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낮은 자들에게 가장 낮은 자세로, 작은손길 무주상보시 13년
살아 오면서 남을 도우며 산적이 별로 없습니다. 가족을 부양하고 세금을 잘 내고 법과 질서를 잘 지키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오로지 자신과 가족 밖에 모르는 삶이라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기적’ 삶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이타적’ 삶을 살아 가는 사람들도 많다는 사실입니다. 자신과 자신의 가족뿐만 주변도 되돌아 볼 줄 아는 삶입니다. 이 세상에 가장 숭고한 삶을 살아 가는 자원봉사자들의 삶 입니디.
회향의 날에
2017년 3월 5일 일요일은 봉사단체 ‘작은손길’에서 회향(廻向)하는 날입니다. 이제까지 지은 모든 공덕을 일체중생에게 되돌려 주는 날입니다. 이런 회향은 일종의 ‘공덕 나누기’라 볼 수 있습니다.
유형의 재물은 나누면 나눌수록 줄어 들지만 무형의 공덕은 나누면 나눌수록 커집니다. 지금 내가 지은 공덕을 타인에게 회향하면 반으로 줄어 드는 것이 아니라 두 배로 늘어납니다. 그래서 자신이 모든 공덕을 일체 중생에게 돌려 주었을 때 그 공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커집니다. 작은 봉사단체 작은손길에서는 지난 13년 동안 지은 공덕을 이날을 맞이하여 남김 없이 회향했습니다.
봉사단체 작은손길로부터 초대받았습니다. 3월 5일 작은손길에서 완전한 회향이 있는데 참여해 달라는 문자를 받았습니다. 작은손길을 늦게 알게 되어 지난 두 달 동안 한 주도 빠지지 않고 을지로 굴다리 노숙자 따비에 참여한 바가 있는데 이런 점을 높이 평가한 것 같습니다. 또한 체험한 것에 대하여 블로그에 올리고 더구나 교계신문 미디어붓다에 기고까지 했는데 이로 인하여 작은손길이 많이 알려 진 것도 영향을 미친 것 같습니다.
풍물시장에서는
일요일 오전 사명당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이날 10시 반부터 회향행사가 시작 되기 때문입니다. 탈북청소년 장학금 수여식과 함께 점심식사를 함께 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가는 길에 늘 보는 것은 ‘풍물시장’입니다.
신설동에 있는 사명당의 집으로 가기 위해서는 풍물시장을 지나야 합니다. 풍물시장에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온갖 것들이 있습니다. 어찌 보면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 것도 진열해 놓고 있습니다. 물건은 ‘만들어 놓으면 팔린다’라는 말이 있는데 집에서 쓰는 물건은 모두 판매 대상이 되는 듯 합니다.
풍물시장 진열품을 보면서 또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율장대품에 “약에 사용되지 못한 푸성귀 는 하나도 없다.”(Vin.I.275) 라는 의사 지바까의 말이 있습니다. 산과 들에 지천으로 깔려 있는 흔하디 흔한 풀도 약초가 될 수 있음을 말합니다. 풍물시장에서 인간들이 만들어낸 온갖 잡것들도 누구에겐가는 쓰임새가 있을 것입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아무리 하찮게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자신의 소질을 발견하고 개발하면 쓰임새가 있을 것입니다.
사명당의 집은
풍물시장 정문을 지나 골목으로 들어 가면 사명당의 집입니다. 2층 양옥으로 된 작은 가옥입니다. 봉사단체 작은손길에서 세들어 있는 곳입니다. 10년 전에 계약을 해서 지금까지 사무소 겸 교육장, 음식 만드는 곳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특히 네팔사람들이 자주 이용했다고 합니다.
