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서 | 이름 | 저자 | 권수 |
1 | 사기(史記) | 전한 사마천(司馬遷) | 130 |
2 | 한서(漢書) | 후한 반고(班固) | 100 |
3 | 후한서(後漢書) | 유송 범엽(范曄, 398년 ~ 445년) | 120 |
4 | 삼국지(三國志) | 서진 진수(眞髓) | 65 |
5 | 진서(晉書) | 당 방현령(房玄齡), 李延壽(이연수) 등 20명 | 130 |
6 | 송서(宋書, 487) | 양 심약(沈約) | 100 |
7 | 남제서(南齊書) | 양 소자현(蕭子顯) | 59 |
8 | 양서(梁書) | 당 요사렴(姚思廉) | 56 |
9 | 진서(陳書) | 방현령(房玄齡) 등 130 | 36 |
10 | 위서(魏書) | 북제 위수(魏收) | 114 |
11 | 북제서(北齊書) | 당 이백약(李百藥) | 50 |
12 | 주서(周書) | 당 영호덕분(令狐德棻),진숙달(陳叔達),유검(庾儉)등 | 50 |
13 | 수서(隋書) | 당 위징(魏徵) 등 | 85 |
14 | 남사(南史) | 당 이연수(李延壽) | 80 |
15 | 북사(北史) | 당 이연수(李延壽) | 100 |
16 | 구당서(舊唐書) | 후진 유후(劉昫)등 | 200 |
17 | 신당서(新唐書) | 송 구양수(歐陽修), 송기(宋祁) 등 | 225 |
18 | 구오대사(舊五代史) | 송 설거정(薛居正) 등 | 150 |
19 | 신오대사(新五代史) | 송 구양수(歐陽修) | 74 |
20 | 송사(宋史) | 원 토크토(托克托) 등 | 496 |
21 | 요사(遼史) | 원 토크토(托克托) 등 | 116 |
22 | 금사(金史) | 원 토크토(托克托) 등 | 135 |
23 | 원사(元史) | 명 송렴(宋濂) 증 | 210 |
24 | 명사(明史) | 청 장정옥(張廷玉) 등 | 332 |
25 | 신원사(新元史) | 중화민국·커샤오민(柯劭忞, 1850~1933년) 등 | 257 |
26 | 청사고(淸史稿) | 중화민국·자오얼쑨(趙爾巽) 등 | 536 |
2. 백문루(白門樓)와 비익루(飛翼樓)
오왕 합려(闔閭)가 백문루(白門樓)를 짓고 범려(范蠡)가 구천(句踐)을 위하여 비익루(飛翼樓)를 세웠다는 기록도 같은 의미로 해석된다.
Ⅱ. 한국
1. 이요루(二樂樓)와 천천정(天泉亭)
구전(口傳)에 의하면 삼한시대에 춘천의 소양정(昭陽亭) 자리에 이요루(二樂樓)가 있었다고 한다. 신라 21대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이 488년 정월에 천천정(天泉亭)에 행차하였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처음 보인다. 여기에서 서출지(書出池)의 지명설화로 미루어 천천정은 연못을 갖춘 정자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의 2대 유리왕(瑠璃王)이 즉위 3년 BC 17년 계비인 화희(禾姬)와 치희(雉姬)를 별거시키기 위하여 동서에 두 별궁을 축조하였고 백제 16대 진사왕(辰斯王)은 391년에 궁전을 중수하여 못을 파고 그곳에 산을 쌓는 역사(役事)를 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기록에 의하여 볼 때 천천정 이전에 이미 누정의 축조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측되나 옛 기록이 확실하지 못하여 5세기 이전의 우리 나라 누정의 역사는 알기 어렵다.
백제 24대 동성왕(東城王)은 500년에 궁 동쪽에 임류각(臨流閣)을 세우고 못을 파서 기이한 짐승을 길렀으며 30대 무왕(武王)도 634년에 궁 남쪽에 못을 파고 방장(方丈)의 선도(仙島)를 만들었으며 636년에는 망해루(望海樓)에서 군신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고 한다.
