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을 사랑함으로
교회 헌장(Lumen Gentium) 49항과 50항에서는 교회를 '순례하는 교회'로 소개하고 있다.
교회는 순례를 통해서 천상 교회를 향해 현세의 나그네 여정을 걷는 자신의 정체성을 가시적으로 드러낸다. 이처럼 순례하는 교회의 지체들인 신자들 역시 순례 행위를 통해서 교회의 신비를 새롭게 사는 가운데 이를 내면화할 수 있게 된다. 순례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를 따르는(Sequela Christi)길이다. 따라서 순례에 있어서 핵심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새롭게 인격적으로 만나고 아는 일이며 그분과의 관계를 쇄신하는 일이다. 이러한 작업에는 필연적으로 회심(回心)이 전제된다. 따라서 순례는 곧 회심의 여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카를로 마짜의 '순례 영성'에서)
엊그제 서울은 비가 내려, 일상에서 벗어나 산에 올라 주말의 한가로움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북향의 우면산 기슭에는 아직도 먼지에 더렵혀진 눈 무더기가 드문드문 남아서 떠나려는 계절을 붙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야박하게도 봄이란 놈이 "방~ 빼" 하며 종일토록 비가 되어 예술의 전당 뒤편 연못에 겨우내 꽁꽁 얼었던 얼음을 오늘에서야 결판내려는 듯 녹이고 있었습니다.
계절의 바뀜에도 이렇듯 치열한 애증(愛憎)이 엇갈리는데 인간사에 있어서야 오죽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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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띄었던 편지에 "성 프란치스코"수도원과 대성당에 대해 소감의 일단을 올렸습니다만 아무래도 "뽀르지운꼴라(porziuncola)"를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뽀루지운 꼴라는 아씨시(assisi) 역에서 수도원으로 들어오는 입구에 있는 천사들의 성모성당 안에 있는 조그만 기도소를 말합니다.
당시 베네딕도회 소유의 아주 작은 기도소를 넘겨받은 것은 성인이 스물일곱 살, 성인을 따르던 사람들과 새로운 수도회, 작은 형제회를 만들어서 수도생활에 정진하게 됩니다. 작은 형제회라... 성인답게 이름도 소박하기 짝이 없지요. 오늘에도 프란치스코회 수사님들은 한 여름 개울에서 물고기를 한 바켓츠 잡아 막걸리 한통과 함께 분도회 수사님들에게 전한답니다. 바로 뽀루지운꼴라를 넘겨받은 것에 대한 임대료라고 볼 수 있겠네요.
성인은 이곳이 얼마나 마음에 들었던지 오랜 수도생활과 전도활동 뒤에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세상을 떠났다 합니다,
제가 아는 프란치스코 수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 프란치스코 이전까지의 예수는 신성(神性)이 강조되어 경배의 대상이었지만 성인이 보여준 영성 이후 주님은 사랑의 대상으로 다가온다" 공감하시나요?
" 프란치스칸 신심은 고급지향이 아니라 인간적이며, 학문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깊은 마음에 다가오는 단순하고 소박한 사랑이 넘치는 무엇"이라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아들을 얻었을 때 주저하지 않고 프란치스코라고 붙였답니다. 근데 이 놈이 고3이라고 미사도 잘 빼먹어 성인께 면목이 없답니다. 글쎄, 신앙교육을 제대로 못 시킨 제가 아씨시에서 얼마나 송구했는지 아십니까? 타우십자가 목걸이와 다미아노 십자가를 사가지고 아들 녀석 방에 걸어 주고 손에 쥐어 주었지만... 대학교에만 들어가면 아주 엄하게 교육시킬래요.
성인이 임종을 맞이했던 작은 골방(한 평이 될까?)을 둘러보노라면 소박하기 짝이 없었던 성인의 이웃을 행해 열려 있었던 사랑이 한없이 그립다. 또한 성인의 유해를 모셔가려고 이웃한 도시 페루자와 한바탕 전쟁도 치루었다네요. 1226년 10월3일 성 프란치스코가 한 평생 수도생활의 고락을 함께한 형제들에게 둘러싸여 죽음을 맞이한 곳에 아내는 한참이나 무릎을 꿇고 묵상에 잠겨 있네요.
말년의 성인은 심한 고행과 오상으로 인해 쇠약해져 거의 걸을 수가 없었답니다. 자신의 죽음울 임박했음을 깨달은 성인은 자신이 사랑하는 아씨시 마을을 축복했고 마지막 시각엔 알몸으로 맨땅에 눕혀 달라고 했대요. 그리고나서 "형제인 죽음이여, 너를 환영한다"고 말하고서 안젤로 형제와 레오 형제더러 형제인 죽음을 노래불러 달라고 명했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마지막으로 다윗의 시편을 노래하고 자신에게 재를 뿌리라고 하고서, 그가 가장 사랑했던 장소에서 형제인 죽음을 맞이하였지요. 죽음을 형제같이 친근하게 껴안은 뽀루찌운꼴라에서 저 또한 죽음을 깊이 생각해봅니다.