사명당의 집은 서울과 수도권에 거주 하는 네팔사람들이 주말에 모이는 장소라 합니다. 모여서 그들의 음식을 만들어 먹고 쉬어 갈 수 있는 장소로 오랫동안 활용되었다고 합니다. 또 사명당의 집은 노숙자들의 쉼터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노숙자들을 위한 음식을 준비하는 곳이고, 독거노인들을 위한 반찬을 만든 곳이기도 하고, 탈북청소년들이 모이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사명당의 집으로 가기 전에 청계보살이 있는 곳으로 가 보았습니다. 청계보살은 청계천 다리에서 구걸하는 여자노숙자입니다. 작은손길 봉사자들이 3년 전 발견해서 지나갈 때 마다 천원씩 주고 간다고 합니다. 관심 보이는 것을 싫어해서 몰래 돈을 슬쩍 주고 가는 식입니다. 그러나 청계보살은 보이지 않습니다. 김광하대표님에게 물어 보니 주말 풍물시장에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날에는 단속을 하기 때문에 없는 것이라 합니다. 저녁이나 평일에는 보일 것이라 합니다.
다시 사명당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입구에서 여운 김광하 대표님이 반갑게 맞이 해 줍니다. 이날 초대된 사람들을 위하여 일부로 밖에 나와서 안내해주는 것입니다. 집으로 들어 가니 낯 익은 얼굴들이 반겨 줍니다. 을지로 따비 현장에서 늘 보았던 제영법사님과 운경행님, 그리고 여운 대표님의 부인 보리 호원순님이 반겨 줍니다. 주방에는 벽안 김경숙님 등이 음식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행사일정을 보니
이날 행사일정을 보았습니다. 칠판에는 ‘작은손길 장학식 및 따비회향식’이라는 제목과 함께 행사일정이 소개 되어 있습니다. 개회사에 이어 전재성박사의 법문이 있고 이날의 하일라이트인 탈북청소년들에 대한 장학금 증여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13년을 돌아 보는 동영상관람이 있습니다. 모든 행사가 끝나면 모두 함께 준비한 떡국으로 점심식사를 하는 일정으로 되어 있습니다.
초대된 손님들이 도착하기 전 주방은 분주합니다. 봉사자들이 또다시 봉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봉사자와 후원자들이 속속도착합니다. 그리고 탈북청소년들과 그들의 부모도 한 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11시가 되자 회향식이 시작 되었습니다. 탈북청소년따비 회향식이자 작은손길 전체회향식입니다. 작년 12월 달에 이미 독거노인반찬봉사따비 회향이 있었고, 지난 주 일요일에는 을지로굴다리노숙자따비가 회향되었습니다. 이제 마지막 남은 탈북청소년따비회향의 날이자 작은손길 전체회향의 날입니다.
인연이 다해서, 조건이 다해서
식순에 따라 작은손길 대표 여운 김광하님의 개회사가 있었습니다. 김광하 대표님은 지난 13년을 회고하면서 “인연이 다 해서 단체는 사라지지만 인간관계는 계속될 것입니다.”라 했습니다. 지난 교계신문 뉴스에 따르면 원래 가족들과 약속하기를 10년만 하기로 했는데 요청이 있어서 더 하게 된 것이라 합니다. 그러나 나이도 이제 65세가 되어 건강도 예전 같지 않고 무엇보다 아름답게 마무리 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 하여 회향하게 된 것이라 합니다. 이런 사실에 대하여 서울대 약대 교수인 약산 김규원님은 “조건이 다돼서 마무리하는 것입니다.”라 했습니다.
시작도 중요하지만 끝도 중요합니다. 시작은 거창하지만 마무리가 좋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어느 정치인은 단식을 거창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별다른 호응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럴 경우 빨리 단식을 끝내야 합니다. 그러나 빠져 나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명분이 없는 것입니다. 병원에 실려 가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출구전략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치인은 빠져 나올 명분이 없었던 것입니다.
