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들판의 작은 등불처럼
*『크리스천 문학』제20호 특집 ‘역대 회장의 회고’ 중에서
해풍이 실어오는 갯내음을 맡으며 우리는 밤하늘의 별을 쳐다보고 있었다. 백일장 행사를 마친 뒤 일부회원은 돌아가고 남은 10여명의 회원들 가운데 몇 명은 평상에 걸터앉고 나머지 대부분은 마당 한가운데 펼쳐놓은 멍석에 허리를 펴고 누웠다. 희미한 알전구마저 꺼버리니 별은 더욱 초롱초롱하고 어디서 풀벌레 우는 소리도 들려왔다. 포장마차에서 핫도그를 팔고 있던 장사꾼들이 철수한 해변엔 조용한 파도소리만 남았다. 16년 전인 1996년 8월 15일(목)~16일(금) 1박2일 일정으로 임랑 해변의 한초가집에서 개최되었던 부산크리스천문인협회의 여름행사의 기억이다.
죽는 날 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회원인 남송우 교수가 윤동주의 서시(序詩)를 낭송하고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세계 속의 문학 그리고 예수」란 주제로 열린 본회의 <‘96 해변문학교실>의 밤은 이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마치 들판에서 하루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안식하는 농부처럼 어떤 이는 잠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오후 2시경에 시작되었던 백일장에서는 청소년부에서 최효진 군(시‘솔바람’-장안중학 2년)과 일반부에서 정은숙 씨(시‘바다’)를 각각 최우수상 수상자로 선정하고 몇 분에게는 장려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윤동주의 서시와 같은 분위기는 우리가 해변문학교실을 개최하는 곳이면 어디서든지 찾아보고 느낄 수 있는 정서였다. <해변문학교실>은 매년 여름 부산의 지역적 특성을 살려 주로 바다를 낀 곳에서 개최되었고 때로는 산간지역이나 멀리 다른 지방을 찾아가기도 했었다. 해변문학교실이 처음 열린 것은 1990년 7월 30일~8월 1일까지 2박3일간 강서구 천가동 소양보육원(가덕도)에서 부터였다. 이때는 백일장 시와 산문 부문에서 최미경·이태숙 씨 등 4명의 당선자를 내고 교회복음신문에서 마련한 타월 100장과 본회가 준비한 기념볼펜 100개를 참가자들에게 나누어준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회원작품집은 1992년『소금의 나라』를 처음으로 펴냈고 이듬해에는『빛의 나라』라는 이름으로 발간되었으나 3호부터는『크리스천 문학』으로 제호를 바꾸어 오늘에 까지 이르렀다.
필자는 첫 작품집『소금의 나라』에 수필 2편을 게재하며 회원으로 이름을 올렸지만 아직 등단과정은 거치치 않은 아마추어였다. 필자가 부산 크리스천문인협회와 관계를 맺게 된 것은 교회복음신문을 통해서였다. 당시 부산 크리스천문인협회는 1990년 3월부터 문현동 소재 교회복음신문사(사장 김인환)에서 정기적으로 월례회를 개최하고 있었다. 필자는 1981년 3월 신학교에 입학하기 전 부산일보사에 근무할 때부터 김인환 회원(당시 YMCA간사)과 친분이 있었고, 목회자가 된 후에는 상당기간 교회복음신문에 기명칼럼을 쓰고 있었다. 그때 필자는 친구인 김 사장의 부탁을 받고 몇 차례 기자들의 소양교육을 맡아했기에 그의 권유로 자연스럽게 크리스천문인협회 회원들과 자리를 같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가덕도에서 첫 번째 해변문예교실을 개최할 때는 참석을 독려하는 임원들의 간곡한 요청을 받았지만 목회자가 3일씩이나 교회를 떠나있을 수 없어 부득이 불참했다. 그 후에도 필자는 어쩌다 한차례씩 참여는 했어도 상당기간 동안 한편의 작품도 내지 못하고 교회 일에 만 몰두했었다. 그러다가 1996년 제5집에 수필 한편을 게재했으나 본격적으로 활동한 것은 1997년부터였던 것 같다. 아마 필자가 그해 월간<수필문학>에 추천을 완료하고 문인으로서의 자격을 구비한 것이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그전까지는 10여년간 일간신문 기자로 일한 이력을 인정받은 회원이었다. ‘맛을 보고 맛을 아는 것’처럼 글을 쓰면서 필자는 차츰 글 쓰는 재미를 깊이 알게 되었고, 3년 후인 1999년 1월에는 그동안 쓴 것을 모아 첫 수필집『매미소리를 들으며』(쿰란출판사)를 출간하게 되었다.
