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동하는 디카시의 힘
― 이상옥의 디카시론
구모룡(문학평론가·한국해양대학교 교수)
이상옥은 디카시를 창안하고 그 개념을 정립하면서 시운동으로 확산한 장본인이다. 그 시작은 스마트폰이 나오기 전에 디지털카메라로 포착한 순간의 시적 감흥을 사진 이미지와 시어를 결합하여 표출하는 실험에서 비롯한다. 시인이자 시를 연구하고 교육하는 교수로서 그는 언어 이전에 ‘날 것으로서의 시’ 혹은 ‘언어 너머의 시’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러니까 ‘시적인 것’을 포획하는 감수성 훈련을 스스로 게을리하지 않았고 학생들에게도 이를 강조한 듯하다. 이러한 가운데 디지털카메라가 작동하는 몸짓이 바로 시로 연결될 수 있다는 우연한 발상에 이른다. 단지 영상을 놓치지 않고 잡아두는 일이 아니라 시적 감흥을 환기하는 영상을 시어와 함께 표출하는 일이다. 서로 다른 두 미디어가 한꺼번에 만나는 형국인데 전혀 새로운 개념이 아닐 수 없다.
지난 2월 초순부터 6월 중순 무렵까지 ‘언어 너머 시’의 노다지를 경험할 수 있었다. 고성 가도를 중심으로 한 출근길이나 퇴근길, 산책길, 혹은 연구실 어디서든지 ‘언어 너머의 시’가 노다지처럼 보인 것이다. 그때마다 순간순간 디카로 찍었다.
한국 최초의 디카시집 『고성 가도』(문학의 전당, 2004)의 후기에서 밝힌 창작 과정의 일부이다. 길 위에서 자동차로 달리거나 산책을 하면서 연구실이나 마을과 집 주위에서 그는 ‘언어 너머의 시’를 포착하고 그 영상에 바로 감흥의 언어를 기술한다. 이와 같은 반복을 통하여 이를 디카시라는 장르로 정립하려는 계기를 얻는다. 『고성 가도』를 경유하면서 디카시 논의는 본격화하지만, ‘디카시’라는 신조어는 4월 인터넷 <한국문학도서관>에 이상옥의 개인 연재 코너에 이미 등장한 바 있다. 그 시작은 한 개인의 시적 실험에 지나지 않으나 이후에 전개되는 운동의 방향과 확산 과정을 볼 때 하나의 문학사적 사건임에 틀림이 없다. 2004년 디카시 마니아 카페 개설을 시발로 무크지 『디카시 마니아』를 2006년 발간하고 이어서 2007년에 계간지 『디카시』로 발전시킨다. 이미 다 아는 사실인데 디카시는 문학사에서도 거론되고 국립국어원의 우리말샘에 새로운 문학 용어로 등재되었다. 경남 고성에서 발원하여 한국의 여러 지역을 거쳐 아시아로 세계로 펼쳐지고 있다. 불과 20여 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디카시’가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고 확산한 데 있어 이상옥의 공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앞서 말한 대로 매체를 간행하고 디카소연구소를 고성에 설립하였으며 『고성 가도』(문학의 전당, 2004)에 이어서 『장산숲』(디카시, 2018), 『고흐의 해바라기』(실천, 2021) 등의 디카시집을 간행하였다. 또한 이론과 담론 영역에서 창립 전도사 역할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디카시를 말한다』(시와 에세이, 2007), 『앙코르 디카시』(국학자료원, 2010), 『디카시 창작 입문』(북인, 2017) 등의 디카시론집을 발간하였다. 시와 사진 양측에서 디카시에 대한 비판이 여전하고 디카시론 내부에서도 논란의 측면이 존재하는 만큼 디카시 운동은 열띤 토론과 함께 힘차게 전진하고 있다. 이제 장르로서의 디카시가 하나의 개념으로 확고하게 뿌리내린 일은 불가역적인 사실이 되었다.
