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등을 날리며
오랜만에 친한 이웃들과 야외에 캠핑을 나왔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적당한 날씨였다. 앞마당에 불을 피워도 벌레가 들지 않는 늦봄의 밤하늘에는 말갛게 별이 빛났다. 캄캄한 밤이 되자 장작불 타는 소리만 이따금 들렸다. 시끌벅적하던 아이들은 소란을 멈추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는지 조용했다.
풍등을 가지고 텐트 밖으로 나왔다. 아이들을 바깥으로 불러냈다. 접혀있는 풍등을 조심스레 펴서 각자 소원들을 그리고 각각의 꿈을 정성 들여 써 보라고 했다. 부끄럼을 많이 타는 아들 녀석도 깨알 같은 크기로 뭔가를 적었다. 풍등이 찢어지지 않도록 돌려가며 무언가를 적고 있는 얼굴은 다소 상기되어 보였다. 사위가 어두워서 작은 글씨를 퍼뜩 읽을 수는 없었지만, 아들의 얼굴에서 피어나는 진지함을 읽을 수 있었다. 무엇을 쓴 것일까? 무언가를 바라고 쫓는 것 만으로도 가치 있는 시간일 것이다. 무지개 너머에 뭐가 있을지 모르지만 즐기면서 나아갔으면 한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당시 채무 문제로 집안이 시끄러웠던 나는 다소 어둡고 조용한 성향의 학생이었다. 무슨 일에라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무기력에 빠져 있었다. 학교에서 문화교실 행사가 있었다. 행사는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감상이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문화교실에 가지 않았다.
다음날 청소시간이었다. 친구 경은이는 영화를 보고 와서는 여전히 감흥이 가라앉지 않았는지, 비질을 하는 나를 따라다니며 영화 줄거리 얘기를 했다. 아마도 영화를 보지 않은 나에게 영화 줄거리를 말해 주고 싶었던 것 같았다. 영화줄거리 얘기를 하다가 경은이는 갑자기 책상 위로 뛰어올랐다.
"오,캡틴. 마이 캡틴.”
책상이 앞뒤로 흔들리다가 바닥에 쓰러졌다. 순간적인 일이었다. 경은이는 두 팔이 부러지고 이마에 큰 타박상을 입었다. 나는 거의 한 달 동안 그녀의 집까지 책가방을 들어다 주었다. 그다지 친하지도 않은 사이였는데, 경은이 이마의 멍이 눈가에 파랗게 내려앉을 즈음에는 둘도 없는 사이가 되었다. 생각이 엉뚱하고 자유로운 경은이는 나의 갑갑한 학교 생활을 순화시켜 주었다. 경은이에게는 까닭도 모르게 느긋하거나 대담한 면도 있어 입시로 불안해 하는 나를 토닥여 주었다. 당시의 나는 약간의 우울증을 앓고 있었는데, 황폐한 마음을 경은이가 보듬어 준 것이다. 내가 힘들어할 때마다 툭툭 던지는 그녀의 말 한마디는 생각지도 못한 답이어서 마치 갇힌 세상에서 넓은 곳으로 나를 데리고 나온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경은이의 행동은 무모하게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뜻대로 살아가는 그녀에게 시기에 가까운 부러움도 느꼈다. 경은이는 성적이나 시험에 연연해 하지 않았고, 사복을 입는 우리 학교에서도 이미 특이한 옷차림으로 유명했다. 호피무늬 스커트에 색 양말을 스스럼없이 신고 학교에 와서는 호기롭게 싱긋 웃곤 했다.
남의 눈에 띄는 것을 꺼려하는 나와 달리 경은이의 행동은 시원하다 못해 불안하기까지 했다. 한번은 내 양말 한 짝을 가져가서는 스커트 아래 짝짝이 양말을 신었다. 담임 선생님은 경은이를 불러내서 양말을 벗으라고 했지만 그녀는 벗지 않았다. 결국 경은이는 며칠간 화장실 청소를 하게 되었고, 나는 그녀 옆에서 화장실 청소를 도왔다. 의상디자이너가 되고 싶어한 경은이는 어떤 상황에서도 기가 죽기 않고 당당한 기질을 보였고, 그녀의 학교생활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봐야만 했다.
