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저자의 약력이 적혀 있는 책 표지의 날개에, 8년 만에 시집을 엮어 낸다는 ‘시인의 말’이 있다는 것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모두 다섯 개의 항목으로 정리한 시편들은 시인의 과거 기억으로부터 최근의 삶까지를 아우르고 있다고 여겨졌다. 각각의 항목을 ‘매듭’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아마도 시인이 만들어낸 작품들이 그러한 매듭으로 엮인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어한 결과라고 이해된다. 그래서 ‘첫째 매듭’은 주로 인도에 머물 당시 창작한 작품들을 수록한 것으로 여겨졌다. 작품의 부제 혹은 제목에서 ‘보드가야’나 ‘사르나트’라든지 ‘수자타’ 같은 지명이 등장하고, 그 내용으로 보아서도 이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시인은 ‘비유’를 시를 창작하는 작업에 빗대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시집에 수록된 첫 번째 작품인 ‘오월 낙엽’이라는 제목이 그렇듯이, 더욱이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시를 쓰는 일에 대한 시인의 고민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나의 비유는 끝이 났다, 수맥이 옮겨간 숲처럼 / 나의 언어는 / 죽은 새의 부리처럼 갈라졌다/ ...... / 비유는 죽고, 나만 앙상하게 남았다 / 내 생의 최대의 비유가 / 생리를 시작하기도 전에 / 나의 언어는 바닥을 드러냈다.” 자신의 내면에 비유가 죽어버렸다고 느낀 순간, 새로운 작품을 창작한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토로한 것이라고 이해된다. 그래서 8년 만에 시집을 상재한 것에 대한 일종의 넋두리를 표출한 것이리라.
열무 솎듯 쑥쑥 뽑아서 박스에 던졌다
박스를 들어 문밖에 냈다
서너 박스는 재활용 쓰레기로 내고
너덧 박스는 주위에 돌리고
서너 박스는 동네 도서관 사서에게 맡겼다
정신의 한 모서리가
해빙에 어긋난 축대처럼 헐거워졌다
어젯밤 참 편안하게 잤다
잠자리에 누워서
웃풍이 숭숭 드는 정신의 남루를 바라보았다
미련의 골재들이 빠져나간 집이
숭숭 넓어서
오늘 아침, 아시 나가기가 아깝다
흥부네 까대기에 누워서 보는 일출의 아침이다
(‘풍찬노숙(風餐露宿)’ 전문)
이사를 가기 전 지니고 있던 책들을 정리하는 것을 형상화한 작품이라고 이해된다. ‘풍찬노숙(風餐露宿)’이란 바람을 끼니 삼고 이슬을 맞으며 잔다는 뜻으로, 여기저기 떠돌며 힘들게 산다는 것을 비유하는 표현이다. 아마도 어느 순간 자신의 삶이 그렇게 느껴졌기에 이런 작품으로 형상화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박스에 넣어 흩었던 책들은 그간 시인이 정성스레 모았던 것들이기에, '정신의 한 모서리가 / 해빙에 어긋난 축대처럼 헐거워졌다'고 표현했을 것이다. 더욱이 그렇게 덜어낸 후의 모습을 ‘미련의 골재들이 뽑혀나간 집’이라고 표현했다고 이해되었다. 나 역시 여전히 책에 대한 ‘미련의 골재’를 잔뜩 지니고 있기에, 이 작품을 썼을 때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시집의 ‘다섯째 매듭’은 캐나다 서부의 도시 밴쿠버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이 차지하고 있다. 나 역시 과거 1년 동안 그곳에서 지냈던 적이 있기에, 여기에 수록된 작품들을 읽으면서 당시의 기억을 떠올려보기도 했다. 이와 함께 어머니와 외할머니에 대한 추억이 시인의 작품을 이루는 주제의 하나로 일관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그것을 ‘비유의 바깥’으로 끌어내는 작업이 결국 시를 창작하는 과정일 것이다. 이제 충분히 비워진 ‘정ㅅ힌의 남루’를 새로운 ‘비유의 언어’로 채울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차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