안압지(雁鴨池)는 삼국사기 문무왕 14년 2월조에 의하면 “궁 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기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하여 삼국통일을 전후로 조성하기 시작하여 문무왕 14년 674년에 완성한 것으로 통일신라시대의 뛰어난 조경술을 보여준다.
누정은 궁실을 위한 원림(園林)의 조성과 군신(君臣)간의 유휴처로서 조영(造營)되기 시작하여 후대에 사대부들이 풍류로 즐기는 장소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제3절 위치(位置)
Ⅰ. 경승지(景勝地) 배산조망(背山眺望)
경승지(景勝地), 경승지지(景勝之地), 보승지(保勝地)는 경치가 좋은 곳을 말한다. 누정은 경관이 좋은 산(山)이나 대(臺, 墩臺) 또는 언덕(丘陵, 岡阜, 岡陵) 위에 위치하여 산을 등지고 앞을 조망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삼척 죽서루(竹西樓), 고성 만경루(萬景樓)와 같이 전망대로서 산꼭대기나 절벽 위에 축조한 누정도 적지 않다.
죽서루 강원도 삼척시 죽서루길 37
Ⅱ. 수애임수(水涯臨水)
누정은 냇가, 강가, 호수, 바다 등에 임하여 세워져 있다. 산이나 언덕이 있으면 그에 따라 물이 흐르는 산곡 또는 호수가 있게 마련이므로 산누정은 대부분이 물가에 임하여 있다. 누정이름에 천(川), 계(溪), 강(江), 유(流), 호(湖), 폭(瀑), 해(海), 파(波) 등이 있는 것은 누정의 위치가 임수(臨水)를 주로 하였기 때문이다.
Ⅲ 유원원림(囿苑園林)
궁실의 후원 등 원림에 많은 누정이 건립되어 있다. 태종 5년 1405년 건립한 서울 창덕궁의 후원(後苑)이었던 비원(秘苑)에는 정자만도 17동이나 된다. 궁실의 사치(奢侈)는 누정의 건립으로 인한 것이 많았는데 궁원의 조경을 통하여 좋은 원림을 이루고자 한 뜻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담양 소쇄원
Ⅳ. 변새성지(邊塞樓城址)
변방(邊方) 또는 성터(城址)에도 누정이 많이 건립되었다. 주로 병사(兵舍)로 쓰기 위하여 지은 건물이므로 그 성격은 특이하지만 산수의 지형이 고려된 것이므로 위치의 경관은 일반 누정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오랑캐를 평정하기 위하여 함경도 삼수에 지었다는 진융루(鎭戎樓)의 경치가 매우 좋았다고 한다.
제4절 지역적 분포
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문헌에 의하면 우리나라 전체 누정 가운데 경상도와 전라도의 누정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1937년에 편찬된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에 따르면 경상도가 1295개로 가장 많고 전라도(1070개), 충청도(219개), 강원도(174개), 제주도(6개) 순이다. 경상도 중에서는 안동(97개), 산청(83개), 예천(79개), 거창(69개) 등 순으로 많다. 전국 누정의 수는 모두 553동이나 중종 21년 1531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국역본), 신증문헌비고(新增文獻備考), 고종 1년 1864년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지지(大東地志), 고종때 작자 미상의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등의 기록을 참고하여 885동으로 하고 있다. 누(樓) 416동, 정(亭) 365동, 당(堂) 45동, 나머지는 대(臺), 헌(軒), 각(閣), 관(館), 기타 등으로 누(樓)가 가장 많다. 누는 정자와는 달리 성문(城門) 혹은 성루(城樓)로 세워지기도 하고 객사 등 관아(官衙)의 부속으로 건립된 경우가 많아 옛 문헌에 의거하여볼 때 우리나라의 누정에는 누가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난다.
Ⅱ. 문화유적총람(文化遺蹟總攬)
1977년 발행된 문화유적총람에는 모두 548동의 누정 가운데 정자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어 우리 나라의 누정은 정자 위주임을 입증하고 있다.
