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의 史記 52회》
☆漢武帝☆
한무제(漢武帝)는 漢나라 7대 황제 유철(劉澈)입니다.
유철은 父皇 經帝와 後宮 왕지(王智)사이에서 태어난 11번째 아들입니다.
11번째 아들은 용빼는 재주가 있다해도 절대 황태자가 될 수 없고 더구나 황제는 꿈도 못꾸는 군번인데 황태자가 되고 황제도 되었습니다.
본실인 황후 박(朴)씨는 아들을 낳지 못하고 일찍 사망하였으므로 후궁 율희의 몸에서 낳은 장남 유영(劉榮)이 황태자로 지명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뒤집혔습니다.
어느날 經帝의 유일한 친누나인 관도공주가 황태자 유영과 자기 딸 진아교를 결혼시키자고 황태자의 생모이자 황후인 율희에게 청혼을 넣었습니다.
그런데 율희가 이를 거절하였습니다.
이에 앙심을 품은 관도공주가 "어디 두고보자! 내가 황제는 시킬 수 없지만 못되게는 할 수 있다."며 이를 갈았습니다.
그리고 평소 자신에게 시누이 대접을 잘해주던 유철의 생모 왕지를 찾아가 자기 딸과 유철을 결혼시키자고 청혼을 넣으니, 왕지는 쌍수를 들고 환영하였습니다.
그로부터 관도공주는 친동생이자 황제인 경제를 찾아가 황태자 유영은 바보같은 놈이며 성질이 난폭하고, 방탕하니, 황태자 자격이 없다는 등 온갖 나쁜 이미지를 심어 황제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유철이 황자들 중에서 제일 똑똑하고 후덕하여 태자감으로 적격이라고 부추겼습니다.
황제는 근래에 황후 율희가 후궁들 문제로 잔소리가 심해져 기분이 안좋은 상태인데 거기다 누이(관도공주)가 기름을 부은 것입니다.
황제는 유영을 폐위하고 유철을 황태자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황후도 율희를 쫓아내고 왕지로 바꾸어버렸습니다.
앞에서도 언급을 하였지만,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이 헛된 말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율희는 시누이(관도공주)의 결혼 제의를 거절한 것이 이렇게 엄청난 앙갚음으로 돌아올줄은 꿈에도 몰랐지요.
유철은 황태자가 되고 부황의 뒤를 이어 황제에 즉위하였는데 이 사람이 무제(武帝)입니다.
물론 관도공주의 딸과도 결혼을 하였습니다.
무제는 할아버지 文帝와 아버지 經帝가 이루어 놓은 부강한 나라를 이어받아 처음에는 성정을 베풀어 한무성세(漢武盛世)라고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았으나 후반기에 들어서는 대규모 토목공사와 사치로 건방을 떨기 시작하더니, 결국 나라의 곡간이 비고 흉노족의 침범이 잦아 백성들의 삶은 궁핍해져 세금을 감당하기가 어려울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격이 난폭해져 제2의 진시황이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말년에는 태자와 황후를 죽이고 충언하는 신하들까지 죽이는 폭군이 되었습니다.
무제는 죽기 1년 전 쯤에 사마천을 불러 "짐은 그대가 쓴 책을 읽어보았다. 너는 짐이 너를 죽여버리기를 바라겠지, 그러면 짐은 폭군이 되고 너는 자손만대에 추앙받는 인물이 되겠지만, 짐은 너를 죽이지 않고 이 책도 후세에 남기도록 할 것이다.
어떤 신하들은 이 책을 태워버리라고 했지만, 짐은 너의 책을 국가의 정사(正史)로 삼을 수는 없지만 한 사관(史官)의 말로 남길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무제는 사마천에게 궁형(宮刑)을 내려 평생 하늘을 보지 못하고 살게 만든 장본인인데 이런말을 한 것은 병주고 약주는 잘못된 처사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되었건 史記는 불태워지지 않고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최초의 역사서로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무제는 말년에 황태자를 죽이고 황후를 죽인 패륜적 행위를 후회하며 고민하다 폐인이 되어 쓸쓸한 최후를 맞으니, 기원전 87년 향년 69세였습니다.
그리고 사마천도 한무제가 죽은 이듬해인 기원전 86년 향년 59세로 궁형(宮刑)이라는 치욕스러운 恨을 털어버리지는 못했지만, 인류 최초의 역사서인 史記를 선물로 남기고 세상을 하직하였습니다.
#이것으로 약소하지만 사마천의 사기에 얽힌 이야기를 마치고자 합니다. 제한된 공간이라 모든 이야기를 리얼하게 표현할 수가 없어 아쉬웠습니다만, 그동안 읽어주신데 대해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 날씨가 쌀쌀해졌습니다. 환절기에 건강 유의하시고 더욱 행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