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사월은 나에게 희망스럽지가 못했다. 고등학교를 2월 10일에 졸업하고 친구들은 대학 입학을 한다고 하나둘 떠나갔다. 덩그러니 남은 친구 몇이 아직은 동네에 있었다. 공부를 다시 하겠다는 여건도 안되었다. 방향을 제시해주는 그 누구도 없었다. 사실 학력고사 점수가 대단하지도 않았고 그런 실력으로 들어갈 곳도 어중간했다. 그런 상태를 무기력이라고 말한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동네에서도 존재감은 없지 그럴 땐 술이 위안이 되어주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부터 늦은 밤 동네 구판장을 찾아갔다. 그 시간이면 구판장도 파시라 오는 사람도 없었다. 술을 마셔도 조금씩 자유스러워졌다. 그렇게라도 하고 나면 좀 기분이 나아졌다. 난 잠시라도 나를 잊기 위해 술을 마셔야 했다. 그것도 날이 거듭되니 습관이 되었다. 술에 취해있는 시간이 길어졌고 그런 날들이 반복되었다. 짧지만 긴 사월까지 흘러가고 있었다. 보다 못한 어머니가 작은 집 사촌 계수형에게 부탁을 한 것 같았다. 마음을 다잡으라며 종중 제각 짓는데 일을 따라다니라는 것이었다. 이틀을 하고 나니 마침 동네 일 년 위 균섭 선배가 부평에서 내려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도 어머니가 듣고 내게 전해주었다. 내일 올라가니 따라 가라는 것이었다. 그 날을 4월 6일로 기억한다. 밤 내내 열차를 타고 올라가 새벽녘에 도착한 곳이 영등포 역이었다. 내 옷속에는 계수형이 챙겨준 품삯에다 어머니가 보탠 46000원에서 기차표를 끊고 남은 돈이 남아 있었다. 비둘기 호쯤으로 기억이 된다. 역마다 안부를 묻듯 쉬었다 떠나가는 열차였다. 남원역에서 밤 아홉 시에 기차를 타면 새벽에야 영등포에 떨어지는 시골 사람들에게는 애환의 기차였다. 균섭 선배는 서울 물을 먹어서인지 영등포의 새벽에 익숙해져 있었다. 역사를 나서는 데 어둠이 몰린 곳에서 아가씨들이 나와 있었다. 지나가는 우리에게 다가와 아가씨들이 손을 잡아끌었다. 소름부터 돋았다. 나중에야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줄 알았다. 그런 도시에 익숙하지 않아 어미 소 엉덩이에 바짝 따라붙은 송아지처럼 균섭 선배를 놓칠세라 부심했다. 역 근처 식당에 들어가 선지해장국을 먹었던 기억은 상경기의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그렇게 당도한 곳이 균섭 선배가 몸 담은 부평 외곽의 부개동이라는 곳이었다. 황토밭에 들어선 공장 건물은 가 건물 형태로 지어져 있었다. 공장 안은 댓 기의 사출기가 놓여있었고 각각 생산하는 일이 다른 용도였던 것으로 보였다. 한동안 일감이 없어 노는 날이 이어졌다. 그럴 때마다 사장은 잠깐 왔다 어디론가 나갔다. 사장이란 분의 몇 마디 질문이 이어졌고 나는 묵인하에 그곳에 체류했다. 늦게 일어나 아침을 먹고는 공장 옆 황토밭에서 미니 축구를 하고 놀았다. 고만고만한 또래가 무리 지어 놀았다. 인근 공장 아이들과 같이 의무 참여였다. 다들 어려운 태생적 환경을 벗어나기 위해 나비의 꿈을 꾸고 고향을 떠나온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이라 말한 것은 초등학교나 중학교를 마치고 고향에 그리움을 묻어두고 올라온 아이들이었기에 그렇다. 내가 보기에도 내 또래거나 비슷한 도토리 키재기의 나이처럼 보였다. 그런 아이들과 한 때를 신나게 놀면서 말다툼도 일었다. 격한 표정을 짓다가도 오가는 언쟁이 분위기를 누그러뜨렸다. 스스로 기를 꺾어 다독이다 식당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렇게 놀다 점심이 되면 대어놓고 먹는 식당에 몰려갔다. 대어놓고 먹는 식당이란 곳이 그렇듯 한 식구 같았다. 주인아줌마가 모두에게 이모였다. 짓궂은 아이들은 중학생인 딸을 의식한 듯 넉살 좋게 장모님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식당 아줌마는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싫지 않은 기색으로 곱살스럽게 받아 넘기곤 했다. 그 식당 아줌마는 얼굴에 살이 붙어 통통하였고 작달막한 키에 웃음이 달라붙은 좋아 보이는 인상이었다. 식당 아줌마는 우리가 식사를 마치고 나올 땐 손 때 묻은 노트에 인원수를 적었다. 그럴 때 잠시지만 낮은 한숨을 들이켰다. 쌓여가는 외상값이 식당 아줌마를 불안하게 했을 것이다. 간간이 중학생 정도의 딸이 식당 안을 드나 들었다. 어린아이들을 키우며 살기 위해 공장 곁에다 식당을 열었을 것이다. 그렇게 십여 일을 균섭 선배 덕에 낯선 식당에서 스무 살의 사월을 먹고 지냈다. 그것도 감사한 인연이라고 본다. 스치는 것도 인연이라는데 십여 일을 먹고 지냈으니 깊은 인연이 아닌가 싶다.
