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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25일(월)
공휴일이자 크리스마스이다.
다른 건 몰라도 크리스마스때는 웬만하면 설레였는데 올해는 왜 아무렇지가 않아?
설레일 일이 적어지면 늙는 거라는 데..?
22일 금요일부터 3일 동안 연휴 시작이었는데 순삭이다. 25일 하루 남았는데 그냥 보내기 서운해 산행갈 결심이다. 그러나 아침은 서두름 없이 느긋했고 할 일 다 해놓고 짐 싸서 시계를 보니 12시 20분이네. 병현이 태워준다고 한다. 107번 버스가 한 번에 가니 안 그래도 되지만, 태워다준다고 하여 얻어타고 박정자삼거리에서 내렸다.
전에 병사골에서부터 산행한 적이 있지만, 갔던 길 다시 가보기로 한다. 나홀로 산행 시작 13시 7분.
아이젠도 챙겼고 랜턴도 챙겼으니 시간 쫓김 없이 천천히 가도록 한다. 스틱을 챙겨오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쉽기만 한데, 할 수 없지. 산행할 때는 언제나 함께 했던 스틱이라 몸의 일부분 같은 느낌도 있어 스틱이 없으면 매우 이상하고 아쉽다. 스틱이 없으니 나의 속도는 느릴테고 내려와서는 피곤하겠지만, 어쩌겠는가. 집 나설 때 산길샘에서 지도다운로드 받는 것 신경 쓰느라 스틱 생각을 못한 걸.
병사골 입구에서부터 씩씩하게 걷는다. 왠지 느낌이 좋다.
오늘 계획은 관음봉까지 찍고 갑사로 내려가는 것이다. 갑사에서 대전까지 대중교통으로 돌아올 일이 걱정이지만, 카카오택시도 있으니 계획대로 하려고 한다. 그리고 나서 목욕탕을 가려는 것이다. 1년에 목욕탕 이용을 한번 할까말까인 나지만, 오늘은 웬일인지 뜨끈한 물에 지지고 싶다.
혼자 산을 갈 때는 사진을 잘 찍지 않는다. 특히나 셀카나 내 사진은 찍을 생각도 안하는데 오늘은 왠 여유일까. 간만의 겨울산행 느낌이 몹시 기분이 좋았을까 안하던 짓을 해본다.
눈이 있지만, 마른 땅이 더 많이 보인다. 미끄러울 염려는 안해도 될 듯 하다. 열심히 걷다보니 장갑을 낀 손이 덥고 갑갑하다. 벗었다 끼었다 하며 오르고 있다.
곧 얼마 안가 장군봉이다. 장군봉에서 물 한 모금 먹어주고 갓바위삼거리를 목표로 열심히 쉬지 않고 걷는다. 장군봉을 지나고부터 하늘에서 눈가루가 날리고 사위가 회색빛이다. 위에서 뿌리는 눈가루가 많아진다. 배낭 커버 씌워주고 다시 고고~
갓바위삼거리까지는 지루한 길이면서 조망이 좋다. 왼쪽으로 천정골과 만나는 능선의 사면을 조망하며 걸을 수 있고 더 아래로는 반포면 학봉리가 내려다보이기도 하는 그런 지능길이다. 더 멀리 눈을 돌리면 천왕봉도 보이고 계룡시도 보이겠지만, 뭐가 천왕봉이고 뭐가 뭔봉인지 지도와 대조해 볼 여유까지는 없고 잠깐 보고 계속 걷게 되었다.
스틱이 있으면 이 정도 턱은 스틱에 의지해서 으쌰 한번 하고는 일어설 만한 높이인데 자꾸만 아쉬워진다. 나무를 손잡이 삼아 잡아가며 높은 바위턱을 올라친다. 아쉬운 건 아쉬운 거고 간만에 산행에 스폰지 물 스며들듯 잔잔하게 기분 좋아진다.
병사골 초입에선 발걸음에 눈이 그닥 없었는데 오르면 오를수록 점점 눈이 많아진다. 등산로는 다져져서 그렇게 많게 여겨지진 않았지만, 사람이 다니지 않은 양 옆으로는 꽤 쌓였다.
겨울산은 길 찾기가 쉽네. 눈 다져진 곳으로만 걸으면 되니 길 표시가 쉽다.
특이하게 생긴 나무가 있다. 언뜻 보고 사다리인 줄 알았네. 독특해서 한 장 찍어본다.
얇은 플리스티셔츠를 입고 그 위에 얇은 우모점퍼를 입었는데 점퍼를 벗고 싶을 만큼 덥지는 않다. 장갑은 얇은 플리스 속장갑이 있는 이중장갑을 끼었는데 더워서 겉장갑은 벗었다. 오늘 날이 많이 풀려서 산행하기 좋다.
갓바위삼거리를 지나니 이제 신선봉을 목표로 걷는다.
