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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디자와 달
정종량
초승달은 관능을 자극한다.
살리 호텔 야외 수영장의 물 위로 가로등 불빛만이 반짝거리고 사위는 침묵에 잠겨 있다. 어둠이 짙게 내린 해변을 따라 파도가 밀려와 하얀 포말을 쏟아낸다. 여자는 썬텐용 접이의자의 등받이를 펴고 비스듬히 몸을 기댄다. 이윽고 식당 쪽 멀리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양손에 무언가 들려있다. 왜 이리 늦었느냐고 여자가 묻자 레스토랑에 여직원들이 수다를 떨고 있는데 붙잡혔다가 간신히 빠져나왔다고 한다. 이들은 세네갈 굿거버넌스개발부 자체 워크숍에 나온 직원들이다. 이번 살리 호텔 워크숍은 이 남자가 의도적으로 계획했다는 소문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비밀이다. 쥐꼬리만 한 사업비를 가지고 이처럼 고급스러운 호텔에 묵으면서 돈을 써댄다는 게 가당찮다는 지적도 있지만, 어차피 놔둬봤자 누군가의 손에 의해 흐지부지 녹아날 것이라는 의견도 많다. 사실 통제하는 기관도 없기 때문에 초기 계획만 그럴듯하게 세워서 언론에 떠벌리면 그만이다. 그 선두에 이 남자, 이브라임이 있다.
얼음이 둥둥 뜬 차를 여자에게 건넨 후 옆에 바짝 붙어 앉는다. 이미 사무실에서는 그가 이 여자를 세컨드로 맞아들이기 위해 열심히 공을 들이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사실 그는 결혼해서 부인과 아이까지 두고 있다. 부인은 티에스에서 중학교 교사를 하고 있는데 거리가 멀어 주말 부부를 하고 있다. 어느덧 가까이 앉은 그의 어깨가 여자의 어깨에 밀착해 온다.
“카디자, 그때 오빠께서 무슨 얘기라도….”
얼마 전 이슬람 마라부인 그녀의 오빠가 리버테시스에 있는 모스크에 강연 차 나왔다가 동생 사무실에 들러 이 남자를 직접 본 적이 있다.
“아니요, 오빤 그런 얘기 안 해요. 집안에서야 원래 돈 많고, 지체 높고 신앙심까지 강한 사람이면 제일이니까요. 호호호!”
“푸하하하, 그럼 저는 완전 땡이네요.”
어느덧 남자의 팔이 카디자의 어깨 위로 은근슬쩍 올라온다. 조금 있으니 어깨와 허벅지까지 밀착해 온다. 그는 차에는 관심이 없는 듯 한편으로 치워놓았다. 그의 눈빛은 온통 카디자의 기다란 목과 도톰한 입술 그리고 솟아오른 가슴에 집중된 듯했다. 빛이라곤 멀리 호텔의 야외 풀장 물 위로 반짝이는 가로등 불빛뿐이다. 간간이 들려오던 식당 쪽 웃음소리도 어느덧 잠잠하다. 모래 위로 밀려와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정적을 깰 뿐이다. 관능을 부추기는 어둠 속에서 그의 숨소리는 더욱 가빠졌다. 그가 여자의 이름을 나지막하게 부른다.
“카디자!”
그녀는 대꾸하지 않은 채 멀리 모래 위로 밀려와 부서지는 파도와 하얀 포말을 응시한다. 불빛에 반사되어 생긴 그녀의 실루엣에 남자는 더욱 몸이 달아오른 듯했다. 야생 들개의 혀처럼 그의 손은 어느덧 그녀의 목을 지나 봉긋한 가슴 위로 내려와 있다. 고리떼, 따바스키의 희생물처럼 다소곳이 기대어 있던 그녀가 비로소 몸을 일으킨다.
“들어가요. 이브라임, 내일 행사도 있는데.”
“뭐, 특별히 할 게 있나요. 이미 다 되어 있는데.”
조금은 멋쩍은 듯 그도 웃으며 몸을 일으킨다. 멀리 서쪽 하늘의 구름이 걷히자 언뜻 별이 보인다. 검붉은 노을이 채 가시지 않은 수평선 위에 조각달이 위태롭게 걸쳐 있다.
“저게 무슨 달이죠?”
“고리떼가 며칠 전이었으니까 초승달 아닐까요?”
이내 검은 구름에 휘말린 듯, 수평선 아래로 저버리기라도 한 듯 종적을 감췄다.
남자가 민망해할까 봐 그녀는 남자의 팔을 가볍게 잡고 걸었다. 식당을 멀리 돌아 숙소에 다다르자 그녀는 남자의 귀 가까이에 인사를 건넨다.
“본 뉘, 인샬라!”
그러자 남자가 자기 방에서 얘기를 좀 더 하자며 여자의 손에 힘을 준다. 그녀가 눈을 휘둥그레 뜨자,
“아직 초저녁인데요. 뭘.”
“그래도 누가 보면 어쩌려고요. 그 많은 입방아….”
“조금만 더 이야기하다 가요.”
마지못해 남자의 방으로 향했다. 적막감에 휩싸인 주변은 울창하게 숲이 우거진 거대한 공원이다. 흐릿한 가로등 불빛 속에서도 바나나, 야자수, 소철, 거대한 바오밥 나무들의 윤곽이 선명하다. 나지막한 객실 건물들은 모두가 전통 양식의 초가지붕으로 벽은 황토를 발랐다. 주변엔 장미 덩굴과 접시꽃, 선인장 등이 한데 어우러져 고즈넉한 시골풍이다. 남자의 방에 들어서자 신선한 풀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객실 안 천장과 벽이 모두 갈대를 엮어서 둘렀는데 무늬까지 맞추어 댔기 때문에 시원할 뿐만 아니라 예술이었다. 여자가 방을 나온 것은 결국 자정이 다 될 무렵이었다. 두 사람 모두 땀으로 범벅이 된 듯 했다. 숙소까지 바래다주겠다는 남자의 호의를 거절한 채 그녀는 혼자서 자기 동으로 그림자처럼 스며들었다.
