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수의 도시 이미지 읽기]의미 있는 변신 꿈꾸는 ‘신촌공화국’
(주간경향 1065호 2014. 02. 25)
90년대 이후 혼잡하고 개성 없는 거리로 전락한 신촌. 겉으론 대학문화 공간이지만 속으론 값비싼 임대료의 각축장이며 소비문화의 천박한 각개전투장이다. 보행로 확충과 광장 조성 같은 물리적 변화는 자칫 이 시가전을 달아오르게 할 우려가 있다. 그래서 삶의 문화도 새롭게 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2013년 하반기에 드라마 ‘응답하라 1994’가 큰 인기를 끌었다. ‘신촌하숙’을 배경으로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의 서울 생활과 순정을 다룬 드라마다. 1990년대 중반의 일상생활은 물론 그 무렵의 서태지 열풍, 김일성 주석 사망, 삼풍백화점 붕괴, 농구대잔치 같은 사회·문화 요소들이 적절히 개입하여 비록 대학을 다니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20년 전의 생활 풍속을 되새기게 했다.
그 첫 회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그레이스 백화점 끼고 올라와가 공원 사거리 있거든, 거기서 보면 형제갈비라고 큰 고깃집 있고 쭉 올라오면 독수리다방이라고 있다. 그 사잇길로 오면 신촌하숙이라고 간판 보일 기다.”
그때는 그랬다. 그런데 지금은 그레이스 백화점은 마트로 바뀌었고, 하숙집들도 많이 사라졌다. 독수리다방, 일명 ‘독다방’은 2005년에 문을 닫았다가 지난해 1월에 실내 인테리어를 바꾸고 다시 문을 열었다. 드라마 속의 ‘신촌하숙’은 방이 5개가 넘고 널찍한 마당까지 있다.
서울지하철 2호선 신촌역에서 연세대 앞에 이르는 연세로의 차도가 2차선으로 줄었다. / 정윤수
그 무렵 신촌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위용이다. 하숙집 식사도 그 무렵의 일반 하숙집에서는 맛보기 힘들 정도로 풍성하다. 아마 그 시절에 대한 낭만적 추억과 여러 등장인물들에게 독립된 공간을 적절히 안배해야 하는 드라마 제작 특성 때문에 그리 되었을 것이다.
고집스러운 음악문화 낳은 젊은 거리
그렇게 신촌은 90년대가 전성기였다. 서울의 거리문화를 일별해 보면 50~60년대는 명동이 문화의 중심지였다. 시인 고은이 “아! 50년대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을 만큼 전쟁의 폐허에서 그나마 사람들이 모이고 저녁을 먹고 술 한 잔에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곳은 명동이었다.
70년대는 종로였다. 그 무렵, 이장희는 “어제는 비가 오는 종로 거리를 우산도 안 받고 혼자 걸었네”라고 노래했다. 청바지와 생맥주 문화가 종로의 밤거리를 형성했다. 그것을 무슨 ‘저항문화’ 운운하는 것은 과도한 표현이고 거의 ‘자뻑’에 가까운 한가로운 소리지만, 어쨌거나 종로는 젊은이들의 집산처였다.
그때, ‘대학문화’가 형성되면서 신촌도 크게 부상했다. 당대를 주도하지는 못했지만 신촌이 있어서 고집스런 음악문화가 형성되었고,‘신촌블루스’와 진짜 ‘록카페’가 존립할 수 있었다.
그 이후 서울의 거리문화는 거대해진 메트로폴리스답게 부도심 곳곳으로 흩어져 전개된다. 80년대에 압구정동과 청담동이 신흥 부촌의 이미지로 두각을 나타냈으며, 한때 주말이면 자동차가 다니지 않았던 대학로는 연극문화의 중심지가 되었고, 곧 홍대앞이 인디문화의 거점으로 은성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에 의해 신촌은 90년대 이후 혼잡하고 개성 없고 교통체증만 극심한 거리로 전락했다.
