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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논문에 쓸 팁으로 썼던 글을 제 이글루스 블로그에 올렸던 겁니다.
원문은 이곳을 참조하시길...
http://chiwoo555.egloos.com/99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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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을 바라보는 이미지는 대략 2개로 나뉜다.
첫째는 권력에 미친 역적의 전형, 마초 이미지..
둘째는 당나라의 침략에 맞서 분연히 일어난 애국자.. 현명한 이미지
대체로 그런 식으로 양분된다. 그런데 전자는 대체로 삼국사기에 실려있는 역적 이미지가 답습되는 경우가 많고, 후자의 경우는 신채호가 과도하게 띄운 연개소문 이미지의 답습인 경우가 많다. 전자의 이미지가 갖는 오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정변의 주역들(최소한 고구려사에서의 명림답부, 창조리) 대한 비판은 없다는 사료의 무비판적 답습인 것일테고, 후자의 경우는 다분히 목적론적인 경향을 띈다는 것일 것이다. 인간 연개소문에 대한 논의는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과연 연개소문은 개인적 정치욕 때문에 정변을 일으킨 것인가? 아니면 영류왕의 매국행위(?)를 참지 못해 혁명을 일으킨 것인가?
그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서 주변의 시대적 상황을 이해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김용만의 연구에 의하면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전통귀족에 속하는 부류는 아니었다. 대략 3대조 즈음에 중앙 정계에 등장하기 시작해 왕권의 비호를 받으며 성장한 신흥 세력인 것으로 보인다.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한 이유는 국내성 지역의 구 귀족세력들이 장악한 기득권을 빼앗고 견제 세력으로서 평양지역의 토호를 내세워 둘의 다툼을 통해 왕권 강화를 노리려는 성격이 강하다. 그 과정이 문자명왕 때까지 이어졌으나 이후 왕들 부터는 그렇지 않아 평원왕 즉위 전까지는 고구려 왕실의 권위는 추락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평양지역의 토호 세력까지 전통귀족화 되어 기득권을 가지고 왕권을 전횡했을 개연성이 크다.
이런 상황은 평원왕 즉위 초에도 여전했을 것이다. 그런 상황을 타계하기 위한 평원왕의 정책은 왕실 친위세력을 만들어 이들을 힘을 부여하는 방법 밖에 없다. 권력기반이 약한 하급 귀족들이나 평민들을 관료로 임용시켜 힘을 부여하거나 전쟁을 통해 공을 세운 하급무관들을 장군으로 임용시키는 방법이다.(온달의 예가 대표적이다.) 이들의 권력기반은 토지와 인맥에 기반한 전통귀족들과는 달리 어디까지나 왕실의 권위에서 비롯된다. 즉, 이들이 권력을 키우려면 필연적으로 왕실의 힘을 키우는데 진력해야한다는 점이다. 때문에 이들은 한시적인 것이나마 근왕적일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사정은 연개소문의 가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천남생 묘지명에 의하면 연개소문의 3대조는 중리부의 관료로 시작하는데 그의 아들 대, 즉 연개소문의 할아버지는 양야,양궁이라는 대목에서 알 수 있듯 무장으로 대성한 듯 하다. 그러한 무장으로서의 성격으로 아버지인 연태조 대에는 막리지로 취임할 정도였다. 만약 그의 가문이 전통귀족의 하수인 가문이었다면 막리지로서의 성장은 꿈꾸지 못했을 것이다. 연개소문 가문의 힘은 왕실 권위로부터 비롯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의문이 남는다. 왕실로부터 힘을 부여받는 그의 가문이 어째서 왕실을 능멸하는 행위인 왕의 참살을 도모한 것일까? 역시 그의 개인적인 정권욕이었을까?
때문에 연개소문의 역적 성향을 강조하는 논조에서는 대체로 전통귀족들의 사병집단이나 그에 포섭되었던 하급무관 세력이 연개소문에게 반란을 일으켰음을 시사하며 그 증거로 안시성의 궐기를 예로 든다. 그러나 그 예에는 의문이 남는다. 왜냐면 642년 10월에 정변을 일으킨 후 불과 1년하고도 반년이 안되는 시간에 연개소문이 직접 신라로 원정을 가서 2개 성을 공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전국적으로 연개소문에 대한 궐기가 일어났다면 연개소문이 외정을 나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하필이면 궐기가 일어났다고 하는 지역은 당태종이 대패한 안시성이었다. 당태종도 점령하지 못한 곳인데다 나라를 지킨 절의의 상징으로 안시성주가 빛났다면 반역의 상징으로서 연개소문에 대해 대비시키는 구도를 통해 그를 깎아내릴 개연성도 있을 것이다.