다음날 행사는 차관과 이브라임이 주도했으나 실행계획이라기보다는 여전히 목적과 목표, 추진 방향을 벗어나지 못한 말 잔치였다. 카디자와 파티마, 그리고 마리안느는 슬며시 회의장을 빠져나왔다. 오전 햇살이 아직 선선했다. 셋은 해변의 모래톱 아래로 내려섰다. 멀리 모래밭 위로 작은 게들이 올망졸망 기어 다니는 모습에 환호성을 질러댔다. 바위에 붙은 홍합은 맨손으론 어림도 없어 보였다. 그렇게 2박3일이 지나갔다. 빈손은 처음부터 예고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돌아가는 차편은 사무실에서 제공한 승합차였다. 우기가 시작되는지 빗방울이 듣기 시작한다. 다카르 초입에서 종합경기장 부근에 사는 자밀라를 먼저 내려주기로 했다. 카디자는 문득 자밀라의 집을 잠시 둘러보고 싶었다. 사실 자밀라의 남편은 변호사인데 그녀는 둘째 부인이다. 처음 결혼할 때에는 둘째면 어떠냐면서 집안에서는 반겼다. 그런데 변호사라는 게 이렇게 형편없는 직업인 줄 몰랐다. 일감도 없는 데다 수입조차 들쑥날쑥, 요즘은 생계비조차 찔끔찔끔, 정말 힘들다고 했다. 생활이 각박해지자, 함께 살던 첫째 부인과의 관계도 삐걱거리면서 미묘한 신경전이 지속되었다. 결국 남자는 멀찍이 떨어진 이곳에 별도의 방을 한 칸 마련해 주었다. 처음엔 자주 들르고 생활비도 대주더니, 언젠가부터 발길이 뜸해지면서 생활비까지 멈추었다. 친정 도움으로 이곳 부처에서 계약직으로 일을 하고는 있지만, 보수라고 해봤자 입에 겨우 풀칠할 정도다. 그런 선입감인지는 몰라도 활짝 핀 자밀라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늘 고리떼와 따바스키를 위해 붙잡혀 있는 양과 염소의 얼굴이었다. 카디자는 자밀라의 사는 모습을 꼭 한번 보고 싶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굴속 같았다. 입구를 비닐 커버로 가려 놓아서 더욱 답답했다. 안에서 인기척이 들리며 친정엄마가 아이를 앞세우고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가 엄마의 손에 든 것을 잽싸게 낚아채더니 안으로 사라진다. 아이 한 명이 자라기 위해선 마을 하나가 필요하다고 했는데. 저 굴속 같은 곳에서 할머니와 아이가 온종일 지내다니. 카디자는 어머니께 목례를 한 후 다시 나왔다. 가슴 한편이 아려왔다. 아무리 둘째라지만 그래도 변호사 부인인데 저 정도일 줄은 몰랐다. 둘째로 산다는 것, 순간 이브라임과의 미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머리를 스쳤다.
차가 다카르 시내로 들어서자 빗줄기는 더욱 거세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창문에 내려치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살리에서 있었던 그날 밤 일을 생각했다. 왜 그 순간 이브라임을 거절하지 못했는지? 매번 관능을 자극하는 그에게 결국 무너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임 도구도 없이 그를 받아들였다. 그는 능숙하게 일을 끝내고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너스레를 떨었다. 사실 늦은 밤 자기 방으로 돌아와서도 카디자는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바로 모하멧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앞으로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하멧은 카디자에게 있어서 여전한 생손앓이다. 그녀는 아직 그와의 관계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했다. 아무렴, 일 년이 다되도록 전화 한 통 없다니 그는 정말 매정한 사람이다. 모하멧은 다카르대학 법학과 동기다. 벌써 대학을 졸업한 지도 6년이 지났다. 모하멧은 졸업 후 국토거버넌스개발부로 들어갔고, 카디자는 현재의 굿거버넌스개발부로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모하멧은 입사하자마자 온통 일에만 매달렸다. 어쩌다 휴가라도 내면 그는 곧장 투바의 그랜드 모스크로 달려갔다. 세네갈 사람들은 대부분 성지 순례를 메카가 아닌 투바로 간다. 모하멧도 일 년이면 몇 차례씩 찾아가 기도를 드려야 직성이 풀렸다. 수년 전 라마단이 끝나갈 무렵 그는 투바에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그녀에게 제안했다. 처음엔 휴일인 고리떼를 놔두고 굳이 라마단 끝 무렵에 가려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제안은 반가웠다. 사실 모하멧과 데이트를 몇 번 가진 적은 있지만 간다는 게 기껏해야 다카르의 해변이었다. 그곳은 햇볕 가림막도 없는 데다가 제대로 된 나무 한 그루 없는 곳이었다. 바닷바람에 모래가 휘날리고 검정 쓰레기 봉지가 이곳저곳 나뒹굴었다. 군데군데 시멘트로 만든 벤치들이 있긴 하지만 그것도 커플들이 자리를 잡으면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한참을 기다려 겨우 자리를 잡아도 볼거리라고는 멀리 바다의 파도가 밀려오는 풍경과 파도 위에서 보일 듯 말 듯 하는 고깃배 몇 척, 그리고 갈매기 떼뿐이었다. 그와의 대화거리는 주로 코란에 관한 내용이었다.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에 우리가 붙들 수 있는 것은 알라의 말씀이라고 했다. 멀리 해원을 향하는 그의 시선에 어울리는 말이 떠올랐다.
‘아브라함보다 더욱 신을 사랑하는 남자’
실은 모하멧으로 고민하던 때 킴이라는 한국의 파트너 친구가 해줬던 말이다. 언젠가 그가 물었다. 네가 모하멧을 사랑하는 만큼 그도 널 죽도록 사랑하니? 사실 그녀는 확신이 없었다. 오랜 세월 동안 그와 만난 건 불과 다섯 손가락으로 셀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아련한 추억 때문이다. 현재 근무하고 있는 굿거버넌스개발부에 입사해서 첫 라마단이 끝나갈 즈음, 그의 제안으로 투바에 가기로 했다.
이른 새벽 다카르 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하니 모하멧이 이미 차표를 구입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셋플라스 승합차였다. 차의 지붕 위에는 짐과 함께 염소와 닭, 오리가 발이 묶인 채 실려 있었다. 염소의 울음소리가 구원을 호소하듯 처량했다. 장시간 저 땡볕 속을 어떻게 견뎌낼지 조금은 불안하고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차의 중앙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았다. 차는 사막 모래벌판을 달리듯 모래 먼지를 뒤로 내뿜으며 앞으로 달렸다. 이따금 창문을 열고 주변 숲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거기까지였다. 차는 도로에 패인 수많은 포트홀을 피하느라 갓길을 벗어나 곡예 운전을 시작했다. 뜨거운 햇볕은 사정없이 얼굴을 달궈댔다. 흔들리는 차 속에서 중심을 잡으려고 천장 손잡이를 잡는 순간 뭔가 미끈한 게 잡혔다. 양의 오줌과 닭똥, 오리 똥이 한데 섞인 회색빛 배설물이 차 안으로 스며들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엔 한두 방울 무릎 위로 떨어지나 싶더니 이내 남색 블라우스와 치마 위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황급히 손수건을 꺼내 닦아보지만 이미 원피스는 더는 손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오랜만의 동행 길이 이렇게 처참하게 될 줄은…. 머리에 둘러쓴 터번까지 오물투성이였다. 투바에 도착한 그녀는 모하멧 친구의 도움으로 간신히 위기를 넘겼다.
