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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불교
 
 
 
카페 게시글
문화재 탐방, 답사 익산 미륵사터 / 왕궁리 오층석탑 / 부여 궁남지
별꽃 추천 0 조회 183 09.07.06 14:35 댓글 5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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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9.07.06 22:19

    첫댓글 정말 행복하고 유익한 답사였습니다!~금강회원들의 밝은 웃음소리, 제 마음 환해졌습니다!~스님의 맑고 고적한 기운 느껴져..감히 근접할 수 없었지만!~미륵사와 왕궁리 5층 석탑앞에서 이어지는 스님의 가르침!~감동으로 가슴 먹먹했습니다!~역사에 무지하고 게을렀던 자신이 부끄럽기만 했습니다!~아!~귀하신 스님께 감사와 경탄합니다!~스님!~늘 건강하시고..언제 어디에 계셔도 저희들에게 삶의 등불 되실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저희들의 마음의 빚이 너무 무겁지 않게 스님께서 저희들의 마음도 좀 받아주셨으면 합니다~서로 베풀 수 있는 게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주셨으면 합니다!~어리석고 부족하지만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 09.07.07 09:22

    5세기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 정책에 밀려 백제 수도 한성이 함락 당한 후, 웅진-사비 천도로 이어지면서 왕권의 몰락과 귀족의 득세는 심각했다. 사비 천도후 위덕왕에서 혜왕, 법왕, 무왕으로 이어지는 왕권 불안정. 선화공주와의 사랑은..'용의 아들' 무왕이 즉위 초기 사비 귀족 세력 견제와 신라와의 관계 개선 등 정치적 입지 강화 측면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42년 재위기간 동안 무왕은, 왕권 강화와 신라 견제라는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출생지 익산으로의 천도를 통해 백제 부활을 시도했고, 그 지지세력으로써 백제 명문가 사택씨 세력과 손을 잡아, 그 딸을 왕비로 맞이한 것 아닐까. -<한국사전>에서

  • 09.07.06 23:55

    1965년 왕궁리 석탑 보수 과정에서 금제금강경이 나왔는데, 지난 40년 탑과 더불어 통일 신라 것으로 추정되었다가, 최근 금제금강경에 내합의 어란문과 꽃무늬, 글씨체, 글자수가 7세기를 넘지 않는 것으로 판명되며 백제 무왕 초기 것으로, 왕궁리 동쪽 제석정사가 불타면서 그곳의 금제금강경이 왕궁리 석탑에 모셔진 것으로 밝히고 있다. 왕궁리터는 성벽, 담장, 문, 정원, 사찰 등 왕성이 갖추어야 할 요건들을 두루 갖추었고 ,무왕의 익산 천도는 사비 반대 세력에 의해 곧 좌절되고, 의자왕 즉위한 후 왕궁사가 지어졌다가, 통일 신라 왕궁리 5층 석탑이 조성된 것으로 본다. 사비시대 무왕 부부의 묘만 익산에 있다.-<한국사전>

  • 작성자 09.07.07 09:48

    그러니 익산은 이루지 못한 무왕의 슬픈 꿈들이 남아있는 곳이네요. 천년전의 비애가 오늘 아침 빗방울을 타고 가슴 속으로 흘러내립니다.

  • 09.07.09 17:05

    바닥을 모두 드러낸 석탑의 기단은 1400년동안의 무상을 가슴 깊이 안겨 줌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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