전국 각 지방의 누정을 재조사하여 보면 그 수는 훨씬 많을 것으로 추측된다. 전남대학교 호남문화연구소에서 1985년 이후 계속하여 실시한 전남지역의 누정 조사연구에 의하면 위에 든 문헌에 있는 누정 외에 새롭게 발견된 건물이 상상 외로 많기 때문이다. 문화유적총람을 보면 우리 나라의 누정은 경상북도에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고 그 다음이 경상남도이며 전라남도 지방도 다른 지역에 비하여 그 수가 적지 않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여 다시 각 지방의 누정 분포를 보면, 함경도는 함흥, 갑산, 삼수, 추성, 안변 등에 많고, 평안도는 평양, 영변, 안주, 정주 등에, 황해도는 황주, 해주 등에, 강원도는 강릉, 평해, 원주, 양양 등에, 경기도는 광주에, 충청도는 충주, 공주, 보령 등에, 경상도는 경주, 안동, 거제, 영해, 상주, 구미 등에, 전라도는 전주, 남원, 순창, 광산, 화순 등에 누정이 많은 편이다. 우리 나라의 누정은 역시 경상도에 제일 많고 그 다음이 전라도이다. 그리고 누정은 주로 강가의 구릉이나 해변의 산기슭에 위치하므로, 낙동강(洛東江) 주변을 비롯하여 영산강(榮山江), 섬진강(蟾津江), 금강(錦江), 임진강(臨津江), 한강(漢江), 소양강(昭陽江), 대동강(大同江), 청천강(淸川江) 등과 관동지방의 동해연변에 많이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제5절 명칭(名稱)의 유래
Ⅰ. 자연 생태 환경
1. 부근의 자연과 관련된 명칭
산수와의 관련에 의하여 붙여진 명칭이 많다. 산에 있는 누정은 대개 산의 지형, 또는 바위나 절벽 등과 관련된 이름이 많다. 영월의 요선정(邀仙亭)은 요선암 위에, 남원의 용두정(龍頭亭)은 용머리와 같은 기암 위에, 구례의 봉성산 밑에 있었다는 봉서루(鳳棲樓)는 그 고을의 지형이 봉과 같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다. 물가나 물 위에 있는 누정명은 내와 호수, 바다, 못 등과 관계가 있다. 영월 금강정(錦江亭), 강릉 송파정(松波亭), 영동 금호루(錦湖樓), 태안 망해루(望海樓) 등은 각각 금강과 송현의 저수지, 금강에 있는 금호와 멀리 바라보이는 서해 등에서 연유된 이름이다.
2. 자연의 풍월, 구름, 비 등에서 연유된 이름
서울 종로의 상량정(上凉亭)은 예로부터 여름의 삼복에 납량(納凉)을 즐겼던 곳이며 희우정(喜雨亭)은 가뭄에 비오기를 빌다가 단비를 맞고 이름을 붙였다고 전한다. 저녁에 떠오르는 아름다운 달을 맞이한다는 광주(廣州)의 영월루(迎月樓), 구름을 즐긴다는 이천의 열운정(悅雲亭) 등도 모두 같은 예에 속한다.
3. 동식물과 연관된 이름
영월 자규루(子規樓)는 원래 매죽루(梅竹樓)였는데 단종(端宗)이 1457년 6월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영월 청령초(淸泠浦)로 유배(流配)될 때 이 누에 올라 슬피 우는 자규(子規, 子鳺, 子𨾚) 소리를 자주 듣고 자규시를 읊었다고 하여 고쳐 붙인 이름이며, 진도의 동백정(冬柏亭)은 동백(冬柏)이 수백그루 있는 곳에 세웠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동물류로는 봉황(鳳凰, 鳳䳨) 용(龍), 거북(龜) 등 상상의 동물과 학(鶴, 鸖, 鶮, 두루미), 갈매기(白鷗, 漚鳥, 鷗鳥) 등이 식물류로는 흔히 군자로 상징되는 4군자(梅, 蘭, 菊, 竹), 연꽃, 소나무 등이 누정의 이름으로 많이 쓰였다.