시작은 거창하지만 끝 마무리가 좋지 않을 때 차라리 안하느니 못합니다. 대부분 봉사단체가 그런 것 같습니다. 처음과 달리 이득과 명예와 칭송에 집착했을 때 본질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필연적으로 재정문제와 인사문제가 일어납니다. 대부분 내분으로 이어집니다. 그 과정에서 추한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런 사실을 김광하대표님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무리시점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것입니다. 제로로 만든 것입니다. 시작할 때도 제로에서 시작했고 회향할 때도 역시 제로입니다. 조직도 없고 건물도 없고 통장에 잔금도 제로가 된 것입니다. 완전한 회향입니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면
회향식에서 ‘법문’이 있었습니다. 김광하대표님과 함께 작은손길을 이끌어 온 ‘전재성’박사님입니다. 정신적 지주라 볼 수 있습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 회장이기도 한 전재성박사님은 사부니까야를 완역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방대한 빠알리율장도 완역했습니다. 또한 쿳다까니까야의 15개 경전 중에 6개를 완역했습니다. 한국의 구마라집이라 볼 수 있고 세계적인 번역가라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빠알리니까야를 완역하는데 있어서 생략된 반복구문을 모두 복원하였기 때문에 ‘7차결집’을 이루어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전재성박사님은 탈북청소년과 가족, 그리고 봉사자들을 위하여 약 20분간 ‘부끄러움을 알자’라는 주제로 법문했습니다. 전재성박사님에 따르면 인간이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것에 대하여 우주를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같다고 했습니다. 만일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세상이라면 약육강식의 짐승의 세상이 될 것입니다. 질서가 무너지고 도덕이 무너진 세상이라면 더 이상 인간이 사는 세상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부끄러움을 모르고 창피함을 모르는 세상은 우주가 무너진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장학금 수여식
이날 행사의 하일라이트는 장학금 수여식입니다. 탈북청소년에게 학비를 전달하는 행사합니다. 대학생에게는 5명에게 70만원씩 전달되었습니다. 고등학생 3명에게는 50만원씩, 중학생 3명에게는 30만원씩 전달 되었습니다. 금액이 많다면 많다고 볼 수 있고 적다면 적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회향을 맞이하여 기부자가 늘어나는 바람에 장학금이 올라 갔다는 사실입니다. 50만원이 70만으로 올라 간 것은 도중에 기부금이 늘어 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도 남김 없이 제로를 만들어야 하는 입장에서 장학금이 상대적으로 올라 간 것입니다.
탈북청소년들 봉사는 거의 10년 가까이 되었다고 합니다. 대부분 교회에서 탈북자와 청소년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 불교의 경우 전무하다고 합니다. 불교계에서는 최초로 탈북청소년 모임을 만들어 장학금을 지급해 온 것입니다. 더구나 2주에 한 번씩 사명당의 집에서 모임을 갖게 해 주었습니다. 특히 사진예술반을 만들어 활동했는데 제영법사가 담임을 맡았습니다. 운경행님은 이들에게 점심을 만들어 제공하는 어머니역할을 했습니다.
작은손길에서 탈북청소년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들의 처한 딱한 사정을 알았기 때문이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과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탈북자들을 돕는 것에 대해 처음에는 망설였다고 합니다. 마치 노숙자를 돕는 것에 대하여 “왜 하필이면 부랑자를 돕는가?”라는 핀잔과 같은 것이라 합니다. 탈북자를 접촉하면 불이익을 받는 것처럼 여겨지는 현실에서 “왜 하필이면 탈북청소년이냐?”라는 의구심입니다. 그러나 자비의 가르침에서 본다면 세간의 부정적인 여론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갈 곳이 없어요”
장학금 수여식이 있고 나서 소감을 발표 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몹시 아쉬워하는 것 같았습니다. 물심 양면으로 도움을 주었는데 이제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눈물을 흘리는 학생도 있었습니다. 한 고등학생은 “갈 곳이 없어요”라 했습니다. 또 어느 학생은 “2주에 한번 오는 것이 제일 재미있었는데 누나들도 못 보고 형들도 못본다고 생각하니 아쉬워요. 다음에도 이런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 합니다. 그래도 2주에 한번 일요일 사명당의 집에 오는 것이 낙이었는데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에 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교회에 가면 용돈도 주고 먹을 것도 줍니다. 그러나 공짜는 없습니다. 교회에 가면 예배와 찬송을 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사명당의 집에서는 전혀 종교를 강요하거나 종교의식을 행하지 않습니다. 제영법사에 따르면 절에 한번 데려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런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일요일 부담 없이 온다고 합니다.