그렇게 지내면서 균섭 선배는 기술을 가르쳐준다며 공장에 사출기 조작 방법을 일러줬다. 균섭 선배가 거기서는 다른 아이들보단 잔밥수가 위였다. 간혹 꼬는 아이도 있었지만 이야깃꺼리가 되질 못 했다. 몇 번의 조작을 통해 프라스틱 제품을 찍어보았다. 그러면서도 내 마음속엔 공돌이라는 거부감이 있었다. 공장에서 일하는 것보단 장사를 배우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막연히 시간만 보낼 수는 없었다. 공장에 일하던 또래를 통해 부평 시장이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작심하고 시장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몇 번의 사거리를 지나자 큰 건물이 많아지면서 사람들도 북적거렸다. 지하 교차로가 보였고 모퉁이 요지에 있는 가게가 보였다. 가게 안은 자루에 담긴 마른 고추가 가득했고 그 안쪽을 나는 힐끗힐끗 몇 번을 들여다보았다. 말라보이는 주인아저씨가 날 쳐다보았다. 망설이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 장사를 배우고 싶다는 말을 했다. 나 같은 사람을 구하는 곳이 있는지 물었다. 그러자 나를 훑어보더니 도화동 자신의 목욕탕에서 때밀이를 하란다. 그러면서 수입도 괜찮다는 말을 곁들였다. 순간 내 속에서 반감이 일었다. 나를 어떻게 보고 그런가 싶었고 욕이 입안에서 굴러다녔다. 돈을 벌어도 그렇게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 가게를 나와 지하도를 건너 반대쪽으로 가 보니 안쪽으로 가게가 더 많았다. 가게 주변을 서성거리다 건미역 해산물이 쌓여 있는 곳의 주인아저씨가 무던해 보였다. 들어가 내 뜻을 말했고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다. 그것은 그냥 해보는 이야기가 아닌 내 모양새와 일을 할 만한가를 알아보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긍정적인 판단이 섰는지 전화를 어디론가 돌렸다. 그 집 전화기는 다이얼을 돌려 거는 검은색 전화기였다.
가게 아저씨는 누군가와 통화를 했다. 통화 내용을 짜 맞춰보면 꼬맹이가 하나 있고, 말을 시켜보니 쓸만하다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고 삼십 분이 지나 무료해지기 시작할 때였다. 짐바를 타고 항공 잠바를 입은 중년의 아저씨가 가게 앞을 스쳐 가며 나를 보더니 두 바퀴를 더 돌았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며 자연스러운 눈짓으로 가게 주인아저씨에게 무언의 교감을 나눈 듯했고 시간이 좀 지나 나에게 말을 시켜보았다. 그러고서 판단이 섰는지 부평 시장 안에 있는 가게로 나를 데리고 갔다. 따라가는 동안 주변의 활기가 느껴졌고 시장통 분위기가 나쁘진 않았다. 따라 들어간 가게 안은 미원이 가득 쌓여있었다. 좁은 통로 안에는 두 평 정도의 사무실이 있었고 경리 아가씨와 아줌마가 나를 보며 반겨 주었다. 어색했지만 재차 아줌마가 내 신상에 관해 질문이 이어졌다. 약해 보인 나에게 짐바에 미원을 싣고 배달을 할 수 있겠는가였다. 난 다 할 수 있다고 했다. 문제는 돈을 만지니까 신원이 문제였고 누군가 그럴 만한 사람이 있는가를 물었다. 큰 형이 서울에서 경찰관으로 근무하고 있었고 며칠 후에 부평을 다녀갔다. 하여간 나는 그날부로 부창상회의 박 군으로 불렸다. 나를 데리고 간 아저씨가 박창호 씨란 것도 알았다. 머지않아 벽창호란 별명을 가졌다는 것도 전해 들었다. 그렇게 나에게는 사장님과 사모님이란 생소한 생활 언어가 추가되었고 곧 익숙해졌다. 사장님은 나를 데리고 부평시장 안의 거래처를 돌며 인사를 시켰다. 추후 내가 하루 수금하고 돌아다닌 돈이 제법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월말이면 많게는 몇 백 만원도 되었으니 신원이 확실해야 되는 이유가 충분했다. 그날부터 짐 자전거를 타는 연습을 했다. 우선은 시장을 짐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녔다. 참 묘한 생각이 들었다. 중학교 1학년 가을날로 기억이 된다. 같은 반 여기용이란 친구가 자전거 타는 법을 알려주었다. 그 친구는 수업이 끝난 뒤 중학교 운동장에서 자기 자전거로 타는 법을 알려주었다. 