다음날 모하멧과 함께 그랜드 모스크를 찾았다. 사람들은 못 먹고 굶주리는데 사원은 눈길이 닿는 곳마다 휘황찬란했다. 모하멧이 사원 곳곳을 안내했다. 규모와 역사가 대단했다. 많은 자원봉사자가 곳곳에서 방문객들을 돕고 있다. 기도 시간이 지나자 각기 코란을 암송하거나 기도하는 모습들이 눈에 띄었다. 모하멧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질 않았다. 그녀에 대해선 신경을 끊은 듯했다. 불안과 서운함이 함께 밀려왔다. 밤이 깊어지자 코란 공부를 하던 여자들도 하나둘 어디론가 사라졌다. 아마도 눈을 붙이기 위해 은밀한 곳으로 찾아든 듯했다. 그래도 대형 회당 안 곳곳에는 사람들이 카펫을 깔고 히잡이나 담요를 꺼내 무릎을 덥고 몸을 웅크렸다. 한참 졸기를 반복하던 카디자가 눈을 떴다. 어깨와 목이 결려왔다. 조용히 일어나 밖으로 나오니 바람기는 없어도 조금은 시원했다. 규모가 작은 사원들이 곳곳에 들어차 있다. 한참 둘러보고 돌아서려던 순간 멀리 건물 모퉁이로 한 사내가 나타났다. 희미한 모습만으로도 그가 모하멧임을 알아챘다.
“하이, 모하멧, 지금까지 뭐 한 거야?”
“하이, 카디자, 이제야 암송을 끝냈어. 눈 좀 붙이려고.”
“난 다 잤는데.”
멀리 동편 모스크 첨탑 위로 쥐면 부서질 듯 작은 달이 애처롭게 걸려있다.
“저게 무슨 달이야? 초승달?”
“아냐, 라마단이 끝나가니까 그믐달일걸?”
“우리 무슬림에겐 초승달이 소중한 것 아냐?”
“물론 그렇지만 그믐달도 의미 있는 달이야.”
그는 이슬람국가들의 국기를 살펴보라고 한다. 모두가 그믐달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 이유는 자기도 모른다고 했다. 그 후로 그는 틈만 나면 투바를 찾았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알라였다. 그와의 거리가 점차 멀어지고 소원해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몰랐다. 카디자가 그를 매몰차게 끊지 못하는 데는 오빠가 한 몫 했다. 그가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했을 때 그녀의 집에 들러 마라부인 오빠를 만난 적이 있다. 그와 한참 대화를 나눈 오빠는 그를 마라부에 필적할만한 매우 신실한 사람이라고 했다.
모하멧과의 거리가 달만큼이나 멀어진 것은 작년 부활절 직후다. 당시 카디자는 그의 사무실로 전화했다. 계속 받지 않자 택시를 잡아타고 그의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 앞 스타벅스에서 다시 전화했다. 사무실 바로 앞이니 잠깐 차 한잔하자고 했다. 그가 불같이 화를 내더니 일갈했다.
“아니, 사전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오면 어떡해. 지금은 안 돼, 너무 바빠.”
열에 받친 그녀는 벌떡 일어섰다. 이것저것 재볼 겨를도 없이 그의 사무실로 쳐들어갔다. 엘리베이터가 고장인지 움직이질 않았다. 5층까지 계단으로 올라가야 했다. 3층에 이르기도 전에 숨이 가빴다. 이마엔 주먹만 한 땀방울이 송알송알 맺혔고, 머리에 쓴 가발은 땀에 뒤틀려 움직였다. 난간을 붙들고 한참을 멈춰 섰다. 눈에 들어간 땀방울을 티슈로 눌렀다. 마스카라가 번지는지 하얀 티슈가 거무스레 했다.
“내가 미친 거 아냐? 나의 초라한 모습을 보면 그가 뭐라 할까?”
이내 그녀는 첫 마디를 뭐라 쏘아붙일 지부터 생각했다.
“나쁜 자식!”
아냐, 너무 교양머리 없지. 허벅지가 쥐가 나는 듯 했다. 손으로 잠시 주무른 후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5층 담당 경비가 모하멧의 사무실을 가리켜 준다. 그의 문을 노크했다. 반응이 없자 문을 확 열어 젖혔다. 안에 있던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카디자를 향했다. 모하멧은 파트너 여직원과 함께 도면을 펼쳐놓고 뭔가 의논 중이었다. 그런데 그 여직원의 모습이 카디자의 눈에 활활 불을 지폈다. 가슴골이 드러난 화려한 투피스 복장에 긴 생머리 가발, 푸른 눈화장, 타바스키에 희생되는 양의 피보다 진한 붉은 입술이 숫제 연예인급이었다. 공무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화려했다. 누굴 위해서지? 벌떡 일어선 모하멧이 카디자의 팔을 끌며 나가자고 했다. 카디자는 문을 가로막고 잠시 그녀를 노려봤다. 이윽고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전화를 안 받는 이유가 이거였어?”
“무슨 소리야? 남의 사무실에 무작정 찾아와서.”
“저 여자 때문이었냐고?”
“왜 이래, 무례하게. 나가서 이야기해.”
“넌 정말 비겁한 놈이구나. 왜 솔직하게 이야길 못해. 좋아하는 여자가 있다고.”
문을 세게 닫은 후 계단을 뛰다시피 내려왔다. 모하멧이 당황한 듯 뒤따라 나오며 외쳐댔다.
“아니야! 오해라고, 정말.”
1층으로 내려섰을 때 그녀는 홀로였다. 그는 더 이상 카디자의 편이길 거부했다. 더 이상 연락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가슴 속에서 그를 완전히 지우질 못했다. 이브라임과 관계를 맺은 뒤에도 모하멧의 얼굴이 계속 어른거렸다.
