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가을 두 번의 금강회 정기답사에 이어 비정기답사로 익산과 부여에 다녀왔다.
스님이 직지사박물관장직을 그만 두고 어딘가로 떠난다는 이야기가 끊임없이 들려와서 한 번이라도 더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님과 우리가 언젠가는 헤어질 그 날을 위해서.
한번은 스님께 물었다.
“스님, 직지사에 계속 계시면 안되나요? 1, 2년 계셨다가 떠나면 원래 스님들이 그렇거니 하고 생각하겠지만, 스님과는 7년동안 만나면서 미운정 고운정 많이 들었어요”
“그러면 영원히 있을 줄 알았어요? 죽을 때는 어떻게 죽을려고 해요? 부처님 말씀이 모든 것이 무상하다고 하잖아요?”
“무상하다는 것은 진리이지만 그래도 참 슬픕니다.”
7월 5일 일요일 아침 9시, 22명의 금강회 회원들은 녹야유치원 25인승 버스를 타고 유치원생같이 맘껏 웃으며 미륵사터에 도착했다. 오전 11시 반이었다. 우리 스님은 석등책을 쓰시기 위해서 군산 발산리 석등을 둘러보시고 11시경 미륵사지에서 우리와 만나기로 했다. 스님은 우리 보다 늦게 12시경 미륵사터 유물관에 들어오셨다.
유물관 옆 미륵사터 안내도가 있는 곳에서 스님 설명을 들었다.
“미륵사터 탑 뒤로 보이는 산이 용화산입니다. 용화산 남쪽의 너른 터에 미륵사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미륵사 창건은 <삼국유사 권2 무왕조>에 잘 나와있습니다.
마를 캐는 서동이 백제 무왕이 되어 신라 신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와 결혼을 합니다.
무왕이 선화공주와 함께 사자사로 가던 도중 큰 못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나 선화공주의 간청으로 못을 메우고 미륵사를 지었다고 합니다.
미륵사는 1980년부터 발굴하고 있습니다. 발굴 결과 미륵사터가 늪지대이며 3개의 금당과 3개의 탑이 있는 삼원일가람의 독특한 구조로 되어있습니다. 이는 미륵부처님이 3회의 설법으로 중생을 구제한다는 삼국유사 내용과 일치합니다.
2009년 1월 14일, 미륵사 서탑에서 사리장엄이 발견되었어요. 사리봉안기에는 무왕의 왕후가 좌평 사택적덕의 딸로 미륵사를 창건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미륵사 탑이 3개인데 중간인 목탑지는 아직 사리장치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왕이 왕비를 몇 명이나 두었는지 알 수 없기에 선화공주와 무왕의 이야기를 허구라고 단정지을 수 없습니다.
저의 관심사는 미륵사 목탑과 금당지 사이 석등에 있습니다. 지금 석등에 대한 글을 쓰고 있으니까요.
동탑은 1993년에 서탑을 보고 복원했습니다. 98억을 들여서 복원했지만 서탑과 상당히 다릅니다. 백제인 고유의 미감을 전혀 느낄 수 없습니다. 모범을 보인 서탑이 있지만 복원에 실패한 것입니다. 미륵사탑은 목탑에서 석탑으로 건너가는 초기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익산 근처에는 황등면 등 화강석 산지가 많습니다. ”
스님께서 설명을 마치자 서탑에서 출토된 사리가 부처님 진짜 사리가 아닌가에 대해서 회원님들간에 설전이 있었다.
스님은 못 들은 척 서탑 쪽으로 이동하셨다.
사리가 진짜인지 가짜인지에 대해서 스님께 직접 물었다. 그러자 스님은 “내가 알 수 있나요?” 하신다.
미륵사터가 늪지였다는 것과 삼원일가람식 구조로 보아 무동과 선화공주의 불멸의 러브스토리도 실화가 아니었을까?
우리 스님도 그렇게 믿고 있는 것 같다.
“선화공주가 맛동을 남몰래 숨겨두고/ 밤마다 안고 논다”
얼마나 낭만적인 사랑 노래인가?
사리장엄구가 출토된 서탑 안으로 들어갔다. 스님의 제안으로 탑의 구조가 잘 보이는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에서 내려다보니 탑의 초석에 정방형의 구조로 큼지막한 돌덩이가 깔려있고 십자로 모양의 길이 보인다. 십자로 정중앙에 유골함같은 심초석이 오뚜마니 올려져있다. 그 곳에서 사리장엄구가 출퇴되었단다.
