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진보 수업에서 두목(杜牧)의 「아방궁부(阿房宮賦)를 읽고
10월 8일, 고문진보 시간에 두목(杜牧)이 지은 아방궁부(阿房宮賦)를 공부했다. 수업은 아방궁과 밀접한 배경이 되는 천하의 요새, 함곡관(函谷關)에 대한 이야기로 흥미롭게 시작되었다.
함곡관은 중원(낙양)에서 관중(함양·장안)으로 들어가는 관문에 위치하여, “한 사람이 관(關)을 지키면 만 사람이 당해낼 수 없다(一夫當關 萬夫莫敵)”는 명성을 지닌 중국 역사상 최고의 난공불락 요새다. ‘함(函)’은 상자, ‘곡(谷)’은 골짜기, ‘關(관)’은 빗장이자 드나드는 통로를 의미한다. 사마천의 사기 「진시황본기와 반고의 「서도부」 기록에 따르면, 함곡관은 황토 고원이 오랜 세월 침식되어 형성된 깊이 십여 미터의 좁은 협곡에 자리 잡고 있다. 골짜기의 길이는 약 15km에 달하는 반면, 폭은 수레 두 대나 말 한 마리가 겨우 통과할 정도로 매우 협소하다.
여기에 북쪽은 거센 황하의 물줄기가 가로막고 있고, 남쪽은 효산과 진령산맥의 험준한 산세가 이어지며, 양옆으로는 수십 미터 높이의 직립한 황토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우회로를 통한 침투는 사실상 불가능한 천혜의 방어막을 이루고 있다.
이처럼 난세의 지리적 배경 속에서 두목이 지은 「아방궁부 」는 사실과 다른 문학적 과장이 깃든 작품이다. 하지만 그 묘사가 워낙 생생하고 강렬하여, 일반 독자들은 이 글을 읽고 자연스럽게 그것이 정사(正史)인 것으로 믿게 되는 경향이 있다. 오늘 공부한 대목에서도 아방궁의 규모는 어마어마하게 크고 화려하며, 무희들의 춤과 악사들의 음악 소리가 그치지 않고 각종 보물로 가득 찬 꿈의 궁전처럼 묘사되어 있었다.
특히 글의 중간에 등장하는 “楚人一火,可憐焦土! (초나라 사람이 한 번 불을 지르니, 가련하게도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었도다!)”라는 구절은 매우 강렬하다. 이 짧고 힘 있는 문장은 읽는 이의 머릿속에 ‘천하제일의 장대한 궁궐이 항우(項羽)의 분노에 의해 단숨에 화염에 휩싸이는 극적인 이미지’를 깊이 각인시킨다.
두목은 이 작품의 사평(史評)에서 ‘滅六國者(멸육국자), 六國也(육국야), 非秦也(비진야), 族秦者(족진자), 秦也(진야), 非天下也(비천하야) (6국을 멸망시킨 것은 6국 자신이지 진(秦)나라가 아니고, 진나라를 멸족시킨 것은 진나라 자신이지 다른 천하의 국가가 아니다)’라고 평했다.
교수님께서는 이 대목을 설명하며 『맹자』 「이루(離婁)」 편을 인용하셨는데,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맹자왈: “부인필자모(夫人必自侮) 연후인모지(然後人侮之)하고, 가필자훼(家必自毀) 연후인훼지(然後人毀之)하며, 국필자벌(國必自伐) 연후인벌지(然後人伐之)니라.”
(어떤 사람이 자기가 자신을 업신여겨야 다른 사람의 업신여김을 초래하고, 한 집안도 스스로 자신을 손상해야만 다른 사람의 손상을 초래하며, 한 나라도 먼저 스스로를 공격해야만 다른 사람의 공격을 초래한다.)
여기에 짝을 이루는 『서경(書經)』 「태갑(太甲)」 편의 말도 함께 떠오른다.
“천작알(天作孽) 유가위(猶可違), 자작알(自작孽) 불가활(不可活). (하늘이 지은 재앙은 오히려 피할 수 있으나, 스스로 지은 재앙은 피할 수 없다.)”
이 두 구절이 전하는 핵심 교훈은 명확하다. 모든 일은 자업자득(自業自得)과 반구저기(反求諸己)에 비롯되므로, 우리는 항상 스스로를 성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은 문학적 상상과는 거리가 있다.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항우가 진나라 궁궐을 불태운 곳은 아방궁이 아니라 위수(渭水) 북쪽에 위치했던 진나라의 본래 궁전인 ‘함양궁(咸陽宮)’이었다.