4. 포괄적인 감상의 흥취로 생긴 이름
어느 한 자연물만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자연을 대할 때의 포괄적인 감상의 흥취로 생긴 누정의 이름도 있다. 간성 만경루(萬景樓)), 망선루(望仙樓)를 개명한 청주의 취경루(聚景樓) 등이 바로 이러한 경우이다.
Ⅱ. 인물의 호칭과 관련된 이름
1. 성명이나 별호와 관계된 이름
양양 하조대(河趙臺)는 하(河)씨 집안의 총각(總角)과 조(趙)씨 집안의 처녀(處女) 사이에 사랑에 얽힌 이야기에서 하조대라고 했다하는 설도 있고 이곳의 절승(絶勝)을 탐승(探勝, 撢勝)하던 하륜(河崙)과 조준(趙浚)의 성에서 따온 호칭이라고도 한다. 영조 45년 1769년에 건립한 달성 삼가헌(三可軒, 주요민속자료 제104호)을 비롯하여 광해군 6년 1614년 괴산 애한정(愛閑亭, 충청북도 유형문화제 제50호)과 1392년 피세정(避世亭), 중종 28년 1533년 담양의 면앙정(俛仰亭)과 선조 17년 1584년 건립하여 1770년 개칭한 송강정(松江亭) 등은 박성수(朴聖洙, 朴彭年 10대손), 박지겸(朴智謙), 조신(曺紳)은 선조의 호를 송순(宋純), 정철은 건립자의 호를 따서 붙인 명칭이다.
송강정
2. 계(契)・회(會)에서 건립한 이름
다수의 모임으로 된 계(契)나 회에서 건립한 모임의 이름과 같다. 강릉 금란정(金蘭亭), 취영정(聚瀛亭), 정읍 백학정(白鶴亭), 난국정(蘭菊亭) 등은 모두 이러한 모임의 명칭으로 된 누정명이다.
피세정(避世亭) 충청북도 괴산군 문광면 괴산로 3440-10
칠충사(七충祠) 충청북도 괴산군 문광면 괴산로 3440-10
Ⅲ. 한문 구절이나 고사에서 유래된 이름
고려 말 공민왕때 북도안부사(北道按撫使) 겸 병마원수(兵馬元帥)를 거쳐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낸 전신민(全新民)이 고려가 망하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은거하면서 지었다는 담양의 독수정원림(獨守亭園林)은 “이제시하인독수서산아(夷齊是何人獨守西山餓)”라는 이백(李白)의 시에서 서울 성동에 있었다는 화양정(華陽亭, 세종 14년 1432~1911)은 “귀마우화산지양(歸馬于華山之陽)”이라 한 주서(周書)의 글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청원 월송정(月松亭), 제천 탁사정(濯斯亭), 부여 대재각(大哉閣) 등도 이와 같은 예에 속하는 누정이다. 담양의 식영정은 임억령이 장주(莊周)의 외영오적(畏影惡迹)의 이야기에 착안하여 붙인 것이며 제주도의 삼도, 전라남도의 함평, 서울 종로에 건립되었던 관덕정(觀德亭)은 모두 예기 사의편(射義篇)에 “사자소이관성덕야(射者所以觀盛德也)” 사(射)는 덕을 보는 것이라고 한 글에서 취한 이름이다. 관덕정은 원래 활을 쏘는 곳으로 쓰고자 하여 건립한 누정임을 알 수 있다.
제6절 편액(扁額)
Ⅰ. 편액(扁額)
편액(扁額)이란 방 안이나 문간 따위의 위에 거는 가로도 된 긴 액자(額子)를 말하며 편제(扁題)라고도 한다. 대부분의 누정은 이와 같은 편액을 갖추고 있는데, 누정이 다른 건물과 구별되는 점은 바로 이 때문이다.
Ⅱ. 편액의 구분
1. 누정의 명칭이 새겨진 것
주로 세 글자로 되어 있기 때문에 3자횡서(三字橫書)로 새겨 누정 밖에 걸어놓고 있다.
