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흑백사진
양재일(시인, 본지 발행인 겸 주간)
점심시간을 알리는 소사 아저씨의 두부종 소리가 울리자, 나는 양은 도시락 뚜껑이 닫히지 않을 만큼 엄마가 싸준 쌀 반 보리 반의 밥을 펼치며
“굶으면 죽는다. 같이 먹자.”
나는 형처럼 말했습니다.
그의 시선은 애써 도시락을 피했지만, 그의 위장은 이미 젓가락을 들고 앉아 그에게 자존심을 지우라고 재촉했습니다.
그의 입에서는 막걸리 트림 같은 냄새가 났습니다. 그는 일주일째 엄마가 동대문 전차 종점 뒷골목 술집 색시처럼 콧소리를 내며 술지게미 장사에게 외상으로 사 온 술지게미로 배고픔을 속이고 있었습니다. 그는 술에 취해 책상에 엎드려 구토를 했습니다. 하지만 토사물 속에 밥알은 한 톨도 없었습니다.
담임 선생님은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술을 처먹고 왔다며 매일 매일 토씨 하나 안 틀리는 녹음기를 틀며 그의 얼굴을 쥐어박았고 마른버짐꽃이 핀 그의 얼굴엔 피꽃이 피었습니다. 나는 담임을 향해 “먹을 것이 없어 술지게미로 연명을 하는 내 친구 병욱이의 슬픔을 아시는가요” 하고 송곳니를 드러내려다 내 새가슴 속으로 감추었습니다. “유유상종!” 거름망도 없이 배설해 내는 선생님의 비아냥거림 짙은 횡포가 두려워 입에 지퍼를 채웠습니다. 하지만 “새 가슴, 새 가슴” 하며 내 비겁함을 꾸짖는 소리가 매일 매일 이명으로 울렸습니다.
수제비도 못 먹고 온 아이들이 수돗가를 향하여 선착순 하듯 달려갔습니다. 수도꼭지를 틀자, 중학생 형들의 오줌발처럼 쏟아지던 물줄기가 5분도 안 되어 세 살 막냇동생 오줌처럼 가늘어지더니 국민 소득 78 달러, 세계 최빈국의 수도는 멎어버렸습니다.
수돗물로 올챙이 배를 만든 아이들은 수치심을 지우려고 운동장 끝에 있는 철봉대로 달려갔습니다. 하얗게 핀 마른버짐꽃이 모여 군락을 이루니 자작나무 수피처럼 창백했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이를 잡고 있습니다. 그들의 몸에서 나온 이는 개미만 했습니다. 밤새 피를 빨아먹은 이에 복수하듯 아이들은 이를 잡은 후 철봉대 기둥에 놓고 짓눌렀습니다. 이들의 창자 터지는 소리가 딱총소리처럼 들렸고 철봉대에는 피꽃이 만발했습니다.
친구는 자존심이 밥 먹여 주냐는 말로 그를 채근하던 그의 위장에 찬물 한 모금이라도 먹이려고 수돗가로 걸어갔습니다. 갓 태어난 송아지처럼 몇 걸음도 못 가 쓰러지기를 반복하다 겨우 수돗가에 도착했지만, 엄마의 빈 젖 빨 듯 빨기를 반복하다 어지럼증에 쓰러졌습니다. 그의 얼굴이 횟배 앓는 아이의 입에서 나온 회충의 색깔 같았습니다.
그는 우려낼 대로 우려내어 기름기 한 점 없는 사골의 석회질 같은 다리로 철봉대를 향하여 애벌레처럼 오체투지五體投地를 이어갔습니다. 주저앉고 싶었지만, 수치심이 그를 철봉대로 떠밀었습니다.
토요일 아침, 엄마에게 친구를 데려올 거라며 밥을 해 달라고 목젖에 엉겨 붙는 말을 침으로 녹여 입술 밖으로 게워 내었습니다.
“지 아버지 닮아 오지랖도 유전이네!”
엄마는 한숨을 밀어 넣으며 부정도 긍정도 아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배고픔을 헤아리지 못하는 담임의 긴 종례는 배고픔에 불을 질렀습니다. 누군가의 배꼽시계가 민망함을 밀어내고 선창을 하자 모두들 개구리 울 듯 떼창을 했습니다.
고깃국은 없었지만, 밥상 위엔 아버지가 외출할 때마다 머리에 바르는 포마드처럼 기름기 반지르한 쌀밥과 자반 고등어가 마지막 김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배고프겠다며 빨리 먹으라는 엄마의 채근을 들으며 숟가락을 들었을 때 그의 밥은 이미 눈물 밥이 되어 있었습니다. 엄마는 옆에 앉아 자반의 속살을 발라 그의 숟가락 위에 올려주었고 내게는 조금만 먹으라고 눈을 껌벅였습니다.