이상옥의 디카시론은 어떠한 쟁점을 제시하였는가? 이를 내 나름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기술의 발달과 미디어의 문제 (2) 사물의 이미지가 환기하는 감흥과 언어의 문제 (3) 환기와 정동의 관계 혹은 디카시의 주체론 (4) 디카시의 위상 문제 등이다. 기술의 발달이 미디어의 변화를 가져오면서 예술도 달라졌다. 문자가 등장할 때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기억력의 약화 등의 폐단을 들어 문자 미디어를 반대하였고 발터 벤야민은 복제기술의 등장으로 예술의 민주화, 예술의 정치화, 정치의 예술화 등의 사회 변화를 지적하였다. 마셜 매클루언은 영상과 TV 등 전자 미디어를 내세워 문자 문명 혹은 구텐베르크 갤럭시의 종언을 선언했다. 이후 앨빈 커넌 같은 매클루언 추종자는 문자 매체의 총아인 문학의 죽음을 예고한다. 대개 기술이 삶을 바꾸고 사회와 문화를 변화시키고 있음을 말한다. 인쇄기술이 종교 개혁과 사회 혁명의 배경임은 두루 아는 사실이다. 더불어 사진과 영상이 20세기에 가져온 여파는 매우 큰데 디지털 혁명으로 더욱 가속화되었다. 이상옥의 디카시의 경우, 디지털 혁명의 세기를 맞아서 디지털카메라와 함께 디카시를 구상하고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더 큰 물결을 타게 되었다. 문자가 없던 시절의 시가 구전되었던 만큼 시는 인쇄 매체의 산물이 아님이 분명하다. 이는 시를 매체 결정론으로 설명할 수 없게 만든다. 회화와 사진과 영상의 흐름이 있고, 구전과 필사 그리고 인쇄의 흐름이 있다. 어느 시대 없이 전자와 후자는 결합하였다. 시의 경우 문인화, 사진시, 영상시 등의 양상이 있다. 이렇게 볼 때 디카시의 등장은 돌발적인 사태가 아니다. 그런데 디지털은 다른 매체와 그 형질이 다르다. 앞선 매체가 서로 다른 물질의 결합이라면 디지털은 디지털화를 기반으로 서로 만나게 한다. 이점에서 디카시는 두 단계의 변신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 하나는 디지털카메라 단계이고 다른 하나는 스마트폰 단계이다. 디카시의 혁신을 가능하게 한 것은 두 번째 단계이다. 영상과 시어의 즉각적인 결합을 스마트폰이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점에서 이상옥이 규정한 디카시의 개념이 분명하게 다가온다. 서로 다른 별개의 영상과 시편이 아니라 한 몸인 영상과 시어라는 개념이다. 하나의 몸짓에서 한 편의 디카 시편이 구성된다. 따라서 이와 같은 알고리즘에 따른 디카시 앱 등의 발명이 뒤따라야겠다.
개인적인 고백이지만 나는 기술결정론이나 기술 우위를 신봉하지 않는 편이다. 과학과 기술은 양면성을 가지며 인류에게 이익과 해독을 동시에 가져다준다. 따라서 마크 포스트의 정보 양식론이나 프리드리히 키틀러의 매체 결정론과 빌렘 플루서의 미디어 현상학을 참조할 따름이다. 재난과 기후 위기 시대에 살면서 기술에 대한 발본적인 사유가 더욱 긴요해졌다. 이러한 점에서 (2) 사물의 이미지가 환기하는 감흥과 언어의 문제와 (3) 환기와 정동의 관계 혹은 디카시의 주체론이 부각한다. 이상옥은 자연과 사물이 환기하는 정동을 디카시 발상의 중요한 단초라고 말한다. 이 점은 사물을 주체로 시인을 객체 혹은 에이전트로 설정하는 그의 과감한 주장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사물의 말을 시인이 대신하는 게 디카시라는 그의 주장을 나는 그의 디카시론에서 순금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가령 이번에 선보이고 있는 다섯 편의 디카시도 매개자로서의 시인이라는 측면이 비친다. 가령 「노천명의 데칼코마니」는 우리에 갇힌 기린의 표정이나 호수에 비친 그의 영상이 “아프리카 초원의/잃어버린 전설을 생각하는/사슴보다 더 슬픈 모가지”를 말한다. 시인은 표제를 통하여 노천명의 ‘사슴’을 다시 포갠다. 「나무의 묘비명」도 흡사하여 잘린 나무의 잔해를 덮고 있는 사물이 그 묘비명을 전하고 있다. “바람과 구름과 태양과 달과 별/온 우주가/성자의 유골에 직접 새긴 상형문자”. 이처럼 인간을 생명의 주재자로 보는 인간중심의 감응 체제를 그는 거부한다. 이는 디카시가 카메라의 시선에 포박될 가능성을 반드시 벗어나야 함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그동안 세계를 활력이 없는 물질과 생동하는 생명의 주체인 인간으로 나누어 보는 데 익숙하다.