사무실 창문을 열자 1층 태권도 체육관으로부터 짧고 날카로운 기합 소리가 4층의 사무실까지 울린다. 여학생들이 태권도 훈련 중인가 보다. 카디자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한때 사무실에서 파트너였던 한국인 친구 킴의 장난기 어린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때도 모하멧 문제로 한숨을 쉬며 고심하던 때였다.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젊은 여인이 웬 한숨이냐며 핀잔을 줬다. 도대체 어떻게 생긴 놈이야? 그가 물었다. 카디자가 머뭇거리자 킴이 진지한 표정으로 단호하게 내뱉는다.
“원초적 본능에 강한 남자가 아니면 과감하게 차버려.”
카디자가 얼굴을 붉히자 그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잇는다.
“카디자,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야? 파티마가 입만 떼면 하는 말, 생각한 거 맞지?”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만을 죽도록 사랑하고 보호해 줄 수 있는 생명수 같은 남자, 특히 둘째 부인 얻지 않을 남자.”
넌 지금 모하멧을 일방적으로 짝사랑하는 거라고. 언젠가는 깊은 상처만 남기고 헤어지게 돼. 상처가 덧나기 전에 빨리 차버려. 차관실의 파티마만큼이나 원색적인 그의 말에 배꼽을 잡고 웃었다. 새삼 그의 말이 귓가에 맴돈다.
요즘 오랑지 전화국의 시설부 매니저인 음바께라는 친구가 카디자의 방을 자주 드나든다. 작년에 부처가 이곳 리버데시스로 이전해 오면서 청사 건물에 대한 각종 공사를 시작했는데 그 때부터였다. 그가 들릴 때면 바게트 빵이 가득한 커다란 비닐 가방을 들고 나타났다. 여직원들에겐 인기맨이었다. 언제부턴가 카디자를 향한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파티마가 농반진반으로 얘기를 했다. 그 사람 멋진 사람 같아. 잘 해 봐. 그래도 카디자에겐 관심 밖이었다.
오후 기도를 준비하던 그녀에게 어느 날 그는 뜻밖의 제안을 했다. 알마디 해변이 요즘 프랑스 관광객들로 붐비는 데 함께 가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각종 조개류와 생선이 제철인데 세네갈 본토인보다도 미식가들인 외국인들이 더 많이 찾는다는 것이었다. 음바께가 무슬림이 아닌 크리스천이라는 게 조금은 걸렸지만 그렇다고 크게 부담될 일은 아니었다. 사실 파티마의 남편도 크리스천이지만 종교에 관해서는 서로가 존중하기 때문에 별문제가 없다고 했다. 심지어 라마단 기간 중에도 파티마는 금식을 해야하지만 남편과 아이들은 스스로 챙겨서 잘 먹는다고 했다. 그의 제안을 들은 파티마와 마리안느도 덩달아 환호성을 지르며 동행키로 했다.
음바께의 차를 타고 알마디 해변으로 나가는 길은 한적했다. 마멜 지역에 이르자 아프리칸 르네상스 모뉴먼트의 거대한 조각품이 붉은 저녁노을을 배경으로 실루엣처럼 드러났다. 알마디 해변으로 밀려드는 파도 소리가 요란하다. 그녀는 히잡을 꺼내 무릎을 덮었다. 사하라 사막의 모래폭풍이 여전히 기세등등했다. 넷은 해변에 가장 가깝고 전망이 좋은 식당을 찾았다. 저녁이라 어둡기는 했지만 기다란 방파제가 한눈에 들어온다. 실내는 한가했다. 인근의 말리와 기니로부터 온 아르바이트생들이 주문을 받았다. 음바께는 메뉴판을 보더니 온 김에 고루 맛보자며 이것저것 한참을 주문한다. 음바께가 매니저를 찾아 카운터로 간 사이, 파티마가 갑작스레 진지 모드로 바뀌더니 마리안느를 향해 한마디 한다.
“오늘 저녁 우리는 곁다리라고.”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마리안느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의미 있는 웃음을 쏟아낸다. 오히려 카디자가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파티마가 카디자를 향해 애교 섞인 윙크를 보낸다. 이윽고 커다란 쟁반에 온갖 조개가 담겨 나왔다. 음바께가 천천히 설명하가 시작했다.
이건 가리비, 대합, 홍합, 키조개, 새조개, 전복, 꼬막, 새우, 기다란 맛조개 등 일일이 짚어가며 친절하게 설명했지만 맛보기에 바빠서 그런지 이름에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조금 있더니 바지락 국물까지 나왔다. 별도의 식사를 할 거냐는 음바께의 제안을 눈치 빠른 파티마가 사양한다. 저녁 할 일이 있다며 마리안느와 함께 둘은 먼저 일어섰다. 이를 기다렸다는 듯 음바께가 카디자에게 재미있는 곳이 있는데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묻는다. 그녀가 머뭇거리자 음바께가 일어선다. 둘은 근처의 미 대사관 부근에 있는 나이트클럽으로 향했다. 차 속에서 그녀는 조금 불안스러웠다. 나이트클럽의 생리를 조금은 아는데 너무 늦은 시간에 끝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 그가 카디자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하는 듯 말을 건넨다.
“너무 늦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녀는 머리에 쓴 터번을 벗어 핸드백에 넣었다. 오빠가 알면 뭐라 할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건물 밖은 의외로 조용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음바께가 능숙하게 앞장서 안내한다. 휘황찬란한 조명에 눈이 부셨다. 물론 카디자도 이런 곳이 처음은 아니다. 대학 시절 친구들과 함께 디스코텍을 찾은 경험은 있지만 오래전 일이다. 일단 테이블을 찾아 자리를 잡았다. 사이키 조명 속에서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드는 긴 머리의 외국인들이 부러웠다. 함께 어울려 제법 흥겹게 즐기는 동안 음악이 잦아들고 사이키 조명이 멈춰 서자 카디자는 조바심이 생겼다. 그에게 갈 시간이 된 것 같다고 하자, 그는 두말 않고 밖으로 나왔다. 그의 차에 올라 피킨으로 향했다. 카디자는 핸드백에서 히잡을 꺼내 머리며 목을 감쌌다. 음바께가 저녁 괜찮았느냐고 묻는다. 카디자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또 다른 제안을 한다.
“타바스키 지나고 락로즈에 한번 같이 가시죠.”
