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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5일
오늘 아침은 드디어 산티아고로 가는 날이지만 다른 순례와 기분이 많이 다르지 않았다. 일단은 출발했다. 그래도 아침에 7시에 출발하느라 급하게 나오면서 거울을 보지 못한 탓에 가서 만난 사람들이 대부분 눈이 많이 빨갛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돌이켜 보니 어제 잠을 좀 덜 잔 것 같긴 했다. 그리고 지금 몸도 조금 피곤했다.
순천역에서 인사를 하고 기차를 탔다. 용산역에 도착해서 은지를 만났다. 그리고 처음으로 은지 아빠를 뵀는데 생각보다 더 은지랑 닮아있었다. 지하철을 타고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중간에 있는 벤치에 누워있는 분 옆으로 직원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무전기와 휴대전화를 양손에 들고 이리저리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석영이랑은 이게 지하철 빌런인가? 하면서 대화를 하고 있는데 조금 있다가 어떤 사람이 내려왔는데 처음엔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 등 뒤에 119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뒤따라서 또 한 사람이 푹신해 보이는 들것을 가지고 내려왔다. 그리고 잠깐 지켜보는 중에 지하철이 도착했다.
1시간 정도 타니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거기 도착한 게 2시였다. 간단히 햄버거를 먹고 짐을 화물에 부쳤다. 그리고 5시 10분에 비행기에 올랐다. 솔직히 영산강 순례가 끝난 직후부터 실감이 날 거로 생각했는데 아직도 산티아고 길을 걷고 있는 ‘나’는 상상이 되지 않는다.
5월 26일
오늘은 어디부터가 오늘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오늘은 어제의 연장선 위에 있었다. 비행기 안에서 하루를 눈을 뜬 채 마쳤고 또 하루를 맞이했다. 드디어 비행기에서 내렸다. 걱정하던 입국심사는 5초 만에 마무리됐다. 거기서 지하철을 3~5번 정도 갈아타고 좀 걸으니까 숙소가 나왔다. 밖에서 볼 때는 잘 몰랐는데 들어가려고 자세히 보니까 한국사람의 이름이 영어로 적혀 있었다. 그리고 정말로 주인분이 한국분이셨다. 공간은 지하였지만 밖에는 오히려 담배냄새 때문에 숨이 막혔는데 지하에는 담배냄새가 없어서 더 쾌적한 느낌이었다.
5월 27일
오늘 아침밥을 숙소 주인분이 조식이 가능하다고 하셔서 준비해 주신 아침을 먹고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지하철은 30분 정도, 버스는 5시간 정도 타고 팜플로나에 도착했다. 그리고 알베르게에 들어가니까 뒤에서 한국인 두 분이 내 가방에 달린 세월호 고리를 보고 한국인인 걸 알아보셨다. 점심은 햄버거를 먹었다. 애들은 동네를 돌아보는 도중에 한국인을 두 명 더 마주쳤다고 했다.
5월 28일
아침에 버스 시간은 12시인데 알베르게 퇴실 시간은 8시 반이어서 나가서 팜플로나 요새를 구경하고, 대성당은 다시 돌아왔을 때 보기 위해서 아껴둔 채로 9시부터 12시까지 정류장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생장에 도착해서 순례자 여권을 만들고 알베르게에 들어갔다. 그리고 늦은 점심을 먹으려고 마을을 돌아다니는데 이미 점심시간이 끝나서 먹을 곳을 찾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조금 멀리 나가서 먹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돈이 너무 많이 들었다. 그리고 드디어 내일부터 진짜 걷는다는 생각에 긴장도 되고 또 설레기도 했다.