탈북청소년들은 마땅히 갈데가 없다고 합니다. 학교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 때문에 왕따를 당하고 남북관계가 경색되면 심지어 불온한 시선으로 본다고 합니다. 이들을 누군가 도와 주지 않으면 이 세상을 살아 가기 힘든 사람들입니다. 그런 장소를 제공해 준 것이 사명당의 집입니다.
탈북청소년들은 2주에 한번 모여서 사진도 배우고 문화공연관람도 하고 헌법학 강의도 듣는 등 일요일 하루를 같은 처지의 학생들과 보냈습니다. 이렇게 일요일 나오는 학생들을 위하여 용돈 5만원씩 주었다고 합니다. 한달에 한번 나오든 두 번 나오든 나오기만 하면 한달에 한번 용돈을 주는 것입니다. 이런 제도를 만들게 된 것은 교회때문이라 볼 수도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교회 나오면 용돈을 준다고 합니다. 또 아르바이트 개념 때문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일요일 아르바이트를 하면 용돈을 벌 수 있는데 사명당의 집으로 나오면 돈을 벌지 못할 것입니다. 고민 끝에 결정한 것이 일종의 장학금 개념의 용돈을 주기로 했다고 합니다.
탈북청소년들과 인연을 맺은지 10년이라 합니다. 그 동안 중학생은 대학생이 되는 등 성장하는 모습을 죽 지켜 보았다고 합니다. 그 중에 한명은 한양대학교에 진학했습니다. 현재 중국에 유학가 있는데 청년사업가를 꿈꾸고 있습니다. 이외 이화여대, 서강대, 아주대, 숙명여대 등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제 갈 곳이 없습니다. 작은손길 만한 곳이 없는 것입니다.
학생들은 이별을 매우 아쉬워 했습니다. 이제 다시 못 만날 것을 생각하니 눈물이 나는 모양입니다. 어느 여학생은 “이렇게 베푸는 것을 보고 나도 남을 도우며 살아가야 겠습니다.”라며 많이 배웠다고 했습니다. 조건 없이 베푸는 작은손길의 무주상보시의 정신이 이들을 감동시킨 것 같습니다.
봉사자들을 소개하는 시간
작은손길에서 봉사를 시작한 것은 2004년 부터라고 합니다. 이전에는 김포에다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상담소를 개설했는데 이것이 봉사의 시초라합니다. 그때 당시 외국인 노동자들의 열악한 환경은 2004년 노무현정부에서 대부분 해결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국내의 소외받는 자들에게 눈을 돌려 2004년부터 종로3가 노인들을 위한 커피봉사, 을지로 노숙자들을 위한 음식봉사, 독거노인들을 위한 반찬봉사, 탈북청소년을 위한 사진예술봉사 등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제 인연이 다 되어서, 이제 조건이 다 되어서 회향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자원봉사자들을 초대하여 회향식을 갖게 된 것입니다.
회향식에 참석한 봉사자들을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각현 이구락님이 부인과 함께 왔습니다. 벽안 김경숙님은 외환은행에서 지점장으로 근무하다 정년퇴직하신 보살님입니다. 명절 때 주로 여성노숙자들을 찾아 다니며 촌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해 왔습니다. 약산 김규원님은 서울대 약대 교수님입니다. 학문적 성과가 있어서 호암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탈북청소년들을 서울대에 두 번이나 초대하여 사진촬영모임 갖도록 도움을 준바 있다고 합니다.