병사골 코스가 재미있는 건 암릉구간이 있어서 그리고 능선걷기라서 이다. 그런데 겨울산행에서 암릉구간이 재미만 있는 건 아니다. 위험도 있고 힘도 드는데 오늘은 기온이 많이 풀려서 위험하지 않아 다행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이젠을 끼고 걸어야 하는 구간도 만났을테고 속도도 더뎠을 것이다. 산행하기 좋은 날이다.
헐떡이며 걷다보니 치악산 멤버들이 생각났다. 손샘이랑 하원씨랑 치악산 좋았는데... 그때 혹한기 겨울산행 3단계로 마지막 난이도가 치악산이었다. 그 때 치악산 종주를 계획하고 갔지만, 완주하진 못했는데 올해 재도전 해볼까 하는 생각도 있다.
하원씨는 잘 지내는지... 그 때 이후로 회사 등산동호회에 가입했다고 연락왔었는데 거기서 지금쯤 날라다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 힘든 치악산을 스틱도 없이 잘도 걸었는데.
신선봉을 향하는 길이 힘들긴 하지만 조망이 좋다. 오를수록 조망미가 좋아지는 것 같다.
신선봉 도착, 금새 큰배재 도착이다. 너무나 익숙한 큰배재.
큰배재에 오니 사람 구경을 할 수 있었다. 한 커플의 등산객이 제대로 된 배낭을 매고 헤드랜턴까지 착용한 채 내가 걸어온 쪽을 향해서 나와는 반대 방향으로 걸어올라오고 있다. 병사골쪽으로 내려가는 걸까.
남매탑에 도착하니 네 분의 등산객이 보인다. 시간은 오후 3시 37분. 오다가 바나나 한 개 밖에 못 먹었다. 여기선 뭘 좀 먹어야 하는데 의자에 온통 눈이 쌓여 있어서 앉을 곳이 없어 보인다. 생각을 못했네 간이 매트리스...
대충 눈을 치워 배낭커버로 앉을 자리를 만들어 놓고 그 위에 배낭을 뒤집어놓았다. 엉덩이가 차지 않도록 앉아 싸갖고 온 바나나와 카스테라로 방전된 에너지를 채워넣는다. 봉지커피가 아쉬웠지만, 괜찮다.
시간이 애매하다. 더 갈까 어쩔까. 갑사쪽으로 내려가는 건 교통편이 좋지 않아 집에 엄청 늦게 도착할 것 같으니 은선폭포로 해서 내려가자.
그런데 어떻할까? 삼불봉 지나 관음봉 거쳐 은선폭포로 하산하려면 6시가 넘을 것 같은데 여기서 그만두기는 아쉽고 계속 가자니 해질 시간을 지나쳐 자칫 위험하진 않을지 멍청히 결정을 못한 채 멍하다.
시간이 계속 간다. 삼불봉에 올라 생각해보기로 했다. 뭐하면 삼불봉에서 남매탑-천정골로 하산하는 방법이 있으니까.
주섬주섬 가방을 다시 챙겨 삼불봉 향하는 계단을 오른다.
먹으면서 땀이 식어 춥고 귀찮은 생각도 들었는데 다시 오르막을 걸으니 몸이 더워지면서 포기하지 않고 삼불봉행을 선택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내 위쪽에서는 내려가는 사람들 뿐이다. 내 뒤로 오르는 사람은 없다.
얼마 안 가니 삼불봉 향하는 등산로와 삼불봉을 우회하는 등산로로 갈라지는 지점이 나타나 망설임없이 우회로로 빠졌다. 삼불봉은 눈으로만 흘깃 보고 skip.
오후 4시 4분 삼불봉에 도착. 쉬지 않고 관음봉 방향으로 걷는다. 몸이 더워지고 그냥 걷고 싶다. 생각지도 못한 겨울 눈 산행 분위기에 너무 취했나보다. 큰배재, 남매탑에서 만난 사람모습에 반가웠던 마음도 잠시, 다시 적막감 속으로 들어가 내 걸음에 밟히는 눈소리 뿐 바람소리도 없다.
내가 읽은 책 '자연이 마음을 살린다'에 의하면 자연에서 오감을 통해 경험한 것들은 인간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 정신적, 심리적으로 어떤 '힘'으로 작용한다고 했다. 그 '힘'을 치유라고 표현했는데 긍정의 힘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가령 지금 걷고 있는 현재 상태처럼 차소리, 클락션 소리 같은 소음이 없는 상태. 인공의 소리는 없고 오직 자연의 소리만 들을 수 있는 상태에서 새소리를 듣거나 걸으면서 자연의 풍경을 눈에 담거나 하는 행동들이 인간에게 좋은 힘으로 작동한다는 거다. 좋은 힘, 긍정의 힘이라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게 뭐야. 연구를 통해 논리적으로 과학적으로 밝힐 수 있을까? 그럴 수도 있을꺼다. 행복하거나 마음이 편안하거나 기분 좋을 때 분비되는 호르몬이 있으니까 그 수치를 통해서 밝힐 수 있겠지. 그런데 그런 과학적 증거 없이도 내가 혼자 계획한 등산계획을 성취했을 때라든지 생각지도 못한 눈 쌓인 겨울산행을 하게 된달지 지난 해 오지탐사대 아웃도어테스트 장소를 답사했을 때처럼 큰 산에 홀로 들어가 두려움을 극복했을 때 뒤늦게 따라오는 '해냈다 할 수 있다'는 그 느낌은 어떻게 과학적으로 밝힐 수 있을까. 그 느낌을 확실히 내가 느꼈고 겪었는데 말이다.
