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五世 낙암공 배득인(十五世 洛巖公 裵得仁)
公의 諱는 득인(得仁), 字는 영중(榮仲) 號는 낙암(洛巖)이며, 효우당(孝友堂, 諱 經)의 맏아들이다. 명종 21년(1566, 丙寅)에 계곡리(桂谷里)의 집에서 출생하였다. 풍채와 위의(威儀)가 엄정(嚴整)하고 이른 나이에 문예(文藝)를 성취하여, 선조 23년(1590, 庚寅)에 성균진사(成均進士)에 합격하였다. 용만 권기(龍巒 權紀)와 함께 영가지(永嘉誌)를 편찬하였다. 만년(晩年)에는건지산(搴芝山) 아래, 낙동강이 내려다 보이는 절벽 위에 정자를 짓고 멀리 경치를 관망하며 속세의 잡념을 잊고 즐거움을 누리고자 하였다. 이곳은 일찍이 公의 칠대조(七代祖)이신 관찰공(觀察公, 諱 桓)이 일찍이 터를 잡고 정자(亭子)를 지었던 곳이었기에, ‘낙암정(洛巖亭)’이란 현판(懸板)을 걸어 선조(先祖)를 추모(追慕)하고 경앙(景仰)하고자 하였다. 당시 공이 행하신 일과 남기신 글이 반드시 많았을 것이나, 가세(家勢)가 기울고 후손들이 번성하지 못하여 고증(考證)할수 없음이 원통할 뿐이다. 묘소는 풍산읍(豐山邑) 계평동(桂坪洞) 빈소곡(殯所谷) 임좌(壬坐)에 있다.
配는 의인진성이씨(宜人眞城李氏)이니 직장(直長) 벼슬인 경원(景轅)의 따님이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균(均)의 손녀이며 별시위(別侍衛) 윤정(允貞)의 증손(曾孫)이다. 네 아들을 기르셨는데, 익겸(益謙), 덕겸(德謙), 복겸(福謙), 호겸(好謙)이며, 사위는 정랑(正郎) 남연(南瑌), 부사(府使) 이회보(李廻寶)인데, 모두 文科에 급제하였다.
● 경앙(景仰) : 덕을 사모하여 우러러 봄.
● 남연(南瑌) : 1598(선조 31)∼1664(현종 5). 본관은 英陽. 자는 鍊夫. 호는 无妄齋. 父 隆達. 祖父 庭元. 居 安東. 鄭元黙의 외손. 1624년 式年試 병과로 문과에 급제하고,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泗川郡守로 부임하여 흩어진 병사를 모아 싸움터로 달려가다가 항복 소식을 듣고 귀향함. 그 후 都承旨에 증직됨. 저서로는 《泗川日錄》‧《柵門記事》‧《新安世稿》 등이 전함. 李惟樟이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國朝文科榜目》 《嶠南誌》
● 이회보(李廻寶) : 1594(선조 27)∼1669(현종 10). 본관은 眞城. 자는 文祥. 호는 石屛. 父 燉. 居 安東. 1629년 別試 을과로 문과에 급제하여 1636년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왕을 호종함. 金尙憲과 함께 청군과 싸울 것을 주장했으나 항복하게 되자 사직하고 낙향함. 이후 兵曹佐郞·工曹佐郞을 역임함. 1650년 金自點의 횡포를 탄핵하여 유배되게 함. 이후 定平府使를 지냄. 효종의 북벌계획을 도와 군비를 충실히 하여 표리를 하사받음. 저서로는 《石屛集》이 있다. 宋箕煥이 묘갈명을 찬함. [참고] 「墓碣銘」 《國朝文科榜目》 《嶠南誌》
첫댓글 남연(南瑌), 이회보(李廻寶) 두 분의 자료는 <경북유학인물지>에 실린 내용을 가져왔습니다. 한자가 조금 다르나, 같은 의미의 글자이고, 거주지역과 연대 등을 볼 때 동일한 분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