설령 외정의 목적이 국내의 관심을 밖으로 돌리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하더라도 우선은 그의 부재로 궐기 가능성이 높았을 텐데도 불구하고 궐기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은 주목할 여지가 있다. 즉, 전통귀족들이 장악하고 있었던 군사적, 정치적 세력들이 연개소문의 정변에 대해 쉽사리 궐기하지 못하게 하는 사회적 공감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다고 봐야할 것은 아닐까?
그것을 본좌는 영류왕 즉위후 근 30여년간 지속된 중원세력에 대한 저자세 외교에 있다고 생각한다. 영양왕 당대에 수나라의 침공을 4차에 걸쳐 막아낸 전력이 있었고 국가 위상으로는 왜국을 암묵적으로 조정해 수의 국제적 위신을 떨어뜨리기도 했다.(재일 사학자 이성시는 601년의 견수사 파견에서 국서에 '해뜨는 곳의 천자가 해지는 곳의 천자에게 문안하노니..'라는 문구의 작성에 쇼툐쿠 태자의 스승인 고구려 스님이 개입된 것으로 보고 있다.)
비록 중원 세력의 강력한 침공 앞에 고구려인들의 전쟁 피해가 막심했고 그 때문에 중원세력에 대한 막연한 공포감이 생겼다고 할 수 있으나 그 전쟁 과정에서 강자였던 수는 붕괴했고 그 덕에 고구려의 천하 관념은 더 높아졌다고 할 것이었다. 그러나 영류왕이 즉위하면서 중원세력에 대해서는 대체로 저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동돌궐과 당의 쟁패에 아무런 개입도 하지 않았고 당의 한반도 정책에 대해서 저자세, 심지어 경관을 허물려는 당의 태도에도 영류왕은 반응하지 않았다. 그것이 중앙 정계의 사정을 자세히 알수 없었던 일반 민이나 하급 귀족들에게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정신적 공감을 만들어 냈을 것이다.
그는 그렇다면 왜 그렇게 한 것일까? 2차 고수전쟁에서 평양을 사수해낸 군공이 있는 바 군사 세력과의 친연성도 고려해본다면 그의 저자세 외교는 일견 의아하기까지 하다. 비록 사료가 없기 때문에 정확한 사정을 알 수는 없지만 그 원인에 대해서는 대체로 그의 즉위과정에 있지 않을까 한다. 기록에는 영양왕의 자식에 대한 기록이 없다. 원래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영류왕 즉위 과정에서 살해된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주변국 기록에 관련 기록이 없는 걸로 봐서는 원래 자식이 없었을 가능성이 크겠다.(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킨 이유 중에 영류왕이 영양왕의 자식을 살해했다면 정변 이유 중에 그 이유가 포함되었어야 할 것이지만 최소한 일본서기에도 그런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왕위 계승자가 영양왕의 동생이었던 영류왕에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보장왕의 아버지인 대양왕 세력이 존재한 것으로 보이는 바 복수의 왕위 계승 세력이 존재한 것으로 보이고 최종 승리자는 영류왕 세력이었던 것 같다. 비록 군공을 크게 세워 군사세력과 친연성이 있었지만 그의 왕위 즉위 세력에 큰 변수가 될만한 것은 전통귀족이 강세를 보이는 대로회의였을 것이다.
전통귀족들은 고수전쟁을 거치면서 국토의 황폐화를 경험했다. 전쟁의 전비 부담은 물론 그들의 권력 기반인 장원(?) 내에 인원들이 병사로 활용되어 전쟁은 그들에게 탐탁치 않았을 것이다. 더불어 장기적인 전쟁은 귀족들이 군사통수권자인 왕에게 어쩔 수 없기 고개를 숙여야 했기에 입맛은 더욱 썼을 것이다.
비단 전통귀족들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조공무역에 종사하게 되는 대상인들(물론 여기에는 전통귀족들이 대거 참여하였을 것이다.)이 이익을 얻으려면 조공 상대국인 당과 외교적인 안정이 있어야 한다. 외교적 트러블은 조공이 성립되지 않음을 의미하며 그들의 이익에 해가 됨을 의미했다. 게다가 그들은 왕실 권위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던 집단들이었다. 그들에게 왕은 귀족들의 대표자일 뿐이었고 그들의 이익을 가로막는 방해자였을 뿐이기 때문이다.(지금에서야 왕에게 충성하지 않는 집단을 부정적 이미지로 보지만 그것은 국가에 충실하기를 바라는 근대적 마인드이고 전근대 시대, 그것도 전제왕권 개념이 제대로 확립되지 않은 시기에 그것을 바라기는 사실상 어려웠다. 당시는 전제왕권으로 넘어가려는 과도기적 시기였기 때문에 왕실과 직접적인 연관을 가지는 근왕세력이나 멘탈리티 상에서 왕화를 입는다고 생각하는 일반 민들에게 한정되는 것일 뿐이었고 전통귀족들에게까지 그런 마인드가 강요될 수는 없었다. 특히 그런 양상은 양원왕(?) 즉위 과정에서 벌어진 세군, 녹군간의 정변으로 왕실 권위가 땅에 떨어진 때에는 더욱 그러했다.)