또 있다. 산의 오묘한 느낌 같은 게 있다. 음기, 양기 그런 단어도 있지만, 공간감각이랄까 갑자기 숲의 느낌이 달라질 때 온 몸으로 느껴지는 기운이 있다. 그런 느낌도 내게 전달되는 무언의 것이 있는데 그걸 어떻게 설명하고 증명하지?
이번 산행에서도 그런 느낌을 가졌다.
실은 3일의 연휴가 아까워 산행을 한 것도 있지만, 계획에도 없던 새해 각오를 하게 된 산행이다. 새해 계획이 무어냐. 그런 거 없이 산 게 몇 년인데 새삼?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이 더 많길래(되지 않는 건지 계획대로 하다가 마는건지) 그런 쓸데없는 새해 계획 같은 것은 잊고 지냈는데 지금 좋은 기운과 에너지가 각오를 새롭게 하라고 북돋우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설계를 하는 데에 있어서 망설이고 망설인 긴 시간이 있었지만, 이번 산행은 내게 힘이 되었다. 해 봐. 할 수 있는 것에서부터 하면 된다고 각오하게 되었다.
혼자만의 산행이 준 성찰이랄까.
관음봉까지 갈길도 바쁘고 시간은 없는데 그와 반대로 내 기분은 즐겁고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 자꾸만 걸음을 멈추게 된다.
차라리 계단이 나은 것 같다. 계단은 지치지 않고 중간에 안쉬고 오를 자신이 있다. 힘들어서 오르막길보다는 계단이 낫겠다는 희망적인 생각으로 관음봉 오르는 첫 계단을 딛는다. 이까이꺼.
겨울산행 대 만족!
집에서 가까운데다 설산산행을 만끽할 수 있는 이런 감사한 산행지가 있다니?
갑사로 내려가려던 계획을 접고 은선폭포로 해서 동학사로 내려가기로 했다.
방향을 잡고 아이젠을 신은 후 쏜살같이 내려갔다. 내려가다가 은선폭포 하단쯤에서 어둑해지는 숲을 맞이했는데 그것도 너무 좋았다.
아무도 없는 적막감도 느꼈다. 왜 이리 조용하지 싶어 걸음을 멈추었는데 정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심지어 새소리도 바람소리도!
은선폭포에서 쭉 계곡을 따라 내려가면 되는 길이 약간 달라졌다. 낙석이 많이 떨어져서 우회로를 만들어놓았네. 다시 오르막길이 시작되길래 길을 잘못 들었나 싶었는데 낙석 때문에 생긴 우회로였다. 잠깐 깜딱 놀랬다.
동학사 100m 전쯤 완전한 어둠이 되었다. 어둑해질 때 랜턴을 켜긴 했는데 별로 춥지도 않은데 건전지가 방전되었는지 켜나 끄나 아무 변화가 없다. 핫팩이 든 주머니 속에 랜턴을 잠시 데웠다가 잠시 후에 다시 켜보니 잠깐 밝아지는데 그것도 오래 못가길래 어렴풋이 보이는 길을 짐작으로 밟아나가 동학사 가로등을 만나 마음 편히 임도를 걸었다.
내려와서 산길샘을 종료하고 전체 거리를 확인하니 생각보다 길게 걸었다. 10km 거리를 걸었네.
10km나 되는 줄은 몰랐네.
25일 나만의 화이트크리스마스 산행을 했다.
들머리 : 병사골
날머리 : 동학사주차장
전체 거리 : 10.5km
소요시간 : 5시간 3분(휴식시간 15분)
1월에 다음 산행을 계획해야지.
오랜 만에 겨울산행으로 인한 체크포인트 기록!!
1. 아이젠과 스틱을 반드시 준비하자.
2. 배낭커버(눈 내릴 수도 있으니 유용)
3. 방풍쟈켓
4. 랜턴(여분의 배터리)
5. 핫팩(춥지 않아도 여러모로 유용)
6. 장갑(눈 덮인 바위를 잡거나 하면 젖으니 여벌 준비하거나 이중장갑)
7. 방석용 작은 매트리스
8. 넉넉한 행동식
새해계획
조금 더 이해하려고 노력해보자. 낼 모레 지천명이라는데 실감은 하나도 안나는데 먹은 값을 해야 될 것 같다. 조금 더 참고 쪼금 더 이해하기.
사업 관련해서는 간판명 빨리 정하고 등록하고 홈피 만들기.
거기서부터 시작하기. 사무실 만드는 건 나중 해도 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