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가람이병기청년시문학상당선작
[대학부] 멧돼지 / 황익순
견고한 산맥은 그럴듯할 뿐
멧돼지를 만족하게 할 수는 없다
어디라도 가서 당장 그곳 숨을 들이켤 준비가 되어 있는
멧돼지는 고궁보다 오래된 숲의 외곽을 순례하고 있다 마치
움직이는 네 발짜리 언덕처럼
음영을 제 발밑에 둔 채 비탈진 등 위로
울창한 수목의 대기를 걷는다 나뭇잎들의 온갖 색채를 밟으며
가죽 속 뜨거운 혈기를 지닌 멧돼지, 고대 대장간 같은 열기를 내뿜는다
멧돼지는 모든 비밀 통로를 행보한다 무덤을 파헤치고
유해마저 젖혀버리는 어금니를 계속 끄덕거리며 계절을 감지하고 있다
미숙한 포수는
마침내 사냥감과 마주쳤으나 총을 겨눌 생각을 못 한다
멧돼지는 너무 멀리 있으나 이미 그 앞까지 와 있고
희미한 표석과 같은데 이미 포수의 그림자까지 밟고 서 있다 멧돼지가
단단한 발굽 속에 고인 힘으로 젖은 땅을 미끄러뜨리려 할 때
두 귀를 멧돼지의 눈에 기울이면 포수의 심장 기척 소리
북이 고동치고 있을 때 마치 멧돼지 가죽 속 가득 찬
소리의 무게에 짓눌린 듯 포수는 두 발을 돌릴 생각도 못 하고 멧돼지가
뜀박질을 내리치려 할 때 튀어나온 귀신같은 사냥개 무리 짐승들은 엉켜
이제 없는 이리 떼로부터
이제 없는 호랑이로부터
이제 없는 곰으로부터
이제 없는 과거의 횃불로부터
이제 없는 구석기로부터
그러나 이제 바로 등 뒤의 죽음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다 멧돼지는 석순 같은 어금니로
지금을 찢고 싶다
멧돼지의 비명이
온 숲에 메아리 울린다
죽음의 무게가 두텁다
그러나 멧돼지는
이제는 사라진
불타버린 과거의 숲 속에서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기 위해
모든 허공을 들이박고 있다
[고등부] 달리의 악몽 / 이세인
화상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내과로 가자
내 상처는 이미 외상이 아니므로
붉어진 손은 계속 등 뒤로 숨겨 두었다가
의사를 만나거든 그때 꺼내야 한다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처럼
내 안의 모든 것이 녹고 있다는 사실
녹은 시계가 나무에 걸려 있고
책상 위에도 늘어져 있다
꿈속은 언제나 뜨겁다
차가운 방바닥에서의 악몽
녹은 시계는 움직이지 않는다
축 처진 시곗바늘을 돌리려 하면
초침보다 날카로운 열기가
손끝을 마구 찔렀다
빨개진 손을 얼른 숨겨보지만
내 안에는 내과가 없다
잠에서 막 깨어났을 때
내 눈꺼풀에는 잠이 늘어져 있다
천장은 꿈속 바다보다 멀다
귓가를 울리는 아득한 뱃고동 소리
머리맡 핸드폰 전원을 끈다
알람이 꺼지고,
녹은 줄 알았던 시계소리가 들려오고,
파란 물결이 흩어져버리고,
흐릿해진 내 손이 보인다
새벽 달빛을 두르고 있는 손
흉터는 아직 등 뒤에 숨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