얼핏 락로즈는 11월 이후에나 가야 장밋빛 호수를 볼 수 있는 곳 아니냐고 카디자가 되물었다.
“그땐 너무 춥습니다. 거친 모래바람이 일기 시작하거든요.”
사실 락로즈는 가보고 싶어도 마땅한 교통편이 없어 마음뿐인 곳이다. 카디자는 그의 호의에 일단 고마움의 눈인사를 보낼 뿐 섣부른 답변은 피했다. 이윽고 피킨 읍내 호수에 다다르자 무수히 많은 별들이 그리고 가로등이 물속에서 반짝거린다. 차에서 내리자 머리 위로 보름달이 둥실 떠 있다. 올케언니가 큰길까지 마중을 나왔다. 음바께가 다시 차에 오르자 카디자는 비로소 긴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 남자 매너 있네. 집까지 바래다주고.”
“당연한 것 아냐?”
“오빠는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
출근길 카디자가 리버테시스의 청사 앞에 내리자 깡통을 든 딸리베들이 쏜살같이 달려든다. 먼지투성이 맨발에 가슴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셔츠며 너덜너덜한 반바지, 곱슬머리 곳곳엔 흰 버짐 자국이 선명하다. 콧물을 흘리는 아이들도 보인다. 그녀는 돈 대신 바게트 빵을 꺼내 손으로 조금씩 자른 후 아이들의 깡통에 하나씩 넣어줬다. 이 시각 아이들이 얼마나 배가 고픈지, 돈을 주어봤자 이맘이나 마라부의 호주머니만 부풀려 줄 거라는 것을 그녀는 잘 안다. 청사 경내로 들어서자 경비가 두 손을 들어 X자 표시를 한다. 엘리베이터가 고장이라는 뜻일 것이다. 4층까지 걸어 올라가야 한다. 거구의 몸을 이끌고 천천히 계단을 오르는 동안 파티마와 자밀라가 앞지르며 ‘쌀라말리쿰’ 한다. 이번엔 이브라임이 ‘봉주흐!’를 외치며 뒤따라온다. 사무실에 들어선 카디자는 땀에 젖은 가발을 벗어 책상 위로 내던졌다. 에어컨을 15도에 맞추더니 머리를 그 밑으로 바짝 들이민다. 앞방의 이브라임이 들어서는데 손에 카드가 들려있다. 하나씩을 돌린다. 곧이어 파티마가 들어섰다.
“하이, 낭가데프! 근데 그게 뭐야?”
파티마가 마리안느의 손에 들려있는 카드를 낚아채 펼쳐 든다. 다카르 대학에서 이브라임의 경제학 박사학위 최종 심사를 위한 프레젠테이션 면접이 있다고 한다. 파티마가 이브라임을 향해 눈웃음을 치며 한마디 한다.
“아니, 카디자에게만 주면 되지, 다 돌릴 필요가 있어?”
이브라임이 계면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더니 나간다. 솔직히 경제 문외한들이 가서 들어봤자지. 파티마의 말에 카디자는 덤덤한 표정이다. 파티마가 목소리를 갑자기 낮추더니 카디자를 다그친다.
“근데, 이브라임으로 결정한 거야?”
“아냐, 그런 거.”
“이브라임이 대학교수가 되어봐. 그럼 비록 둘째 부인이라도 교수 부인되는 거잖아.”
카디자가 반박을 하지 않는다. 카디자에게 음바께를 어떻게 할 건지 묻는다. 그가 최근 들어 문턱이 닳도록 드나드는 이유를 알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이렇게 끌고 갈 거야? 부담되면 마리안느에게 넘겨.”
파티마의 농담에 일순 폭소가 터진다. 파티마가 마리안느를 쳐다보며 한마디 한다.
“얘, 넌 너무 고르는 것 아냐? ‘너무 고르다 보면 덜 익은 코코넛을 고르게 된다’는 말도 있잖아.”
카디자가 덧붙인다.
“그렇긴 하지만 마리안느 넌 살부터 좀 찌우는 게 우선이야.”
“언니, 나 그래도 50키로는 나가.”
“체, 그 몸매를 세네갈 어느 남자가 쳐다보겠니? 최소 60키로까진 늘려야지.”
“너도 어제 교통사고 봤잖아. 남자의 시선이 어디로 쏠리는지.”
사실 어제 점심을 먹으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코미디 한 편이 벌어졌다. 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카디자를 포함한 여자 셋이서 돌아오는데, 근처 삼거리에서 신호에 걸렸다. 마침 오른편에서 오던 택시가 멀쩡한 도로에서 지나가는 버스의 옆구리를 들이받았다. 버스가 갑자기 멈춰서자 뒤따르던 승용차들이 연쇄적으로 5중 추돌을 일으켰다. 놀랍게도 사고의 원인 제공자는 바로 카디자였다. 택시 기사가 젊은 친구였는데 마침 미니스커트를 입은 카디자의 늘씬한 각선미를 감상하느라 그만 신호를 못 본 것이다. 사실 여자들은 촉이라는 게 있다. 남자의 뜨거운 시선이 와 닿으면 금세 알아차린다.
“암튼, 그 남잔 본능만이 살아있는 속물이었다니깐. 그렇지만 어쩌겠니. 남자가 다 그런걸.”
