진다는 점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차이 역시 작가의 의식 차에서 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5) 사진
영화와 소설모두 사진으로 마무리가 되고 있다. 그러나 양자에서 사진이 등장하지만 그 묘사는 상당히 다르다. 영화와 소설 모두 사진을 찍는 과정이 큰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준섭이 용순을 부르고 용순이 달려오며 친지들이 용순이의 옷매무새를 만져주며 사진 가운데로 보내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가족 간 화해를 간접적으로 나타내주는 상징물로 나타나는 반면 소설에서는 준섭이 원하지 않지만 장기자의 강력한 권유로 억지로 용순이를 데려오는 것으로 되어 있다. 결국 소설에서는 끝까지 준섭과 용순간의 화해가 잘 나타나지 않는다.
3. 차이의 원인 분석-개성 차이의 원인
소설 ‘축제’와 영화 ‘축제’는 모두 같은 대상을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두 작품의 매체차이로 인한 객관적 차이말고도 살펴 본 바와 같은 주관적 차이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 차이의 원인은 무엇인가? 이러한 개성차이를 가져 온 주요한 원인은 무엇인가?
이 물음들에 답하기 위해 지금까지 살펴 본 주관적 차이를 잘 살펴보면 소설에서 있는 어머님과 준섭이에 대한 일화가 많이 생략되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소설에서는 어머님의 유언으로 비녀가 등장하지만 영화에서는 유언이 없으며 준섭이 유학 가는 이야기, 옷보퉁이 이야기 등이 생략되어 있다. 특히 어머님이 준섭과 같이 사시지 않은 이유 즉 박복하니 나쁜 운의 영향을 받을라하여 준섭과 같이 지내시고 싶지만 떠나보내시는 어머님의 애틋한 마음 같은 것이 영화에서는 표현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준섭이 바로 두 작가 자신의 모습을 담고 있으며 두 작품이 모두 두 작가의 어머님께 받치는 작품이라는 것을 주목하면 하나의 답을 얻을 수 있다. 즉 두 작가의 어머님이 같지 않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두 작품은 비슷한 사건과 내용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다른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소설 ‘축제’는 이청준씨가 자신의 어머님께 대해 쓴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는 시종 어머님께 죄스러운 이청준씨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어머님이 원하시지 않으셔서 모시지 못 했지만 못 모셨다는 죄책감은 어머님 장례식을 경건하고 엄숙하게 치르려고 하는 준섭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사실은 이 소설이 치매에 걸렸다 돌아가신 이청준씨 어머님 장례식을 계기로 임권택 감독과 이야기 중 소설과 영화가 시작되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즉 이 작품은 이청준씨 어머님의 실제 장례식에 근접한 이미지인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 이청준은 그다지 밝은 느낌으로 써 내려가기 어려웠던 것이다.
한편 영화 ‘축제’는 소설보다는 밝고 실제 ‘축제’에 가까운 느낌을 준다. 이것은 또한 감독 임권택이 자신의 어머님께 받치고 싶은 장례식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씨받이’에서부터 유학자들의 허례와 허식을 꼬집던 임권택 감독의 성향은 여기서도 나타나서 어머님은 전통 장례를 원하시지만 그러한 것은 허식이라는 입장에서 접근해 갔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영화는 소설보다 밝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며 어머님을 모시지 못하였다는 죄책감이 소설에서처럼 크게 나타나지는 않고 있다.
이러한 동기에서의 차이는 영화와 소설에서 차이를 나타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동기의 차이는 작가 각자의 개성으로 강하게 나타나게 되어 두 작품이 서로 다른 작품으로 각자의 독자적 가치를 갖는 작품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한편 이 영화와 소설은 다른 소설과 영화의 예와는 달리 동시진행으로 두 작가의 영향이 서로에게 강했던 작품이다. 이는 다시 절을 바꾸어 살펴보기로 하겠다.
4. 동시진행의 영향
‘축제’는 소설과 영화가 동시에 만들어진 경우이다. 이 때 감독과 작가는 서로가 많은 이야기와 생각을 나누어 가며 만들어 갔다. 그만큼 서로간의 영향을 주고받기 쉬웠고 실제로 서신을 통해 서로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다. 그 영향의 한 예가 이청준씨가 서신으로 보낸 ‘효’의 의미에 대한 영화 삽입이다.