즉, 어떻게 보면 영류왕의 권력 기반은 전통귀족들의 지지에서 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외교에서는 당에 대한 저자세 외교가, 내치에서는 근왕세력에 대한 소홀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이 30년 가까이 이어지게 된 것은 고수 전쟁에 대한 복구, 고수전쟁을 어부지리로 삼아 세력을 키운 동돌궐에 대한 견제라는 측면으로 설득이 있었을 것이지만 동돌궐이 당에게 무너지고 이어 고창국과 토번이 제압된 사실은 고구려인에게 공포를, 한편으로 그걸 막지 못한 영류왕에 대한 원망이 깃들어 있었을 것이다.
삼국지연의에서 적벽대전을 앞둔 손권에게 제갈량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쟁을 반대하는 중신들은 조조에게 항복한 후에도 받는 봉록이나 대우에 차이가 그리 나지 않을 것이지만 강동의 패주께서는 과연 그러하시겠습니까? 기껏해야 봉록 몇 백석에 딸린 시종이 서넛에 불과할 것입니다."
당시에 손권이 느꼈을 감흥을 영류왕 보다는 왕실 권위에 근간하던 근왕세력이 더 크게 느꼈을 것이다. 전통귀족들이야 고구려가 전쟁에 휘말리지 않는다면야 왕실 권위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지만 근왕세력은 그렇지 않다.
천손으로서의 자격은 천의 질서를 얼마나 지켜낼 수 있는가의 여부에 달려있다. 적어도 근왕세력에게 자신들을 돌보지 않는 것도 모자라 천의 질서를 제대로 지켜낼 의지가 없는 왕이 과연 그들에게 용납될 수 있었을까?
그럼 근왕세력으로 대표되는 연개소문이 순수하게 국가에 대한 충심으로만 정변을 일으켰다고 볼 수는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적어도 그는 불만이 쌓여가는 근왕세력을 대표해서 정변을 일으켰고 그것이 고구려 전체의 사회적 분위기와 공명을 일으키며 정권의 유지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럼 여기서 의문이 발생한다. 비록 근왕세력이라고 하나 왕을 살해하고 또다른 왕을 옹립한 그가 왕실을 능멸할 가능성이 높은데도 25년이나 권력을 유지한 사실은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만약 그가 왕실을 능멸했다면 또다른 제 2의 연개소문이 등장해 정변이 일어났을 공산이 컸을 것이나 그렇게 되진 않았다.
정변 초기에 연개소문 혼자의 힘으로 정권을 이끄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가 정변을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표면적인지, 실질적인 것인지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그는 2인자의 자리로 물러났고 1인자의 위치를 대로 고정의에게 넘겼다.(일본서기에서 그를 도수류금류라고 칭하고 있다.) 적어도 그는 실권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1차 고당전쟁에서 15만 대군의 총지휘관이었다면 단순 얼굴마담일리가 없다. 또한 그런 능력자를 표면에 내세울 정도로 연개소문은 바보가 아닐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그 둘은 공동의 목표를 가진 정치적 동반자라는 것을 의미하며 그의 정변에 동참한 집단은 그 성격이 근왕적이기도 했지만 다양한 정치집단을 아우르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순한 근왕주의자부터 왕실 그 자체가 가진 권력(왕자 임무를 막리지로 임명한 것과 중신 선도해를 김춘추와의 대면에 보내는 것을 보면 보장왕은 연개소문 말고도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고 정치적인 동맹관계였다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소수나마 남아있는 전통귀족(이들을 완전히 몰살시켰다면 고구려 전국에 혼란이 더 가중되었을 것이며 실제로 이들 세력은 어느 정도 남아 있었던 것으로 흔적들이 보인다.)이 연개소문 정변 이후 성립한 정권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렇다. 정변 초기에는 연개소문이 흔히들 아는 것처럼 전권을 휘두르는 형태는 아니었던 것 같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권력이 점차 전제화되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정권 초기에는 다양한 정치적 입장을 가진 집단을 총괄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ps. 논지의 대부분 얘기는 김용만 선생님의 '새로쓰는 연개소문전'에 나오는 얘기들이다. 거기서 나오지 않는 얘기들은 본좌가 당시를 재구성해본 것들이다. 그런데..
....음..쓰고보니 근거는 별로 얘기 하지 않고 소설만 쭉 쓴 꼴이 되어버렸군...
