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허(超虛)의 시문학과 삶의 편린(片鱗)
-겨레의 혼 ‘호수와 파초의 김동명 시인’
엄창섭(관동대명예교수, 국제펜클럽한국본부고문)
1. 서론 : 문제 제기
지정학적으로 경주와 함께 천년의 문향文鄕인 강릉은, 역사상 모자(율곡과 사임당)가 화폐의 인물로 선정되어 세계인의 주목을 받을 뿐더러, 자연풍광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공간으로 「蘂城詩稿」(1917)의 ‘명주에는 시인이 많다’라는 기술처럼 근자에는 우리현대문학사에서 일제강점기의 심연수(1918-1945) 시인이 새롭게 조명을 받는 현상('항일 민족시인 7위 추모 분향단', 충남 보령시 주산면 삼곡리 명덕산(이양우.《문예춘추》발행인)-윤동주, 이육사, 한용운, 이상화, 김영랑, 오일도, 심연수)에서, ‘호수와 파초의 시인’으로 삶을 마감한 김동명金東鳴(1900-1968)의 출생지이다. 광복 이후, 널리 애송되는 <파초>와 <내 마음>의 시인 초허는, 순수문학종합잡지인『개벽』(1923년 10월)에 <당신이 만약 내게 문을 열어 주시면>을 발표하면서 데뷔를 했다. 6권의 시집을 간행하였으나 인위적인 도그마에 구속되기를 원치 않는 그는, 한 시대의 진정한 종교인으로, 망국의 통한을 시적으로 형상화한 시인, 교육자와 정객으로서 다양한 삶의 거적을 남긴 존재이다. 초허에 관한 지속적인 논의는 개념도 어설픈 세계화의 조류에 떠밀린 ‘영어몰입교육정책’의 시간대에 더없이 소중한 인자因子로서의 타당성을 지닌다.
그 같은 까닭은 “조국을 언제 떠났노/파초의 꿈은 가련하다”로 시작되는 <芭蕉>를 그 자신이 민족과 조국(자연)을 애상적 음조로 읊었으며, 조선어 말살사건의 과도기에서도 우리의 언어로 <술 노래>, <狂人>(1942)의 시작詩作에 열중한 지사적 인물로 현실의 통분을 기독교의 박애정신으로 극복한 연계성을 유지하였기 때문이다. 한국현대문학사에서 2인문단시대로부터 새로운 문학 활동이 전개된 1920년대는, 『泰西文藝新報』(1918) 창간을 기점으로 서구문학이 본격적으로 태동한 시기로 『創造』(1919)를 비롯한 『廢墟』,『薔薇村』 등과 『朝鮮文壇』,『文藝公論』 등의 순수문학지와 『開闢』(1920) 등 일반 종합지 성격의 잡지들이 출간되었다. 시문학적으로 이 시기는 낭만주의 색채가 지배적이어서, 1925년 조선예술가동맹의 결성으로 카프문학의 활동을 배제할 수는 없으나, 유미적이고 퇴폐적인 경향의 감상주의가 지배적인 양상이었다.
초허의 애상적이고도 담백한 시적 정조와 간결한 언어로 직조된 작품들은 우리 현대시사를 장식하고 있다. 그의 분망한 삶은 부당한 권력에 의해 인권의 자유가 구속받던 시대에 불의에 맞서 자신의 집념과 신앙을 축으로 고뇌한 시간대였다. 그의 시편들이 독자들의 관심 대상에서 다소 멀어진 까닭은, 그간의 평자들이 자연적·목가적·전원적 시로 평이하게 해석하고 일축함으로써 논의의 전개를 축소한 것과 맞물린 탓이다. 여기서 그의 시적 형상화와 산문에서 확인되는 종교적 특성에 관해 논의하기로 한다.
