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풍기의 선물의 文化史(16)] 벼루, 학문과 수행을 격려하다 조선시대 길 떠나는 선비들이 반드시 챙겼던 필수품… 평생 학문과 함께할 사람의 앞길 축복하는 의미 담겨
김풍기 강원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벼루’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바로 조선 후기의 교양인 정철조(鄭喆祚, 1730~1781)다. 벼루를 좋아할 뿐 아니라 제작도 했다. 돌에 미친 바보라고 자처할 정도로 그의 벼루 사랑은 한이 없었다. 오죽하면 자신의 호를 석치(石痴)라고 했겠는가.
보통 각도(刻刀)가 있어야 돌을 깎아서 벼루를 만드는데, 정철조는 돌만 보면 평소 허리춤에 차고 다니던 패도(佩刀)를 빼서 즉시 깎곤 했다. 그렇게 만든 벼루를 숨겨 두는 것도 아니었다. 책상에 수북이 쌓아뒀다가 달라는 사람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선뜻 주곤 했다.
돌의 종류도 가리지 않고 칼의 종류도 가리지 않았던 정철조의 벼루는 예술적 성취도 높았다. 당시 조선의 선비들은 정철조의 벼루 하나만 소장하는 것이 소원이었다고 할 정도로 그가 만든 벼루는 인기 만점이었다. 우리나라의 벼루를 정리한 [동연보(東硯譜)]를 편찬했던 유득공(柳得恭), 뛰어난 문인이요 화가였던 강세황(姜世晃) 등도 모두 정철조의 벼루를 소장하고 있었다.
심노숭(沈魯崇, 1762~1837)의 [효전산고(孝田散稿)]에 이런 일화가 실렸다. 그가 천안군수로 있을 때 강이문(姜彛文, 1775~1855)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우연히 강이문이 정철조의 벼루를 소장하고 있는 것을 알고 빌리게 된다. 심노숭 역시 정철조의 벼루를 한 점 가지고 있었는데, 이사를 다니던 와중에 잃어버려서 안타까워했다.
그러자 강이문이 자기 집에 정철조가 만든 벼루를 하나 소장하고 있는데, 정철조가 자기 조상의 묘문(墓文)에 글씨를 써달라고 부탁하러 오면서 선물로 준 벼루라고 했다. 강이문은 바로 강세황의 손자다. 자신의 조부 강세황이 생전에 ‘이 벼루를 최고의 작품이라며 극찬하시더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빌려달라는 심노숭의 부탁에 흔쾌히 집에서 가져다 빌려준다. 심노숭의 [정석치연소지(鄭石痴硯小識)]에 나오는 이야기다.
정철조의 벼루는 워낙 이름난 것이어서 그와 관련된 기록은 상당히 많이 남아 있다. 이제는 붓글씨를 쓰는 사람 외에는 찾지 않는 물건이 돼 우리 생활 속에서 발견하기 어려워진 벼루는 근대 이전 지식인들에게는 늘 옆에 두고 사용하던 것이었다. 오죽하면 문방사우(文房四友) 혹은 문방사보(文房四寶)라고 불렀겠는가.
조선시대 먼 길을 떠나는 선비들이 반드시 챙기는 물건이 바로 벼루였다. 길을 가면서도 무언가 시상(詩想)이 떠오른다든지 기억해야 할 것이 생기면 즉시 벼루를 꺼내서 먹을 갈거나 먹물을 붓고 메모를 했다. 조선 후기 전라도 지역의 선비였던 황윤석(黃胤錫)은 서울로 가는 행장을 꾸리면서 목록을 적어뒀다. 거기에 보면 붓통·먹물과 함께 작은 휴대용 벼루를 포함시켰다. 선비들의 귀한 벗이 한둘이겠는가마는 벼루야말로 글을 하는 문사의 소중한 여러 벗 중의 하나였다.
근대 이전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에 벼루를 만들기 위한 돌을 채굴하는 곳이 상당히 많았다. 못해도 수십 군데는 됐을 법한 채석장은 벼루의 용도가 사라지면서 지금은 충남 보령의 남포를 비롯해 몇 군데만 겨우 남아 있을 뿐이다. 보물로 지정된 벼루만 해도 정탁(鄭琢) 집안 유물이라든지 곽재우 유물 중에서 포도연(葡萄硯), 추사 김정희 유물 중에서 운룡문단계연을 비롯한 벼루들이 있고, 특이하게도 충남 태안군 해저에서 발견된 청자로 만든 고려시대의 벼루도 있다.
