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오전, 오랜만에 동네 진*골 산책에 나섰다. 밤새 분 바람 탓인지 산책로 구석에는 색 바랜 나뭇잎들이 수북하고 코끝에 와 닿는 바람도 가을 냄새가 완연했다. 약간의 경사가 있는 곳에 이르자 민망하게도 높낮이까지 조절하며 꼴사납게 터지는 내 별스런 재채기가 비강을 훑고 나왔다. 놀란 코로나 방역 마스크가 심하게 흔들렸다.
맞은편에서 내려오는 가족이 내 재채기 소리에 놀라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아 황급히 양손으로 마스크를 고쳐 썼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여자애 목소리가 조용한 산책길에 울려 퍼진다.
“엄마! 오빠가 뒤에서 내 걷는 것보고 자꾸 사마귀라고 해.”
“그래? 니 걷는 모습이 멋지다고 오빠가 그렇게 부르잖아. 멋진 롱다리 딸!”
“아이~ 그래도 히힝~ 그럼 오빠는 멍게다”
“뭐? 야! 너 이리와.”
바람 불면 넘어질 것 같이 날씬하고 키 큰 남자애가 흰 모자를 쓴 여동생 뒤를 쫓아갔다. 그 상황이 익숙한 듯 부부의 웃음소리가 이어진다.
그때 어릴 적 우리 5남매 생활이 생생하게 동영상처럼 떠올라 그 가족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리고 코믹했던 우리 형제 일들이 떠올랐다.
야빠오, 땡삐, 야니언, 짱(짱구), 시코쿠, 물고기, 매, 요마, 폴~
이름보다 더 자주 불린 우리 5남매의 어릴 적 별명이다.
이름 부르는 것이 더 어색할 정도였다. 우리가 오빠를 부를 때 “오빠야”를 거꾸로 발음하는 “야빠오”로 불렀으며 언니는 “땡삐, 야니언(‘언니야’의 거꾸로 발음)”, 난 튀어나온 이마 때문에 “짱(짱구)” 또는 고집부릴 때 입이 먼저 튀어나온다고 해서 “시코쿠”, 생각이 단순하다고 하여 “물고기”라는 별명이 있었다. 바로 밑 여동생은 나이는 어리지만 하는 짓이 할매같다고 하여 “할매”의 마지막 글자 “매”만 간단하게 불렀다. 막내 남동생은 “꼬마”라는 된소리보다 부르기 좋게 우리끼리 “요마” 또는 “폴”이라고 불러댔다.
이 별명들은 오빠가 먼저 부르기 시작해서 어느새 약속이나 한 듯이 이름처럼 서로 불렀으며 세월의 나이테를 먹은 지금은 한 명당 한 가지 별명만 주로 부른다. 주고받는 형제 SNS에도 별명들은 어김없이 등장한다. 결혼 전까지만 해도 집 밖에서 누가 가끔 이름을 부른다거나 전화기 너머로 남매 중 누구를 바꿔달라고 상대방이 이름을 말하면 한 번씩 멈칫했던 기억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끼리 거의 별명을 부르다보니 이름 듣는 것이 너무 어색했기 때문이다.
오빠는 부모님 관심사 1호였다. 동생들을 돌봐야 한다는 부모님의 밥상머리 교육 덕분인지 책임감이 남달랐다. 반면에 우리와 놀 때는 장난꾸러기 그 자체였다. 별명을 지어 부르며 약 올리기도 했다. 우리끼리 먹는 둥근 밥상 위에 생선 구이라도 오르면 오빠는 큰소리로 “잠깐만~”이라고 말하며 우리 시선을 집중시킨 후 젓가락으로 생선을 5등분하여 별명을 부르며 각자 할당된 것을 먹게 한 일도 있었다. 이러한 일들은 지금도 우리 형제들이 한 자리에 모이면 한 번씩 회자되며 웃는 사연이다.
대구에서 우리끼리 모여 자취 살림살이를 관리했던 오빠는 제대 후 진지한 표정 없이 갑자기 열공 모드로 변신했다. 1년 남짓 언니와 나는 아침에 번갈아가며 노란색 양철로 된 사각 도시락 두 개를 준비해 주면 오빠는 학교도서관에 가서 문 닫을 때까지 공부했다. 그 덕분인지 졸업 전에 행*고시에 합격했다. 우리는 “야빠오~최고다!!”라며 기뻐했으며 그 소식은 부모님 어깨에 힘이 들어가게 했다. 지금 생각하니 그 때 아침마다 오빠 것을 포함해서 도시락을 다섯 개까지 준비하더라도 누구 하나 서로 탓하지 않고 깔깔거리며 재미있게 지냈다.