5월 29일
오늘은 순례 처음으로 걷는 날이다. 걷는 거라면 매일 아침 걸었고 순례도 여러 번 다녀 왔는데 이번에는 특히 더 설레었다. 산을 오르는데 이때까지 못 봤던 풍경이 하나둘씩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중반이 되니까 나는 다리에 쥐가 나서 몇 시간 동안 고생하며 일평, 석영이랑 같이 가다가 결국 뒤로 처졌고, 처음부터 처지던 은지, 설린, 후마는 그래도 보이지 않았다. 대충 일평, 석영은 내 앞으로 2킬로, 은지, 설린, 후마는 내 뒤로 6킬로 정도 떨어졌다. 중간에서는 아무도 보이지 않아서 걸음에 힘도 없고, 무엇보다 길에 대한 내 선택에 확신이 없었다. ‘이 길이 아니면 어떡하지?’, ‘이미 많이 왔는데’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다행히 조금 가다가 석영, 일평을 만났다. 그리고 숙소에 도착해서 점심 먹고 뒷사람들 기다려서 숙소에 들어갔다.
5월 30일
오늘은 비교적 느긋하게 6시 30분쯤 출발했다. 길을 가다 가끔 지금 시각에 7시간을 더해 한국 시각을 생각하며 애들은 뭐 하고 있을지 생각하며 걷는다. 그래도 다행히 내가 생각한 그들의 모습은 웃는 모습 밖에 없었다. 길은 별로 험하지 않았다. 내가 급격하게 느려지는 오르막길이 별로 없어서 선두에서 갈 수 있었다. 중반에는 다시 오르막길이 나와 나는 아슬아슬하게 선두 그룹의 뒷모습을 보며 따라갔고 설린, 은지, 후마는 뒤쪽에서 느리게 왔다. 그리고 벌써 외국에 있는 게 익숙해졌다. 도착한 수비르(수 비리)에 있는 시냇가에서 발을 담글 수 있었다. 그리고 걱정했던 언어도 그럭저럭 버틸만했다.
5월 31일
다리는 더 아파졌지만, 이상하게 걸으면 좀 덜 아팠다가 쉬었다가 다시 출발하면 다시 아팠다. 아직은 적응이 덜 된 듯하다. 그래도 점점 적응이 되는 것 같다. 그 증거로 걷기 할 때, 오르막길에서 간격이 줄어들고 있다. 이제는 여기서 만난 사람들과도 그럭저럭 마주칠 때 인사도 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언어에 대한 부담감이 많이 줄어든 듯했다.
6월 1일
걸으면서 만난 어떤 분이 오늘 걷는 길이 거의 피레네 급으로 힘들다고 하셔서 많이 긴장하고 나왔다. 걷기를 시작하고 시내에서 벗어나고, 나무가 많아지고, 길이 도로에서 흙길로 바뀌고 두 시간째 걸으니까 오르막이 나왔다. 그래서 이제 시작인가 보다. 하며 속도를 좀 늦추고 힘을 아끼며 언덕을 올랐다. 1시간이 좀 넘자 사진으로는 많이 봤지만 여긴 줄을 몰랐던 용서의 언덕이 나왔다. 이 언덕의 의미는 말 그대로 용서한다. 이 언덕을 넘고 나서는 순례길을 포기해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어느 정도 순례의 패턴에 익숙해진 것 같았다.
6월 2일
평소처럼 6시에 출발했다. 그리고 전보다 훨씬 여유롭게 걸었다. 킬로 수는 21킬로여서 마음이 편했다. 그리고 출발하기 전에 후마가 힘들지 않게 자기 페이스 잘 유지하라고 말씀하셔서 ‘당연히 느린 게 덜 힘들겠지’라고 생각하고 아침을 먹고 나서부터 제일 뒤에서 시도 외울 겸 느리게 갔다. 그리고 나중에 앞쪽이랑 거리가 많이 떨어진 것 같길래 속도를 올리려고 했더니 이상하게 원하는 만큼 속도를 올리기가 쉽지 않았다. 그냥 느낌이 그랬다.
내가 다리가 아파서 그런가 보다 하고 쉬어봐도 뭔가 걷는데 허전하고 찜찜했다. 그래서 중간마다 뒤를 돌아보거나 했지만 빠뜨리는건 없었다. 쉬지도 않는데 앞사람들과의 거리는 계속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도착할 때 쯤 되니까 오히려 걷기가 편했다.
