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의 史記 51회》
☆漢文帝의 생모 박부인의 처세술☆
漢나라 5대 황제 文帝는 고조 유방이 형양에서 전투할 때인 기원전 203년에 만난 박(薄)부인과의 사이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유방은 전쟁이 끝나고 박씨를 후궁으로 삼고 아들 이름을 항(恒)으로 지어 네번째 아들로 입적시켰습니다.
박부인은 척부인과 달리 궁궐에서 허드렛일만 하였습니다.
그녀는 특히 베 짜는 일을 좋아하여 언제나 한쪽 귀퉁이 방에서 아들을 데리고 베짜는 일에 몰두하니, 유방이 찾는 일도 없었고 여태후의 눈 밖에 날 일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여태후는 자신의 아들 여의를 태자로 세워 달라고 앙탈을 부리는 척부인은 미워했지만, 박부인은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였는지 여섯살 유항을 대(代)나라 王으로 봉할 때도 여태후는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봉지(封地)를 받고 代나라로 옮김에 따라 박부인도 함께 따라갔습니다.
여태후는 다른 배(胚)다른 자식들은 王 작위를 폐하고 다 죽였지만, 유항과 박부인은 자기가 죽을 때까지 손대지 않았습니다.
박부인은 미앙궁(장안의 궁궐)에 있을 때나 代나라에 있을 때나 다른 사람들이 느끼지 못할 정도로 매사에 조신하고 정숙하였습니다.
흔히 후궁들이 황제의 품에 한번 안겨보기 위해 온갖 편법을 쓰는 경우가 있었지만, 박부인은 일체 고조황제에게 접근하지 않았습니다.
촌부(村婦)가 하늘 같은 황제의 아들을 생산하고 궁궐에 사는 것만으로 만족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여태후가 죽은 후 여씨들을 토벌한 주발과 진평은 여태후가 세운 소황제를 폐위하고 代王으로 있는 유항을 새로운 황제로 옹립할 때 박부인을 태후로 모시게 된 것입니다.
박부인은 자신의 분수를 잘 알고 잘 지켰기 때문에 아들은 황제에 오르고 자신은 태후가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모두 박부인의 현명한 처세술이 가져다 준 복(福)이었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