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백제의 멸망과 부흥운동에 대하여 논하라.
Ⅰ. 서
국가는 군장국가(성읍국가. 부여 사출도, 고구려 나집단), 연맹왕국(고조선, 초기 고구려, 부여, 삼한, 가야연맹)을 거쳐서 중앙집권적 고대국가(고구려, 백제, 신라)로 성장하였다. 고대국가의 특징은 왕권이 강화되면서 지방의 군장세력을 국왕권력 밑으로 편입하고 왕위를 부자상속하고 불교를 수용하고 율령을 반포하며 활발한 정복사업을 전개하여 공대한 영토국가를 이루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 중 백제는 4세기 13대 근초고왕 때 전성기를 이루고 잘 나아갔으나 5세기 고구려 19대 광개토왕 20대 장수왕을 거치면서 융성하면서 백제는 국력이 약화되고 장수왕의 남침과 개로왕의 전사로 한강유역도 고구려에게 빼앗기고 웅진으로 천도를 하였고 6C 신라 24대 진흥왕 때 신라는 최대의 판도를 형성하였는데 백제 26대 성왕은 백제 부흥을 꿈꾸고 국호를 남부여, 수도를 사비로 천도하고 신라와 협력하여 551년 한강유역을 되찾았다가 다시 신라에게 한강유역을 빼앗기자 분노하여 직접 신라와 교전 중 554년 관산성에서 패사하였다. 백제 31대 의자왕이 신라를 공격하여 40여성을 빼앗자 신라는 고구려에 구원을 청하고 이마저 안되자 김춘추가 648년 당나라에 가서 당 태종에게 나당 연합을 제의하여 마침내 나당연합을 맺고 백제를 멸망시켰고 멸망 후 곧 부흥운동이 있어났지만 내분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하에서의 백제의 멸망과 부흥운동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
Ⅱ. 백제의 멸망과 부흥운동
1. 백제의 멸망
가. 원인 :
⑴ 백제의 신라 대야성 함락과 여제 동맹
고구려가 중국의 수(581~618)와 당(618~907)과 혈투를 계속하는 동안 백제는 신라에 대한 서둘렀다. 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 칭송 받던 백제 마지막 왕 31대 의자왕(義慈王. 641~660) 2년 642년 8월 윤충(允忠)에게 1만군을 주어 신라의 대야성(大耶城. 합천)을 비롯한 40여성을 함락시키자 김춘추는 고구려에 가서 구원을 요구했으나 고구려의 연개소문(淵蓋蘇文)은 출병 대가로 한강 유역의 반환을 요구하였고 643년 고구려와 백제가 여제동맹(麗濟同盟)을 맺자 김춘추는 648년 당나라로 가서 나제동맹을 맺기에 이르렀다. 백제는 655년에도 신라 30여성을 함락시켰다.
⑵ 의자왕의 주색탐닉
의장왕은 국정을 소홀히 하고 의자왕은 주색에 탐닉하였다. 신라 김유신(金庾信)은 백제를 무너뜨리게 하기 위하여 백제의 임자(壬子)와 내통하고 있었고 임자(壬子)가 보낸 뛰어난 미모와 빼어난 몸매를 가진 왕실 무당 금화(錦花)에 빠져 헤어나지 못했다.
⑶ 백제의 통치 질서 문란
의자왕은 병관좌평 부여성충(扶餘成忠)(상소후 28일 단식하다가 옥사)과 중국 월주(越州) 총독 부여윤충(扶餘允忠) 형제를 옥에 가두고 좌평 흥수(興首)는 의자왕의 음란을 비판하였다고 고마미지(古馬彌知, 전남 강진)으로 귀양을 보내고 사촌동생 복신(福信)을 하였다.
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로 진군할 때 의자왕이 좌평 의직(義直, 590년과 600년 사이~660년) 달솔 상영(常永, ? ~660년) 등과 회의를 열었으나, 의견 차이가 심하여 결정을 짓지 못했다. 왕은 사람을 보내 흥수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는 “당은 대국이며 군율이 엄하고 더구나 신라군과 연합하여 앞뒤로 협력하는 상황이니 넓은 들판에서 싸우면 패할지 모른다. 백강과 탄현은 우리의 요새이므로 당군이 백강에 상륙하지 못하게 하고 신라의 대군은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라. 왕께서는 성문을 닫고 버티다가 연합군의 양식이 떨어지고 사졸들이 피로해질 때 공격한다면 반드시 연합군을 막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대신들은 “흥수는 오랫동안 유배되어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으니 그 말을 들어줄 수 없다. 당군은 백강에 들어와서 흐름에 따라 배를 정렬할 수 없게 하고 신라 정예군은 탄현에 올라서 좁은 길을 따라 말을 정렬할 수 없게 한 다음 공격하면 마치 새장 속에 있는 닭을 죽이고 그물에 걸린 고기를 잡는 것과 같다.”고 하니, 왕이 동의했다. 그러나 당의 대군이 이미 백강을 통과했고 신라의 대군도 탄현을 넘었다는 소식을 듣자 왕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⑷ 지배층의 사치, 향락, 백성들의 일체감 상실
의자왕을 비롯한 백제 지배층은 사치와 향락에 빠졌고 백성들은 일체감을 상실하여 있었다.