황채운단장님은 봉은사 신도로서 쌀 보시와 관련이 있습니다. 보살님은 ‘반갑다 연우야’봉사단장으로서 매달 200키로그램의 쌀을 작은손길로 오게 했습니다. 쌀은 을지로굴다리따비에서 노숙자들에게 제공될 백설기를 만드는데 활용됩니다. 그 쌀을 살 돈으로 탈북청소년들에게 장학금과 용돈을 준 것입니다. 누군가 쌀을 불단에 보시 했을 때 돌고 돌아 여러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보시의 연쇄반응입니다. 한사람의 보시가 자신과 자신의 가족 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도움이 되는 행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정진우님은 김포에서 외국인노동자들을 인권상담을 하던 분이라 합니다. 그때 당시 김광하대표님은 후원자이었는데 처음으로 엔지오 활동에 대하여 알개 해 준 사람이라 합니다. 그 인연으로 봉사활동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강형진 니르바니 필 하모닉 오케스트라 단장님이 소고 심소현실장님과 함께 오셨습니다. 하하 엄성은님이 오셨습니다. 하하는 필명이라 합니다. 요즘 연예인 중에 하하가 있다 하는데 더 오래 되었기 때문에 오리지널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김광하님에 따르면 ‘따비’라는 말을 만든 장본이라 합니다.
어떻게 하면 티를 내지 않고
순수한 우리말인 ‘따비’는 작은 농기구를 말합니다. 쟁기등이 들어 갈 수 없는 자투리 땅을 가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수작업 도구입니다. 큰 손길이 미치지 않는 작은 손길이 미치는데 활용됩니다. 봉사단체 ‘작은손길’에 매우 적절한 용어라 여겨집니다. 그래서 봉사라는 말 대신 따비라는 말을 사용하여 을지로굴다리노숙자따비, 독거노인반찬따비, 탈북청소년따비라 합니다.
작은손길은 봉사단체입니다. 그러나 봉사라는 말을 사용하기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보조 농기구를 뜻하는 따비라는 말로 대신합니다. “우리는 봉사한다.”라고 의도적으로 드러내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게 눈에 띄지 않게 가장 낮은 곳을 찾아 다닙니다. 봉사라기 보다 일종의 수행단체의 성격이 짙습니다. 이는 단체를 이끈 김광하님의 불교관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김광하님의 화두는 ‘무주상보시’이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티를 내지 않고 봉사하느냐는 것입니다. 대부분 봉사단체들이 드러내려 하고 조직을 키우려 하지만 정반대로 나간 것입니다. 그래서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아마 불자대상을 주어야 한다면 당연히 대상일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불자대상은 사성장군이나 연예인, 스포츠스타가 대상이 됩니다. 시류에 편승한 인기영합주의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불자대상자 중에는 두 명이나 구속된 바 있습니다.
모멸감을 느끼지 않도록
무주상보시의 실현은 가장 낮은 자세를 갖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이에 대한 단적인 예를 들려 줍니다. 을지로 노숙자 따비가 지금의 을지로 굴다리가 아닌 을지로입구역 지하원형광장이 있었을 때입니다. 그때 당시 각종봉사단체가 노숙자들을 대상으로 하여 봉사하던 때라 합니다.
교회의 경우 반드시 예배와 찬송을 해야만 얻어 먹을 수 있습니다. 또 긴줄을 서야만 합니다. 그런데 작은손길에서는 아무런 조건 없이 주기만 한 것입니다. 그것도 찾아 가며 주었다고 합니다. 을지로입구역의 경우 동그랗게 생긴 커다란 홀이 있었는데 거사님들(노숙자들)을 빙둘러 앉게 하고 식판에 밥을 담아 직접 하나 하나 전달해 주었다고 합니다. 이런 방식은 이제까지 없었다고 합니다.