이러한 인식체계를 극복하고 “생동하는 물질”(vibrant matter)이라는 개념을 적극적으로 숙고할 필요가 있다. 이는 단지 우주 유기체론의 재탕이 아니다. 제인 베넷이 주장하듯이 물질의 활력을 옹호하는 일은 “죽어 있거나 철저히 도구화된 물질이라는 이미지가 인간의 자만심과 정복 및 소비 등 지구를 파괴하는 우리의 환상”(제인 베넷, 『생동하는 물질』, 문성재 역, 현실문화, 2020)을 깨트리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디카시의 발상에는 “생기적 물질성”(vital materiality)을 자각하는 기제가 있다. 이는 시인 에이전트 이론을 브뤼노 라투르의 ‘행위소’(actant)로 발전시킬 수 있는 계기를 얻게 한다. (3)이 말하듯이 환기 시학 혹은 정동 시학과 디카시론이 관계 맺을 수 있는 대목이다. 사물이 환기하고 물질의 정동이 시인을 촉매로 발현하는 과정이다. 이상옥이 이러한 시학적 확장 가능성을 예고하고 있는데 이는 앞으로 심화해야 할 과제이다. 물론 그가 말하는 주체와 객체론은 충분하게 이분법을 해체하고 있진 못하다. 하지만 ‘정동적 촉매’(제인 베넷)로서의 시인의 위치를 그는 거듭 역설하고 있다. 가령 「두 사람에 관한 오마주」는 정지된 삼성 에어컨의 영상과 “베트남 짜빈 변두리 호텔에 누워/별 하나 별 둘 별 셋 헤는 밤”이라는 시구와 만난다.
SAMSUNG이라는 상호가 “별 하나 별 둘 별 셋”을 말하는데 더운 지역이지만 에어컨은 열려 있지 않다. 기계의 정동과 시적 자아의 정동이 미묘하게 오간다. 이 시에서도 표제는 의미의 증폭을 주도한다. 두 사람은 누구일까? 윤동주와 또 다른 한 사람? 여하튼 난해의 장막이 없진 않다. 이러한 점에서 표제의 시차(時差/視差)는 디카시 구성에서 중요한 요소이다. 순간의 미학에서 벗어나서 이는 사후적이다. 앞으로 디카시에서 표제의 역할은 일반 시편에서와 마찬가지로 토론의 재료이다. 여하튼 기계의 물질성을 생동하게 한 이 시편의 확장성을 상기한다. 「황진이 혹은」은 “다시 산사에 꽃무릇 붉게 피었건만/당신은 미동도 않으시구려”라고 진술한다. 닫힌 문이며 댓돌 위에 놓은 검정 고무신의 말인지 화자의 말인지 구분할 까닭이 없다. 또한 역시 표제가 제시하듯이 ‘황진이’의 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세 겹의 말이 포개진 형국이다.
디카시가 포착하는 사물은 생동하는 물질성을 전한다. 이는 단지 정지된 상태가 아니다. 움직이고, 흐르고, 스미며, 충돌하고, 부서진다. 또한 흩어지고, 뭉치며, 오르다, 내리고, 사라지다, 나타난다. 만일 디카시가 정지태의 사물에 더 많은 관심을 둔다면 그 운동성이 고착할 수 있다. 유동성, 이동성은 디지털 노마드에 적합하다. 들뢰즈의 ‘노마디즘’이 디카시에 영양을 공급하리라고 믿는다. 물론 우리 자신의 보행과 이동(mobility)이 먼저 있다. 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자연 사물이나 기계, 전기, 음식, 쓰레기의 움직임도 종요롭다. 「메콩 델타 빈롱」은 시인의 이동에 따른 디카시 쓰기의 과정을 잘 보여준다. 유음의 흐름처럼 “하늘과 메콩강을 경계로 유장하게 흐르는” 풍경은 디카시의 속살이자 운명이다. (4)의 디카시의 위상 문제는 디카시를 쓰는 이의 위치 감각과도 연관된다. 디카시는 시의 한 장르인가? 기존의 시와 다른 흐름인가? 물론 이 둘은 대체의 관계가 아니다. 문자코드와 테크노 코드는 공존해야 한다. 이는 우리가 알약으로 음식을 대체할 수 없는 사정으로도 알 수 있다. 시는 인류의 오래된 문화 패턴이다. 의식주가 달라지듯이 달라져 왔다. 과연 이러한 패턴이 바닷가 모래 위에 그려진 얼굴처럼 사라질 것인가? 아마 이러한 질문을 디카시의 원조인 이상옥 시인도 끊임없이 반추하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구모룡
한국해양대 동아시아학과 교수
1990년 《한길문학》 시 등단, 《동아일보》신춘문예 평론 등단
비평집 『폐허의 푸른빛-비평의 원근법』 외 다수
‘제31회 팔봉비평문학상 수상’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