나는 서점 <오늘의 책>이 운명을 고한 뒤로 가급적 신촌에서 누군가를 만나는 것을 피해왔다. 비좁은 인도로 오가는 사람들 어깨를 피해가며 걷는 일도 피곤했고, 도심지의 한순간을 고요하게 보낼 수 있는 곳도 마땅치 않았다.
13일 신촌 연세로 정비로 생겨난 광장에서 대학생들이 집회를 하고 있다. / 정윤수
복잡하게 뒤엉킨 차량의 소음과 매연을 참는 일은 고역이었다. 헌책방이 몇 군데 남아 있어 좋은 책 혹시 없나 두리번거리다가 서둘러 신촌을 빠져나오곤 했다.
그랬는데, 얼마 전에 일부러 가보았다. 1월 6일부터 지하철 신촌역에서 연대앞에 이르는 550m가량의 연세로가 ‘대중교통전용지구’가 되어 대대적인 교통 정비가 이뤄졌기 때문에 그 풍경을 보고 싶었다. 시내버스와 마을버스, 그리고 16인승 이상 승합차와 긴급 차량만 통행할 수 있다.
머지않아 이 거리는 ‘보행자 전용지구’로도 운영된다. 서울시와 서대문구는 이 거리를 차 없는 거리로 만들어 나가기 위해 보도와 차도를 같은 높이로 만들었다.
4차로가 2차로로 줄었고 보도는 대폭 넓어졌다. 광장과 쉼터도 만들어졌다. 버스가 다니기는 하지만 보행자의 안전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시속 30㎞ 이하로 달려야 한다.
‘신촌건준’ㆍ‘신촌재생포럼’ 본격 활동
현대백화점 입구는 꽤 넓은 광장이 되었고, 그 맞은편은 문화 행사나 집회가 가능할 정도로 조성되었다. 이럴 때 흔히 쓰는 낡은 표현이지만, 외국의 어느 도시와 흡사했다.
나는 독일 아우크스부르크 시민들이 서행하는 전차 앞뒤로 태평하게 길을 건너는 풍경을 본 적이 있다. 신촌에서도 차량은 서행했다. 사람들은 어쩌다 지나가는 느린 속도의 버스에 구애받지 않고 편하게 거리를 걸어다녔다.
이로써 다 해결된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이렇게 보행자 중심으로 개편된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곧 상혼이 바짝 달아오를 것이다. 작은 가게라도 얻어 장사하려는 사람들이나 싼 하숙집 찾는 학생들이 치솟는 임대료를 감당 못해 고생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삶의 문화도 새롭게 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신촌 지역의 문화·사회단체 및 이에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모인 ‘신촌공화국 건국 준비 모임’이 대표적이다. 지난 1월 26일 신촌건준은 자신들의 페이스북에 신촌공화국 국민을 모집하는 공고문까지 올렸다.
신촌의 의미 있는 문화행사를 기획하고 청년 창업이나 양질의 주거문제 등을 폭넓게 논의하기 위해서다. 신촌건준은 공고문에서 “신촌공화국 국민들은 1년에 10만원의 세금을 내고 한 달에 한 번씩 신촌 연세로에서 전체회의를 열어 세금의 용처를 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의미 있는 지역 자치공동체 문화운동이다.
‘신촌재생포럼’도 본격적으로 활동에 나섰다. 겉으로는 낭만화된 대학문화 공간이지만 속으로는 값비싼 임대료의 각축장이며 소비문화의 천박한 각개전투가 벌어지는 곳이 연세로 일대 풍경이다. 보행로 확충과 광장 공간 조성 같은 물리적 변화는 자칫 이 시가전을 달아오르게만 할 우려가 있다.
그래서 ‘신촌재생포럼’은 친환경식당 네트워크, 공유경제를 위한 노머니경제센터, 예술가들의 자립자활 작업실 등을 꿈꾼다. 서울, 이 대도시는 그렇게 또 한 번의 홍역을 치르며 변해가는 중이다.
<정윤수 문화평론가>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5&art_id=2014022515572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