나. 누정기(樓亭記) 또는 누정제영(樓亭題詠)을 현판한 것
누정기는 비교적 긴 한문장(漢文章)이며 누정제영도 5언 또는 7언의 한시로서 이들은 모두 종서(縱書)로 새겨 누정 안에 걸어놓고 있다. 다만 누정시만은 경복궁의 부용정(芙蓉亭)이나 청심정(淸心亭)에서 보는 바와 같이 주련(柱聯, 기둥에 장식으로 써붙인 글귀)에 씌어 밖의 기둥에 걸려 있기도 한다.
2. 사액(賜額)과 명명(命名)
누정명의 편액은 임금의 하사나 유명인사의 명명으로 된 것이 유명하다. 성종의 사액인 서울 종로의 풍월정(風月亭), 숙종의 사액인 희우정(喜雨亭), 정조의 어필(御筆)로 된 주합루(宙合樓) 등이 그 예이다. 포항 화수정(花樹亭) 편액은 김정희(金正喜)의 글씨이고, 영주 구학정(龜鶴亭)과 의성 만취당(晩翠堂)은 한호(韓濩), 강릉의 해운정(海雲亭)은 송시열이 그 편액을 썼다고 해서 보다 더 유명하다.
정자와 다른 이름의 편액이 있는 경우도 있다. 정철이 담양에 세웠다는 송강정은 죽록정(竹綠亭)이라는 편액이 아울러 현판되어 있는데 송강정 아래 죽록평야를 끼고 흐르는 송강을 죽록천이라고도 부른 데서 생긴 이명이다.
누정 내에 현판된 누정기나 누정시 역시 주로 당시의 이름 있는 누정시인의 참여로 이루어졌으며, 편액의 글씨체는 해서, 초서, 예서, 전서 등으로 다양하다. 글자수가 적은 누정의 이름은 초서, 예서, 전서 등으로 쓰인 것이 많고, 글자수가 많은 누정기나 누정시는 해서 또는 반초서로 쓰인 것이 많다. 이 편액은 나무판에 새긴 것이 특색인데, 오목새김(陰刻)보다는 돋을새김(陽刻)으로 된 현판이 주를 이루며, 검은 판에 흰 글씨로 돋보이게 돋을 새김한 현판이 일반적이다.
제7절 누정(樓亭)의 기능
Ⅰ. 유흥상경(遊興賞景)의 기능
누정의 명칭에 자연의 산수로 말미암아 명명된 누정이 가장 많다는 것이 누정의 기능을 시사하여 준다. 흔히 명승지(名勝地)를 유람하고자 하여 누정에 오르고 누정에 오르면 산수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게 됨은 누정의 기능이 바로 유흥상경에 있음을 의미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중종 때의 여러 신하들이 유하정(流霞亭)과 같은 승지의 정자를 찾아 구경하고 이를 노는 장소로 삼았다고 하였고 안노생(安魯生)은 징심루(澄心樓)의 기문(記文)에서 “무릇 누관을 짓되 유람하며 상경하는 즐거움으로 하지 않음이 없다.”고 지적한 바 있다.
Ⅱ. 시단(詩壇)을 이루는 기능
시를 아는 선비들이 누정을 짓고 이를 휴식처로 삼아 거기에서 유유자적(悠悠自適)할 때 찾아오는 이는 물론 뜻이 통하는 시우(詩友)들이다. 유흥상경의 흥치가 시적으로 나타나면 그것은 곧 누정시가 되었으니 누정시단은 이렇게 해서 형성되었다. 면앙정시단, 식영정시단은 면앙정이나 식영정에서 누정제영을 읊으며 시작활동을 하던 시적 교유의 집단을 말한다. 식영정에서는 임억령을 중심으로 한 김성원(金成遠), 고경명(高敬命), 정철(鄭澈사자소이관성덕야(射者所以觀盛德也) 등 성산(星山)의 사선(四仙)이 호운작시(呼韻作詩)하며 시적 사귐을 가졌는데 이들은 식영정사선(息影亭四仙) 또는 성산사선(星山死線)이라는 식영정시단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Ⅲ. 학문수양, 강학(講學)과 인륜의 도를 가르치던 구실
누정에는 사대부들이 벼슬을 그만두고 은퇴하여 유휴처로서 지내던 곳이 많다. 광해군 때의 처사(處士) 오유립(吳裕立)이 청원에 월송정(月松亭)과 지선정(止善亭)을 짓고 그곳에 은거하면서 유생을 가르쳐 많은 문사를 배출하였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누정은 강학하고 인간의 규범을 깨우치던 정사(精舍)의 구실을 겸하였다고 볼 수 있다.
