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번째 답사지로 떠나기 전, 우리는 경주 박물관에 들려서 신라시대의 여러 유물들을 살펴보았다. 그중에는 금관총에서 나온 화려한 금관도 있었고, 얼굴의 1/3 가량이 사라진 웃는 모양의 기와도 있었으며, 이사지왕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검과 이외의 여러 유물들이 있었다. 이곳에서는 신라의 다양한 시대 배경을 나타내는 유물들을 볼 수 있었고, 그에 얽혀있는 이야기들도 마주할 수 있는 아주 유익한 공간이었다. 이번 역사 기행에서는 약간 새는 이야기일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 내가 유물에 대하여 그 의미를 크게 되새길 수 있었던 사건은 제 작년 이집트 여행 때의 일이었다. 이집트에는 말 그대로 발에 치일 만큼 유물들이 널리고 널렸지만, 그중에서도 독보적이고도 독창적인 유물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미라였다. 나는 이집트 박물관에서 미라를 두 눈으로 직접 감상하면서 정말 미묘한 감정을 느꼈다. 역사의 순간을 나타내는 유물이 아니라, 아예 그 순간을 직접 살아내고 창조해 낸 인물이, 자신의 옥체를 그대로 남겨 지금 내 눈앞에 누워 있으니. 그저 이야기로 듣고 공부했었던 역사의 순간이, 너무나도 현실적으로 지금 내 눈앞에 떡하니 놓여 있었다. 이때 이후로 나는 박물관 가는 것이 좋든 싫든 간에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여섯 번째 답사지는 계림이었다. 계림은 소지 마립간 때에는 홍수로 물이 범람할 경우에 인명피해를 막기 위한 댐의 역할을 하던 숲이었으며, 또한 신라 왕성 김씨의 시조 김알지의 탄강 전설이 있는 숲이다. 아주 오래된 숲인 만큼 거대한 고목들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어 중후한 분위기를 풍기는 숲이었고, 그 사이 사이로 보이는 거대한 고봉들과 새소리, 흐르는 시냇물 소리가 어우러져 현재는 굉장히 아름다운 숲의 모습을 띄고 있었다.
일곱 번째 답사지는 월정교였다. 계림에서 이어져 있는 산책로를 따라 걸어가다 보니, 거대한 전각의 모습을 띄고 있는 아름다운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월정교는 66M의 거리에 폭 13M, 높이 6M에 달하는 거대한 다리였다. 남천을 건널 수 있는 다리가 없던 신라 35대 왕 경덕왕 시대, 일정교와 함께 세워진 월정교는 월성과 남산을 이어주는 지리적, 문화적, 종교적 역할을 지닌 다리였다. 삼국 통일을 이룬 신라는 불국토라는 상징성을 밀고 나감으로써 민족 정신을 일깨우는데 한창이었다. 그렇기에 지리적 이유 외에도 불교의 성지인 남산과 월성을 잇는 화려한 다리로서 불국토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고 생각되어 진다. 게다가 삼국 통일 후 한창 불교가 장성할 시기에는 건축적인 부분에서도 활달하게 새로운 기술과 건축물들이 만들어진다. 그중 하나였던 월정교 역시 현대에 이르러서 과학적으로 건축 기술의 실용성을 검증할 수 있게 됨에 따라 그 기술력의 수준이 굉장히 월등했음을 밝혀냈다. 내가 공부했던 불국사와 석굴암, 그리고 월정교를 살펴보면 총 세 가지의 주제들이 맞물려 있었으니, 불교를 향한 신라의 깊은 믿음과, 이를 형상화하는 예술성,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를 실현 시킬 수 있는 기술력까지. 이 삼박자가 맞아 떨어짐에 따라 만들어진 신라의 여러 건축물을 살펴보면, 당시 신라인들의 드높은 자부심이 보지 않으려 해도 보이는 듯하다. 그만큼 전에 없던 여러 창의적인 시도들과 이를 뒷받침하는 과학적 사고가 모두 묻어나오기 때문이다. 내가 이러한 감상을 더 강하게 가지게 된 것은 다음 날 가게 될 석굴암을 공부함에 의한 것이었다.
여덟 번째 답사지는 석굴암, 석불사였다. 석굴암은 사전에 내가 가장 많이, 열심히 찾아봤던 답사지였다. 왜냐하면 불교가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기 위해 사용하는 여러 상징적인 언어들, 그 장치들을 이해하기 위해선 너무나 많은 것들을 알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정말 사소한 것들 하나하나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는 시도들이 나타나 있었고, 그 시도의 흔적을 읽어낼 수 있었기에 그 속의 의미 또한 어영부영 지나칠 수 없었다.