위의 나열된 별명에서 유추해보면 어릴 때 부모님과의 약속을 가장 안 지킨 사람은 배우처럼 얼굴 예쁜 언니였다. 귀가 시간 약속을 자주 안 지켜 남매 모두 아버지로부터 집단 벌칙을 받게 한 주인공이기도 했다. 외출할 때면 옷장 문을 여러 번 여닫으며 입을 옷이 없다며 불평하기도 하고 적어도 그 당시 내가 보기에 괜한 것에 트집을 잡고 성질을 부리곤 했다.
엄마는 언니가 한 번 성질이 날 때마다 달래기 힘들다고 하자 오빠는 성질머리 사나운 왕벌 같다고 하여 “땡삐”라고 별명을 지어 불렀다. 나와 동생 두 명은 “땡삐 언니야” 또는 “야니언”이라고 불렀다.
결혼 후 들은 사실이지만 언니는 나름대로 애환이 있었다. 어릴 때 몸이 연약한 엄마 대신 아버지의 지시로 자주 부엌에 들어가 식사 준비와 궂은일을 도맡아 해야 해서 힘들었다고 했다. 심지어 혼자 계시는 큰어머니 댁에까지 가서 일을 도왔다고 했다.
내가 빨래하고 산등성이 우물에 가서 물 긷고 부엌일 한 횟수보다 언니가 훨씬 힘든 일을 많이 했다. 우리가 자취했던 당시에도 직장에 나가면서 우리를 오빠만큼 돌봤으며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지금도 우리들에게 뭐 하나라도 퍼주고 싶어 하는 마음 씀이 훈훈하고 고맙다.
5남매의 중간이었던 난 “짱구”라고 많이 불렸다. 그냥 알아서 스스로 하는 아이로 컸으며 말괄량이에다가 호기심 많았고 내 문제는 스스로 해결해나간 유형이었다. 앨범 속 흑백 사진 속의 내 모습이 눈이 옆으로 가늘게 찢어지고 헝클어진 머리 모습이 많은 것으로 보아 용모에 별로 관심 없었음에 틀림없다. 가끔 고집을 부리기도 하고 남의 말을 그대로 믿어 단순한 물고기 아이큐랑 비슷하다며 물고기라고도 했다.
여동생은 어릴 때 말하는 속도가 느렸다. 할머니처럼 소리 없이 피식 잘 웃어 “매”라고 불렀다. 엄하셨던 아버지께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함부로 말씀드리지도 못한 우리에 비해 여동생은 본인 느낌 그대로 할 말 다하는 아이였다.
부모님과 관련 있는 일도 거침없이 천진난만하게 표현하여 부모님의 웃음꽃도 피어나게 하였다. 대학 시절 다양한 알바를 하고 결혼 후에도 여러 번의 마라톤완주, 각종 요리자격증과 숲 관련자격증을 취득해서 바쁘게 보내고 있다. 부천에 사는 여동생은 요즘은 1시간 넘게 지하철을 타고 경기도 의정부 엄마 집에 자주 들러 엄마 좋아하시는 담백한 음식을 만들어드리고 목욕까지 해드리곤 해서 너무 고맙다.
남동생은 어릴 때 영화 “꼬마신랑”의 주인공 배우 김정훈을 닮았다 하여 우리 형제뿐만이 아니라 집안 어른들로부터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우리는 50대인 막내남동생을 아직 “요마야.”라고 부르곤 한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대구로 나와 자취하는 우리와 함께 지냈다. 우리는 각자의 일에 정신이 없어 부모님처럼 따뜻한 보살핌이 필요한 막내를 정서적으로 지지해주지 못한 것 같아 지금도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다행이도 지금은 우리보다 더 생각이 깊다. 지금은 올케, 오빠 내외와 함께 엄마 집 인근에 살며 일상처럼 살뜰히 연로한 엄마를 보살펴주고 있어서 너무 고맙다.
부모님과 떨어져 우리끼리 함께 자취하며 키운 에너지 덕분에 가끔 소통 부족이 감지되면 오빠, 아니면 문제를 인식한 자의 레이더가 자연스레 작동된다. 서로 중심 잡아 주는 필살기가 있어 합리적인 조언이 전해지면 전폭적으로 공감하며 지지한다. 아직도 그 별명들이 어릴 적 다양한 추억과 함께 아직 일상 속에 살아 있으며 형제들 삶속의 밸런스를 유지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어릴 적 우리 딸이 내 귓가에 대고 속삭이던 말이 생각난다.
“엄마~ 외삼촌하고 이모가 왜 엄마보고 짱이라고 불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