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추억
그러니까 대학교에 들어가서 첫 미팅할 때 저지른 내 무용담을 털어놓으려고 한다.
4월 쯤 되었나 고향 향우회에서 신입생을 위해 미팅을 주선했다. 촌놈들 향우회하면 껌뻑 죽는다. 막상 가기 전날이 되니 가슴이 두근두근하는데 소풍 가기 전에 설레었던 초등학생마냥 기다려지는 게 아닌가. 이 귀여운 신입생 아그들아, 느그들을 위해 E여대 불문학과 아그들을 대령했잖겠어. 하고 4학년 선배가 공치사를 억쑤로 하더라고. 그래서 머리를 깎고 멋을 내야지 하고 동네 이발관엘 갔다. 하숙집이 산꼭대기 동네라 이발관은 내가 살던 고향보다 더 촌스런 곳이어서 뭔가 시원찮더라고. 왠걸, 드라이기도 없어서 이발관 할배가, 그래 할배였다. 연탄불에 달군 고대기를 들고 오는게 기가 막히더라고. 드라이기가 뭐 대단한 장비라고 그것도 없는 엉터리 이발관이었던 걸. 요즈음은 전기 고대기가 아닌감? 길죽한 집게처럼 생긴 고대기로 내 삼단같이 탐스런 머리칼을 2대8로 가르마를 타고 굽어재키는게 아니겠어라. 머리칼이 타는 냄새가 나고 어쩌고저쩌고 하더니 이발이 끝났대요. 히야~ 흡사 새마을 지도자, 아니아니 그때는 새마을 운동이 나오기 전이었으니 시골 4H 회장님이 거울에 비춰지는 게 아니겠는감. 내가, 내 낯짝이 안동군 옹천면 4H구락부 회장님 같더라니까.(그땐 클럽이라는 말 대신 구락부라고 불렀서라)
어쩌겠어, 하숙집에 들어가니 난리가 났다. 625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었다네. 당시 내 하숙집은 고향 선배들이었거든. 하숙집 주인장도 그랬으니 얼마나 날 놀렸을까. 가르마가 영 보기 싫더라고. 빡빡 깎은 고등학생이 막 대학교 들어갔다고 머리를 기르는 중이었으니 가르마는 뭔 가르마. 가르마를 없애려고 박박 문질러도 벌겋게 단 고대기로 굽어재킨 가르마가 없어지간데. 4월 하숙집에 뜨슨 물이 나오지 않을 때였는데 수돗물 틀어놓고 머리를 감아도 2대8 가르마는 씽씽했어.
어쨎건 태릉으로 미팅을 갔다고. 옷은 뭘입었는데? 옷이라고는 교복밖에 없어서 그걸 입었지뭐. 울 아들 보니까 요즈음 대학생은 교복이 없는가봐. 그때는 교복 아니면 군용야전잠바 꺼멓게 물들인 게 전부였던 시절이었거든. 하여튼 선배가 찍어준대로 여학생과 짝을 지어 앉았는데 곁눈길로 본 여학생도 음전하더라고. 화장은 무슨, 발그스레한 뺨이 아직 솜털이 보송보송한 풋내기 여대생이 당시 최고로 인기가 있던 뭐시기 여대 불문과 아그들었는데. 가당치도 않은 명문 여대생을 붙여준 선배가 얼마나 감사하던지 평생 은혜를 잊지 않으려 맹세했다니까.
미팅이란게 그렇지 뭐. 게임으로 시작하더니 아니 서로 통성명하는 순서도 있었을 거야. 드디어 포크댄스를 하는 차례가 돌아왔다. 일어서서 서로 손을 잡으래요.기가 막힐 노릇이야. 서울로 유학 가는 손자를 붙들고 당부하신 말씀. 할머니가 서울 가서 여자 사귀면 못쓴다고 신신당부를 했거든. 집안 장손인 내가 처자를 잘못 사귀면 집안 망친다고 누누이 말씀하셨다고. 학교 잘 댕기고 나면 당신이 알아서 음전한 처자한테로 장가 보내주신다 했거든. 낭패더라고. 번쩍 기발난 생각이 떠오르더라고. 평소에 손수건 같은 걸 가지고 다닌 적이 있어야지. 벤또를 싸온 포장지가 야들야들한 게 괜찮아보이길래 그거로 여학생, 내 파트너 손을 잡았다고. 맨손으로 손을 잡을 수가 없으니 그런 편법을 쓴거지뭐. 내파트너는 순간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더군. 사회를 보는 선배가 너 뭐하는 거냐고 묻길래 '울 할매가 처자손 잡으면 안 된다고 했걸랑요' 이게 무슨 시추에이션인가 하더니 포복절도를 하더라고. 다들 내 답변이 떨어지고나서 한참 후에야 웃고 난리가 아니었어. 여학생들이야 자기 파트너가 설명해주니 비로소 알아듣고는 깔깔 웃데. 내 파트너는 얼굴이 샛빨가지더니 그래도 음전한 처자였어. 웃는둥마는둥 얌전하게 넘어가더라니까. 그날 미팅은 나 때문에 업 되었다고 해야하나, 하여튼 분위가 단번에 풀려버렸으니 내 공로가 아주 없는 건 아니었을 거야.