첫댓글 단순 권력욕이었다면 다른 대가들 처럼 영류태왕과 뜻을 함께 하여 본전을 챙기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보장태왕의 부친인 고대양은 영양태왕과 동모제가 아닐까 조심스레 추론해봅니다.
반역이란 개념부터 명확하게 하여야겠습니다. 고려왕조와 조선왕조시대에서는 어디까지나 왕에 대한 충성과 반역의 개념이 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따라서 왕조시대에서 보는 눈으로는 어떠한 이유가 없이 당연히 반역의 행위로 밖에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다만 왕조개념이 없어진 오늘날 국민들의 국가에서는 국가를 위주로 보아야겠지요, 왕의 정치행위에 따라 국가의 존망을 함께 따지는 것으로 연개소문 장군을 반역으로 볼 수 없다는 개념이 아닐까요?? 또한 죽는날까지 고구려라는 자신의 국가를 끝까지 사수한 행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를 반역자로 보느냐, 애국지로 보느냐는 순전히 가치관의 차이가 아닐까 합니다. 유교적인 입장이라면 그는 천하의 죽일놈이요, 실학적인 입장이라면 천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영웅이 되기에,, 평가자의 방향에 따라서 판단이 틀립니다.
일명 쿠데타에는 3가지 종류가 있죠. 1. 철저한 준비와 확고한 국가경영방침을 정하고 하는 쿠데타.. 이경우가 가장 이상적인 쿠데타라고 볼 수 있죠. 명림답부와 창조리, 연개소문, 이방원의 난, 수양대군의 난등 이러한 쿠데타뒤에 그국가가 더욱 발전된다고 볼 수 있죠. 2. 단순한 권력탐으로 인한 쿠데타, 단순한 권력을 위해서 한 쿠데타는 그후 국가발전에 큰장애가 되죠. 중종반정, 인조반정등을 예로 들 수 있죠. 중종반정은 이후 임진왜란을 일어나게한 권력층을 생산합니다. 그후 조광조의 개혁을 실패하게 만들고요. 인조반정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나게 하죠. 그후 조선의 생산시스템은 붕괴되죠. 3. 단순히 욱하는 마음에
일어난 경우. 가장 비참하다고 할 수 있죠. 별 개혁도 없이, 정국이 냉각되니깐요. 고려의 무신정변이 대표적이죠. 계속해서 불만을 가지고 있던 무신들이 한순간의 사건으로 욱해서 일어나게 되니깐요. 그후에 100년간 무신정권시대가 열리죠. 제가 볼때 연개소문의 쿠데타는 첫번째 경우라고 봅니다. 그는 철저한 준비와 확고한 국가경영방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런 당나라에 대한 유연성 부족과 2차고당전쟁처럼 전략적미스, 후계자 구도실패등으로 고구려는 당나라에게 국력부족으로 멸망하게 되고, 고구려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하지는 못했지만 2번 걸친 당나라의 침공을 격퇴시켰으니깐요.
잘봤습니다~
무전신현님. 당 태종은 연개소문의 집권 전인 641년에도 고구려 원정에 대한 야욕을 드러낸 바 있습니다. 연개소문의 쿠데타가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삼국사기 원문에는 연개소문이 당에게 여자를 보내면서 '고압적인' 글을 보냈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 저의 경우는 여자를 보낸 것이 당으로 끌려간 포로 송환에 대한 뇌물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기본적으로 당태종이 고구려 원정을 하려 한 목적은 당태종 자신의 권력 장악 과정이 정당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벌인 정당성 확보 차원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중원에서 천자의 사명이란게 그렇죠. 조만간 이걸 주제로 글을 올리겠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영류태왕이셨다면, 연륜이셨다는 이런 류의 말은 듣기가 조금 그렇군요. 공정하게 저울질해서 연개소문 비판 하는게 아니잖습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단인님께서 언급하셨듯이 이세민이 먼저 고구려를 치려고 했고 영류태왕은 이점을 파악하지 못했고 이 상태에서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킨 것으로 알고 있슴니다만?
여자를 보낸 것에 대해 당태종이 어떤 식으로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물론 무전신현님의 생각처럼 수치스러운 것이었다고 '당태종'이 생각해서 여자들을 물리쳤을 수도 있지요.(전 달리 생각하지만) 그러나 연개소문의 의도도 그랬다고는 할 순 없습니다. 의도된 것과 결과가 같다는 보장은 없거든요. 당시 연개소문에게 급한 것은 전쟁의 수습이지 전쟁의 재발이 아닙니다. 전쟁의 상흔이 크다면 대당강경조로 나가는 그의 입지만 좁아지기 때문에 그 상처를 봉합해야 그의 정책 수행이 가능해지죠. 때문에 포로 교환에 대한 사전 공작으로 생각한 겁니다. 반면 무전신현님의 반론은 연개소문에 대한 일종의 편견 때문이라 생각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