6월 3일
항상 그렇듯 5시~7시에 다 같이 걸을 땐 시간이 정말 빨리 간다. 그런데 이번에 뒤처진 설린이와 함께 뒤로 간 일평이 1킬로 적지만 산을 넘어야 하는 길로 가고, 1킬로 더 많지만 평지길인 곳으로 간 우리와 오늘 가는 마을에서 만나기로 했다. 석영이는 무슨 이유인지 가면서 속도는 올리고 쉬지는 않았다. 초반에 잠바 벗으려고 3~4분 정도 멈춰 있었는데 그때 벌어진 거리를 좁히려고 벤치에 한 번 쉬면 따라잡을 거리를 유지하며 걸었다. 그런데 문제는 석영이가 전혀 쉬지를 않았다. 그리고 포기했을 때는 나보다 조금 느리게 걷는 애들이 여수 아저씨라고 부르는 분을 만나서 같이 이야기하며 걸었다. 도착해서 저녁을 먹고 6시 즈음에 마을에서 소몰이 축제를 한다고 해서 우의를 입고 구경하러 나갔다. 정말 마을 안에서 최소한의 안전장치만 해 놓고 소들이 뛰어다녔다. 처음에는 담장을 잘못 넘어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서 서둘러 나왔다. 그런데 시작하고 나니까 생각보다 싱거웠다. 팜플로나는 규모가 커서 여러 명 죽는 정도라는데, 소몰이 축제는 여기랑 팜플로나 그사이가 가장 적당할 것 같다.
6월 4일
별다를 게 없었다. 항상 똑같은 아침이었고 똑같은 풍경이었고 매일 먹던 그 음식들이었고, 심지어는 걷는 사람들마저 모두 똑같았다. 질렸다. 감흥이 없어지는 것을 넘어 거부감까지 생기기 시작했다. 특히 풍경이 그랬다. 계속해서 달라지지만 크게 달라지는 거 없이 꼬불꼬불한 흙길에 옆으로는 밀밭과 포도, 올리브가 심어져 있고 1~2시간마다 작은 마을이 하나씩 나왔다. 이런 반복적인 일상에 만족감과 안전함을 느꼈지만 내 생각마저 한정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또 한 번 겨우 지루함만 벗겨 내는 나에게 실망했다.
6월 5일
오늘은 그냥 평소처럼 일어났고 속도도 많이 다르지 않았다. 그 이후에 아침을 먹고 출발해서 제일 앞에서 걸었다. 걷다가 중간에 스탬프 받는 중에 조금 뒤에 있던 석영이가 와서 같이 도시를 지나는데 워낙 큰 도시라 길이 헷갈렸고 화살표는 있어도 스프레이로 거의 덮여 있었다. 알고 보니 가고 있는 길이 정석에서 벗어난 길이었다. 어찌어찌 도시를 통과하고 좀 많이 힘들게 걸어서 10시 20분쯤 나바레테에 도착했다. 그런데 2시간쯤 지났는데도 설린, 일평, 후마가 오지 않아서 그냥 별생각 없이 석영이한테 어떡하냐고 말했더니 석영이도 생각하고 있었는지 스탬프 찍어주시는 분한테 가서 도움을 구해 전화를 했다. 그런데 후마가 전화를 받지 않으셨고 나중에 알고 보니 중간에 장을 보는데 마트가 문을 늦게 열어서 기다리다가 왔고, 전화는 스팸인 줄 알았다고 하셨다. 그래도 숙소는 1시 오픈이어서 덜 원망스러웠다.