2. 초허 시문학의 형상화와 내면인식
한 시인의 생애와 사회적 환경, 작품 및 정신 등에 관하여 연구하는 것은 유의미한 정신작업으로 삶의 고통에 동참하는 생산적인 행위이다. 시적 형상화는 개인의 생활과 사상·감정의 생산물이기에, 한 편의 시를 이해한다는 것은 화자(persona)의 인간성과 정신세계를 아우르는 계기에 해당한다. 편의상 『金東鳴文學硏究』에서 초허의 시력詩歷을 각각 3기로 구분지어, 초기는 나의 거문고(1923∼1930)시대로, 인생을 고민하는 허무적 특성을 지닌 세기말적인 감상주의와 퇴폐적인 경향으로 정리하였다. 보들레르의 '악의 꽃'에 대한 헌시인 <당신이 만약 내게 門을 열어 주신다면>과 <애닯은 기억>, <내 거문고>, <기원> 등이 이 시기의 시편이다. 중기는 파초(1936∼1938)시대로, 절망적인 시대 상황과 인생의 무상함을 극복하려는 인생관으로 일제탄압을 피해 농촌에 거주하며 민족적 염원을 서정화한 시간대로, <파초>, <내 마음은>, <손님>, <밤>, <민주주의> 등이 쓰여 졌다. 말기는 삼팔선, 진주만, 목격자(1947~1957)시대로, 우울한 이야기로서의 민족의 참상, 태평양전쟁의 상황 및 일제의 암흑상, 그리고 풍물적인 사회상이 시적 형상화를 걸쳐 감상적인 낭만이 주조를 이룬다. 이 같은 정황에서도 ‘운명의 아들, 카인의 후예後裔’를 자처한 초허의 시적 골격은 ‘삶이란 한낱 환상과 가식에 지나지 않으며 죽음 속에서 또 다른 생명이 비롯된다.’는 기독교적 구원론과 접목되고 있다.
그대는 차디찬 의지의 날개로/끝없는 고독의 위를 나르는/애달픈 마음/또한 그리고 그리다 가 죽는/죽었다가 다시 살아 또다시 죽는/가여운 넋은 아닐까//
-<水仙花>에서
초허는 일제강점기의 유일한 탈출구로 문학의 길을 택한다. 그에게 있어 고독이란, 안수길의 지적처럼 ‘남달리 조국과 민족을 사랑한 열정의 발로’이기에 <수선화>는 단순한 연애적 감상이나 민족의 정한을 읊은 서정시로 단정 지을 수 없다. 이 시편은 높은 정신적 차원에서 민족과 조국 혼을 시적대상으로 형상화 절규絶叫로, 그것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기독교의 부활론을 축으로 한 불멸의 영혼으로 점철된다. 그 자신이 몸담았던 생애를 다양하게 활동하면서도 문단이라는 울타리 속에 머물기를 원치 않았기에, ‘문단 밖의 낭인浪人으로’ 소외되었고, 또 그 자신이 ‘카인의 말예末裔임’을 자처하였듯 우리 문단에서 심층적으로 다루어질 수 없었다. 특히 「芭蕉」(신성각, 1938)에 수록된 다수의 시편들은, 일제의 탄압이 점차 극렬하여 민족적이고 반일적인 사상이 일체 허용되지 않았던 1930년대의 정신적 산물이다. 이 무렵의 우리 문단은 신간회 해산(1931년), KAPF의 검거 및 해산(1934년), 일어사용 강제령(1937년), 內鮮동조론(1938년)이 공습경보 아래서 현실도피적인 행태를 취하였다.
이 같은 사회현상에서 비록 이 무렵의 시편에 저항의식이 강하게 수용되지는 않았지만, 일제의 침략에 동조하지 않으려는 의지는 이 땅의 어느 문인보다 확고하였다.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신학과와 니혼대학(日本大學) 철학과에서 수학한 신분으로, 창씨개명과 일어로의 창작을 거부한 초허의 시 의식에 대한 조명은 현대문학사를 정리하는 계기가 될 뿐 아니라, 순박한 강원인의 자긍심을 일깨워주는 작업에 해당한다. 한편, 최초의 정치평론가이며 교육자로서 망국의 울분을 토로했던 투철한 민족의식은 <파초 해제>, <종으로 마다시면>을 통해 확인된다. 특히 1934~38년에는 그 자신이 지역유지들에 의해 건립된 흥남 서호진의 동광학원 원장으로 민족혼을 일깨우며, 망국의 통한을 순수서정과 유유자적의 정조, 그리고 고독한 심경의 시적 형상화로 일관하였다.『朝光』(1936년 1월호)에 발표된 <芭蕉>는, 조국을 상실한 화자의 처지를 남국을 떠난 ‘파초’에 감정이입 수법으로 동일화를 시도해 상징·우의·의지·전원적인 시격이 시각적 심상을 매개로 하여 빛나고 있다. 우리는 시인이 자기의 감정적 상태 혹은 활동을 지각의 대상인 파초에 투사投射하는, 시적수법을 통해 동병상련을 체득하고 있음도 주목하여야 한다. 시작의 배경이 된 공간은 그 자신이 함경남도 서호진西湖津의 처가에 우거遇居하며 일제의 탄압을 피하던 때였다. 초허는 등단 직후부터 아름답고 참신한 메타로 단조로운 문단에서 명성을 떨쳤으나, 동인 중심의 문단에서 동인활동을 하지 않은 까닭에 평가가 괄목하게 이행되지 않았다. 일부의 평자에 의해 그의 시 전반에 대한 평가마저 목가적 낭만적으로 고정되어 그 한계성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앞서 <수선화>를 가곡으로 작곡한 김동진은, 스승인 초허의 인간적인 면에 매료되었음을 술회하였다. 이것은 퇴폐적 시를 남긴 전원파적인 낭만시인으로 국한 지은 그간의 평가와는 달리 긍정적으로 조국을 상실한 예술가의 고뇌를 민족적인 서정과 미의식으로 표출한 예이다. 일제강점기 망국의 통분에 절규하는 뜨거운 피의 소유자라도 탈출할 통로가 없었기에, 의지가 나약한 지식인에게 치욕과 좌절에서 오는 자학은 일차적 선택으로 치부된다.
