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를 적다
홍일표
검은 눈을 헤쳐 보면 흰 눈이 나올 거라는
그런 희망 따위가 지구의 표정을 바꾸는 건 아니겠지만
맨손으로 아침의 껍질을 벗겨서
식탁 위에 올려 놓는다
몇 마리의 새가 날아와 햇살 몇 줌 쪼다가 흑해의 어둠 속으로 투신한다
뿌옇게 날이 밝아 올 때까지
난파된 배 한 척 인양하여 진흙투성이 바닥을 끌고 나올 때까지
다시 온다
무궁한 세게의 아침과 저녁이 그리고 청동으로 빚어 만든 밤이 쇠사슬을 끌고 저벅저벅 온다 낯익은 미래를 만나는 거다 수 백 년 전 얼굴, 불타버린 심장이 다시 오는 거다
머릿속에 가득한
죽은 글자들
예언자의 입에서 번쩍이는 미래
너의 머리통을 부술 때까지 나는 해안 끝자락에 섯서 세기의 어둠에 불을 지를 것이니
용서하라
아니 심판하라
죽어도 죽지 않는 샛별의 언약
아우성과 분노, 회한과 탄식을 끌고 빛을 따라 흘러 다니던 사람들은 혀가 찢겨서 성 밖으로 던져지고, 신의 음성은 갈수록 또렷하여 창과 검을 든 외눈박이 시종들이 몰려가는 곳마다 태양이 죽는다
그래, 그리하여 희망 따위에게 묻곤 한다
오늘의 중세는 언제까지냐고
뭇 생령들을 고문하는 당신의 판타지가 지겹지 않느냐고
홍일표 시인
1988년 《심상》 신인상으로 등단.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
시집 『살바도르 달리풍의 낮달』 외 다수
청소년 시집 『우리는 어딨지?』
평설집 『홀림의 풍경들』
지리산문학상, 시인광장작품상 수상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