이브라임의 박사학위 프레젠테이션에 참석하기 위해 직원들 몇몇이 청사 앞에 모였다. 크리스천인 마리안느를 제외한 여성들은 전통 의상으로 한껏 차려입었다. 머리엔 터번을 둘렀고, 금색, 남색, 붉은색의 원피스 복장으로 멋을 냈다. 카디자의 하늘빛 의상이 단연 돋보이는 듯했다. 평소 카디자에 관심이 많던 경비 녀석이 뛰쳐나와 수선을 피운다. 가까이 달라붙는 딸리베들을 쫒는다지만 속셈은 뻔하다. 그녀에게 치근덕거리고 싶은 게다. 이미 결혼까지 했고 돈이라곤 쥐뿔도 없는 녀석이 본능만 살아있다. 차는 벌써 대학 근처에 있는 오랑지 전화국을 지났다. 그녀는 잠시 음바께 생각에 젖어 들었다. 상당히 남자답고 매너도 있다. 어느덧 다카르대학 정문을 지나 포스터가 덕지덕지 붙은 대학 극장 건물과 온갖 빨래들이 만국기처럼 휘날리는 기숙사 건물을 지났다. 차는 경제학부 광장에 멈췄다. 광장의 주변에 거대한 야자수며 선인장, 활엽수의 잎이 관정에서 뿜어져 나오는 지하수에 젖어 반짝거린다. 밖에선 딸리배들이 저 지하수조차 못 마시고 흙탕물에 손을 대고 있는데. 연락을 받은 이브라임이 나타나 반갑게 맞이한다. 파티마의 눈초리는 벌써부터 카디자와 이브라임간의 동작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훑고 있다. 행사가 예정된 강당에 들어서자 카디자는 앞쪽에 마련된 가족석으로 안내를 받아 들어갔다. 이브라임의 특별 배려다. 먼저 와있던 가족들이 카디자를 반갑게 맞이한다. 언뜻 이브라임의 부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아이를 데리고 가까이 앉아 있다. 부인은 띠에스에서 중학교 교사를 하고 있다. 다카르에서 출퇴근이 어려워 주말 부부로 산다고 했다. 행사는 몇몇 관계자들만의 화려한 말잔치로 끝났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관심도 없고 이해도 안 되었다. 행사가 끝나고 심사 교수들과 가족들 간의 식사가 있다고 했다. 사무실에서는 오직 카디자만 초대를 받았다. 파티마와 마리안느, 자밀라는 당연한 듯 여기면서도 섭섭한 표정을 감추진 못했다.
“우리 들러리들은 어디 가서 쩨부젠으로 때우자.”
파티마의 제안에 일순 폭소가 터지며 활기가 솟아올랐다.
카디자는 조금은 어색한 식사 자리를 꿋꿋하게 버텨냈다. 교수들과의 의례적인 덕담이 오가는 동안 이브라임의 부모나 부인과도 어색한 대화를 나누었다. 밖이 어둑어둑해지고서야 식사는 끝이 났다. 이브라임은 일단 동생의 차에 부인과 가족들을 먼저 태워 보냈다. 그는 카디자와 함께 강당 뒤편의 공원으로 향했다. 가로등엔 벌써 희미하게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브라임이 걸으며 노골적으로 앞으로의 꿈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공직에 오래 있을 생각은 없다고 한다. 현재도 시간 강사를 하고는 있지만, 자리가 나면 곧장 학교로 돌아올 계획이란다. 그녀는 대꾸하지 않았다.
“눈치를 채셨겠지만, 아내를 포함해서 가족들에게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얘기했습니다. 저는 정말 당신과 결혼하고 싶습니다. 물론 초혼인 당신에겐 대단히 미안하지만요.”
여전히 여전히 대꾸를 피했다.
“지난번 살리에서도 많은 얘기를 나눴지만 이젠 당신 생각도 좀 듣고 싶습니다.”
드디어 카디자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저도 당신을 좋아해요. 그렇지만 아직 연인으로서 사랑한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물론 살리에서의 행동은 실수였고요.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진 저도 모르겠어요.”
그녀는 말하는 중에도 머릿속으론 모하멧이 스쳐갔고 음바께가 지나갔다. 오늘 이브라임의 호의적인 대접에도 불구하고 그가 더욱 가까워졌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실내가 더운지 학생들이 야외로 나와 가로등 불빛을 찾아 자리를 잡는다. 숲속 벤치에도 몇몇 젊은 커플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학생들을 피해 전망이 확 트인 언덕 위로 오르니 밑으로 해안도로가 질주한다. 멀리 대서양 수평선 너머로 해는 이미 넘어간 듯 붉은 노을이 훨훨 타오르고 있다. 이브라임이 슬그머니 손을 뻗어온다. 그녀는 그의 손을 가볍게 젖히고 일어섰다. 핸드백에서 터번이 아닌 히잡을 꺼내 머리와 목에 둘렀다. 대학 구내를 걸어 나오며 그녀는 자밀라를 생각했다. 그녀도 결혼 초에는 화려한 인생을 꿈꾸지 않았을까. 달콤한 속삭임은 노을처럼 아름답다고 했다. 자밀라 그녀도 초승달 같은 관능의 유혹에 넘어간 것은 아니었을까?
타바스키가 지나자 사무실은 한결 차분해졌다. 퇴근 무렵 카디자는 기도를 위해 가발을 벗고 손과 발을 씻었다. 카펫을 펼치고 히잡을 둘렀다. 허리를 굽혀 묵도를 시작하는데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려온다. 다 늦은 시간에 누구일까? 경비가 퇴근 점검이라도 하나. 이윽고 그녀의 방문을 두드린다. 그녀가 기도를 하다말고 대꾸를 했다. 문이 열리며 음바께가 들어서려다 멈칫한다. 그녀가 괜찮다며 들어오라고 한다.
“무슨 일이죠?”
“락로즈에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철이 좀 이른 것 같은데….”
장밋빛 소금 호수를 관찰하기는 11월 이후가 제철이지만 그때는 날씨가 너무 춥고 모래바람이 심해서 여자들에겐 오히려 힘들다고 했다. 이번 주말에 같이 가는 게 어떤지 묻는다. 카디자도 그가 싫지는 않았다. 지난번 알마디 해변에 갔을 때 보인 그의 매너가 마음에 들었다. 그렇다고 당장 승낙하는 것도 좀 가벼워 보였다. 조금 뜸을 들인 뒤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무슨 특별한 일이 있어 왔느냐고 묻자 그는 오랑지 사무실에서 일부러 그녀의 퇴근 시간에 맞추어 왔다고 한다.
“아니, 그냥 전화로 해도 될 일을….”
말을 잊지 못하자 그가 카디자의 얼굴도 볼 겸 얘기도 할 겸 해서 왔다고 한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왠지 깊고 선하다고 느꼈다. 지난번 알마디 나이트클럽 갔을 때 집에까지 데려다주고 달빛 속으로 사라지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감사해요. 일부러 와주셔서. 지난번에도 신세를 많이 졌는데.”
“뭘요. 제가 오히려 더 고맙지요.”