“서탑 중앙에 심초석을 보세요. 황룡사 9층 목탑지에서도 저런 심초석이 나왔습니다. 이것은 목탑의 구조에서 옵니다. 사방으로 난 십자로 같은 돌을 따라가면 4개의 문이 달렸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사방 3칸씩의 구조였지요. 이것도 목탑의 구조입니다.
초석 바깥에 3개의 석인상은 돌장승의 원형이었다고 추정합니다. 이까지 해체한 것도 10여년이 걸렸습니다. 긴 안목으로 보고 신중해야합니다. 더 이상의 해체는 기단의 안정을 해칠 수도 있습니다. 이제 복원한다고 하면 동탑이 완벽하게 복원되었으니 서탑은 6층 정도로 복원하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서탑 1층으로 내려오면서 안내도를 보고 설명하시는 스님께 평소에 궁금한 우동, 전각, 두공 양식을 물어보았다.
“낙수면과 낙수면이 만나는 귀마루를 우동이라고 합니다. 우리 말이 이렇게 좋은데 우동이 뭡니까? 귀마루 바로 밑의 수직 부분이 전각이고 두공은 공포를 말합니다.”
“우리가 먹는 우동이 바로 석탑의 우동이란 명칭에서 유래된 것은 아닐까요? 석탑의 우동도 굵잖아요.”라고 내가 말했다.
나중에 조재숙선생님은 왕궁리 오층석탑 앞에서 “미륵사탑 지붕돌 귀마루가 우동이라면 석가탑의 지붕돌 귀마루는 국수겠네”라고 하신다.
중앙에 목탑지와 금당지 사이에 있는 석등받침돌과 지붕돌을 보았다.
“우리의 전통 가람은 일직선 상에 중문과 탑과 석등과 금당과 강당이 놓인 것입니다. 요즘 법당 앞에 탑을 두 개 씩 놓는 것은 조선시대까지는 없었어요, 이것은 무식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 석등 받침돌 위에 연꽃잎을 보셔요. 정말 기가 막힙니다. 얇게 조각한 것이 정말 연꽃잎을 닮았습니다. 이런 우아한 연꽃잎은 신라의 섬세하고 화려한 연꽃잎과 다릅니다. 이것이 발전해서 부여박물관 앞에 놓인 가탑리 석등 받침돌 연꽃잎이 나온겁니다. 받침돌 앞에 동그란 구멍은 용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만 실상사나 금강산 묘길상 앞에 놓인 석등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아닐까 추정합니다. ”
바깥으로 나가서 석물들을 전시한 곳으로 가서 둘러보고 유물관 안으로 들어갔다.
금동사리외호와 금제사리내호가 천년의 세월을 뚫고 휘황하게 빛을 발한다. 사진에서 보고 상상한 것 보다 훨씬 작다.
백제인의 미감이 유감없이 드러나는 우아한 당초무늬, 연꽃잎, 연주문이 빼곡하게 조각되었다.
이런 우아한 예술의 나라 백제가 나당연합군의 거센 힘 앞에 멸망하다니...
버스 기사가 예약한 식당으로 가서 점심밥을 먹고 왕궁리 오층석탑을 보러 갔다.
이곳이 옛 왕궁터라고 하는데 그 나라가 마한인지, 백제인지, 후백제인지 알 수 없다.
패자의 기록은 철처히 파괴되고 패자는 자신의 말을 남길 수 없다. 힘이 없으면 정의도 없으니까.
왕궁리 오층석탑은 전형적인 백제탑과 닮았다.
정림사터탑보다는 안정감이 있고, 무량사탑보다는 늘씬하다. 석탑 좌우에는 벚나무와 배롱나무가 가득하다.
여기 수많은 배롱나무는 한 나무도 붉은 꽃을 세상에 내놓지 않았다. 배롱나무는 아직도 멸망의 한으로 꽃이 피는 줄도 모르고 통곡하고 있는지 모른다.
스님은 왕궁리 오층석탑 앞에서 작년 가을 정림사터탑에서 설명하셨던 백제탑의 특징을 10여가지를 설명하셨다.
더없이 명쾌하다.
유물관을 둘러보고 스님은 직지사로 떠나셨다.
