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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가장 큰 권위를 가지고, 가장 좋은 기회를 줍니다.
비는 해를 가리고 하늘을 가리고, 세상 사람의 눈을 가립니다.
그러나 비는 번개와 무지개를 가리지 않습니다.
나는 번개가 되어 무지개를 타고, 당신에게 가서 사랑의 팔에 감기고자 합니다.
비오는 날 가만히 가서 당신의 침묵을 가져온대도, 당신의 주인은 알 수가 없습니다.
만일 당신이 비오는 날에 오신다면, 나는 연잎으로 웃옷을 지어서 보내겠습니다.
당신이 비오는 날에 연잎옷을 입고 오시면, 이 세상에는 알 사람이 없습니다.
당신이 비 가운데로 가만히 오셔서 나의 눈물을 가져가신대도 영원한 비밀이 될 것입니다.
비는 가장 큰 권위를 가지고, 가장 좋은 기회를 줍니다
― 한용운, '비', 《님의 침묵》(1926.5)
내 지렝이는 커서 구렁이가 되었읍니다.
천년동안만 밤마다 흙에 물을주면 그흙이 지렝이가 되었읍니다.
장마지면 비와같이 하눌에서 날여왔읍니다.
뒤에 붕어와 농다리의 미끼가 되었읍니다.
내 리과책에서는 암컷과 숫컷이있어서 색기를 나헛습니다.
지렝이의눈이 보고싶읍니다.
지렝이의 밥과집이 부럽습니다.
― 백석, '나와 지렝이’, 《조광》 1권 1호(1935.11)
매달 열려 이번으로 36회를 맞는 시인 백석을 다시 읽자는 모임 백석과노홀다가 만해와 백석의 시를 읽는다.
시를 돌아가며 소리내어 읽고 백석연구가 김달진의 해설을 들으며 문답하는 시간이다.
음악감상을 겸한 자리가 끝나면 가까운 양화대교를 건너갔다가 오며 마칠 예정이다.
▣ 일시 : 2014년 3월 27일(목) 7:30pm
▣ 장소 : 합정역6번출구 달의다락
▣ 내용 : 음악감상을 겸한 백석 시 읽기와 양화대교 걷기
쉼없이 아니 잠시 쉬더라도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 편을 들며, 옳은 생각을 하고 옳은 말을 하며, 남은 둘째치고 자기가 그렇게 생각하고 말한대로 살아야 한다.
이는 영락없이 광양만에서 구례까지 밤새 걸어가보면 끝없는 섬진강이 돌아도 부딪혀도 흘러가 끝내 바다로 나아가는 이치와 같다.
그런데 곧은 직선과 구불구불한 곡선 그 위 이별의 경지가 있다.
리별은 美의 創造임니다
리별의 미는 아츰의 바탕 업는 황금과 밤의 올 업는 검은비단과 죽엄 업는 영원의 생명과 시들지 안는 하늘의 푸른꼿에도 업슴니다
님이어 리별이 아니면 나는 눈물에서 죽엇다가 우슴에서 다시 사러날 수가 업슴니다 오오 리별이어
리별은 美의 創造임니다
― 한용운, '리별은 美의 創造', 《님의 침묵》(1926.5.20)
만해는 직선과 곡선 위를 걷는 역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마치 강이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듯하다가도 흐르는 것이 이별인가 궁금한 실마리이기도 하다.
이 시는 이별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빛이 거세된 황금, 어둠 속 검은 비단, 결코 죽음에 이르지 않는 목숨과 시들지 않는 꽃은 아름답지 않다. 만해의 선언이다.
이별이야말로 아름다움을 창조한다.
자신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몸서리치는 고독과 외로움에 처하며, 누구도 구출해주지 못하는 위험에 처해있다면 절망 한 가운데 자살을 택할 것인가 이별이 창조해낸 아름다움으로 스스로를 일으킬 것인가.
시인 백석과 만해 한용운은 둘 다 고독한 길을 스스로 택해 외롭게 걸었고 금욕적인 삶을 이어갔다.
그런데 만해가 묵던 심우장은 공교롭게도 백석의 연인을 자처하는 이가 주인이었다는 길상사 맞은 편 가까이 자리하고 있다.
법정스님에게 정경유착의 야합을 벌이던 대원각이라는 요정을 기부한 한 여주인의 연예담으로, 자기 스스로보다 대원각 마담 자야의 연인으로 더 알려진 '월북시인' 백석은 자신과 만해가 이런 식으로 가까운 연을 맺게 것에 대해 뭐라 말할까?
길상사 안에는 공덕주 길상화 보살이라는 비석이 있는데 본명 김영한(1916~1999)를 기리는 것으로 1937년 천재시인 백석으로부터 자야라는 아명으로 불리었다고 쓰여 있고 마지막엔 '나와 나타샤와 힌당나귀' 시로 맺는다. 나타샤는 바로 김영한이라고.