고려 때 송나라에서 사신으로 왔던 서긍(徐兢)이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 고려의 말을 기록한 부분이 있는데, 거기에 ‘硯曰皮盧’라는 구절이 있다. 한자 ‘연(硯, 벼루)’은 고려 말로 ‘皮盧(피로)’라고 발음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마도 ‘벼루’의 고어였을 것이다. 그만큼 중세 문인들에게 벼루는 한시도 떨어지지 않는 물건이었다.
요즘이야 단계연(端溪硯)과 같은 중국의 명품을 벼루의 대명사로 치지만, 조선의 벼루도 그에 못지않은 명품들이 있었다. 세조 때 유구국(流球國)에서 사신이 온 적이 있다. 1467년(세조 13) 7월, 유구국의 동조(同照) 스님을 필두로 사신단이 여러 공물을 가지고 찾아왔다.
중국 사신도 탐냈던 조선의 ‘명품’
이미 1461년 유구국에서 사신이 왔던 터라 낯설지는 않았는데, 그들의 공물에 답례품으로 조선이 준비한 선물 목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수록돼 있다. 거기에 보면 불경을 비롯한 많은 양의 서책과 조선의 특산물이 적혀 있는데, 자석연(紫石硯)이 포함돼 있다. 자석연은 일본에서 산출되는 자석(紫石)으로 만든 벼루가 많아서, 일본 사람이 고려나 조선으로 올 때 선물로 가지고 온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조선에서도 자석이 산출됐고, 그것을 만든 벼루가 좋은 품질이었던지 세조 때 유구국 사신에게 선물로 하사한 것이다. 이유원(李裕元)의 [임하필기(林下筆記)]에 보면 한석봉(韓石峯)이 충북 진천에서 돌을 구해 벼루를 만든 자석연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자석연을 하사함으로써 조선의 문물을 유구국에 드러낸 것을 보면 조선에서 명품 벼루를 만드는 곳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배용길(裵龍吉, 1556~1609)의 문집 [금역당집(琴易堂集)]에 보면 안동태수를 지낸 황극중(黃克中)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는 글에서 흥미로운 사건을 언급한다. 1601년 겨울 무렵 중국에서 황태자를 봉한다는 조서를 받들고 명나라 사신이 조선을 찾아왔다. 그때 안동부에 자석연 100개를 바치도록 명령을 하면서 크기는 1척(尺)으로 맞추도록 했다.
그렇지만 자석연을 만드는 돌은 깊은 시냇물 밑에 있는 것이라서 채석하는 괴로움이 말도 못할 지경이었다. 한겨울 날씨는 추운데 시냇물은 살을 에는 듯하고, 백성들의 고통은 심해졌다. 황극중은 백성들이 불쌍한 나머지 임의로 자석연을 준비해서 임금에게 진상했다.
그러나 당시 임금이었던 선조는 내막을 알아보지도 않고 공물로 올린 벼루가 자신이 지정한 규격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화를 내면서 황극중을 파직했다. 그가 떠나는 날 안동의 백성들이 어진 태수를 잃었다면서 눈물로 전송을 했다는 것이다. 배용길의 글 ‘귀향하는 황극중을 전송하는 글’(送黃和甫歸田序, [琴易堂集] 卷4)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의 글에는 벼루와 관련된 또 하나의 일화가 수록돼 있다. 송나라 진종 때의 명신 손지한(孫之翰)에게 어떤 사람이 벼루를 선물했다. 그 사람이 이 벼루가 삼천 금이나 되는 높은 값어치가 있는 것이라면서 자랑했는데 손지한이 미심쩍어하는 눈빛을 보였다.
