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륜대 한국 순교자 기념관 입구 (출처- http://cafe.naver.com/roadstory )
1982년 개관한 오륜대 한국 순교자 기념관은 순교자들의 유물과 서책(書冊) 및 형구 등이 풍부하게 전시되어 있어 소장품으로 볼 때 가히 한국 최고의 순교자 기념관이라 할 만하다. 모두 3층으로 이루어진 전시실에는 1층에 순교자의 유물과 자료가 보관되어 있고 2층에는 성모 성년 특별 전시실, 선교 2백주년 기념실, 민속 자료실이 설치되어 있고 3층에는 김인순(루갈다) 기능품 전시실이 마련되어 있다. 그리고 병인박해의 서슬 아래 1868년 6월 부산 수영 장대에서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한 순교자 8명 중 이정식의 가족 4명의 무덤이 이 기념관 뒷동산에 이장되어 있다. (글 출처- http://www.paxkorea.co.kr)
순교자 기념관 입구 (출처- http://info.catholic.or.kr/pds/album) 오륜대 한국 순교자 기념관
오륜대에는 바로 이들의 순교를 기념해 그 1백주년 되는 해인 1968년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 분원이 설치됐고 순교 복자 기념관 및 기념 성당이 아울러 건립되었다. 그중에서도 1982년 완공, 9월에 개관한 기념관은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 창설 초창기부터 많은 수녀들이 수집, 연구하고 간직해 온 순교자들의 유물과 서책(書冊) 및 형구 등이 풍부하게 전시돼 있어 양이나 질적인 면에서 매우 우수한 기념관으로 정평이 나 있다. 1층의 기념관에는 수영장대벌의 추춧돌과 함께 교우들을 고문하던 곤장, 태, 칼, 등의 도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과 교우촌에서 발굴된 십자고상과 녹슬고 끊어진 묵주가 그 시절 교우들의 힘들었던 상황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안중근의사에 관한 내용과 장면선생에 대한 전시를 본 후 2층으로 올라가면 전세계에서 모은 성모상이 진열되어 있는데 그중 300년된 외국의 바르바라상이 눈길을 끈다. 3층의 특별전시실에는 김대건 신부님의 일대기와 최양업 신부님에 대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 자료의 귀중함이나 그림 하나하나가 마치 그분들과 함께 순례를 하는 듯한 마음이 들도록 만든다. 최양업 신부님에 대해서 전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던 전시회는 오륜대 순교자 기념관에서만 볼 수 있었던 귀중한 경험이었다. 신부님의 라틴어로 쓰신 편지 사본, 유학생시절부터 선종하시는 순간까지의 그림중 미사를 준비하시다가 외교인들의 침입으로 맨발로 도망을 치시는 그림은 마음을 찡하게 한다. (출처- http://www.paxkorea.co.kr)
기념관 입구 성녀 김효주 아녜스와 김효임 골룸바상
기념관 입구 성녀 김효주 아녜스와 김효임 골룸바상
순교자 기념관 입구 중앙의 성모자상
순교자 기념관 입구 중앙의 성모자상
기념관 왼편으로 수녀원 분원 (출처- http://info.catholic.or.kr/pds/album)
1층 내부 전시 형틀
1층 내부 전시 형틀
3층 성 김대건 신부 옥중서간 비
기념관에서 성당으로 올라가는 길 (출처- http://info.catholic.or.kr/pds/album)
돌 형구
돌 형구
돌 형구
순교자 성당
전시관을 나오면 오른편으로 성당이 있는데 특이 한 것은 성당안에 파티마의 성모상이 있다는 것이다. 또 프란치스코에 수도회에서 보내준 말 구유는 이국적인 구유를 눈으로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순교자 성당
성당 내부
성당 내부
성당 내부 우측에 있는 파티마 성모 상 (출처- http://info.catholic.or.kr/pds/album)
예수님과 마리아 상
순교자 성당과 기념비 (출처- http://blog.daum.net/shadha)
김대건 신부의 탄생과 순교 기념비와 103위 성인 시성 기념비
김대건 신부 상
김대건 신부 상
김대건 신부의 말씀 (출처- http://blog.naver.com/susannadj)
성당 마당에 있는 리델 주교, 다블뤼 주교, 최양업 신부 기념비
성당 마당에 있는 리델 주교, 다블뤼 주교, 최양업 신부 기념비
최양업 신부 상
최양업 신부 상
수영 장대돌 (출처- http://info.catholic.or.kr/pds/album)