6월 6일
오늘은 ‘내 속도를 꼭 찾을 거야’ 하며 나갔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잘 모르겠다. 자기 속도를 찾으면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걷기 중에 허리에 뭘 끼워 넣고 걸어서 더 편해지긴 했다. 도착해서 시계를 보니 10시 10분쯤이었는데 알베르게 오픈은 2시여서 심각하게 많이 남았다. 다른 알베르게를 찾아봤지만 가격만 비싸고 시설은 안 좋다는 평이 많아서 그냥 기다려서 처음 말했던 곳으로 갔다.
6월 7일
이제 슬 슬 지치는 것 같은 감이 없지 않아 살짝 있다. 숙소에 도착하면 잠부터 온다. 그리고 다 귀찮다. 딱히 특별한 일은 없었다. 있다고 하면, 음식 재료를 사러 장을 봐서 들어갔는데, 주변 상권 회복 어쩌고 하면서 요리를 못하게 되어 있어서 전자레인지만으로 음식을 했던 것 정도 말고는 나머지는 감흥이 없었다.
6월 8일
오늘 걷기는 도로 바로 옆으로 걸었다. 그런데 하필 그 너머에 큰 공사가 있는지 도로도 통제되고 그것 때문에 차가 지나간다 하면 한 번에 끊임없이 등 뒤에 차가 지나갔다. 특히 화물차가 많았다. 거기다 모기는 없어서 좋았지만 작은 초파리 같은 것들이 쉴 새 없이 눈앞에서 알짱거리고 방향도 잘 못 잡고 목이나 팔에 부딪혔다. 그래서 걷기 자체보다는 그 옆으로 지나가는 차들과 오토바이를 보고 있자니 힘이 빠졌다. 그리고 자전거 뒤에 가리비 조개를 달고 가는 걸 보면 더 힘이 빠졌다. 숙소는 10유로였는데 전 숙소보다 비싼 가격에도 시설은 많이 좋지 않았다.
6월 9일
걷는 내내 맞바람을 맞아서 앞머리가 계속 거슬렸다. 하지만 딱히 ‘바람이 멈췄으면 좋겠다.’ 하는 느낌은 없었다. 나는 오히려 발걸음 소리, 말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더 편안하게 걸을 수 있었다. 그리고 중간에는 정말 끝이 보이지 않는 직선 길이 있었는데 앞뒤로 아무도 보이지 않아서 길 위에 나밖에 없는 느낌을 받았다. 그동안에 흐름과 달리 이번에는 걷다가 중간에 아침을 먹는 게 아니라 출발하기 전에 아침을 먹고 출발해서 10시 반이 넘으니까 너무 배고프고 쉬지도 않으니까 발바닥이 아팠다. 그래서 잠시 쉴 겸 빵도 하나 꺼내 먹으면서 쉬엄쉬엄 걸었다. 마을에 도착하니까 작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생각보다 더 작았다. 또 알베르게도 15유로여서 비쌌다. 더우기 일단 마트가 없어서 다른 걸 사지 못했다. 바는 있었지만 듣기로는 메뉴도 별로 없고 좀 귀찮았다.
6월 10일
걷고 있는 길 옆에 자라 있는 풀들과 바닥에 달팽이들이 정말 많았다. 그런데 달팽이들의 껍질 색이 땅바닥 색과 비슷해서 발에 많이 밟혔다. 분명 달팽이들도 나름 보호색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또 껍질도 자신을 보호하려고 만들었을 텐데 내가 밟는 순간 ‘도독’하면서 죽어버리니까 달팽이가 애써 만든 생존 방법이 오히려 부작용으로 다가오는구나 생각하는데, 일지에 쓸 좋은 꺼리가 생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내가 밟는 건 살짝 걸려서 거의 바닥만 보고 걷는데 가끔 껍질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면 깜짝 놀랐다. 그리고 길을 못 찾아서 일평을 기다리며 쉬는데, 일평이 그냥 지나치길래 급하게 주섬주섬 챙기다가 허리에 끼워놓고 걸었던 모자를 놓고 오고 말았다. 2~3킬로 정도 걸었을 때 생각이 났지만, 다시 돌아갈 만큼 간절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