⑸ 요새 부재와 국력 분산
백제는 경제적으로 매우 풍요한 나라였으나 넓은 평야에 위치하여 국방의 요새(要塞)가 없었고 국력이 일본 등 해외로 분산되어 내부 통합이 부족하였다.
나. 나당 연합군의 침입
⑴ 나당연합군(18만명)
당나라 군은 13만명으로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 蘇定方, 우장군 金仁問,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유백영(劉伯英, 자 인원)・,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 풍사귀(馮士貴),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방효공(龐孝公, 龎孝泰)이 이끌었고 신라군은 5만으로 제1군 김법민(金法敏, 문무왕), 제2군 金庾信(선봉 김흠순(金欽殉. 반굴(盤屈)부) 1만, 좌익 김품일(金品日, 관창(官昌) 부) 1만, 우익 천존(天存)1만, 후군 金庾信 2만)이 이끌었다.
⑵ 신라 김유신의 황산벌 싸움
계백(階伯)과 아수라는 좌평 충상(忠常)의 지휘 하에 5천의 결사대로 황산벌에서 5만의 신라 정예군과 네 차례의 전투를 벌인 끝에 백제군은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충상(忠常), 상영(常永, ? ~660년) 등 신라에 항복한 20인을 제외한 4980명이 군대가 전멸하고 계백도 전사했다. 충상(忠常)과 상영(常永)은 신라의 태종무열왕으로부터 아찬(阿飡.6관위)과 일길찬(一吉湌.7관위) 같은 육두품 벼슬을 받아 신라 귀족으로 편입되었다.
⑶ 당군
기벌포(금강 하류) 침입하여 제1진 의직(義直) 2만 결사대. 제2진 우소(于召), 제3진 자간(自簡), 제4진 무치(武治)군을 차례로 격파하며 왕성의 목을 조여 갔다.
⑷ 나당연합군의 사비성 함락과 의자왕과 태자 부여효(扶餘孝) 항복
황산과 기벌포에서 백제군을 제압한 나당연합군이 수도 사비(泗沘. 부여)로 몰려와 사비를 함락시키자 웅진으로 피신했던 의자왕과 태자 부여효(扶餘孝) 항복하여 백제는 멸망하였다 (660년). 의자왕, 왕자들, 대신과 장군 88명, 주민 12,807명 소장방에 의해 포로로 장안 압송되었다.
⑸ 웅진도독부 등 5도독부 설치 : 7주 관할
당나라는 신라와의 약속을 깨고 백제를 지배하기 위해 웅진도독부를 두고 의자왕 아들 부여융(扶餘隆)을 웅진 도독으로 삼아 다스리게 하고 사비성과 웅진성은 유인원(劉仁願) 1만명과 신라왕자 인태, 사찬 일원, 금찬 길라 등 신라군 7000명과 함께 주둔하에 하였다.
2. 백제의 부흥운동
⑴ 복신의 옹산성, 사정성, 진현성 탈환(661년)
의자왕의 사촌동생 왕족 복신은 흑지상지(黑齒常之) 장군, 승려 (道琛) 등과 함께 일본에 있는 가 있던 의자왕의 부여풍(扶餘豐)을 임금으로 맞아 들여 부흥운동을 전개하여 백제 부흥군은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해 고구려를 공격하는 틈을 타서 옹산성(甕山城. 대전광역시 대덕구 장동에 있던 계족산성으로 비정)·사정성(沙井城. 대전광역시 중구 사정동)·진현성(眞峴城) 등을 공격해 이를 탈환하였다.