라파엘 호
라파엘 호
십자가의 길
십자가 14처 처
순교자의 길
순교자 묘소 (출처- http://info.catholic.or.kr/pds/album)
성당을 왼편에 끼고 돌아가면 십자가의 길과 로사리오의 길이 나타나고 그 위쪽으로 동래 출신 8명의 순교자 무덤이 깨끗하게 정돈돼 있다. 80여 세의 노구로 사형의 험한 꼴을 당한 이정식(요한), 그의 아들 이관복(프란치스코), 이관복의 처 박소사(마리아)등 일가를 포함한 8명의 순교자는 병인박해의 서슬 아래 1868년 6월 부산 수영 장대(水營將臺: 현 부산 광안동 수영 중학교 뒤)에서 군문 효수(軍門梟首)의 극형을 받았다. 이들 8명 중 이정식의 가족 4명의 무덤이 본시 부산 동래구 명장동 산 96번지 가르멜 수녀원 뒷산 등에 묻혀 있었다가 1977년 9월 19일 현재의 한국 순교자 기념관 뒷동산으로 이장되었고 다만 나머지 4명의 무덤은 아직 찾지 못해 기념비만을 세워 두었다.
순교자 묘소
순교자 이정식 요한 (1794-1868년) 이정식(李廷植) 요한은 경상도 동래 북문 밖에 살던 사람이었다. 그는 젊었을 때 무과에 급제한 뒤 동래의 장교가 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활 쏘는 법을 가르친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나이 60세 때 교리를 배워 천주교에 입교한 뒤로는 첩을 내보내고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였다. 요한은 이후 가족들을 열심히 권면하여 입교시켰으며, 누구보다 수계에 열심이었다. 화려한 의복을 피하고, 항상 검소한 음식을 먹었으며, 애긍에 힘쓰면서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또 작은 방을 만들어 십자고상과 상본을 걸고 묵상과 교리 공부에 열중하였다. 이러한 열심 때문에 요한은 입교한 지 얼마 안되어 회장으로 임명되었고, 그는 언제나 자신의 본분을 다하였다. 그러던 중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가족들과 함께 기장과 경주로 피신하였다가 다시 울산 수박골로 피신하여 교우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1868년 이정식 요한 회장은 동래 교우들의 문초 과정에서 그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자 동래 포졸들은 그가 사는 곳을 수소문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는 그의 거주지를 찾아내 그곳에 있던 교우들을 모두 체포하였다. 그때 요한의 아들 이관복(프란치스코)과 조카 이삼근(베드로)은 요한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스스로 포졸들 앞으로 나와 자수하였다. 이내 동래로 압송된 요한 회장은 그곳에서 대자 양재현(마르티노)을 만나 서로 위로하며 신앙을 굳게 지키자고 다짐하였다. 그리고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문초를 받게 되자, 요한은 천주교 신자임을 분명히 하고는 많은 교우들을 가르쳤다는 것도 시인하였다. 그러나 교우들이 사는 곳만은 절대로 입밖에 내지 않았다. 또 형벌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당하였지만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요한과 동료들은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47일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 고통을 당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신앙을 버리고 석방된 사람은 없었다. 동래 관장은 마침내 사형을 결정하였다. 그런 다음 옥에 있는 신자들을 끌어내 군대 지휘소가 있는 장대(將臺)로 압송하였다. 이때 사형을 맡은 군사들이 부자를 한날에 죽이는 것을 꺼려하자, 동래 관장은 동시에 사형을 집행하라고 명령하였다. 요한은 참수형을 당하기에 앞서 삼종 기도를 바치고 십자 성호를 그은 다음에 칼을 받았으니, 그때가 1868년 여름으로, 당시 그의 나이는 75세였다. 순교 후 그의 시신은 가족들에 의해 거두어져 사형장 인근에 안장되었다.
순교자 묘소
순교자 고백비
순교자 김종권 시몬 단비
척사비
약도 |
출처: 사상천사 원문보기 글쓴이: 사상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