정말 내 파트너 얼굴도 정면으로 보지도 못했어. 생각해보라고. 이제껏 여학생과 말이라도 제대로 붙여본 적이 있었을까? 떠꺼머리 촌놈이 서울 와서 이쁜 처자하고 손도 잡아보고 노래도 부르곤 했으니 출세했지뭐. 이래서 선생님 말씀 잘 들은 탓에 서울로 유학 와서 서울 처자도 사귀고 말이야.
누군 그러대, 너 고단수야. 하지만 정말 그땐 그랬어. 여학생 손을 어떻게 맨손으로 잡는다 말인가. 하기사 손만 잡아도 아 배는 건 아니라지만. 솔직히 털어놓자면 나중엔 이걸 자주 써 먹었다고. 아주 순진한 척 하려고. 뭐 작전대로 여학생들한테 어필했어 순진한 총각이라고.
아마 가을 무렵이었을 거야. 종로 YMCA, 전석환씨가 하는 씽얼롱에 친구따라 여학생 사귀어볼려고 드나들다가 그 여학생을 먼발치에서 봤어. 봄하곤 달랐어. 화장빨도 오르고 세련된 모습으로 친구랑 왔던가봐. 그녀가 날 먼저 알아보더라고. 제 친구랑 뭐라고 숙덕거리는데 킥킥 웃느라고 야단법석을 떨기에 나도 알아채린 거지뭐. 그땐 나도 프로에 가까웠지. 노래가 끝나자마자 아는 척 했어. 와이엠씨에이 지하 다방엘 갔던 거로 기억 나. 정말 남학생들한테 선망의 학교, 거기다가 불문학과 여학생다웠어. 커피를 마시는 포스도 뭔가 다르더라고.
니보고 뭐라고 하대? '요즈음은 여학생 손도 잡고 하는가요?' 그리곤 울 할머니도 안녕하시고요? 하더라고. '나도 점잖게 그랬지 뭐. '요즈음은 손수건 가지고 잡는다'고 뒷주머니에 가지고 다니던 손수건도 꺼내보였지. 친구라는 여학생이 울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어. 내 고향을 알려줬더니 고개를 꾸벅이며 알만하다고 하더구먼. 그 여학생은 사학과 학생인데 그 학교 사학과는 신입생 첫 답사는 꼭 울 고향으로 오더라고. 양반 고을에 사는 사람답다고 아주 고인돌 취급을 하더라고.
이제껏 제 이야기를 읽으며 웃지 않으신 벗님들 계신가? 이만하면 사나이가 커가는 성장소설로 장안의 인기를 누릴 자격 있겠지요? 촌놈이 서울 올라와서 받은 첫 번째 충격은 이런 문화적 충격이었다오. 생각해보시구려. 2대8로 가르마를 탄 제 모습, 생각이 나요? 생각이 좀처럼 안 떠오른다는 분은 박대통령, 지금 대통령 아버지 모습을 연상하면 될거요. 그래요 4에이치 구락부 회장님이 서울에 교육받으러 왔다고. 제가 생긴 게 깔끔하지 못한 터라 고대기로 가르마를 단정하게 탔다면 어울리겠어요. 하긴 울 고향에 조영남씨가 공연 왔을 때 시골 여학생들이 길에서 절 보고 싸인받으려고 하더라니까요. 제가 생긴 게 시원찮다는 건 일찍이 알아봤지만 그래도 기분 더럽더라고요. 어디 닮을 데가 없어 영남이랑 닮았단 말인가? 뺀질뺀질하게 생긴 녀석은 봐줄 수가 없지요. 얄밉잖아요.
단숨에 교정도 보질 않고 일필휘지로 써내려간 거니까 오타도 많이 났을거구먼요. 촌놈 상경기 한번 껄죽하다고 웃어넘기시구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