다음은 백석연구가 김달진과의 이메일 문답이다.
예술배달부 : 이 길상사 여주인이 월북시인 백석과 사랑에 빠져 그로부터 중국 전설 속 여인의 이름 인 자야라는 아명까지 받았다고 이곳저곳에서 소개되고 있다. 끝에서 백석의 연인 자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가진 것을 모두 보시했다며.
김달진 : 사실과 허구가 섞여 있다. 대체로 자야와 백석의 이야기는 허구이고 자야와 법정과의 관계는 사실인 듯하다. 자야는 백석이라는 시인을 1987년 이후에 이동순 교수의 '백석시 전집'을 통해서 알았을 것이다.
'내 사랑 백석'은 1995년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는데 이 책의 지은이는 김자야라고 되어 있지만 이 책의 부제는 '백석 시인과 자야여사의 애절한 사랑이야기'이다. 어찌 여기서 지은이는 자기 스스로를 '여사'라 칭하고 있는가. 이 책은 표지에서부터 대필의 냄새가 강하게 난다.
책장을 열면 백석 시인에 대한 구체적인 얘기가 전무하다시피 하다. 실제로 백석의 삶을 오랫동안 추적해온 송준 씨의 주장과 다른 이야기가 곳곳에 드러난다.
대원각은 원래 자야의 소유물이 아니라 ‘조선의 레닌’으로 불렸던 불운의 혁명가 박헌영의 땅이었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박헌영의 유일한 혈육인 그의 아들 원경 스님의 주장이다(서울신문 2010-08-31 22면,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00831022005).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박헌영이 대원각의 명의만 잠시 자야에게 돌려놓은 것인데 이를 자야가 수십년 후 자의대로 처분한 것이다. 이 설은 천억대의 재산을 요정 사업을 통해 모았다는 자야의 주장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다.
예술배달부 : 백석과 만해가 심우장과 길상사가 아니라 심우의 '소'로 연결이 되었다고 했는데.
일제시대에 시를 쓰는 사람으로 시적 양심을 지킨 대표적인 시인으로 만해를 꼽지만 그와 대등하게 백석을 꼽지는 않는다.
시인 백석은 그저 천재시인, 미남 모던보이, 그러나 황해도 토속어를 발굴한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 정도로만 불린다. 그리고 늘 그를 설명할 때는 최근 철학자라는 강신주나 심지어 고은 시인조차 자야라는 여인과의 낭만적이며 육감적인 사랑을 빼놓지 않는다.
그러니 3.1운동을 주도하고 옥고를 치르다 광복을 차마 못보고 죽어간 만해의 절개와 비교한다는 자체가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 많은 여류시인이나 기생과 연예질이나하고 이혼을 일삼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데.
김달진 : 백석은 만해 못지않게 치열하게 일제의 폭압과 시대의 불의에 저항하며 살다 죽었다.
백석이 새악시를 버리고 집을 나온 것, 한때 기생집에 얹혀 산 것, 아내와 자식을 신의주에서 버린 것은 무책임하고 방탕한 짓거리가 아니다.
이는 모두 조선의 미래를 위해 신중하게 결정한 공의로운 처신이다. 이러한 기행과 방종을 체계적이고 계획적으로 실천한다는 것은 위인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이러한 점에서 독자들과 연구자들은 백석을 만해와 동등한 자리에 앉혀 놓고서 접근해야 할 것이다.
예술배달부 : 만해 한용운이 살다간 심우장에서 심우는 '소를 찾다가 깨달음에 불성에 이른다'는 뜻의 尋牛이다.
소를 찾는 열 단계 그림이 심우도(尋牛圖)이 법당 바깥 벽에 많이 그려져 있다.
소의 천성은 우직하고 성급하지 않은 우리 민족 기질과 닮았다고 한다. 순박하고 평화로운 천성도 같다고 한다.
김달진 : 백석은 자신의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고 썼다.
그가 자비로 내놓은 유일한 시집 <사슴>엔 '절간의 소 이야기'가 나오고 36년 '조광' 2월호에 발표한 '오리'에도 역시 소가 나온다.
병이 들면 풀밭으로 가서 풀을 뜯는 소는
인간人間보다 령靈해서 열 걸음 안에
제 병을 낫게 할 약藥이 있는 줄 안다고
수양산首陽山의 어늬 오래된 절에서
칠십七十이 넘은 로장은 이런 이야기를하며
치마자락의 산山나물을 추었다
― '절간의 소 이야기', 《사슴》
오리야 고운 오리야 가만히 안겼거라
너를 팔어 술을 먹는 노(盧)장에 영감은
홀아비 소의연 침을 놓는 영감인데
나는 너를 백통전* 하나 주고 사오누나
나를 생각하든 그 무당의 딸은 내 어린 누이에게
오리야 너를 한쌍 주드니
어린 누이는 없고 저는 시집을 갔다건만
오리야 너는 한쌍이 날어가누나
― ‘오리’에서, 《조광》, 1936.2
예술배달부 : 여기 백석에게 '소'는 어떤 의미 또는 상징을 가지는가?