착하기짝이 없는 성인은 그 당시 유럽을 전염병처럼 들뜨게 하던 십자군 전쟁을 반대했답니다. 종교를 빙자하여 권력과 상인들이 결탁하여 일으킨 부도덕한 전쟁을 외롭게 반대한 성인의 참 모습을 눈에 담아 오고자 오래 오래 골방 앞에 꿇어앉아 있었습니다.
돌로 지어진 아주 자그마한 뽀르지운 꼴라 정면 가득히 그려진 벽화는 천사들의 호위속에 성모님과 함께 계신 예수님을 제단 아래서 성인과 작은 형제회의 수도자들이 경배하고 있는 장면으로 순례자는 깊은 감동을 느낄 수 밖에 없네요.
그러나 소박한 뽀르지운 꼴라를 뒤덮은 천사들의 성모성당, 17세기 성인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성 비오 5세의 지시에 의해 세워진 이 크고도 화려한 성당은 성인의 체취가 생생한 뽀르지운 꼴라를 그냥 두고 그 위를 덮어버리게 아주 큰 규모로 지어버려 묘하게도 뽀루지운 꼴라는 교회안의 교회가 되어버린 셈이라고 할까요? 그 후, 성 비오 10세는 이 천사들의 성 마리아 성당을 모든 프란치스칸 성당의 모 성당으로 선포하고, 대성당과 교황 기도소의 명예를 부여하였답니다.
갇혀버린 탓에 성인의 체취는 간 곳 없어…아무튼 프란치스코 성인하면 떠오르는 작고도 초라한 뽀르지운꼴라에서 성인의 임종을 회상해 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교황 호노리오3세에게서 이 성당에 전대사를 얻었다고 합니다.
아~ 참! 천사들의 성모성당 입구에는 1986년 아씨시에서 로마 교황청 주최로 열렸던 "세계 종교지도자 회의" 당시 찍은 주요 참가자들의 사진이 동판으로 붙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평화로운 세계를 먼저 실현합시다. 평화가 우리 위에 내려와 우리 마음을 가득 채우기를!"
'평화의 성자' 프란치스코(1182?~1226)의 땅, 이탈리아 아시시는 세계 종교평화의 성지로 거듭나고 있다. 1986년 처음 요한 바오로 2세가 '평화를 위한 세계 기도의 날' 행사를 열었을 때, 기독교 32개 종파와 유대교, 힌두교, 시크교, 불교, 이슬람, 아프리카 애니미즘, 조로아스터교 등 11개 비(非)기독교 종교의 지도자가 모였다. 이후 1993년에는 보스니아 전쟁 종식을 위해, 2002년에는 9·11 테러 사태 이후 종교 간 증오의 종식을 위해, 세계 종교 지도자들과 순례자들의 기도와 행진이 계속되고 있다. 25주년을 맞아 지난 10월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연 행사에서는 한국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慈乘) 스님이 세계 불교도 대표로 평화를 위한 연설문을 낭독하기도 했다.
'주여 저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라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기도와 실천이 반향을 낳았던 건 당시 시대상 때문이었다. 크고 작은 전쟁으로 사람들은 고통받고 있었지만 부유해진 교회는 재물과 권력에 집착했다. 성인은 성서의 가르침대로 사는 청빈과 평화의 삶만이 고난으로 가득찬 세계를 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를 따르는 수도자들은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 주고, 성인과 함께 세상에 평화와 화해의 메시지를 전했다.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은 지금도 "가난은 나의 어머니"라고 했던 성인을 따라 겨울에도 맨발에 샌들을 신는다. 당시 성직자들의 허리띠는 값비싼 천으로 만들어 보석으로 치장했지만,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은 그저 흰 밧줄을 둘렀다. 이 밧줄에 청빈, 정결, 순명(順命)을 상징하는 세 개의 매듭을 묶는 것도 성인 때와 마찬가지다.
프란치스코는 자신이 나고 자란 아시시에서 숨을 거뒀다. 그는 자신의 시신을 언덕 위 프란치스코 대성당 자리에 묻어달라고 했다. 원래 사형수의 시신을 버리던 '죽음의 언덕'이라 불린 곳이었다. 지금 이 언덕은 '희망의 언덕'이라 불린다. 성인은 죽음을 희망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 세상은 잠시 다녀가는 순례임을 잊지 마세요. 그건 순간일 뿐이며, 영원한 기쁨은 그 뒤에 옵니다." 성인의 생가 위에 지어진 키에사 노바 프란치스코회 수도원 앞. 원장 프란치스코 데 라자리(51) 신부는 "프란치스코 성인은 이미 800년 전에 돌아가셨지만, 일상의 단순한 아름다움, 이웃을 위해 봉헌하는 삶, 모든 피조물을 향한 형제애 같은 그의 영성은 생생히 살아 있다"고 했다. "시뇨레 띠 디아라 파체(주께서 당신께 평화를 주십니다)." 신부는 프란치스코회 고유의 인사말로 작별하며 손을 흔들었다.