식영정(息影亭)
Ⅳ. 모임의 장
누정에서는 씨족끼리의 종회(宗會)나 마을사람들의 동회(洞會) 또는 각종 계의 모임을 가지기도 하였다. 누정에는 종친들의 합의에 의하여 또는 마을공동으로 혹은 계의 모임에서 건립한 것이 적지 않다. 청풍김씨의 종중에서 세운 괴산의 모선정(慕先亭), 선조 때의 동중계약(洞中契約)부터 보존하여 오고 있는 나주의 쌍계정(雙溪亭) 등은 건립취지에 따라 종회나 계회 또는 동회가 개최되었던 곳이다.
Ⅴ. 사정사장(射亭射場)
누정 중에는 활쏘기를 연습하는 곳인 사장(射場, 활터)의 구실을 하던 곳이 많다. 관덕정은 모두 궁술 연마를 위하여 건립한 누정이다. 서울의 다섯 사장이었던 옥동 등룡정(登龍亭), 삼청동 운룡정(雲龍亭), 사직동 대송정(大松亭), 누상동 풍소정(風嘯亭), 필운동 등과정(登科亭)은 모두 궁술 연습장으로 이름난 곳이었다. 그 밖에 전국 도처에서 활쏘기를 연습하던 정자를 발견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아 누정이 사장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음을 짐작할수 있다.
Ⅵ. 문루(門樓) 또는 치적 표상(治績 表象)
누정은 한 고을의 문루(門樓) 또는 고을을 잘 다스렸다는 공적인 치적(治績)을 표상하는 것으로도 건립되었다. 옛날에는 고을을 지키기 위하여 성을 쌓으면 으레 성루(城樓)를 두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함흥부의 누정조에 남쪽 남화루(南華樓) 북쪽 망양루(望洋樓) 등 열두 성루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모두 성의 기능을 가진 누정들이다. 변방을 지키기 위하여 세웠던 삼수 진융루(鎭戎樓), 은성 진변루(鎭邊樓), 의주 통군정(統軍亭)도 성루의 하나이다. 고을에 따라서는 북청 진남루(鎭南樓), 평양 대동문루(大同門樓) 등과 같이 동서남북에 문루가 있었던 경우도 있다. 승지를 가려 오고가는 벼슬아치들의 접대소 또는 휴식소로서 객관(客館)에 따른 누정을 짓기도 하였다. 큰 고을이나 치적을 자랑하는 지방에서는 이와 같은 누정의 사치가 적지 않았다.
Ⅶ. 기타 기능
누정의 기능은 그밖에 별장(別莊), 전쟁 때의 지휘본부, 무예연마장, 재실(齋室), 치농(治農), 측후(測候) 등 여러 가지이다. 서거정(徐居正)은 학명루기(鶴鳴樓記)에서 누정은 나라의 사신을 정중히 맞이하고 빈객을 접대하기 위함이며 때와 기후를 예측하고 농사를 살펴서 백성들과 함께 즐기는 뜻을 가지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바로 누정의 기능이 다양함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제8절 장승배기
Ⅰ. 장승(長栍, 장생)
소재지 : 서울시 동작구 장승배기로(노량진2동)
1. 의의
장승(長栍) : ① 기다란 통나무나 돌 따위에 사람의 얼굴 모양을 익살스럽게 새겨 세운 것[호법상(護法像)과 이정표(里程標) 역할]. ② 멋없이 키가 큰 사람. 멍하니 서 있는 사람.