석굴암과 불국사의 창건 신화는 삼국유사의 김대성 이야기에 나타나 있다. 모량리 가난한 어머니 아래에서 태어난 대성은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던 와중, 보시를 받으러 온 스님에게서 현생에 덕을 쌓으면 다음 생에 더 나은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말을 듣는다. 이에 대성은 자신에게 보시할 것은 없었지만, 전생에 덕을 쌓지 않아 현생에 가난한데, 현생에 가난해 다시 덕을 쌓지 못하여 다음 생에도 가난한 것은 너무나도 억울한 일이라며 수중에 있던 밭을 전부 보시하고 이내 금방 죽고 만다. 이후 재상 김문량의 집에서 환생하여 장성해 사냥을 즐기며 잘 살아가던 와중, 우연히 잡은 곰 한 마리가 꿈에서 나와 자신은 억울하다며 다음 생에 너를 죽여버리리라 협박하는 일을 겪게 된다. 이에 곰에게 사죄하는 마음으로 곰을 잡은 자리에 장수사를 짓고 이를 통해 자비로운 결심을 갖고 전생의 모를 위해 석불사를, 현생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세우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석굴암은 세계에서 최초이자 최후로 만들어진 불교의 인공 석굴이다. 통일 신라 초기, 세계 각국으로 유학을 다녀온 신라의 스님들은 인도의 암벽을 파고 들어가는 양식으로 건축 된 석굴을 보고 이를 신라 땅에 재현하고자 한다. 그러나 한반도의 산들은 단단하고 무거운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굴을 파고 들어가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래서 결국 인공적으로 석굴을 만들어서 그 위를 흙과 자갈로 덮는 형식의 석굴암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었다.
석굴암에는 현재 총 38개의 석상이 존재한다. 맨 처음 팔부신중이 양쪽 벽에 병풍처럼 세워져 있고 그 뒤로 불법을 수호하는 금강역사가 둘, 사천왕이 넷, 그리고 주실에 본존불을 중심으로 세 분의 보살과 범천, 제석천, 석가모니불의 열 제자와 그 위 감실에 총 8명의 불교 관련 인물들이 조각되어 있다. 또한 석굴암은 황금률을 적극 도입하여 미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비율로 제작되었고, 원근감으로 특정 거리와 높이에서 보았을 때 가장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하는 시도 또한 나타내었다. 하나하나가 몇 톤에서 많게는 몇십 톤이 넘어가는 돌덩이들을 쌓아 만든 석굴암. 이 안에 상징적으로 나타나져 있는 장치들은 무수히 많지만, 그중에서도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게 느낀 부분은 바로 본존불 위 감실에 안치 되어있는 유마거사상과 문수보살상이 상징하는 이야기였다.
유마거사는 석가모니불의 제자였으나, 출가하지 않고 결혼을 한 인물이었다. 평생 건강이 좋지 않아 병상에서 설법을 계속하던 유마거사. 그가 죽을 날이 다가오자 석가모니불은 문수보살을 시켜 유마거사를 찾아가게 한다. 이때 유마거사는 문수보살에게 절대 평등이란 무엇인지 물음을 던지고, 문수보살은 이에 이렇게 답한다. ‘말도 없고, 사람도 없으며, 인식할 수도 없고, 제시할 수도 없는 경지.’ 이 내용은 머나먼 옛날 구마라집이 중국으로 번역하여 들여온 경전 중 많은 관심을 받은 유마경에서도 가장 사랑받는 장면이다. 이 장면을 표현한 그림으로 유마경변상도가 있는데, 이 유마경변상도에는 중국의 황제와 신라의 사신들 또한 그려져 있다. 석굴암의 문수보살은 유마거사에게 두 손가락을 내비치고 있다. 마치 둘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이에 유마거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무엇을 말로 꺼내는 순간 그것은 옳고 그르고, 좋고 나쁘고 등 세상의 여러 관념으로 재단 될 것임을 알기 때문이리라.
반면에 본존불은 과연 어느 부처님일까. 본존불 곁으로 둘러 있는 10대 제자를 보면 본존불이 역사적 부처, 석가모니불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뒤에 있는 십일면관세음보살을 보면, 본존불이 관음보살이 모시는 서방 정토의 부처일 수도 있음을 나타낸다. 또한 미륵보살을 통해 본존불이 미륵보살이 모시는 미래의 부처님일 가능성 또한 표현되고 있다. 즉 김대성은 본존불을 특정한 한 부처가 아닌 시공간을 초월한 법과 진리 그 자체로 표현하고자 한 것일지도 모른다. 본존불이 짓고 있는 항마촉지인은 석가모니불이 아직 부처가 되기 전 보리수나무 아래 금강좌에 앉아 수행을 이어가던 때, 자신을 유혹하는 악마의 속삭임을 모두 이겨내며 짓고 있던 선정인을 풀고 악마를 물리치며 깨달음을 얻는 순간을 나타낸다. 즉 깨달음. 그 진리의 외침은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철학적인 뜻을 김대성은 이 석굴암이라는 인공 공간 안에 나타낸 것이리라고도 볼 수 있었다.
이처럼 석굴암은 기존에 존재하는 불교문화의 양식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인용하였지만, 그에 덧붙여 오직 신라만의 색채를 입힌 새로운 표현 방식을 많이 시도해 만든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석굴암을 부처님 오신 날, 즉 석가탄신일에 찾아갔다. 이날은 1년 중 단 하루, 석굴암 내부를 막고 있는 유리관을 여는 날이었다. 그렇기에 이른 시각, 차를 타고 토함산을 올라 직접 석굴암 내부를 한 바퀴 돌 수 있었다. 가까운 자리에서 마주 보는 문화재의 모습.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깊은 뜻이 담긴 석굴암은 1300년 전과 크게 변함없는 모습으로 우리를 반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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