근간에 『親日人名事典』(2008)이 간행되어 친일개념과 한계성이 명확하지 못해 다소의 혼란을 증폭시키고 있는 사회현상에 미루어, 이 땅의 문인들에게 ‘친일을 택하여 황국신민을 자처하거나, 일제에 저항하는 문학을 양산하거나, 또는 현실도피의 방안으로서의 자연귀의-정당화 될 수 없는 현실도피’를 택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 당시의 상황이었기에 우리가 임의의 잣대나 주관적 판단으로 질책할 수는 없다. 당시의 전원파나 『文章』(1939년) 출신인 청록파 시인들의 현실도피, 그리고 어떤 면에서 일제강점기 사실주의의 흐름도 이 같은 변형으로 해석되어진다.
자, 그러면 여보게, 잠은 내일 낮 나무 그늘로 미루고 이 밤은 노래로 새이세 그려. 내 비록 서투르나마 그대의 곡조에 내 악기를 맞춰보리. 그리고 날이 새이면 나는 결코 그 대의 길을 더디게 하지는 않으려네. 허나 그대가 떠나기가 바쁘게 나는 다시 돌아오는 그대의 말방울소리를 기다릴 터이니
-<손님> 중에서
여기서 김소월에게 유일한 단편 「함박꽃」이 있듯이, 초허의 수필집인 『世代의 揷話』(1959)에 수록된 「越南記」는 『自由文學』목차에 ‘創作小說’로 명기되어 4회로 연재된 1인칭소설임은 필히 유념하여야 한다. 일단, 시인이며 교육자, 종교인, 정객 등으로 다양한 삶의 거적을 남긴 그의 향리, 국도 변에는 “떠나기가 바쁘게 다시 돌아오는” 주인을 기다리는 시비가 자리해 있다. 시비에 각인된 일부를 옮겨 보기로 한다.
한 시대의 준엄한 筆誅의 글이며 증언이기도 한 님의 정치평론과 또한 정치활동까지도 필 경 궁핍한 땅의 한 시인이 그리는 祖國의 모습이 가져온 애국의 시작이며 창조의 詩業이었던 것이다.
자신이 정치를 ‘또 다른 시’로 인식한 독특한 시 의식은 “강릉군수가 되라.”는 모친의 유언과 망국의 한恨에 절여 살아온 초허의 또 다른 열정의 발현을 해석할 수 있다. 유학시절부터 정치에 대한 꿈을 키워 '정치는 제 2의 시'라고 역설한 그는 시화집 『나는 증언한다』(新雅社, 1964)에서 <시와 정치, 그리고 현실>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이 글은 내가 조국에 바치는 나의 시요. 또 이 책은 내가 겨레에게 보내는 나의 제7 시집인 것이다.…(중략) 내가 만일 내 시에 좀더 충실할 수 있었다면, 나는 벌써 칼을 들고 나섰을지도 모른다.
‘계속 펜을 들고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칼을 들 것인가’를 수 없이 반복하며 고민한 흔적이 역력한 대목을 그의 저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의도적으로 김동명을 민족정신을 예술적 차원으로 승화시킨 만해萬海와 같이 민족의 뼈아픈 현실을 정화시킨 종교 시인으로 기술하지 않더라도, 기독교문학사에서 전혀 논의되지 않는 현상은 안타깝다. 특징적으로 초허의 내면인식에 일관되게 깔려 있는 '죽음 의식', 저항시를 쓰면서 함께 한 다수의 산문은 심도 있게 검색되어야 한다. 서울 망우리 가족 묘소에서 백 년 만에 선영에 묻힌 그의 <종으로도 마다시며>에서 자리한 치열한 민족애가 불멸의 시혼으로 불 타 오르듯, 우리가 더 이상의 머뭇거림 없이 ‘피리를 불어주어야 할 시간대임’을 애써 밝히고 싶다. 한국현대시사에서 ‘전원시인, 목가적 시인’으로 평가 절하된 초허에게 자연은, 상실한 조국의 산하이며 삶의 이상향으로 결부된다. 시선집『내 마음』에서 다양하게 확인되는 ‘흐름이며, 생명의 원천, 그리고 變轉’의 속성을 지닌 물의 상징성은 바다와 같은 어디까지나 ‘생명의 本源이며 母性’이다.