며칠 전에 제가 이런 일을 하고 있는 눈치를 알고 장터거리 그 이교장 형님이 찾아와 이런저런 말이 오간 끝에 그 ‘축제성’과 관련한 장례식의 의미를 함께 새겨 본 일까지 있었으니까요. 참고삼아 여기 대충 그때의 이야기들을 간추려 드리면 이런 것이었습니다. 「우리 전통의 유교적 세계관에서는 제사를 지낼 때 보듯이 우리 조상들이 신으로 숭앙받고 대접을 받는다. 우리 조상들은 죽어서 가족신이 되는 것이다. 그처럼 우리가 말하는 유교적 개념의 효라는 것은 조상이 살아있을 때는 생활의 계율을 이루고, 조상이 죽어서는 종교적 차원의 의식 규범을 이룬다. 제사라는 것은 그러니까 죽어 신이 되어간 조상들에 대한 종교적 효의 형식인 셈이고, 장례식은 그 현세적 공경의 대상이었던 조상을 종교적 신앙의 대상으로 섬기는 유교적 방식의 이전의석, 즉 등신의식인 셈이다. 그러니 그것이 얼마나 뜻 깊고 엄숙한 일이냐. 죽어 신이 되어 가는 망자에게나 뒷사람들에게나 가히 큰 기쁨이 될 수도 있을 만한 일이다.(소설 축제, 271p)」
또 다른 하나는 마지막의 사진이다. 이는 임권택씨의 생각으로 이청준씨가 소설에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영화에서는 사진이 잘 어울리며 감동을 자아내지만 소설에서는 부조화가 느껴지는데도 불구하고 이청준씨는 감독의 의견을 받아들여 소설에 쓰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부분적인 영향은 그 각각의 차이에 비하면 미미할 정도다. 그나마 마지막 사진부분은 소설과 영화가 분위기 상 큰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동시진행을 하고 서로 서신을 주고받으며 영화와 소설이 완성되었지만 그 동일성보다는 작가간의 강력한 개성차이로 말미암아 서로 다른 작품이 완성된 것이다. 결국 동시진행이라는 것으로도 두 작가간의 개성을 좁히는 데는 그다지 큰 힘이 되지 못하였다. 이는 바로 위에서 찾아본 두 작가의 어머님의 차이라는 좁힐 수 없는 차이로 인한 것이라 볼 수 있다.
Ⅵ. 결어
모든 인간에게서 개성이 사라진다면 새로운 만남도 헤어짐도 의미가 없을지 모른다. 인간은 각자의 체험과 생각을 바탕으로 개성을 만들어가고 또 그 개성을 표현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개성은 한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중요한 요소라 하겠다.
지금까지 살펴 본 것과 같이 소설 ‘축제’와 영화 ‘축제’는 같은 대상을 바라보고 만든 것임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개성과 경험의 차이에 의해 서로 상이한 모습을 띠게 된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이러한 개성의 차이에 의한 결과는 동시진행이라는 특이한 방식으로 서로간의 접근을 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차이가 그다지 좁혀지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소설이 존재하고 영화가 존재하든 영화가 존재하고 소설이 나왔든 결국 같은 대상과 유사한 주제를 바탕으로 하고 사건이 유사하며 인물이 같음으로 똑같다내지는 둘 중의 하나는 그 의미가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까지 본 바와 같이 두 작가가 다르면 그 느낌과 분위기가 달라질 수밖에 없고 결국은 두 개가 다른 독립된 작품으로 평가되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은 인간마다 다른 개성의 결과인 것이다.
그러므로 소설의 감동을 가지고 영화를 볼 수가 없고 영화의 감동을 가지고 소설을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소설과 영화의 감동이 다르다고 이상하다 평가할 이유가 없다. 또 다른 개성에 의한 또 다른 감동인 것이다.
소설 ‘축제’와 영화 ‘축제’도 이런 관점에서 독립된 작품으로서 평가를 내려야 하고
또한 다른 비슷한 예의 경우에도 소설과 영화를 서로 다르게 보아야 할 것이다. 끝.
□ 참고문헌
이청준, 축제, 서울: 열림원, 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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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영화연구회, 우리 영화 속 문학 읽기, 서울 : 월인, 2003년
김상아, <소설 가족시네마와 영화 가족시네마의 비교연구>, 서울대학교 학위논문(석사), 2002
(퍼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