1986년 10월 27일 아씨시, 요한 바오로 2세(1920~2005) 교황은 전 세계에서 모인 그리스도교와 다른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 "서로 다른 종교로부터 온 우리가 오늘 역사상 처음으로, 각자의 신앙 전통에 따라 평화의 초월적 가치에 대해 세상 앞에 증언하게 됐다"고 했다. 왜 아시시였나? 그는 "우리가 아시시에 모인 것은 평화와 화해, 형제애의 상징인 프란치스코 성인이 나고 묻힌 곳이기 때문이며, 온유와 겸손의 모범이었던 그의 본을 받아 진정한 내적 침묵 가운데 기도하기 위해서"라고도 했다.
1999년 로마에서 또 한 차례의 종교지도자 회의가 열렸을 때도 유대교,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 정교회 등 세계 종교 지도자들이 아씨시를 다시 찾아 올 정도로 종교를 초월한 성인의 사랑과 평화에 대한 헌신은 오늘에도 우리들 가슴을 숙연케 합니다,
오늘은 우기(雨期)에 접어든 이태리의 겨울답지 않게 화사한 정오, 집 앞에 나와 해바라기를 즐기는 은발의 노부부와 기념품가게의 세련미가 넘치던 소피아로랜(?)은 평화를 사랑하는 상징인 타우십자를 건네주며 밝은 미소와 함께 " 챠오! 봉 죠르노"를 연발하네요. 영어로 '하이! 굿 모닝' 이라고 알아들었습니다.
끝없이 펼쳐진 올리브밭… 수확을 끝낸 텅 빈 들녘, 이따금 보이는 포도밭이 계절을 잊은 듯 푸르름을 잃지 않고 한눈에도 기름진 옥토임을 알게 하는 벌판이 너무 넓어 아득하니 현기증을 일으키는데… 순간, 낮게 이어진 구릉 넘어 은빛 투구와 붉은 망토, 백마를 탄 막시무스 장군이 이끄는 로마 군사들의 질서정연한 대오… 타오르는 햇빛, 번쩍이는 창검의 눈부심과 갈리아 방면 사령관 막시무스장군을 나타내는 눈매가 사나운 독수리의 레지오 팩시밀리움, 이어지는 기병대의 질풍노도, 말들의 질주, 비명, 숨 가쁜 전투 씬…
아씨시에서 돌아오는 길에 언젠가 보았던 " 글래디에이터" 영화 장면을 떠올리는 건 무슨 조화람? 잔잔하게 흘러가는 강물처럼 풍요로운 평화와 사랑을 좋아 하기도 하지만 번쩍이는 과시와 이기고자 하는 정복감, 누군가에 의해서 들어 올려지는 황홀한 권력을 향한 추구, 제복, 군대의 구령, 힘센 자에 대한 복종의 쾌감…이렇듯 내 속에 자리한 속물근성을 들여다 본 후에는 말할 수 없이 부끄러웠습니다,
로마하면 우선 떠오르는 번쩍이는 투구와 창검, 숱한 영웅들로 점철한 도시라면 지극히 한적하고 고요한 아씨시는 프란치스코성인과 끼아라성녀, 비둘기와 염소, 무엇보다 인간적인 욕정으로 괴로워하던 성인이 뒹굴었던 장미덩굴 밭(참으로 신비하게도 장미가지에는 가시가 없답니다. 바로 수도원 담장 밖의 장미는 가시가 있는데) 이 먼저 떠오르네요. 영(靈)과 육(肉)이 이렇게 극명하게 대비될 수 있을까요?
내 안에서 틈만 나면 꿈틀거리는 인간의 욕정과 육(肉)으로 향하는 어쩔 수 없는 악의 경향을 어떻게 극복 할 수 있을까요? 프란치스코 성인도 힘들게 이겨낸 현장에서 어쩜 나도 해 볼 만하지 않을까 고 실낱같은 희망을 발견합니다. 나도 이 욕망과 유혹에 견딜 수 있게 더 많은 기도와 묵상의 시간을 가져야 겠다고 다짐하며, 돌아오는 순례자가 멀리 있는 그대에게 평화의 인사를 드립니다. "살롬"
아침녘에 화사하던 로마는 안개비에 젖은 채, 돌아오는 우리를 맞이했고 가벼운 오한으로 김치찌게 국물을 떠먹으며 호사스러운 순례가 문득 부끄러웠습니다.
…우울한 로마는 비에 젖어 그대에게 보내는 편지도 비에 적셔져 혹시라도 그…대, 감기에 걸릴까 염려하며…
부오나 노테!!! Buona notte!!! ( 굿 나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