경은이는 입시를 앞두고 충격적인 말을 했다. 졸업하면 바로 서울로 가서 옷장사를 배우겠다는 것이었다. 누구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대학 진학이 아닌 서울 갈 경비를 걱정하는 그녀는 마치 깜깜한 밤하늘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풍등 같았다. 졸업하자 경은이는 예정대로 서울로 갔다. 그녀다웠고 그녀라서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정해진 길을 벗어나면 불안해 하는 나와는 달리 경은이는 생각지도 못한 길을 만들면서 나아갔다. 의상디자이너가 되겠다는 경은이를 흉내라도 내고 싶었던건지 대학에 진학한 내 손에는 '복식사(服飾史)' 전공책이 들려 있었다. 가끔씩 대구에 내려올 때면 경은이는 내가 다니는 학교로 왔다. 나의 전공서적을 훑어보던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옷은 직접 입어보고, 직접 만져 봐야해."
비슷한 꿈이었지만 나아가는 방향은 우리의 성격처럼 완전히 달랐다. 어느 순간부터 경은이와 연락이 끊겼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내게는 참신함이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경은이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과정을 즐겼을 테지만, 항상 그랬듯이 나는 매번 결과물에 신경을 썼고 길이 끊어지지나 않을까 조바심을 냈다.
과제물을 기한 안에 못 만들면 어떡하나, 디자인이 교수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쩌나, 모든 과정과정이 걱정 투성이였다. 감각과 재능의 모자람을 깨칠 때면, 그리고 공부를 때려치우고 싶은 충동에 휩싸일 때마다 이상하게도 경은이가 떠올랐다. 하지만 이미 경은이는 마치 풍등처럼 부풀어 어디론가 사라졌다. 끝까지 지켜볼 수 없었지만 평소의 그녀처럼 남을 의식하지 않는 자유로운 비행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가 옷을 만든다면 특별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길을 가다 어떤 옷을 볼 때면 경은이가 떠올랐다. 그 옷들의 패턴과 색상, 소재는 내가 생각지도 못한 것들이었다. 옷들은 마치 경은이가 만든, 경은이만이 만들 수 있는 옷처럼 느껴졌다. 도중에 멈춘 나와는 다르게 경은이는 아직도 어딘가에서 그녀만의 방법으로 옷을 만지며 살고 있을 것만 같았다.
납작 엎드린 밀랍 심지를 세워 불을 붙였다. 심지가 타들어 가면서 풍등이 부풀기 시작하자 아이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풍등은 빵빵해지더니 쥐고 있던 손을 놓자 잔바람에 몸을 실었다. 어둠 속에서 환한 빛이 천천히 흔들리며 위로 떠올랐다. 각각의 글귀는 빛이 되어 어둠을 가르며 솟구쳐 올라가더니 별처럼 반짝임을 남기고 사라졌다.
시선 밖으로 벗어난 풍등 역시 험난한 여정을 겪는지도 모른다. 정해진 길은 없을 테지만, 그때마다 길을 만들어 날아가는 풍등처럼 최대한 자유롭게 비행을 하기를 바란다. 여정을 끝낸 글귀는 어둠을 넘어 희붐한 형태를 또렷이 드러내어 미래의 자신에게 도착해 있을 것이다.
첫댓글 '여정을 끝낸 글귀는 어둠을 넘어 희붐한 형태를 또렷이 드러내어
미래의 자신에게 도착해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 희망의 메세지가 될 좋은 글이네요.^^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잘 읽었습니다.
다시 한번 축하합니다.
축하합니다
풍등에 더 큰 꿈을 담기를 바랍니다
바람에 맏겨진 등. 자유 보다는 위태로워 보인다.
우리네 삶도 위태로운 풍등이 아닐까.
손에 땀이 나는 듯한 나날들.
수상을 축하합니다.
오래전 부처님 오신 날 풍등을 띄웠습니다.
밤하늘로 멀어져가는 풍등을 보고 빌었습니다.
사무관 승진시험에 꼭 붙게 해 달라고요.
풍등의 힘이었는지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습니다.
덕분에 인사과에 발령이 나서 5년간 근무했습니다.
다시 한번 풍등을 띄워보고 싶습니다.
미래의 자신에게 도착할 메시지를 꿈꾸면서 말입니다.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