특히 시사적 측면에서 초기에 전원을 구가한 시에서부터 말기의 사회적 경향의 시까지 다양한 시세계를 구축한 초허는, 물을 질료로 하여 비교적 아름다운 서정적 미감으로 그 이미지를 형상화하였으나, 감미로운 시 속에서 또 다른 세계를 동경하고 추구한 까닭에 광복 이후의 사회현상에 민감하게 조응된 그의 시편은 서정성과 시적 긴장감에 다소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그 와중에서 정치평론의 지평을 열면서 지적 정객政客으로 변모하여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투신하며, 시대의 비통함을 신앙으로 감내한 예언자적 시인이다. 그는 신사참배의 조짐이 확장되는 시기에 기독교 교세의 확장을 위해 명분상의 분파 조성보다 화합의 역동성을 시사示唆하며 체계적인 「장감 양교파 합동가부문제長監兩敎派合同可否問題」(眞生, 54호, 1929. 6.)를 발표하였다. 이 논문은 시대정황에 비춰 교파분리의 부당함을 통해 기독교적 학문성의 깊이로 점철된 예이다. 참고로 『眞生』은 1925년에 창간된 기독교 월간지로 발행인은 앤더슨(W.J. Anderson)이다.
초허에게 ‘물의 이미지’는 그리움의 정조情調 즉, 시적 대상과의 합일을 지향하는 열망으로 해석되어지며, 그의 산문(수필, 수기, 정치평론 포함)을 고찰하면 신학을 전공한 연유도 있지만 기독교적 경향이 강하다. 정치평론집 『나는 證言한다』(新雅社, 1964)의 후기에서 ‘나의 제7시집’으로 기술하였듯, 충실한 시 작업을 위한 통로로 의관衣冠, 즉 형식을 빌려 쓴 흔적이 파악된다. <孤獨>에서는 ‘무릇 인간으로서는 신을 떠나서 살 수 없는 것도 그 타고난 운명인 것이다. <自畵像>(요한12:24, 창세3:19)’, “「여호와」도 일찍이 소돔城에 유황불을 나리시지 않았든가?(술 노래 解題,/창세19:24)”, <三樂論>(창세2:22, 눅2:7~10, 창세20:3~17), <세대의 揷繪>(마 26:75, 마27:3, 마6:33, 마27:32~33, 마7:6), <敵과 同志>(마10:35~37), <第二代國會行狀記>(창세19:24, 창세18:32), <愛國者냐 反逆者냐>(마7:16~18), <歷史는 보고 갔다>(마11:3), <民主黨에 바람>(요8:7, 마5:39), <批判精神의 昻揚을 爲하여>(마5:13), <神의 誕生>(창세1:27, 마2:11), <民族主義와 民主主義>(마9:17), <時局은 重大하다>(마4:4) 등에서 그 자신은 신약성서를 자주 인용하였고, 신약의 4복음서에서 “하나님의 膳物로 약속된 王國”을 예언한 마태복음을 즐겨 인용하였다. 특히 수필의 본말 중 ‘바벨塔, 나사렛, 요단江, 요한, 牧師, 예배당, 강단, 이스터의 季節’ 등 종교적 색조를 노출하고 있으며, 설교 투의 가르침, 어법의 특이성은 초허의 문학을 다양하게 모색하는 키 워드에 해당한다.
3. 결론 -남는 문제
지금까지 초허에 대해서는 비교적 인상 비평적으로 다루어진 점은 아쉬움이 남는다. 그간에 기독교계의 무관심으로 그의 실체가 일체 논의하지 않은 현상은 안타깝다. 그의 시 해석에 있어 ‘물의 시적형상화’는 상실된 조국의 그리움으로, 유년시절 그 자신이 고향을 등진 유랑과도 접맥된다. 그 자신이 시의 소재로 다룬 ‘돌·물’ 같은 자연의 기본적인 물상은 항구적이지만, 인간의 의식과 존재는 어디까지나 가변적이고 일시적이다.