당시 항우(項羽) 는 진나라의 값진 보물을 약탈한 뒤 허영심에 사로잡혀 고향인 팽성으로 돌아가려 했다. 이때 한생(韓生)이 “관중은 사방이 산과 강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이자 비옥한 땅이니,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천하를 다스리셔야 합니다”라며 강력히 말렸다. 그러나 항우(項羽) 는 “부귀를 누리게 되었는데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비단옷을 입고 밤에 길을 가는 것(금의야행·錦衣夜行)과 같아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자신의 고언이 무시당하자 한생은 물러나며 “초나라 사람들은 원숭이가 목욕을 하고 관을 쓴 것과 같다고 하더니 과연 틀린 말이 아니구나”라며 항우의 어리석음을 탄식했고, 이 말이 밀고로 전해져 항우는 크게 진노하여 그를 가마솥에 삶아 죽이는 팽형(烹刑)에 처했다.
이 사건은 항우가 장기적인 전략적 안목보다 눈앞의 허영과 과시욕을 앞세우며 인재의 직언을 내친 대표적인 패착으로 기록되었다. 권력을 쥐고 고향으로 돌아가 성공을 뽐내고 싶어 했던 그의 욕망에서 ‘금의환향(錦衣還鄕)’이라는 고사도 유래했다.
그렇다면 아방궁의 실제 모습은 어떠했을까? 아방궁은 진시황 35년(B.C. 212)에 공사가 시작되었으나, 진시황의 사망과 이어진 농민 봉기로 인해 기단(토대)만 조성된 채 중단되었다. 건물이 완공조차 되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사기』 「진시황본기」에는 전전(前殿) 아방궁의 규모가 동서 500보(약 675~690m), 남북 50장(약 115~150m)으로 위층에만 1만 명이 족히 앉을 수 있는 구조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2000년대 중국 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의 정밀 발굴 조사 결과에 따르면, 실제 조성된 아방궁 전전의 판축 대좌는 동서 길이 약 1,270~1,300m(축구장 12~13개 크기), 남북 너비 약 420~450m로 총면적이 약 54만㎡(약 16만 평, 여의도 광장의 약 2배 이상)에 달했다. 놀랍게도 발굴 조사 어디에서도 건물이 불탄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두목의 부(賦) 한 편으로 인해 항우(項羽) 가 아방궁을 불태웠다는 왜곡된 인식을 진실처럼 받아들여 온 것이다. 글과 문학이 가진 힘이 얼마나 거대한지 새롭게 실감하게 되는 대목이다.
이러한 역사적 기록의 전파와 왜곡을 마주하며, 작금의 우리 현실을 돌아보게 된다. 최근 대중문화 영역에서도 역사적 사실을 두고 소모적인 논란과 왜곡 시비가 벌어지곤 한다. 역사를 다룸에 있어 특정한 편향이나 의도에 치우쳐 진실을 가리는 일은 경계해야 마땅하다. 다행히 요즘 젊은 세대들은 과거와 달리 다양한 정보 채널을 통해 주체적으로 진실을 탐색하고 역사를 새롭게 조명하는 눈을 길러가고 있다.
작금 허진호 감독의 ‘암살자’라는 영화가 역사를 왜곡했다고 논란이 거세다.
영화를 보지는 않았지만, 평론가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박정희 대통령이 권력의 연장을 도모하기 위해 육영수 영부인을 암살한 것처럼 암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패륜이다. 우리 세대는 이 사건이 북한의 사주를 받은 재일 조총련 출신 문세광이 범행을 저질렀음을 이미 다 알고 있다.
그리고 요즈음 젊은이들은 아무리 왜곡되게 가르쳐도 다양한 정보 루트를 통해 진실을 쉽게 알 수 있게 되었다.
최근 젊은이들은 박정희 대통령을 새롭게 조명하는 신드롬이 일고 있다. 그들 중의 일부는 박정희 대통령의 위대한 업적을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의 업적을 합친 것보다 위대하다고 여긴다.
만에 하나 그와 같은 신드롬에 흠집을 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든 영화라면 제작자와 연출자 그리고 출연자는 역사적인 죄인이 되어 천추의 한으로 남으리라고 본다.
역사는 정확한 사실과 반성을 통해 미래의 거울이 되어야 한다. 고전 속 두목의 글 한 구절에서 시작된 상념이, 오늘날 우리가 역사를 대하는 태도와 기록의 무게를 다시금 깊이 돌아보게 만드는 소중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