얻어 먹는 자들은 모멸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줄을 선다는 것 그 자체가 사실은 모멸감의 시작입니다. 여기에 예배와 찬송까지 곁들인다면 먹기 위해 참아야 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작은 손길에서는 일체 의식이 없습니다. 마치 백미터 달리기 하듯이 시간되면 주기에 바쁩니다. 그런데 찾아 가며 주었을 때 대접받는 기분일 것입니다. 봉사자들은 을지로 3가역 따비를 회상하며 “가장 보람 있었다.”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수 많은 봉사자들
안영화님은 을지로입구역따비 때부터 참여했다고 합니다. 홍광순님은 열혈학생으로 소개 되었는데 선유식을 공부하던 회원이었다고 합니다. 운경행님은 탈북청소년 예술반에서 어머니 역할을 했습니다. 최은미님과 김명옥님은 독거노인 반찬봉사를 오랫동안 해 왔습니다. 이왕재님은 탈북청소년들에게 헌법특강을 해 준 바 있습니다. 이병관님 부부는 사랑재를 이끌고 있는데 봉사를 몸으로 실천하기 위해 참여했다고 합니다. 이 밖에 많은 봉사자들이 자리를 함께 했습니다.
봉사자중에는 외국인도 있었다고 합니다. 외국 입양자 중에 부모를 찾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사람이 있었는데 봉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봉사활동을 인터넷에 올렸는데 이런 사실을 알고 외국에서 찾아 온 사람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중에 한명이 같은 외국인 봉사자하고 사귀게 되어 결혼까지 하게 된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2008년 외국인봉사자
세월의 무게가
장학금수여식이 끝나고 지난 13년간 활동상황을 보여지는 동영상시청시간이 있었습니다. 사진은 다음 카페 ‘작은손길(사명당의집)’ 에 올려져 있는 사진을 수집하여 만든 유사동영상입니다. 2005년 카페가 만들어진 이후 현재까지 올려져 있는 사진을 보면 세월의 무게를 느끼게 됩니다. 엄마와 함께 연탄을 나르던 초등학교 학생은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특히 김광하대표님과 전재성박사의 십년전 모습과 현재의 머리모양을 보면 세월이 흘러 갔음을 실감합니다.
2008년 전재성박사
2008년 김광하대표
기념촬영을 하고
장학금은 봉사자들이 수여 했습니다. 십여명에 달하는 학생 각자에게 각 봉사자가 수여한 것입니다. 수여식이 끝나고 탈북청소년들과 봉사자들이 함께 단체사진촬영시간을 가졌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노숙자들의 쉼터, 네팔사람들의 모임의 장소, 그리고 각종 모임의 장소로 활용된 2층 구조의 옛날 양옥 마당에서입니다.
모임에는 가장 늦게 참가 했습니다. 작년 12월 전재성박사님의 니까야 강독모임이 인연이 되어 뒤늦게 참여한 것입니다. 늦었지만 회향 당일까지 함께 했습니다. 그러나 참석하지 못한 봉사자가 훨씬 더 많습니다. 카페에 남겨진 사진을 보니 그 동안 수 많은 봉사자들이 다녀 갔습니다. 그리고 수 많은 사람들이 후원 했습니다. 아무런 대가나 보상을 바라지 않는 무주상보시의 실천자들입니다.
즐거운 식사시간
이제 즐거운 식사시간입니다. 부엌에서는 봉사의 달인들이 음식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날 메뉴는 떡국입니다. 수십명이 비좁은 장소에서 먹어야 하기 때문에 떡국만한 것이 없습니다. 여기에 딸기, 귤 등 빨갛고 노란 과일이 곁들였습니다.
청소년들은 작은 방에서 식사합니다. 오늘이 마지막 날입니다. 누나들과 형들과 함께 했지만 이제 언제 다시 만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번 뿌려진 무주상보시의 정신은 실천 될 것입니다. 언젠가는 다시 모이리라 봅니다.