토요일 오후 음바께가 피킨에 있는 카디자의 집으로 향했다. 그녀가 음바께를 반갑게 맞이한다. 카디자는 올케언니에게만 살짝 귀띔을 해두었다. 차는 피킨 시내를 벗어나 북쪽으로 달리더니 어느덧 해변을 따라 질주 시작한다. 멀리서 해안으로 밀려드는 잔잔한 파도의 흰 거품이 바닷가 짧은 백사장을 덮친다. 마음은 이미 푸른 바닷속으로 젖어 들었다. 하늘은 연한 남색이다. 해변을 따라 아무렇게나 방치된 배들이 느긋한 휴일 낮잠 자듯 지그재그로 놓여있다. 물새들이 이따금 해변을 총총 걸으며 부리로 먹이를 쪼아댄다. 이윽고 차는 샛길로 빠져들었다. 멀리 하얗고 작은 봉우리들이 군데군데 눈에 들어온다. 음바께가 저게 바로 소금산이라고 말한다. 가까이 다가가자 주변이 온통 하얗고 끝이 보이지 않는 기다란 호수가 나타난다. 락로즈(Lac Rose)라고 한다. 호수엔 잔잔한 파도가 일고 있다. 소금 채취선인 배조차도 온통 하얗다. 가까이서 보니 쌓아 올린 소금에 황토와 모래가 잔뜩 뒤섞여 있다. 저것을 어떻게 정제할지 궁금했다. 사실 그녀도 처음 구경하는 것이다. 차에서 내려 호숫가로 길게 뻗은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코스가 워낙 길어서 한 바퀴 돈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30분쯤 걷다가 되돌아왔다. 소금산이 거창하긴 한데 볼거리치고는 좀 단순하다는 생각을 했다. 음바께가 속내를 알아차린 듯,
“저 산 너머에 가면 진짜 볼거리가 있습니다. 일단 점심부터 먼저 때우지요. 전 이게 두 번쨉니다. 그래도 가슴이 설레고 재밌는데요. 카디자, 어떠요?”
“거창하고 신기하다는 말밖엔 안 나와요.”
음바께가 그녀를 간이매점으로 안내했다. 양고기를 넣은 바게트 빵과 주스를 주문했다. 날씨가 쾌청해서 호수를 거닐기는 좋았지만 정작 붉은 장밋빛 호수를 보지 못해 그녀로서는 조금 아쉬웠다. 그가 다음 여정을 설명했다. 사실 락로즈의 볼거리는 이제부터라고 했다. 둘은 차를 몰아 구릉처럼 생긴 산을 넘었다. 사막지대였지만 나무가 무성한 구릉과 계곡이 굽이굽이 이어졌다. 사막지대 너른 벌판을 따라 허름한 초가들이 군데군데 촌락을 이루고 있다. 카디자로선 처음 보는 세네갈이었다. 숲이 우거진 구릉 계곡과 모래사막을 자동차를 타고 달리는 코스였다. 이미 앞서간 사람들이 벌써 달리고 있는지 구릉 계곡에 거대한 황색 모래바람이 일고 있다. 그런데 코스 주변에서 젊은 여인들과 아이들이 군데군데 모여 앉아 과일과 빵, 음료수를 팔고 있다. 일단 출발하면 차에서 내릴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물건을 사 줄 수도 없다. 오로지 뿌연 모래 먼지만 뒤집어쓸 뿐인데도 어쩌다 하나라도 팔려고 기를 쓰고 달려들었다. 그녀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왜 이런 것을 타자고 했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차는 8인승 사막 랠리용으로 개조된 트럭이었다. 양쪽 난간을 따라 4명씩 앉았는데 안전띠도 없다. 물론 포장을 둘러쳐서 안전은 했지만, 천장에 쇠막대가 가로질러 있기 때문에 위험해 보였다.
차는 비명을 내지르며 비탈을 힘겹게 오르기 시작했다. 오르막에선 헛바퀴가 도는지 엄청난 소음과 매연, 그리고 노란 모래 먼지를 로켓처럼 내뿜었다. 가까스로 정상에 오른 차는 이번엔 계곡을 향해 롤러코스터처럼 앞머리를 수직으로 내리꽂았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차는 다시 구릉을 향해 오르고 계곡으로 처박기를 반복했다. 카디자는 갑자기 머리가 끈적끈적해지는 것을 느꼈다. 손으로 머리를 누르니 피가 묻어났다. 갑자기 튀어 오를 때 쇠막대에 머리가 부딪친 모양이었다. 차는 여전히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몰아쳤다. 이윽고 차가 멈춰 서자 그간의 두려움도 잊어버린 듯 희열을 느꼈다.
“카디자, 괜찮아요?”
“네”
“다 끝났습니다.”
그녀는 아직 제정신이 돌아온 건 아니었지만 옷매무새를 보니 말이 아니었다. 머리를 털자 모래 먼지가 황색 구름처럼 솟아오른다. 옷을 털고 신발 속의 모래를 털어냈다.
“가시죠. 가시다가 한군데 더 있습니다.”
“또요?”
“하하하, 이런 게 아닙니다. 그냥 지나가면서 보시면 돼요.”
“휴우, 난 또.”
음바께가 차를 몰면서 이젠 폐허가 되어버린 도시를 소개하겠단다. 한참을 달리니 텅 빈 거리에 들어선 듯 폐업한 상가들이 나타났다. 물론 식당이며, 술집, 나이트클럽, 오락실 등 서부거리를 연상시키는 거리다. 군데군데 설치미술 조각품들도 보였다.
“왜 이래요 거리가?”
이곳이 바로 파리-다카르 자동차 랠리의 종착역이라고 했다. 그 랠리가 하도 위험하다고 난리를 쳐서 남미로 옮겨갔단다. 그때 부흥했던 거리가 지금 이렇게 폐허가 되었다고 했다.
“그럼 저걸 어떻게 해야 돼요?”
“그게 바로 우리들 몫 아닌가요?”
“어떻게요?”
“이 거리에서 뭔가 해볼 작정입니다. 물론 당신이 옆에서 응원해 주신다면요.”
카디자는 어안이 벙벙했다. 오늘 이곳에 오자고 한 목적이 바로 이것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나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도무지 거리에 사람이 보이질 않았다. 오는 도중 해변에 차를 세우고 물가로 내려섰다. 모래보다는 펄이 좀 많아 보였다. 펄 위를 작은 게들이 바삐 움직인다. 어느덧 서쪽 먼바다는 붉은 낙조로 화려하게 물들고 있다. 카디자가 음바께를 향해 난데없는 질문을 던진다.
“음바께, 왜 오랑지의 훌륭한 아가씨들을 놔두고 우리 사무실까지 오시는 거죠?”
“왜요, 싫습니까?”
“아니요, 그냥 궁금해서요.”
“물론 오랑지에 훌륭한 여자들 많습니다. 똑똑하고요. 그런데 당신 사무실 사람들처럼 가슴이 따뜻한 사람이 없어요. 모두가 잘났고, 밥도 늘 각자 먹어요.”