기다란 통나무나 돌 따위에 사람의 얼굴 모양을 익살스럽게 새겨 세운 것으로 조선 시대에는 후자(堠子), 장생(長栍), 장승(長丞, 張丞,長承) 등으로 썼고 지방에 따라 장승, 장성, 벅수, 법수, 당산할아버지, 수살목 등의 이름이 있다. 장승은 보통 남녀로 쌍을 이루며 남상(男像)은 머리에 관모를 쓰고 전면에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 상원대장군(上元大將軍)이라 새겨 있으며 여상(女像)은 관이 없고 전면에 지하대장군(地下大將軍),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 하원대장군(下元大將軍) 등의 글이 새겨 있다.
벅수 : 기다란 통나무 두 개에 각각 익살스러운 남녀의 얼굴 모양과 天下大將軍과 지하여장군이라는 글자를 새기고 마을 어귀에 세워 부락의 수호신상(守護神像)으로 삼던 표목(標木).
2. 종류
장승은 그 재질에 따라 돌로 만든 석장승(石長栍)과 나무로 만든 목장승(木長栍)로 분류할 수 있으며 충남 청양이 나무장승 문화권이라면 대전은 돌장승의 문화권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대전에 그 만큼 다양한 형태의 많은 돌장승이 전승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대전은 돌장승의 도시로 이는 타 지역에 비해 유독 대전에 돌장승이 많기 때문이다. 대전 대덕구 회덕동주민센터 화단에서 읍내동 장승 1기가 발견됐다.
3. 기원
⑴ 고대의 성기(性器) 숭배에서 나온 것
⑵ 장생고(長生庫)에 속하는 사전(寺田)의 표지(標識)에서 나온 것
⑶ 목장승은 솟대(蘇塗, 소도)에서 석장승은 선돌(立石, 입석)에서 유래한 것 등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확실한 기원은 알 수 없다.
4. 기능
⑴ 지역 간의 경계표 구실
⑵ 큰 길가(호동, 街衢(가구))에 세워져 이정표(里程標, milestone) 구실을 하는 것
길가나 마을 경계에 있는 장승에는 그것을 기점으로 한 사방의 주요 고을 및 거리를 표시하였다.
⑶ 절입구에 세워져 그 절을 지키는 호법상(護法像)의 구실을 하는 것, 마을의 수호신 역할
Ⅱ. 장승배기
장승배기는 전국 장승의 우두머리인 대방장승이 서있던 유적지이다.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과 노량진동에 걸쳐있는 마을로서 현재 상도2동 영도시장 맞은편 사거리의 국민은행 앞에 있으며, 서울특별시에서 표석(標石)을 세우고 다시 장승을 만들어 세웠다. 이곳에 장승을 세우게 된 내력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온다. 옛날에 이 일대는 인가가 없고 울창한 나무숲이고 음산하여 왕명으로 장승을 세웠다고 한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잊지 못해 화산(수원)에 있는 아버지의 묘소인 현릉원(顯隆園)으로 전배하러 가다가 이 지점에서 쉬면서, “이곳에 장승을 만들어 세워라. 하나는 장사 모양을 한 남자 장승을 세워 ‘天下大將軍’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또 하나는 여자 장승을 세워 ‘地下女將軍’으로 하여라.” 하고 명하였다. 어명으로 장승배기에는 곧 두 개의 장승이 세워졌다. 이는 왕이 안심하고 행차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마을 사람들이 장승 앞에서 동제(洞祭)를 지내며 마을의 안전을 기원하였다. 이때부터 이곳은 장승배기란 지명이 붙게 되었고 정조는 아버지의 묘소를 찾아 가는 길에 이 장승 앞에 어가를 멈추고 쉬었다고 한다. 왕명으로 세워진 유일한 대방장승은 판소리 ’변강쇠가’의 소재가 되고 ’장승배기’라는 지명의 근원이 되었다.