“그땐 그랬지”
식사가 끝나고 차와 함께 담소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제영법사님이 지나간 사진을 카페에서 찾아내어 하나 하나 설명합니다. 그동안 오고 간 봉사자들의 면면을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이구동성으로 “그땐 그랬지”라며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카페에는 사진과 글로서 활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날 행위는 있었지만 남아 있는 것은 사진과 글입니다. 그래서 “남는 것은 사진밖에 없습니다.”라 합니다. 결국 사진만 남은 것 같습니다.
남은 것은 사진밖에
제영법사님은 10년 전 사진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하나씩 하나씩 보여 줍니다. 봉사자들이 사진을 보면서 옛날을 회상합니다. 봉사자중에는 유명을 달리 한 분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안타까워 합니다. 봉사자중에는 젊은 여검사도 있었습니다. 남편과 함께 열심히 봉사하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또 사진에는 박완서작가의 모습도 보입니다. 김광하대표님의 부인은 박완서 작가의 둘째 딸입니다. 그래서 봉사현장에서 사진이 찍힌 것 같습니다. 기록을 보니 박완서작가가 작고 하기 전 2010년 3백만원을 보시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리고 매월 정기적으로 후원하는 후원자의 명단에도 보입니다. 이날 행사가 끝났을 때 참석자 전원에게 박완서 작가의 동화 ‘노인과 소년’을 증정했습니다.
갈사람은 가고 남은 사람은 계속 이야기합니다. 이야기꽃을 피우다 보니 흥이 났나 봅니다. 그러다보니 7시까지 이야기 했습니다.
“훌륭한 회향입니다.”
김광하님은 지난 13년 동안 봉사활동을 하면서 늘 염두에 둔 것은 ‘무주상보시’였다고 합니다. 조직화하고 적립하고 쌓아 두었다면 회향은 엄두도 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기에 훌훌 털어 버린 것입니다. 거기에는 어떤 미련도 없고 회환도 없고 이루었다는 마음도 없는 것입니다. 그저 할 바를 다한 것입니다.
김광하 대표님은 늘 무주상보시를 화두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외부인이 보기에는 지행합일입니다. 그것은 가르침의 실천입니다. 낮에 한 말 다르고 밤에 하는 행동이 다른 것이 아닌, 낮에 한말과 밤에 행동하는 것이 일치함을 말합니다. 거기에는 지옥문이 닫칠 때 까지 성불하지 않겠다는 엄청난 서원도 아니고 이득과 명예와 칭송을 바라는 것도 아닙니다.
작은손길 사람들은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자들에게 가장 낮은 자세로 마땅히 해야 할 바를 묵묵히 다한 것입니다. 김광하대표님의 지행합일과 무주상보시의 정신은 마치 민들레가 홀씨되어 바람을 타고 날아 가듯이 널리널리 퍼져 나갈 것입니다. 그동안 참여했던 수 많은 자원봉사자들과 수 많은 후원자들이 지행합일의 무주상보시의 정신을 계승해 갈 것이라 봅니다.
작은봉사단체 작은손길은 해야 할 바를 다 했습니다. 그리고 여법하게 회향했습니다. 마치 “봉사는 이렇게 하는 것이다.”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 같습니다. 김광하 대표님을 포함하여 자원봉사자들, 그리고 후원자들이 모두 승리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훌륭한 회향입니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2017-03-06 진흙속의연꽃 |
출처: 진흙속의연꽃 원문보기 글쓴이: 진흙속의연꽃
첫댓글 진흙거사님, 글을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
이 글은 교계신문 사이트 중의 하나인 미디어붓다에도 실렸습니다. 제목은 "무주상보시 정신 민들레 홀씨처럼 퍼지리” 입니다.
작은손길의 지행합일과 무주상보시의 정신이 민들레 홀씨 처럼 널리 퍼졌으면 좋겠습니다.
http://mediabuddha.net/m/news/view.php?number=20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