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오늘은 홍차를 처음으로 먹은 날 이야기를 하려합니다. 무슨 차를 먹는다 그럴까? 촌놈 보시게. 차는 마시는 것이거든 몰랐나보다.
그러니까 고등학생 때, 아마 1학년이었을 거예요. 초여름이던가 늦여름이었던가, 집에 돌아오니 아무도 없이 조용하더라고요. 할머닌 마실 가셨을 테고 어머닌 시장 갔으려니 하니까 뭔가 생각이 나서 잽싸게 부엌으로 들어갔지요.
며칠 전 고모가 귀한 걸구했다고, 영국제 홍차 잔 세트를 보내 준 게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당시 생활 용품은 대게가 미제하고 일제를 제일로 쳐줬잖습니까? 왜 남대문 도깨비 시장 같은 데 가면 외제 물건이 휘황찬란하게 빛나질 않던가요? 그런대 영국제 홍차잔 세트라니. 고모한테는 단골로 외제 물건을 공급해 주는 왜관댁이 있었거든요. 온갖 외제 화장품에다가 아이스크림 제조기까지. 아~ 빅터사 전축까지 공급해 주는 만물상 아주머니한테서 두 세트를 샀던 모양이예요. 빅터사 전축은 진짜로 명품이었지요. 개 한 마리가 나팔처럼 생긴 스피커 앞에서 넙죽 엎드려서 노래를 듣는 장면이 상표였거든. 왜관댁이라니, 아마도 왜관이라는 곳에 미군부대가 있어 그쪽 피엑스 물건을 빼내가지고 팔러 다니는 게 아니었을까요?
커피하고 홍차가 우리 집에 있긴 있었어요. 하지만 주 고객이었을 아버지가 마시는 걸 못 봤어요. 어머니 말씀은 이랬다. ‘느그 아부지야, 다방에가서 이쁜 레지가 갖다 주는 커피나 마시지 내가 따라주는 커피를 무슨 맛으로 마시겠노.’ 약간 빈정대는 느낌인 걸 보니 엄마도 천상 여자였구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려.
아무리 생각해도 영국제 홍차잔은 만지다가 일을 크게 벌리지 싶어서 홍차 티백 하나를 꺼내고선 수돗가로 갔지요. 이제야 흔해 빠진 찻잔이 뭐 그리 대수라고? 그때는 그랬어요. 더우기 영국제라잖아요. 미제하고 일제가 판치는 세상에 뭔지 모르게 영제는 엄청 고급스럽잖아요. 귀족이 마시는 거라고....혹여 공작 나리께서 애지중지하던 홍차잔이라면 상상만해도 숨막히지 않겠어요. 커피는 커녕 손님이 오시면 차대접은 낯선 시대였고 우리집 기준으로는 알루미늄 주전자를 들고서 길 모퉁이에 있는 구멍가게에 가서 막걸리 한 되를 받아 오는 게 손님 대접이었지요. 맏이인 제가 막걸리 심부름을 했는데 부수입으로 주전자 주둥이에 대고 꿀꺽 한 모금 마시다가 벌충한다고 수돗가에서 대충 마신만큼 물을 채워 놓곤 했더니 '읍내 막걸리는 어째 싱겁다'고 손님께서 한 소리하시면 그날 죽는 거지요. 제가 한 모금하다가 너무 많이 마신 후유증이 컸다고 봐야지요.
홍차 티백을 하나 꺼냈지만 홍차 마신 걸 본 적이 없으니 어떡하겠어요. 그렇다고 홍차잔에 마시기엔 너무 위험 부담이 커서 마당 한켠에 있는 수돗 가에 시멘트로 만들어놓은 네모 번듯한 물 독에 둥둥 떠있는 바가지에 반틈 물을 떠서 마루에 척하니 앉았지요. 홍차 티백을 들고서 고민하다가 얇디얇은 티빽을 찢어서 내용물을 털어놓았어요. 종일 햇볕에 그을린 물조차 뜨뜻미지근한데 홍차 잎파리가 둥둥 뜨니까 괜찮아 보이더군요. 그걸 후후 불어가며 바가지에 입을 대고 마셨지요 뭐. 차잎이 목에 걸리니 어쩌겠어요 후후 불 수밖에. 에게게.....맛이 뭐 이럴까? 밍밍한 물에 홍차 이파리가 목에 걸리는게 ...... 참을성 있게 후후 불어가며 이파리를 치워가며 맹물을 훌훌 마시니 .... 벗님네들 이런 홍차맛 아실른가? '에라이~, 미쿡놈 영국 놈들은 이런 걸 먹는 거라고 삐까번쩍한 홍차잔에 마신다고?' 한심하더라고요. 어쨌냐고요? 바가지에 담긴 귀한 홍차물을 마당에 확 버렸지요. 고즈녁한 여름 한낮, 맛도 하나 없는 홍차 먹다가 입맛만 버렸지요 뭐.