김달진 : 일제 강점기에 나라를 잃은 조선인들은 모두 소의 운명을 갖고 태어났다. 고삐에 매여 일을 하며 억지로라도 살아 남아야 하는 것이 우리 할아버지들의 인생이었다.
백석과 만해는 조만식이나 이중섭 민초들의 고단한 삶에서 소의 억척스러움과 강인함에 깊은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소는 기본적으로 예술세계의 소이다.
그것은 힌두교의 신 중의 왕인 인드라가 거느린 아이라바타(코끼리 중의 코끼리)처럼 흰빛을 띠고 있으며 태생적으로 숨바꼭질하는 소이다.
그리고 그 소는 조선의 독립으로 얻어지는 소가 아니라 우리 후대인들이 찾아내야 하는 소이다.
백석과 만해의 소를 '고삐에 매여 있는 코끼리'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파리의 개선문에 있는 코끼리, 그리고 시엠리업의 앙코르톰의 승리의 문에 있는 코끼리와 일맥 상통한다.
예술배달부 : 만해의 '수의 비밀'과 백석의 '여승'과 '수라'와 어떤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는가?
김달진 : '수'는 시인이자 문예 이론가인 김화산의 '무산계급의 아나키즘 예술론'과 상통한다.
이러한 고민을 구체적으로 보여준 세 편의 시가 바로 위의 시이다.
일제의 폭정에 조선 땅의 지도자와 시인들이 어느 길을 가야 할 것인가를 일찍이 한용운은 기미 독립운동 후 3년간의 옥살이 기간과 그 후의 의연한 삶의 통해, 그리고 시집 '님의 침묵'을 통해 보여졌다.
193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부터 전세계에 전쟁의 암흔이 짙어지면서 일제는 이전보다 훨씬 더 노골적이고 전면적인 출판-언론 통제를 단행하게 되는데 이러한 때 시인들이 진실을 찾는 시를 발표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백석을 비롯한 몇몇 시인들과 예술가들은 더욱 더 정교해지고 예리한 '수'를 강구하게 되는데 그 오랜 산통 끝에 탄생한 것이 수들의 수라 할 수 있는 '옥수수'이다. 이러한 '옥수'라는 수의 탄생을 비유적이고 상징적인 언어로 구현한 시가 바로 백석의 '여승'이고 '수라'인 것이다.
예술배달부 : 한용운의 '비'는 구원의 매개물로 작용하는데 백석의 시에서도 '나와 지렝이' 속의 '농다리'와 '비', '고야' 중에 나오는 '내빌눈', '내빌물'도 그러한지.
김달진 : 백석이 '사슴'을 1936년 1월에 출간하면서, 그 전에 약 10년 전 만해가 발행한 시집 '님의 침묵'을 자세히 보았을 것이다.
실제 백석의 시 중에는 만해의 이런 모습이 상당히 구체적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예술배달부 : 많은 학자들과 연구자 그리고 신문기자들은 백석이 북한에서 고통스러운 치욕의 시간들을 보냈다며, 북한에서 발표한 시와 글들을 들고 있는데 이는 하나같이 틀린 말인가?
김달진 : 심한 왜곡이다.
북한에서의 백석의 생애는 결코 고통과 좌절로 점철된 문학적 공백기가 아니었다.
그는 북한에서도 ‘제2인공위성’ ‘석탄이 하는 말’ ‘사회주의 바다’ ‘오리들이 운다’ 같은 애틋하면서도 강렬한 어조의 시들을 1962년 5월까지 꾸준히 발표했다.
'인공위성'은 "별이 된 사람들"의 이야기이며, '사회주의 바다'는 백석시 해석의 단초가 되는 '비' 즉 '바다'에 대한 축사이며, "빡빡" 우는 오리는 그 '바다'의 주인공인 Bach, 즉 '빡'을 애틋하게 찾은 노래인 것이다.
달은 밝고 당신이 하도 긔루엇슴니다
자던 옷을 고처 입고 뜰에 나와 퍼지르고 안저서 달을 한참 보앗슴니다
달은 차차차 당신의 얼골이 되더니 넓은이마 둥근코 아름다은수염이 넉넉히 보임니다
간해에는 당신의 얼골이 달로 보이더니 오늘밤에는 달이 당신의 얼골이 됨니다
당신의 얼골이 달이기에 나의 얼골도 달이 되얏슴니다
나의 얼골은 그믐달이 된 줄을 당신이 아심닛가
아아 당신의 얼골이 달이기에 나의 얼골도 달이 되얏슴니다
― 한용운, '달을 보며', 1926. 5. 20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옛나라에 비춘 달아
쇠창을 넘어 와서
나의 마음 비춘 달아
계수나무 베어내고
무궁화를 심으과저.