⑵ 백제부흥(재건)운동
복신(福信) 재건 총사령관 | 12,000명. 주류성(周留城) 서천의 건지산성(乾芝山城, 충남 서천군 한산면 지현리 산3, 사적 제60호 |
도침(道琛) 좌장군 | 10,000명. 임존성(任存城) : 예산군 대흥면 상중리 산8. 봉수산성(鳳首山城).국가지정문화재 사적90호 |
흑지상지(黑齒常之) | 10,000명. 眞峴城, 오늘날 黑石東山城, 密巖山城, 흑대전광역시 서구 봉곡동(鳳谷洞) 山 26-1. 대전광역시기념물 제15호 |
상여(相如) | 3000명 이례성(尒禮城), 충남 논산군 노성 |
지수신(遲受信) | 3000명 가림성(加林城) 성흥산성(聖興山城) 충남 부여군 임천면과 장암면에 걸쳐 세워진 산성. 사적 제4호 |
좌평 정무(正武) | 두시원악(豆尸原嶽). 충남 청양군 정산면 두릉윤성(豆陵尹城)추정 |
달솔 여자긴(餘自進) | 구마노리성(久麻怒利城). 웅진(熊津 공주)의 한글 발음인 ‘고마(곰)나루’를 한자로 표현한 것 |
왕자 부여풍(扶餘豐) | 왕. 中大兄. 제명천황(보황녀)의 아들 |
⑶ 일본 원군의 패배(663년)
일본에 원군을 요청하여 38대 덴지 천황(天智天皇. 텐치 텐노, 626년 ~ 672년 1월 7일)이 파견한 30,000명의 일본 구원군이 400여 채의 배를 타고 들어와서 백촌강에서 나당연합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덴지 2년(663년) 음력 7월 20일(양력 8월 28일)에 백강(白江) 어귀에서 나·당 연합군에게 처참하게 궤멸되고(백강구 전투) 백제 부흥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백제를 지원했던 왜군의 일본서기에 의하면 663년 9월 7일 주류성(충청남도 서천시 한산면 건지산성(乾芝山城) 또는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우금산성((禹金山城))이 함락되었다고 한다.
⑷ 반목
내분으로 복신이 도침( 661년 4월 반골양 전투 후 ~ 662년 사이로 추정)을 죽이고 663년 풍은 복신를 죽였다. 복신은 도침과 반목해 도침을 죽이고 자기 세력을 믿고 장차 부여 풍까지 제거하고 실권을 장악하려고 하였다. 거짓 병을 핑계로 누워 있다가 부여 풍이 문병 오는 것을 기다려 잡아 죽이려고 하였다. 이 사실을 알아챈 부여 풍이 먼저 부하들을 이끌고 가서 복신을 죽였다. ⑸ 부여 융(隆)과 흑치상지의 항복
백제 부흥운동의 유력한 한 축을 형성하다가 부흥운동의 본거지였던 주류성(周留城)이 함락된 663년 9월을 전후하여 더 버텨나가기가 어려워 수로(水路)로 공격해온 당나라의 장수 유인궤(劉仁軌)에게 항복하였다. 항복 후 오히려 당군의 선봉에 서서 백제 부흥군의 마지막 보루였던 665년 지수신(遲受信)이 버티던 임존성을 함락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부흥운동이 종식된 뒤, 흑치상지는 부여융(扶餘隆)과 함께 당으로 들어가 장안(長安)의 만연현(萬年縣)에 편적되었가 다음 해인 664년에 부여융이 웅진도독(熊津都督)에 임명되어 백제땅으로 귀환할 때 흑치상지(黑齒常之)도 다른 백제 인사들과 함께 백제땅으로 돌아와 절충도위·진웅진성대(折衝都尉·鎭熊津城大) 즉 부여융을 수반으로 하는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의 군장이 되었다. 웅진도독부가 신라군의 공격으로 한반도에서 소멸되면서 흑치상지는 당시 당으로 들어가서 여러 차례 승진을 거듭하여 좌령군원외장군 양주자사(左領軍員外將軍揚州刺史)가 되어 토번(吐蕃: 티베트)과 돌궐(突厥)을 치는데 공을 세웠다. 측천무후(則天武后)의 통치 때 응양장군(鷹揚將軍) 조회절(趙懷節)과 더불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주흥(周興) 등의 무고(誣告)로 옥에 갇혔다가 689년 10월 자결하였다.
⑹ 부흥운동 실패
백제 부흥운동은 지도부의 분열과 663년 주류성 함락 및 665년 지수신(遲受信)이 버티고 있던 마지막 보루이던 임존성의 로 전후 4년에 걸친 백제 부흥 운동은 좌절되고 말았다. 백간전투에서 패한 풍은 근신만을 거느리고 배 한 척으로 고구려로 도주하였다. 고구려에 투항한 뒤 왜국에 남아있던 아우 부여용과 내응하기도 했으나 668년에 고구려가 나 당 연합군에게 멸망한 후, 당에 끌려가 중국 남부 지방으로 유형되었다고 한다.
Ⅲ. 결어
백제의 멸망은 의자왕의 실정과 충신들의 간언을 듣지 않은데서 비롯되었고 백제 부흥운동의 실패는 복신, 도침과 풍 간의 지도층의 분열 때문이다. 국민의 생명과 안위를 보장해야 할 지도자는 국정을 올바르게 이끌어 하고 어려울 때 서로 협력해야 하는 것을 우리가 배울 수 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교훈이 백제 부흥운동의 실패에서 새겨 볼수 있는 대목이고 백제유민은 900년 견훤을 도와 후백제를 건설했지만 후백제도 36년만에 부자간의 분열로 고려에 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