나중에 서울 와서 다방에서 여학생을 만나서 커피를 시켰더니 여학생은 홍차를 시키대요. 어렵소, 여기 정신 나간 여자가 또 있네 하고선 홍차 마시는 걸 구경한다고 주의깊게 살폈지요. 하기사 나같은 촌놈 만나는 여학생이 어디 제 정신이었겠어요? 티백을 살짝 홍차에 담궈서 몇번 휑그던가 물에 우려나온 티백을 건져서 찻잔 옆에 내려놓고 찻잔을 가만히 입에 가져가서 마시는 폼이 영락없는 나탈리 우드같이 맵시가 나더라니까요. 아~ 나탈리 우드는 당시에 제가 가장 좋아하는 미국 여자배우였어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는 영화로 힛트를 쳤지요. 정말 황홀한 표정으로 그 여학생의 입만 쳐다보곤 왔지요. 다음날 친구랑 다방에 가서 난 홍차를 시켰어요. 친구가 웬 홍차하는 표정이었지만 그 여학생 하던대로 따라서 해봤더니 홍차 맛이 괜찮더라고요. 그 다음부터 홍차만 시켰어요.
촌놈이 세상 물정 하나 하나 알아가는 과정이었지요 뭐. '그래, 홍차 마시니 니말따나 세상을 바라보는 지평이 넓어지던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제가 세상 알아가는 모습 거게가 이쁜 여학생 흉내 내면서 배워간 거라 제 행동거지가 음전하고 품위가 있어보이지 않은가요? 티백을 깐 홍차 마시다가 목에 걸린 홍차 이파리에다가 화풀이를 하던 촌놈, 이젠 많이도 세련돼 보이지 않는가요?
홍차를 마실 때면 옛날 있었던 에피소드가 떠올라 빙그래 웃곤한답니다. 언젠가 울 와이프한테 이야기했더니 '당신이 풀어놓는 추억은 어째 하나같이 촌스럽기만 하냐고' 흉보는게 밉더니만 요즈음은 그런 댓꾸도 없어요. 우리 사랑, 많이 식어버린가 봐요. 가슴 한 켠이 쿵하고 내려앉는 거 맨치로 무서워요.
이상은 사랑도 잃고 돈도 없이 늙어가는 남정네의 푸념이었습니다. ........................................................................................................................................................
저보다 한참 뒤, 친구가 월남전 참전 했다가 집에 돌아왔던 이야기 하나.
씨레이션이라고 군인이 전쟁 중에 먹는 전투식량 한 박스를 가져왔는데 스테이크라든가 비스켓 뭐 이런 거 중에 커피도 한 봉지들어 있대요. 이거 뭐냐고 묻길래 엄마한테 커피라고 양놈들이 밥 먹고 난 뒤에 꼭 마시는 숭늉이라고 했나봐요. 스테이크라든가 비스켓 같이 귀한 거야 감춰두고 커피 대접을 하기로 하셨나 봐요. 동네 아줌마들을 불러 놓고 부엌에선 가마솥에 물을 가득 부어놓고 펄펄 끓이기 시작합니다. 커피 한 봉지를 풀어넣겠지요. 동네 아줌마, 벌써 중노인 시골 아지매들이 미쿡 사람들이 마시는 숭늉 맛본다고 한방 가득 앉아서 물이 끓기를 기다렸다지요. 솔가지를 때서 물을 끓이느라 시간을 얼쭈 잡아먹고나서 대접에다가 한사발씩 가득 부어서 돌립니다. 한 대접 후후 불어가며 마시는 아지매들 표정이 어땧을까요?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그 후일담은 차마 올릴 수 없네요. 벗님네들 상상에 맡깁니다.
그런 시절이 얼마되지 않는데 요즈음 커피야 우리나라 꺼가 세계 시장을 쥐었다가 놨다가 난리도 아니랍니다. 흐흐 커피믹스가 엄청난 히트를 친거지요. 울 할매 산소에 성묘갈 때면 아버지께선 커피를 챙기라고 채근하세요. 할매가 커피를 무척 좋아하셨거든요. 세상 변하는 거 못 말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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