언젠가 카디자가 대형 쩨부젠을 주문해서 대여섯 명의 여직원들이 빙 둘러앉아 즐겁게 점심을 먹고 있었다. 마침 들린 음바께가 그 모습을 인상 깊게 본 모양이었다.
“사실 저도 끼고 싶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당신의 모습이 유난히 두드러졌어요. 이유는 저도 모릅니다. 그냥 당신이 좋았을 뿐이에요.”
“가요!”
차는 다시 해변을 따라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한참 조용했던 그가 침묵을 깨트렸다.
“전 공학돈데요, 파리에 가서 경영학 공부를 좀 더 하려고요. 언제까지나 프랑스계 기업만을 위해 일할 순 없잖습니까? 가능하다면 당신과 함께 가고 싶습니다.”
순간 카디자는 그의 옆모습을 쳐다봤다. 얼굴은 정면을 향하고 있지만 조금은 긴장한 듯했다. 그녀는 특별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허황한 꿈이라고 말하기에는 태도가 너무 진지했다. 집에 가까워지자 올케에게 전화했다. 그런데 의외로 오빠가 올케언니와 함께 문밖 도로까지 나와 서성거리고 있다. 차가 멈추고 음바께도 함께 내렸다. 그를 오빠에게 간략히 소개했다. 그는 다시 차에 올라 다카르로 향했다. 오빠가 문간에 들어서며 한마디 한다.
“왜, 무슬림이 아니라서 미리 얘기 안 했니?”
카디자가 묵묵부답이자, 오빠가 계속한다.
“응, 사람 괜찮아 보인다. 그럼 모하멧 그 친구는 어쩌려고.”
“그 사람은 끝났어. 이젠 묻지도 말아 그 사람.”
“참 별 싱거운 녀석 같으니라고. 보매는 그렇잖아 보이더만.”
“그러니까 잘 믿는다고 완벽한 게 아니라니깐. 오빠도 사람 보는 눈에 허점이 많다는 걸 알아야 해, 글쎄.” 동편 대문 위로 희고 둥근 달이 머리를 내밀고 있다.
아침부터 단수다. 카디자는 작은 플라스틱 물통을 들고 비상용 식수가 있는 청소원 대기실로 향했다. 마침 차관실의 파티마와 마리안느도 함께 있다. 한참 수다를 떠느라 인사도 잊은 모양이다.
“쌀라말리쿰! 무슨 얘기들이야?”
파티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반문한다.
“카디자! 너도 모른 거야?”
“무엇을?”
얼마 전부터 사표를 내겠다던 문서과의 아미나타가 드디어 사표를 내던졌다는 것이다. 중국인 사업가의 현지처로 들어가게 되었다고 했다. 그 남자가 엄청 많은 지참금을 보내왔는데, 아마 다카르 플라토의 독립광장 부근에 식당 하나 차릴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하다고 했다. 사실 차관도 전부터 그녀에게 눈독을 들여왔는데 헛물을 켠 셈이다. 어려운 대학까지 나와서 제대로 능력 발휘도 못 하고 야만인 이교도에게 넘어가다니 카디자는 씁쓸했다. 성평등이나 여권신장에 관한 각종 워크숍, 국제회의가 있으면 빠짐없이 함께 참석했던 그녀였기에 실망이 더욱 컸다. 지난주 받아든 결혼식 청첩장에 대한 실망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또 한 번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게 된 것이다. 전에 받은 청첩장 주인공은 세네갈 여성학회 홍보이사로 있던 대학 선배였다. 그녀도 세네갈 여성들의 인권 강화와 성평등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던 유망주였다. 만나기만 하면 부처는 다르지만 함께 일해 보자며 의기투합했던 그녀가 국회의원의 둘째 부인으로 들어간다니 도대체 이해가 안 되었다. 들리는 말로는 국회의원이 사업가 출신인데 국회의원이 되기 전부터 오릿동안 긴밀한 사이였다고 했다. 정말 돈 때문인지 사랑 때문인지 모를 일이다.
월요일 아침 회의는 장관이 주재하는 날인데 차관이 앉아있다. 카디자는 왼쪽에 앉은 파티마에게 쪽지를 건넸다.
“장관은?”
“투바에”
그러자 오른쪽에 앉은 자밀라가 팔꿈치를 툭 치더니 역시 메모지를 건넨다.
“요즘 높은 애들 투바순례 경쟁 중”
며칠 전 차관실의 파티마가 지나가며 흘린 얘기가 떠올랐다. 차관이나 장관이나 높은 사람들 신앙심 가지고도 경쟁한다니까. 글쎄, 책장에 책 한 권 있나 보라고. 책상 위에 코란 한 권 달랑 펴놓고 있잖아. 굿거버넌스 좋아하시네!
카디자는 차관의 이야기를 한 귀로 흘리며 엉뚱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노트의 상단에 모하멧의 이름을 적었다. 그리고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미 끝나버린 사랑일까? 그는 카디자보다도 알라가 늘 우선인 사람이었다. 무엇보다도 사무실에 함께 있던 그 여자, 바로 그 여우가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둘이 교환하던 그 눈빛, 너무나 그윽해 보였다. 아무래도…, 그녀는 그의 이름 위에 X를 그었다. 이어서 차관 옆자리에 앉아서 옥스팜 지원 사업 현황을 설명하고 있는 이브라임의 이름을 희미하게 흘려 썼다. 둘째 부인? 여성의 인권과 성인지 정책을 논하고 성평등을 주창하는 여자가 세컨드라. 살리에서의 하룻밤이 떠올랐다. 그건 동물적이고 관능적인 풋사랑이었다. 이 친구가 정말 그녀를 끝까지 사랑하고 보호해 줄 수 있을지. 그의 모습을 아무리 봐도 신실함이 묻어나지 않았다. 오른쪽 자밀라의 얼굴을 힐끗 곁눈질했다. 여전히 그림자가 드리워진 모습이다. 그녀의 초라한 집과 아이, 그리고 친정엄마가 떠올랐다. 이브라임 이름 옆에 무수히 많은 ?마크와 점을 찍어댔다.
사무실로 돌아온 그녀는 킴이 남긴 논문집을 꺼내 들었다. 여성 기술훈련 개선안 보고서 부분을 펼쳤다. 음바께가 락로즈에서 돌아오는 길에 했던 말들과 맥락이 비슷했다. 그녀는 오랜만에 킴에게 안부의 메시지를 한 통 띄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