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속에서 우는 사랑
장석주
꿈속에서 우는 사랑
어딘지 모를 곳에서
겨울엔 눈 많은 파주로 넘어와서
꿈속의 꿈에서 홀로 울다가
눈사람 몇 개를 만들다가 떠나겠지.
지난여름 장마에 맹꽁이가 울 때
시장통에서 사 온 편육을 먹고
고요한 음악에 귀를 쫑긋 세우면
고양이들은 구석에 몸을 숨기고
비탄과 유머도 모르는 채 졸고 있겠지.
피로가 몰려오는 저녁
사랑은 우리의 쓸쓸한 관습,
우리는 등을 켠 거실에서 고양이 두 마리와
눈 키스를 하다가 잠이 들겠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나. 우리는
파주에 산 적이 없는 이들에게
추억을 리본처럼 매달아주는 저녁들.
식탁에는 귀신들도 와서 밥을 먹겠지.
한밤중 늑골 아래서 누군가 말을 거는데
그건 귀신의 말,
알 수 없는 외계인의 말.
겨울마다 눈이 참 많이도 내렸지.
파주에서 인사도 잘하고 잘 웃는 당신.
사랑이 늘 크고 단단할 필요는 없었지.
우리는 작은 사랑을 하며
눈사람을 몇 개나 세우고 고양이를 보살폈지.
제발,
제발,
이게 꿈이 아니라고 말해줘.
파주엔 눈이 많이 내렸지.
눈 쌓인 그곳에서 우리가 죽고 나면
눈썹을 가늘게 그린 딸들이 와
꿈속에서 꿈을 꾸듯이 살겠지.
우리의 기일엔 눈썹 검은 세월이란 하객들이
모였다 흩어지겠지.
하얀 방
날씨는 누군가 먼 곳에서 보낸 소식이다. 당신은 언제나 하얀 앞니를 보이며 웃고,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눈꼬리를 올려 사나운 표정을 짓는다. 당신의 표정과 몸짓이 나의 날씨라면 당신이 연둣빛 봄비 이틀을 내게 보낼 때 나는 당신의 등이나 옆구리를 쓰다듬으려고 한다. 만질 수 없는 것을 만지려고 손을 뻗는 나여, 참 어리석구나! 거리를 가늠할 수 없는 먼 곳, 태풍이 자라나는 먼바다에서 당신이 애처롭게 울고 있겠구나.
당신이 기다릴 때 나는 울지 않고 다만 깨끗한 하늘을 스치는 번개를 본다. 당신의 슬픔이 깊으니 내 눈썹은 검고 내면은 단단하다. 시금치와 구운 생선을 먹고 밤에는 맥주를 마신다. 소문과 거짓말이 퍼지는 다른 세계에서 온 당신을 알지 못한다. 고독의 세입자인 당신, 오, 나의 피안이여, 오늘 당신은 먼 곳에서 출발한다고 연락한다. 당신은 이미 텅 빈 방과 가까운 장소에 불시착한다.
아, 나는 다시 태어나는 일은 없겠구나. 누군가의 자궁에서 심장을 새로 빚어 태어나려고 양수를 쏟는 일은 없겠구나. 손톱과 수염이 자라는 세계에서는 한 번 태어난 걸 무를 수는 없다, 입술을 동그랗게 모으고 봄이라고 발음해보자. 여기가 피안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금지를 금지하자. 번식과 멸종이 일어나게 놔두자. 꽃들은 누구의 노력도 없이 가지 밖으로 불거지고 극장에서 나온 연인은 그길로 헤어진다. 우리는 태어나고 죽는다. 흰빛이 넘치는 거실에서는 녹색 잎을 틔운 식물들이 수화를 한다. 당신은 여기에 없다. 거실엔 나침반과 방위표가 있다면 좋겠다.
당신은 언제부터 당신이었는가? 설마 당신은 여기에 온 적이 있었나? 당신은 삼만 년 전부터 태어나려고 하지만 무모한 일이다. 우리는 날씨를 예측하는 일에 실패한다. 당신의 기분이 날씨에 따라 자주 변하기 때문이다. 나무와 석탄 속에 숨은 불이 밖으로 솟구칠 때 당신은 당신이 부재하는 곳에서 뛰쳐나간다. 산소를 뿜는 초목이 자라고 가슴 붉은 새가 오리나무에서 우는 아침이 온다. 당신은 우리 곁에 오지 못했다. 아침에 오지 못한 사람은 기어코 오지 못한다. 약속이 깨지고 도착이 지연되면 우리의 슬픔도 유예될 것임을 안다. 우리가 태어나지 않은 자의 외로움을 모르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밤에 식물처럼 자라는 당신과 걷기
당신은 녹색 식물, 당신은 침묵의 원뿔 속에 웅크린다. 당신 안에는 폐와 심장, 불투명한 의혹 들이 공존한다. 당신은 여러 의혹을 안고 걷는 사람 …… 물은 흐르고 당신은 걷는다. 당신 안에서 둥근 고요가 자라나는 건 꽃 필 징조다. 당신은 언제나 자기 밖으로 나와 당신의 안을 향해서 한없이 걷는다.
당신의 출구는 당신이었어. 당신 안에는 새장과 감옥이 있고, 침묵이란 새와 접착이란 죄수가 산다. 당신 안에서 혼자 사는 당신은 며칠씩 입을 다문다. 당신이 개울물소리를 읽고, 모란과 작약이 꽃망울을 키우는 기척에 귀를 기울이기 때문이다.
헤어진 이의 안부는 묻지 않는다. 가끔 마루까지 들이닥친 비가 당신 안의 고요를 들여다보고 돌아간다. 복사꽃은 폈다가 지고, 달은 찼다가 기울었다. 노모가 헌옷가지를 남기고 떠난 뒤 수제비도 팥죽도 더는 없었다. 굶을 수는 없어서 이틀이나 사흘마다 전기밥솥에 밥을 지었다. 전기밥솥이 저 혼자 끓어 넘치다가 밥이 다 되었다고 소리를 냈다.
당신은 당신 안에서 걷는 사람이다. 걷기는 존재의 파닥거림, 당신은 날개를 파닥거린다. 밤에 식물처럼 말없이 걷는 건 당신이 당신 밖에서 자유를 얻는 몸짓, 걷기는 오, 경이로운 슬픔 속에서 슬픔 밖으로 나가는 일, 대지 위로 미끄러지는 저 하염없는 걸음을 보라.
걷기는 동물의 기예, 춤과 신명의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