달아 달아 밝은 달아
님의 거울 비춘 달아
쇠창을 넘어 와서
나의 품에 안긴 달아
사랑으로 도우고자.
달아 달아 밝은 달아
가이 없이 비친 달아
쇠창을 넘어 와서
나의 넋을 쏘는 달아
구름재를 넘어 와서
너의 빛을 따르고자.
― 한용운, '무궁화 심으과저', 《개벽》(1922. 9)
아배는 타관 가서 오지 않고 山비탈 외따른 집에 엄매와 나와 단둘이서 누가 죽이는 듯이 무서운 밤 집 뒤로는 어늬 山곬작이에서 소를 잡어 먹는 노나리군들이 도적놈들같이 쿵쿵걸이며 다닌다
날기 멍석을 저 간다는 닭 보는 할미를 차 굴린다는 땅 아래 고래 같은 기와집에는 언제나 니차떡에 청밀에 은금보화가 그득하다는 외발 가진 조마구 뒷山 어늬 메도 조마구네 나라가 있어서 오줌누러 깨는 재밤 머리맡의 문살에 대인 유리창으로 조마구 군병의 새깜안 대가리 새깜안 눈알이 들여다 보는 때 나는 이불 속에 자즐어 붙어 숨도 쉬지 못한다
또 이러한 밤 같은 때 시집갈 처녀 망내고무가 고개 넘어 큰집으로 치장감을 가지고 와서 엄매와 둘이 소기름에 쌍심지의 불을 밝히고 밤이 들도록 바느질을 하는 밤 같은 때 나는 아릇목의 샅귀를 들고 쇠든밤을 내여 다람쥐처럼 밝어먹고 은행여름을 인두불에 구어도 먹고 그러다는 이불 ?에서 광대넘이를 뒤이고 또 ?어 굴면서 엄매에게 ?목에 둘은 평풍의 샛?안 천두의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고무더러는 밝는 날 멀리는 못 난다는 뫼추라기를 잡어달라고 졸으기도 하고
내일같이 명절날인 밤은 부엌에 쎄듯하니 불이 밝고 솥뚜껑이 놀으며 구수한 내음새 곰국이 무르끓고 방안에서는 일가집 할머니가 와서 마을의 소문을 펴며 조개송편에 달송편에 죈두기송편에 떡을 빚는 곁에서 나는 밤소 팟소 설탕 든 콩가루소를 먹으며 설탕 든 콩가루소가 가장 맛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얼마나 반죽을 주물으며 힌가루 손이 되여 떡을 빚고 싶은지 모른다
섯달에 내빌날이 드러서 내빌날 밤에 눈이 오면 이 밤엔 쌔하얀 할미귀신의 눈귀신도 내빌눈을 받노라 못 난다는 말을 든든히 녁이며 엄매와 나는 앙궁 ?에 떡돌 ?에 곱새담 ?에 함지에 버치며 대냥푼을 놓고 치성이나 들이듯이 정한 마음으로 내빌눈 약눈을 받는다 이 눈새기 물을 내빌물이라고 제주병에 진상 항아리에 채워두고는 해를 묵여 가며 고뿔이 와도 배앓이를 해도 갑피기를 앓어도 먹을 물이다
― 백석, '고야(古夜)', 《사슴》, 1936.1
삼수갑산 높은 산을 내려
홍원 전진 동해바다에
명태를 푸러 갔다 온 처녀,
한달 열흘 일을 잘해
민청상을 받고 온 처녀,
삼수갑산에 돌아와 하는 말이―
"삼수갑산 내 고향 같은 곳
어디를 가나 다시 없습데
홍원 전진 동태 생선 좋기는 해도
삼수갑산 갓나물만 난 못합데."
그런데 이 처녀 아나 모르나.
한달 열흘 고향을 난 동안에
조합에선 세톤짜리 화물자동차도 받아
내일 모레 쌀과 생선 실러 가는 줄,
내일 모레 이 고장 갓나물 실어 보내는 줄.
삼수갑산 심심 산골에도
쌀이며 생선 왕왕 실어 보내는
크나큰 그 배려 모를 처녀 아니나,
그래도 제 고장 갓나물에서
더 좋은 것 없다는 이 처녀의 마음.
삼수갑산 갓나물같이 향기롭구나 ―
― 백석, ‘갓나물’, 《조선문학》, 195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