Ⅲ. 대방장승과 변강쇠(卞强釗)
평안도 월경촌에 옹녀가 살고 있었는데 열다섯에 첫 시집을 간 후 첫 남편이 1년을 넘기지 못하고 급살(急煞)을 한 후 매년 얻은 남편들이 원인 모르게 죽어나가자 마을 사람들이 옹녀를 내 쫓았다고 한다. 마을을 떠난 옹녀는 삼남지방으로 가던 중 황해도 서부에 있는 청석골에서 변강쇠를 만나 신방을 차리고 함께 살았지만 워낙 게으른 강쇠가 재산을 탕진해 결국 지리산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옹녀는 날마다 잠만 자는 강쇠에게 땔감을 해오라고 했는데 게으른 강쇠는 땔감을 하러 가서도 낮잠만 자다가 장승하나를 뽑아서 집으로 돌아오니 깜짝 놀란 옹녀가 장승을 때면 장승동증에 걸려 죽는다고 극구 말렸지만 강쇠는 이를 아랑곳 하지 않고 함양장승을 뽑아 집으로 가져와 도끼로 쪼개 장작불로 써버렸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듣고 분기탱천(憤氣撐天)한 팔도장승들과 대방장승이 노들 나루터에 모여 회의를 한후 변강쇠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갖 병을 다 불어넣기로 하여 머리에서 두팔까지는 전라도・경상도, 겨드랑이(腋窩[액와], 腋間[액간])에서 볼기(臀部[둔부], 脽尻[수고])까지 황해도・평안도, 항문(肛門)에서 두발(頭髮)까지 강원도・함경도가, 오장육부(五臟六腑) 내복(內腹)은 경기도・충청도가 맡아 팔만 사천 털구멍 한 구멍도 빈틈없이 단단히 잘 하라고 대방장승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팔도 장승들은 사냥 나온 벌떼 같이 병(病) 하나씩 등에 지고 함양장승의 혼령을 따라 강쇠에게 달려가 각자 자기네가 맡은 대로 병 도배를 한 후 변강쇠는 장승들의 벌을 받고 죽음에 이르게 되고 장승들은 각자의 고향으로 흩어졌다고 한다.
과거의 장승
Ⅳ.장승배기 장승제
동작구 상도동 장승배기는 전국 장승의 우두머리인 대방장승(大方長栍)이 서있던 유적지(遺蹟地, 遺跡地)이다. 정조는 그의 부친인 사도세자(思悼世子)가 뒤주 속에 갇혀 비통하게 돌아가신 것을 애도하여 지금의 수원 현륭원(사도세자 묘소)을 자주 들렀는데 참배 길에 잠시 쉬어가던 이곳이 숲이 우거지고 음산하여 왕명으로 장:사(壯:士) 모양을 한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과 여상(女像)을 한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을 세워 백성이 안심하고 다닐 수 있게 한 것에서 유래됐다. 이 장승은 팔도정승을 다스리는 대방장승이 되었으며 이 길에 장승배기라는 지명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행인들이 이곳에서 쉬어가고 마을사람들이 마을의 안전을 지켜주던 장승 앞에서 동제(洞祭)를 지냈다.
일시 매년 10월 24일
장소 장승배기 장승 앞(노량진2동 동작도서관 옆)
대상 구민 누구나 소개
일제시대 미신 타파라는 미명아래 민족문화 말살정책으로 장승은 멸실되고 지명만이 불리던 것을 1991년 10월 24일 ‘노량진2동 바르게살기위원회’에서 전통문화 계승 차원으로 장승을 복원한 것이다. 2012년 밑둥이 썩어들어가는 장승을 현재의 천하대장군과 지하대장군으로 교체했다.
일제가 철거 한 장승을 동민이 다시 세우고 장승제를 지내는 민속을 되살려 전통놀이 속에 음식을 나누며 함께 어울리는 주민화합의 향토 축제를 펼친다.
제례순서 개식선언 내빈소개, 경과보고 및 내빈들의 격려사와 축사, 분향(焚香), 강신재배(降神再拜) 및 초헌(初獻), 독축(讀祝), 아헌(亞獻), 종헌(終獻) 순으로 진행된다. 제례 후에는 마을 주민들이 함께 마련한 음식을 함께 먹으며 덕담을 나누는 시간을 갖는다.
찾아오시는 길(약도)
지하철 7호선 장승배기 6번 출입구(동작도서관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