삶의 자세를 담은 글, 연명(硯銘)
그러자 벼루를 선물한 사람은 “벼루는 물에 젖은 듯한 빛깔이 나는 것이 좋은 제품인데, 이 벼루는 입김을 한 번 불면 물이 흐를 정도입니다”라고 했다. 그제야 이 벼루가 아주 비싼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된 손지한은 “하루 종일 입김을 불어 수백 근의 물을 얻는다 해도 그 정도의 물값이야 서 푼에 불과한 것이지” 하면서 그 벼루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 정도의 값어치면 선물이 아니라 뇌물일 것이고, 입김을 불어 물이 흐를 정도라 해도 그 물 값이야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선물과 뇌물은 백지 한 장 차이인 경우가 많다. 특히 사람들이 흔히 구할 수 있는 물품 중에서 선물이 뇌물 역할을 하는 일이 허다하다. 벼루도 아마 그런 종류가 아니었을까. 벼루는 누구나 집에 한두 개씩은 가지고 있는 흔한 물품이다. 그만큼 벼루는 엄청난 양이 생산됐을 것이다. 수많은 벼루가 일상생활 속에서 유통되다 보니, 자연히 품질의 편차가 매우 크다. 물품이 적은 분야의 물건이면 물건 사이에 값의 편차가 별로 없지만, 물건이 많으면 좋은 물건과 나쁜 물건 사이에 품질의 차이가 커지고 그에 따라 값의 차이도 커진다. 이 순간이 바로 명품 탄생의 순간이다.
수많은 삼류를 딛고 우뚝 서는 것을 명품이라고 한다면 벼루처럼 일상에서 너무도 흔하게 볼 수 있는 것들 중에 명품 벼루가 나온다.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벼루를 너무 좋아해서 1000점이 넘는 작품을 소장한 사람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벼루의 크기, 모양, 거기에 새겨진 문양, 글씨, 먹의 갈림, 먹물 유지 시간 등 수많은 조건으로 벼루를 품평해서,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하면서 예술적 가치를 지닌 것들을 명품이라 한다.
그러나 미적 기준은 사람마다 다른 것이고 각각의 기준에 맞는 다양한 작품을 모으다 보면 1000점의 벼루야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정철조만 하더라도 돌의 품질과 칼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틈만 나면 벼루를 깎아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의 작품 하나 소장하기를 원했던 당시의 문사들 입장에서는 정철조야말로 명품 제조자였던 셈이다.
이렇게 벼루를 사랑했던 문인들 입장에서는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도 많았다. 자신의 좌우명을 벼루에 새겨두는 일도 흔했고, 문양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담는 경우도 많았다. 연명(硯銘)이라는 제목으로 많은 글들이 지어졌는데, 이러한 작품들은 대체로 벼루의 바닥에 새겨서 좌우명처럼 여기는 경우가 많았다.
고려 후기의 문인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자기가 사용하는 작은 벼루를 두고 이러한 글을 남겼다. “벼루여 벼루여, 네가 작다 하나 너의 부끄러움이 아니로다. 네 비록 한 치쯤 되는 웅덩이지만, 끝없는 뜻을 쓰게 하노라. 내 키가 비록 여섯 자나 되지만, 사업(事業)은 너를 빌려야 이뤄진다. 벼루여, 나와 너는 함께 돌아가리니, 살아도 너 때문이요, 죽어도 너 때문이라.”([소연명(小硯銘)])
이규보는 자신의 원대한 꿈을 벼루에 의탁하고 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벼루로 인해 나의 꿈이 현실 속에서 이뤄질 것이고, 꿈을 이루는 길을 따라 벼루 역시 함께 걸어간다. 내 삶이 다하는 날 비로소 벼루와의 인연이 사라지리니, 이규보에게 벼루야말로 운명의 벗이다. 그것이 작다 한들 벼루가 없으면 무슨 소용일 것이며 무엇을 이룰 수 있겠는가.
정조(正祖) 역시 벼루에 대한 글을 남긴 적이 있다. 자신의 벼루가 아니라 바로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벼루였다. 정조는 율곡이 사용하던 벼루가 그 집안에 전해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즉시 그것을 보고 싶어했다. 평소 존경하는 선현의 손때가 묻은 벼루였기 때문이다. 그 벼루에서 율곡의 주옥 같은 문장들이 나왔고, 수많은 저술이 나왔을 것이다. 그 벼루를 친견하고 난 뒤 정조는 율곡의 벼루에 글을 한 편지어 직접 글씨를 쓴 다음 벼루 밑면에 새겨서 율곡 집안으로 돌려준다. 1788년의 일이었다.
