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새끼손가락
최 장 순
다듬잇돌을 집에 들여놓았다. 여름내 인사동을 드나들며 눈여겨 보아둔 것을 한겨울이 되어서야 실어오게 된 것이다. 두 자쯤 되는 길이에 높이는 한 뼘 남짓. 어릴 적 툇마루에서 어머니의 시름과 울분을 묵묵히 받아주던 그 다듬잇돌과 닮았었다. 보고 있으면 태중에서부터 익히 들었을 것이 틀림없는 어머니의 다듬이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또닥 또닥 또다닥, 또드락 또드락 또드락……"
어머니의 한 옥타브 높아진 숨결과 함께 서러움을 두드려 풀죽게 하고 고달픔으로 구겨진 삶을 반듯하게 펴시던 그 소리. 낮을 분주하게 누비던 천근의 무거운 다리를 접고 두 팔을 걷어 부친 채, 방망이로 지나온 하루를 두들겨대면 다듬이소리는 자칫 적막해지기 쉬운 밤기운까지 싹 몰아냈다. 어머니는 그렇게 무시로 치마저고리며 이불 호청을 흠씬 두들겨 폈다.
내겐 다듬잇돌에 얽힌 남다른 사연이 있다. 육이오 때 태어난 내가 생후 팔 개월쯤이었을 어느 날, 어머니는 내게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사랑의 증표를 만들어 주셨다.
그날 어머니는 희끔한 등잔불 아래서 다듬이질을 하고 계셨다. 때마침 나는 어머니의 젖을 찾아 엉금엉금 기어가다 그만 다듬잇돌에 손을 얹었고, 그 순간 어머니의 방망이는 내 손가락을 내려쳤다. 내 왼쪽 새끼손가락 끝마디는 이지러졌고, 피가 솟구쳐 올랐으리라.
난리 통이라 엄마의 젖은 늘 부족했다. 그런 까닭을 알 리 없는 나는 계속 품속을 파고들며 보챘을 것이다. 같이 놀아주던 누님이 잠간 한눈판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지금도 그 일로 누님은 내게 미안해하신다.
짧아진 새끼손가락은 유심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잘 모를 수도 있었지만 어렸을 때는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남들 앞에 내 보이길 싫어했다. 그래서 웬만하면 왼손을 펴지 않고 주먹을 꼭 말아 쥐는 버릇이 생겼다. 지금도 남달리 왼손을 잘 못쓰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아픈 증표인 새끼손가락. 그러나 그것 때문에 이루지 못한 일은 없다. 엄격한 사관학교의 신체검사도 이상 없이 통과했고, 오랜 군 생활에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도 어머니는 나를 볼 때마다 말없이 내 손을 쓰다듬곤 하신다. 나는 철이 든 이후로는 내 새끼손가락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오히려 어머니가 아픔의 흔적으로 남겨준 내 육신의 한 자락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가끔 군에서 승진을 했을 때나 상을 탔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드리면 어머니는 '잘 컸지 잘 컸어.' 하며 그저 혼잣말을 되뇌시곤 하셨다.
내게도 자식이 다쳤던 아픔이 있다. 아들이 유치원생이었을 무렵 아파트 옥상에서 놀던 이웃집 아이가 지나가던 아들을 불러 세웠고, 무심히 올려다보는 순간 그 아이가 던진 돌은 아들의 이마를 명중했다. 온통 피투성이가 된 아들이 놀라서 집으로 들어오자 아내는 부리나케 내게 알렸다.
"여보, 승원이가, 승원이가……"
아내는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뭔가 큰 일이 일어났음을 알아차렸고 서둘러 집에 당도해 상황을 직감했다.
그 당시 아들의 흉터가 얼마나 커 보였던지 당장 성형수술이라도 해주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어른이 된 지금은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말끔해졌고 나 또한 그 일을 까맣게 잊은 채 살았다. 다 큰 아들의 이마를 짚고 안쓰러워하거나 쓰다듬어 본 적도 없다. 하지만 금년으로 아흔아홉이 되시는 내 어머니는 지금껏 그 때의 아픔을 잊지 못하시고 뵐 때마다 내 손을 들여다보신다.
손을 내려다보며 어머니를 생각한다. 나는 결혼반지도, 사관학교 졸업반지도, 심지어 자식들이 우리부부에게 선물로 해준 커플링도 내 손에서 다 벗어놓고 지낸다. 그러나 어머니의 아픈 상처로 새겨진 새끼손가락의 흔적만큼은 언제나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첫댓글 얼마나 아프셨을까, 어머님의 아픈 새끼손가락이네요.. 최장순 선생님의 등단을합니다..^^
잊지 못할 사랑의 흔적입니다. 고맙습니다.
예사로운 글이 아니다 했더니, 이미 수필집도 내셨네요. 에세이스트에 등단하신 경력도 있구요. 한 식구가 된 것을 환영합니다.
새끼손가락의 아픔이 클 것도 같은데 인사동에서 다듬잇돌을 사오시고, 99세 노모님의 마음도 헤아리시고...따뜻한 글에 감동이 큽니다. 오랜만에 다듬이 소리를 들어봤습니다. 팔 개월짜리 사내아이의 자지러지는 울음 소리고 들었구요.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변하지않는 사랑의 증표로 남아있습니다.
감동했습니다. 수필은 이래서 좋은가봅니다. 아기의 손가락을 다치게 하신 어머님 마음, 덩달아 마음이 찡합니다.
잘 쓰신 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격려에 감사드립니다.
그 짧았던 아픔이 피붙이들간의 찐한 연민과 사랑을 길게 길게 이어주는 듯해 외려 부럽다는 마음을 갖게도 합니다. 좋은 글감하고 갑니다. 감사
고맙습니다. 따뜻한 격려...
참으로 감성적인 글입니다. 그 흔적이 있기에 어머니께서 떠나셔도 외로움이 덜 할 듯 싶습니다.
에세이문학 식구가 되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감사합니다. 말석에서나마 식구 노릇 잘 하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지도를 부탁드립니다.
서러움을 두드려 풀죽게 하고 고달픔으로 구겨진 삶을 반듯하게 펴시다 보면 상념은 끝이 없으셨을 터
금쪽같은 아들의 새끼손가락이 거기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하셨다가 얼마나 놀라고 마음이 아프셨을까요.
등단을 축하드립니다.
격려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에세이문학의 따뜻한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지금도 아들의 그 새끼 손가락을 들여다 보시는 어머니 마음을 생각합니다.
에세이 식구가 된 것 축하합니다.
고맙습니다. 지울 수 없는 사랑의 증표.
정회원의 자격을 받아 이제사 들렀습니다.
저처럼 어머니를 생각하는 글이라서 마음이 많이 아프답니다.
저와 함께 '여름호'에 등단을 하게되어 반갑습니다.
등단 동기님~~축하합니다.
이미 등단하셨던 최장순 선생님, 합평회에서 먼저 아는척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글을 일부러 찾아 읽어주셨는데 저는 이제야 <<에세이스트>>를 다 뒤져 <연 잎에 앉은 청개구리>가 한 편 있어 읽었습니다. 정확한 문장 구사력, 침착한 글의 호흡이 느껴집니다. 등단작도 덕분에 다시 한 번 읽었습니다. 저는 자꾸 부끄러워지네요. 황금련 선생님을 비롯해 훌륭하신 동기생이 계셔서 든든합니다
멋진 동기애를! 좋은 인연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