그해 3월에는 필자는 목회자 근속 10년을 맞으면서 수필집 출판기념회 및 10년 근속감사예배를 3월16일 저녁 부산평강교회당에서 가졌다. 1부 예배에 이어 2부 행사에서는 남송우 교수(부경대)가 서평을, 김인환 본회 회장과 수필문학 부산작가회 이병수 회장이 축사를 했으며 당시 한국기독신문 주필이었던 정선기 장로가 격려사를 했었다. 이날은 부산 크리스천 문인협회 뿐만 아니라 교회적으로도 큰 잔치였다. 크리스천 문인협회는 매년 해변문학교실과 함께 꾸준히 작품집을 내며 <주부 백일장> <추수감사절 기념문학의 밤>, 문학특강 등을 개최하며 회원수도 50~60명으로 늘어났다. 양왕용·남송우·구모룡·박춘덕·전기웅 씨 등 대학교수들이 문학적 지주를 굳게 세웠고, 심군식·백성호·안유환 씨 등 목회자들이 신앙적 기틀을 잡아주었고, 박영희·한영자 씨 등 의사들과 각계각층에 포진한 평신도들이 함께 모인 자리는 초창기에는 마치 교회의 원형인 초대교회의 분위기와 같았다. 서로의 얼굴을 보기만 해도 정이 넘쳐흘렀고 문학과 신앙의 이야기를 주고받다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부산 크리스천문인협회는 대외적으로 활발한 활동은 펴지 못했지만 어두운 들판의 작은 등불처럼 세상을 밝혀왔다. 1994년 1월 3일자로 신년축하 인사와 광고를 겸해 총무가 발송한 공문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謹賀新年. 회원 여러분, 주님의 무한한 사랑 안에서 새해에도 만복을 받으시고 건필을 부탁드립니다. 새해에는 보다 개혁적이고 발전하는 부산 크리스천문학가 협회가 되기를 부탁드리오며 협조를 요망합니다. -회장 양왕용. *아래 회람 : 지난해 부산 기독교 문화축제를 무사히 마쳤습니다. 당일 본회 연간집『빛의 나라』와 부산 기독교문화회 수상집『또 하나의 작은 결실』출판 기념회에는 이상규 교수(고신대)의「부산, 부산 기독교 문화」강연과 토론이 있었습니다. 많은 회원이 나오지 못하여 안타까웠습니다. 신입회원 신선(시)을 비롯해 12명이 참가했습니다.······. 1993. 1. 3. 총무 김동재.”
그로부터 3년 후 김동재 총무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하늘나라로 먼저 떠났다. 그동안 부지런히 수필을 써오던 필자는 2001년 하반기부터 뜻밖에 시를 쓰게 되었고 2003년에는 첫 시집『천사들의 휴양지』(세종), 2006년에는 두 번째 시집『서설』(세종), 그리고 2012년에는 세 번째 시집『그림자의 귀향』(창조문예사)을 출간했다. 처음 시를 쓰기 시작할 때 수필보다는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하고 싶은 말을 시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새로운 즐거움이었다. 이에 앞서 2001년 8월 6일~7일 거제 유스호스텔에서 개최된 해변문학교실에서는 갑작스런 임시총회가 있었다. 왜냐하면 5대 회장이었던 남송우 교수가 캐나다 교환교수로 떠나게 되어 사의를 표명했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서는 본회 초창기부터 많은 수고를 해온 허성욱 시조시인을 6대 회장으로 선출했다.
그리고 잔여임기가 끝나는 2003년 2월 3일 대연동 채식뷔페에서 개최된 정기총회에서 안유환 시인(필자)이 7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모든 여건이 불비한 가운데서 하나의 단체를 이끌어간다는 것은 그야말로 ‘십자가를 지는 일’이었다. 명칭은 선출이지만 실제로는 짐을 떠맡기는 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맡겨진 2년 동안의 임기 중 성실히 책임을 감당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회원들의 의견을 수렴해 만든 당시 사업계획을 살펴보면 감회가 새롭다.