율곡의 벼루 보며 그의 지혜 그리워한 정조
세상을 떠난 지 오래돼 직접 대면할 수는 없지만, 율곡의 벼루를 완상(玩賞)하면서 정조는 율곡의 지혜가 그리웠을 것이다. 그렇게 완상한 기념으로, 혹은 마주해 이야기를 나눌 수 없는 선현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리움을 담아, 어쩌면 정조는 율곡에서 선물을 주는 마음으로 연명을 지어 새겨줬을 것이다.
벼루 선물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을까? 의미를 담지 않은 선물은 없다. 경제적 가치의 고하를 막론하고 그 의미 때문에 선물은 각각 최고의 가치를 가진다. 벼루는 흔한 물건이기도 했지만 명품이라 불릴 만한 비싸고 귀한 것도 있었다. 벼루 선물에는 다양한 의미가 담겨 있는데, 우선은 문인들의 고아한 품격을 드러내는 물건이라는 점에서 여타의 선물과는 궤를 달리한다.
쓰임새를 생각하면 벼루의 일차적인 용도는 먹을 갈기 위한 것이다. 벼루는 크게 먹을 가는 부분인 연당(硯堂), 먹물이 고여 있는 부분인 연지(硯池), 연지 옆쪽으로 문양이나 글자를 새겨 넣는 부분은 연액(硯額), 벼루의 둘레를 지칭하는 연변(硯邊) 등으로 구분된다. 세부 명칭이 더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정도가 벼루의 주요 부위일 것이다.
연당에 먹을 갈아서 연지에 먹물을 담아놓고 서화를 쓰게 된다. 그렇게 보면 벼루는 자신의 온몸을 희생해서 먹을 준비하도록 만드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벼루의 중요한 속성으로 단단함을 꼽을 수 있다. 어떤 형태의 먹이든 자기 몸돌에 비벼서 먹물을 만드는 것이니, 한편으로 보면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내부의 견고함을 지켜서 벼루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한다. 이를 통해서 사람들은 군자(君子)의 아름다운 모습을 읽어낸다. 선비들의 문화를 꽃피우게 하는 도구이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정신을 담을 수 있는 멋진 물건이 바로 벼루였다.
게다가 문인으로서는 늘 옆에 두고 사용하는 것이었으므로 온 마음을 다해 벼루에 정성을 쏟았다. 공부하는 사람의 정성이 이곳에 모이니, 벼루는 때때로 학문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벼루 선물에는 받는 사람의 학업을 격려 혹은 장려하는 의미를 갖게 된다. 마치 스승이 제자에게 만년필을 선물하면서 학문의 길을 걸어가려는 젊은 학도를 격려하듯이, 벼루 선물은 평생 학문과 함께할 사람의 앞길을 격려하는 의미를 가진다.
벼루가 문인의 벗이었기에 죽을 때도 관 속에 벼루를 넣은 사람도 있었다. 청나라의 대표적인 연치(硯痴: 벼루만 좋아한 바보)인 고봉한(高鳳翰, 1683~1749)이 그런 사람이었다. 양주팔괴(揚州八怪)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그는 [연사(硯史)]를 편찬하기도 했고, 1000개에 달하는 벼루를 직접 깎기도 했다. 훗날 문화대혁명 시절 그의 무덤이 파헤쳐졌는데, 관 속에 100여 개의 벼루가 함께 묻힌 것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 정도면 벼루 사랑으로는 따라갈 사람이 없지 않을까.
이따금 책상 옆에 놓아둔 벼루를 꺼내본다. 쌓인 먼지를 털어내다 보면 벼루에서 희미하게 묵흔(墨痕)이 보인다. 이제는 지식인들의 서가에서 잊힌 물건이 됐지만, 내면의 단단함으로 세월의 무게를 견디는 모습이 새삼스럽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가 지나면 또 다른 방식의 필기구가 나올 것이고, 벼루는 더더욱 잊힐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 안에 간직하고 있는 학문에 대한 열망, 단단함을 지키는 군자다운 모습은 여전할 것이다. 벼루 선물은 그런 마음을 주고받는 행위였을 것이다.
※ 김풍기 - 강원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책과 노니는 것을 인생 최대의 즐거움으로 삼는 고전문학자. 매년 전국 대학교수들의 이름으로 발표하는 ‘올해의 사자성어’[2011년 엄이도종(掩耳盜鐘)]에 선정되는 등 현실에 대한 비판도 잊지 않는다. 저서로 [옛 시에 매혹되다] [조선 지식인의 서가를 탐하다] [삼라만상을 열치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