얻은 것과 잃은 것 (남강 둔치에서 피어난 가을의 사유)
이른 새벽, 대지를 감싸 안은 여명의 서늘한 공기를 가르며 파크골프를 치기 위해 장재구장으로 향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가방을 열어젖힌 순간, 아차 싶었다. 전날 밤 충전기에 꽂아 둔 채 깜빡 잊은 야광공이 생각난 것이다.
새벽녘의 어스름 속에서 시력마저 좋지 않은 나에게 야광공은 투박한 새벽을 밝혀주는 유일한 눈이었다.
일반 공으로 대체해 보려무나,
어슴프레한 어둠 속에서 하얗게 흩어지는 공을 쫓는 일은 고행에 가깝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내게 남겨진 선택지는 평범한 공 하나뿐이었다. 아쉬움을 삼키며 짧고 조심스러운 스윙으로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운명의 장난일까.
6번 홀에 이르러 가볍게 친 공이 마술처럼 숨어버렸다. 주름진 풀숲 어딘가에 몸을 숨긴 공은 눈을 씻고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휴대폰 조명을 켜고 풀잎 사이를 헤매자, 마침 이웃 홀에서 라운딩을 하던 다정한 여사 한 분이 다가와 함께 공을 찾아주었다. 그러나 공은 끝내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그녀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여분의 공을 건너면서 계속치라고 했다.
나는 사양하면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마 오늘은 제게 공을 치지 말고 자연을 보라고 일러주는 신의 뜻인가 봅니다. 호의는 참으로 감사하지만, 오늘 저의 파크골프는 여기까지만 하려고 합니다. 즐겁게 잘 치다 오십시오.”
그렇게 구장을 나와 천천히 자전거를 몰아 남강 둔치 길의 둘레를 에둘러 집으로 향했다.
가로등 불빛이 수줍게 비치는 둔치 길에는 가을의 문턱에서 고개를 내민 풀꽃들이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얼마전까지는 제방길을 걸을 때면 이들과 눈을 맞추며 정겨운 대화를 나누곤 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파크골프라는 정해진 시간, 목표로 한 발걸음 수, 그리고 스케줄에 맞춰 하루를 소화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내 마음의 여유를 앗아갔다. 골프채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갈수록, 자연의 숨소리를 듣는 귀는 닫혀 있었던 것이다.
오늘 아침, 남강 둔치는 변함없이 찬란하고 웅장한 가을의 무대를 펼쳐 보이고 있었다.
바람새와 수크렁, 강아지풀, 하늘새는 살랑살랑 불어오는 새벽 바람에 몸을 맡긴 채 가장 먼저 나에게 반가운 인사를 건네 왔다. 구절초와 쑥부쟁이, 개미취는 들국화 특유의 의연하고 고고한 자태를 드러내며 발걸음을 붙잡았고, 달맞이꽃과 분홍바늘꽃, 범꼬리는 가을바람을 만나 제 세상이라도 만난 듯 한껏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그 틈바구니에서 소리쟁이의 끈질긴 생명력은 가히 일품이었다. 조개풀과 한삼덩굴, 그리고 며느리밑씻개는 강둑의 가장 낮고 그늘진 자리를 묵묵히 지키며 생명의 깊이를 더해주고 있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참으로 간교하고도 신비롭다. 똑같은 풍경을 마주하더라도 마음의 창이 어디를 향해 있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 나는 작은 공 하나를 잃어버렸지만, 대신 가을의 진정한 주인공인 산야초들의 눈부신 아름다움과 영혼의 휴식을 얻었다.
손에 쥔 것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눈에 들어오는 세상이 있다. 잃어버린 공 자리에 가을바람이 스며들어, 오히려 내 삶의 가장 충만한 하루를 채워준 찬란한 아침이었다.
첫댓글 이젠 파크골프에 매진 하시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