꼬꾸라지면 다시 잡아 밀어주길 반복했고 그 친구의 격려 덕에 어느 순간 자전거가 굴러가는 원리를 깨달았다. 그 친구가 알려준 것처럼 짐 자전거도 이내 익숙해졌다. 곧이어 25kg짜리 미원 포대를 많게는 다섯 포대를 실어도 끄떡 없었다. 짐 자전거는 실린 무게 이상으로 힘을 써야 굴러간다. 그것만 알면 충분했고 세상사가 다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장사꾼이 되기 위해 스무 살 청년인 나는 짐바를 끌기 시작했다. 첫 월급 5만 5천 원과 창고에 딸린 사무실이 밤이면 내 방이 되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24시간을 근무한 것이 맞다. 창고를 지키는 인간 세콤 역할을 단단히 해냈으니 말이다. 일을 마치고 나면 우선 별일 같지도 않은데 사장님의 칭찬이 이어졌다. 참 이것도 일이구나 싶었다. 그 집에는 미원 말고도 농심라면 대리점을 겸하고 있었다. 타이탄 트럭이 두 대가 더 있었다. 그 타이탄으로 부평은 물론이고 인천 4, 5공단과 강화가 보이는 검단까지와 부천이라고 불리던 소사를 돌며 판매할 수 있는 영업권을 갖고 있었다. 상당히 넓은 영역이었다. 두어 달 시장 배달 위주로 일하다 싫증이 났다. 주문 온 물량만 배달하다 보니 무료해졌고 직접 물건을 팔고 싶었다. 그래서 부평 시내에 있던 대형 식당에 덕용이라는 2kg짜리 미원을 팔러 다녔다. 서서히 나만의 단골을 만들어갔고 매일 상당량을 팔아 치웠다. 사장님은 덤으로 올린 매출에 간혹 웃는 얼굴로 화답했다. 자전거에 미원을 싣고 멀리는 인천의 작전동 입구 해태음료 공장이 있는 곳까지 판촉을 다녔다. 공장이 있는 곳은 미원도 소비가 많았다. 작전동을 갈 때는 부평 북구청 쪽에서 부평 공단과 맞댄 도로를 타고 효성동 방향으로 올라갔다. 그러다 보면 삼익악기 공장이 커다랗게 있었고 우측으로 꺾어 한참을 가면 해태음료 공장이 나왔다. 점심이 되면 해태음료 공장 앞에 있는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먹었다. 당시는 거의 다 수타로 면을 만들었다. 중국집 주인은 양을 듬뿍 주며 먹는 모습을 바라보곤 했다. 그 양반이 당시 사십 대 정도로 보였으니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해본다.
그렇게 5개월 정도 자전거로 배달을 했다. 마침 타이탄 트럭을 한 대 더 구입을 하게 된다. 나도 차에 물건을 싣고 루트 세일을 하게 된다. 우선 스피드가 좋았고, 사방팔방 맘만 먹으면 어디든지 갈 수 있어 좋았다. 당시는 운전기사와 한팀이 되어 판매를 하고 다녔다. 그런데 판매의 모든 결과는 판매원의 몫이었다. 처음에는 좋았는데 나중에는 그것도 스트레스였다. 차량 세 대가 서로 자연스럽게 경쟁을 하게 되었다. 똑같이 차에다 물건을 싣고 아침에 나가 저녁이면 정산을 했다. 매일 매일 판매 실적이 나와 버렸다. 거기에서도 질 수 없는 내 성격 탓에 판매 방법에 대한 노하우를 축적하게 되었다. 모든 것은 사람에게 얼마나 다가갈 수 있느냐가 관건이었다. 가게 주인에게 나를 알리고 내 물건을 자연스럽게 사주도록 안면을 터 나가는 것이었다. 그런 전략은 적중했다. 안 팔아준 가게는 최대한 자주 들러 가게에서 체류하는 시간을 가졌다. 물론 이야깃꺼리를 공유하는 것은 당연했다. 갈산동 한전 사택 안에 있는 가게가 기억에 남아있다. 스무살의 목표였던 장사꾼이 되겠다는 꿈을 나는 실현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사람과 살아가려면 최대한 상대방을 기분 좋게 말해줘야 하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곧 진정성이 담긴 진심이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환한 모습이되 상대방의 마음으로 다가가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스무 살 부평에서 나는 그렇게 최선을 다했지만, 이루지 못한 것이 많다. 이루지 못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지금껏 내 살아온 날들도 헛되지 않았다고 보기에 그렇다. 앞으로 삼십 년 후에 지금처럼 스무 살 때를 아쉽게 생각하듯 그러지 않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