1)무원칙한 연간집 약력을 등단지, 저서, 사회활동 직함, 교회직분 등 4가지로 간략하게 축소하고, 2)매월 1회 월례회를 개최하여 회원들의 작품을 대상으로 합평회를 갖고 작품을 질적 향상을 도모하며, 3)연1회 서면 지역에서「크리스천 문학 세미나」를 개최하고, 4)해변문학교실 때는 ‘초청문인과의 대화’ 시간을 가지며, 5)봄·가을 두 차례 회원 등산대회를 개최하고, 6)조속한 시일 내에 인터넷 홈페이지를 개설 하도록 결의했다. 7)그리고 장기적인 안목으로 본회 문학상 제정 및 시화전 개최 등을 단계적으로 추진하도록 의견을 모았다.
교환교수 1년을 마치고 귀국한 남송우 교수는 본회 홈페이지(bookmoon.net)에 마련된 ‘작품 감상코너’에 코멘트를 했고, ‘어느 비평가의 하루’를 매주 연재하여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회원들이 지속적인 관심을 갖지 못함으로 이태 후 홈페이지는 아쉽게도 자동으로 폐쇄되고 말았다. 회원 작품 합평회도 실제 운영에 어려움이 노출되어 빛을 보지 못했으나 등산대회는 두어 차례 가지며 회원들의 친목을 도모했다. 이렇게 하여 화려한(?) 사업계획은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고 다음 회장에게 바톤을 넘겨야 했다.
필자가 회장으로 재직하던 기간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2003년 8월 4일~5일 이틀간 거제 문화관광농원에서「바다, 그 실존과 허무를 넘어」라는 주제로 개최한 해변문학교실과 2004년 4월 22일 연산로터리 해암 뷔페에서 가진『크리스천 문학』제12집 출판기념회이다. ‘거제 해변문학교실’에서는 1)주제 강의 : 정선기 시인, 2)남송우 교수의 캐나다 이야기, 3)본회 발전을 위한 ‘조별토의’로 이어졌다. 그리고 제12집 출판기념회에서는 1부 예배에 이어 2부에서는 류정희·최원철 시인의 시 낭송, 구모룡 교수의 서평, 강인수 부산시문인협회장 축사, 임수생 부산시인협회장 격려사가 있었고, 사직동 교회 중창단이 축가를 해주었다. 또 한 가지 양왕용 교수가 주선하여 개강한 ‘부설 문예대학’에서 필자는 수필부분의 강의를 맡아 특강 및 주1회 글쓰기 강의를 계속했으나 본회의 여건이 여의치 않아 각 장르 공히 등단의 열매는 맺지 못한 채 수강생들에게 아쉬움만 남겼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문학을 한다는 것은 매사추세츠 주의 콩코드에서 태어나 그곳을 영구 거주지로 정했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삶을 지향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생각할 때가 있다. 다소 불편함을 견디고, 조금은 외로우며, 상당히 반항적이고, 그 누구보다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이 문학인이 아닐까-?. 거기에는 명예나 욕심이 끼어들 자리가 점점 사라져 갈 것이다. 소로우는 손수 숲속에 집을 짓고 농사를 지으며 최대한의 여가를 즐겼다. 그는『윌든』에서 “간소하게, 간소하게, 간소하게 살라! 당신의 일을 두 가지나 세 가지로 줄이며, 백가지나 천 가지가 되도록 하지 말라. 백만 대신에 다섯이나 여섯까지만 셀 것이며, 계산은 엄지손톱에 할 수 있도록 하라.”고 말했다. 문학이란 이처럼 고독한 삶에서 피어나는 꽃이 아닐까?
돌아보면 꺼질듯 꺼질듯 하면서도 때로는 왕성하게 타오르는 불꽃처럼 크리스천 문인협회는 그렇게 걸어온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천 문인협회도 역시 세상의 문인협회와 별로 다를 바 없다는 아쉬움을 떨쳐버릴 수 없다. 우리의 출발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였지만 어떤 때는 지나치게 자기를 내세우는 몸짓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때도 없지 않았던 것 같다. 목회가 가장 어렵다는 생각에는 아직도 변함이 없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목회보다 더 어려운 것이 문인들의 모임을 이끌어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언제나 남는 시간은 없다. 주어진 세월을 아끼며 살아야 한다는 마음을 새롭게 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