그 가운데서도 물의 속성, 이것은 물의 美感을 형성한다. 물의 예술적 미감을 기초로 하여 종교적 神秘性이나 도덕적 교훈성이 증명된다.
일반적으로 물은 인류학이나 潛在心理學에서 생명의 원천, 久遠한 생명의 母胎를 象徵한다.
종교적 재생의 한 과정으로서 국문학에서 죽음에의 유혹으로 표현되는 물은, 상상력의 원천이나 시적 상상력을 통한 다양한 이미지의 확장이다. 초허의 시편에서 변형의 표징인 물의 이미지는 힘의 집합으로 교감의 공간이거나 시간의 매체로 사용된다. “하하하. 그러면 그대는 황혼과 함께 영원히 내 것이 된답니다 그려.(황혼의 속삭임)”에서 황혼이 자리한 공간에 생동감과 낭만적인 전원의 모습이 감지되듯 황혼의 에로틱한 낭만성은 사랑의 비극적인 이별로 귀결된다. 초허는 1923년 3월에 도일하여 일본의 청산학원 신학과에 입학하여 1928년 졸업하였으나 영혼의 자유로움을 구가한 까닭에 목회를 하지는 않았다. 여기서 청산학원 후배인 백석과 미션스쿨인 영생학교에 재직하며, 교지(영생)를 편집한 것은 기억에 담아 둘 일이다.
1948년 5월부터 1960년 6월까지 기독교학원인 이화여자대학의 교수로 재직한 것도 고려할 점이다. 그는 도일하기 전, 서호에 체류할 때도 매달 한번 꼴로 교회에서 설교를 하였다. 또한 파사현정破邪顯正의 필봉을 휘두르며 역사의 증인으로 치열하게 살아온 초허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8:3)”라는 성서의 말씀을 좌우명으로 삼은 행적을 미루어 유추할 때, 자유분방한 종교 시인이었음은 간과치 말아야 할 것이다. 1947년 4월 김재준 목사의 사택에 기거하며 한국신학대학 교수로도 재임하였다. 초허의 시편 “아아, 幸福스런 꽃이여!/ 「그리스도」도/하마터면 너 때문에/詩人이 될뻔 하셨다./아아, 榮光스런 꽃이여!(白合花)”를 비롯하여 <기원>, <수난>, <애사>, <명상의 노래>, <성모 마리아의 초상화 앞에서> 등은 물론이거니와 『동아일보』에 독제정권의 부당성을 강도 높게 제기한 논설을 묶어 간행한 정치평론집 『나는 증언한다』는, 정권의 부당함에 항거하며 예리한 필봉으로 대처하였던 그의 지사적 행적이 기독신앙과 접목되어 있음은 내면의식의 특이성을 고찰하는 요인에 해당한다. 여기서 한국현대사에 다양한 족적을 남긴 그의 문학관은 명상적·사색적 태도로서 비유적 이미지와 회화적 기법으로 즉물적 현상을 시적 형상화하를 기했을 뿐더러, 일제강점기엔 상징적 서정시를 발표한 저항시인으로 민족적 비애를 절창하며 교육계에 투신하였고, 공산치하에서는 압정을 배격한 점은 비중 있게 논의될 항목이다.
특히 자유당과 군사독재정권 당시는 민주수호의 지성으로서 진실과 정의를 위해 주저함 없는 예리한 필봉의 소유자로 정치평론의 지평을 열었다. 이 점은, 김용호에게 답한 <恥辱의 辯>에서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독재악의 퇴치를 생애의 남은 과업으로 생각한다.’에서 명증된다. 아울러 종교 시인으로서 작품 속에 기독교의 부활을 축으로 한 생명의식을 긍정적으로 수용한 사실이다. 그 자신이 ‘個我와 절대자와의 합일, 그리고 죽음을 완전한 자유를 누리는 성취의 과정으로 인식하면서 영원한 해방을 허락한 신의 은총임’을 수긍한 점은 심층적으로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모쪼록 강원도의 <얼 선양사업>의 일환으로 초허의 생가 터에 시비와 도비가 투자되어 생가복원과 자료관 설치사업이 마무리된 것은 다행스럽다. 차지에 문화의 지역구심주의라는 시각에서 지역민의 의식의 결집은 물론, 지역문인의 시대적 소임을 수행할 강한 의지의 결단이 요청된다.
첫댓글 초허(超虛)의 시문학과 삶의 편린(片鱗)
-겨레의 혼 ‘호수와 파초의 김동명 시인’ 박사님의 글속에서 옥을 봅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