스님 얼굴을 보니 아주 힘들어 보였다. 아침 일찍 죽을 드시고 군산까지 가서는 일도 다 매듭짓지 못하고 허겁지겁 미륵사터로 오셨다. 그리고 무더운 날씨에 설명하시고 너무 늦게 점심을 드셨다. 스님 자동차는 에어컨이 고장났고, 시동을 거는데 아주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자동차는 거의 폐차 직전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런 무더운 여름날 직지사까지 무사히 가실 수 있을까 가슴이 조마조마하면서 목이 메인다.
권정희 선생님은 못내 안타까와 하면서, “선생님, 저 귀하신 분이 탈이 나면 어쩌지요? 스님이 너무 힘들어 보여서 가방이라도 들어드리고 싶은데 용기가 없어서 말도 못했어요.”
우린 부여 궁남지로 가서 연못에 가득히 핀 연꽃을 감상했다.
뜨거운 오후라서 연꽃은 지쳤고 연꽃잎이 오무려져 있었다. 마치 우리 스님처럼.
연꽃잎을 자세히 보니 미륵사터 석등받침돌 연꽃잎처럼 중앙 부분이 볼록이 솟았다.
문득 나태주의 <풀꽃>이란 시가 생각났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예쁘다
너도 그렇다
< 미륵사터 당간지주와 석물들과 복원한 동석탑 >
< 사리장엄이 출토된 서석탑 초석 >
< 미륵사터 서석탑 석인상 >
< 미륵사터 중금당 앞 석등받침돌 >
< 2008 가을 답사 부여박물관 앞 가탑리 석등 받침돌 >
< 왕궁리 오층석탑 >
< 무왕과 선화공주가 놀았다던 부여 궁남지 연꽃 >
첫댓글 정말 행복하고 유익한 답사였습니다!~금강회원들의 밝은 웃음소리, 제 마음 환해졌습니다!~스님의 맑고 고적한 기운 느껴져..감히 근접할 수 없었지만!~미륵사와 왕궁리 5층 석탑앞에서 이어지는 스님의 가르침!~감동으로 가슴 먹먹했습니다!~역사에 무지하고 게을렀던 자신이 부끄럽기만 했습니다!~아!~귀하신 스님께 감사와 경탄합니다!~스님!~늘 건강하시고..언제 어디에 계셔도 저희들에게 삶의 등불 되실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저희들의 마음의 빚이 너무 무겁지 않게 스님께서 저희들의 마음도 좀 받아주셨으면 합니다~서로 베풀 수 있는 게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주셨으면 합니다!~어리석고 부족하지만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5세기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 정책에 밀려 백제 수도 한성이 함락 당한 후, 웅진-사비 천도로 이어지면서 왕권의 몰락과 귀족의 득세는 심각했다. 사비 천도후 위덕왕에서 혜왕, 법왕, 무왕으로 이어지는 왕권 불안정. 선화공주와의 사랑은..'용의 아들' 무왕이 즉위 초기 사비 귀족 세력 견제와 신라와의 관계 개선 등 정치적 입지 강화 측면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42년 재위기간 동안 무왕은, 왕권 강화와 신라 견제라는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출생지 익산으로의 천도를 통해 백제 부활을 시도했고, 그 지지세력으로써 백제 명문가 사택씨 세력과 손을 잡아, 그 딸을 왕비로 맞이한 것 아닐까. -<한국사전>에서
1965년 왕궁리 석탑 보수 과정에서 금제금강경이 나왔는데, 지난 40년 탑과 더불어 통일 신라 것으로 추정되었다가, 최근 금제금강경에 내합의 어란문과 꽃무늬, 글씨체, 글자수가 7세기를 넘지 않는 것으로 판명되며 백제 무왕 초기 것으로, 왕궁리 동쪽 제석정사가 불타면서 그곳의 금제금강경이 왕궁리 석탑에 모셔진 것으로 밝히고 있다. 왕궁리터는 성벽, 담장, 문, 정원, 사찰 등 왕성이 갖추어야 할 요건들을 두루 갖추었고 ,무왕의 익산 천도는 사비 반대 세력에 의해 곧 좌절되고, 의자왕 즉위한 후 왕궁사가 지어졌다가, 통일 신라 왕궁리 5층 석탑이 조성된 것으로 본다. 사비시대 무왕 부부의 묘만 익산에 있다.-<한국사전>
그러니 익산은 이루지 못한 무왕의 슬픈 꿈들이 남아있는 곳이네요. 천년전의 비애가 오늘 아침 빗방울을 타고 가슴 속으로 흘러내립니다.
바닥을 모두 드러낸 석탑의 기단은 1400년동안의 무상을 가슴 깊이 안겨 줌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