슬픈 밥을 먹고 나는 학교 앞까지 그를 배웅하고는 몸을 숨겼고 고양이 걸음으로 그를 미행했습니다. 버짐 핀 얼굴 때문에 발각될까봐 낙엽에 흙을 묻혀 얼굴을 위장을 했습니다.
그의 집은 청계천 둑방 위의 하꼬방이었습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철거반원들이 어린 아기 머리통만 한 해머를 들고 참수형을 하는 망마니처럼 입에 거품을 물고 그의 집을 부수고 있었습니다.
콜타르를 뿌려놓은 듯 기미 짙은 얼굴의 그의 엄마가 무릎을 꿇고 빌다가 해머를 든 철거반원의 다리를 잡고 거머리처럼 달라붙었습니다. 하지만 엄마의 반항은 완장을 찬 사내의 권위에 불을 붙여버렸고 일순간에 루핑 지붕과 사과 괘짝으로 만든 벽이 먼지를 쏟아내며 친구의 얼굴을 지워버렸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나의 미행을 후회했습니다. 다음날은 아침부터 비가 내렸습니다. 나는 그가 궁금해져 찢어진 비닐우산으로 얼굴을 가리고 그의 폐허를 탐색하러 갔습니다. 나무젓가락으로 건드려도 쓰러질 것 같은 그의 엄마가 철거의 잔해물을 모아 움막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나는 우산을 그의 엄마에게 던져주고 비를 맞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이 달팽이처럼 기어갔습니다. 그가 술에 취한 노숙인처럼 학교에 나타난 후 그는 입을 닫아버렸고 며칠이 흐른 후 나는 비밀의 자물통을 굳게 채우고 마포 나루 동네로 이사했고 손 한 번 잡지 못한 채 그와 헤어졌습니다.
서울에서 22년 간 국어 선생을 마치고 24년 전 어느 여름날, 내 인연의 홀씨가 양평의 변방 지평에 내려앉았습니다. 나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늘어진 엄마의 빈 젖을 빨다 울고 있는 아프리카 아이들의 정강이뼈 같은 서까래가 150년 된 오막살이를 이고 있는 폐가에 빈 보퉁이를 풀었습니다.
초등학교 교실 만한 밭에 푸성귀를 심었습니다. 밭고랑을 걸을 때마다 잡초들은 경기를 했습니다. 내 얼굴을 외면한 채 어린 날 그애의 엄마처럼 살려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어둠이 키를 높이면 용케 살았다고 기뻐했습니다. 아침이면 가족들이 모여 굿 모닝을 외쳤습니다. 그래서 나는 녀석들과 함께 살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나의 게으름을 꾸짖듯 잡초는 아침과 저녁 시원할 때 뽑아야 한다고 혀를 차고 갔습니다.
8월의 오후 두 시였습니다. 이승의 삶이 불지옥이라며 차라리 제초제를 뿌려 죽여달라고 애원을 했습니다. 나는 예초기의 시동을 걸고 녀석들에게 이발을 해주겠다고 말하며 악셀을 당기며 다음 생에는 잡초라는 노비문서를 버리고 장미나 백합으로 태어나라고 기도했습니다.
다음 날 새벽, 밭으로 나갔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이 성수처럼 이슬을 내려 녀석들의 상처에 발라주며 호호, 하고 입김을 불어주었습니다. 나는 예초기를 들 때마다 내 친구 병욱이가 잡초처럼 살아있기를 기도했습니다.
서울 나갈 때마다 청량리에서 전철을 타고 교보문고로 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나의 가난한 주머니는 언제나 동묘 벼룩시장의 헌책방으로 나를 내리게 했습니다. 거기가 그가 살던 꼬방동네이기 때문입니다.
헌책방에서 책 몇 권을 사면 벼룩시장 뒷골목 오천 원짜리 동태탕 집으로 들어가 동태탕과 막걸리 한 병을 주문하고는 출입문을 바라보며 혹여 로또에 당첨되는 기적 같은 일이 내게 온다면 그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도를 하며 술을 마시곤 했습니다. 어느 날, 나는 마른버짐꽃이 아닌 목련의 속살로 변모한 그가 들어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나는 자석에 끌리듯 그에게로 갔고 그도 내 자력에 끌려왔습니다.
“용두초등학교 4학년 때 내 짝꿍 주근깨 조병욱!”
“맞아, 내 친구 양재기, 양재기, 양재기!”
그는 이름 때문에 생긴 내 별명을 50년 동안 잊지 않았고 나도 그의 죽은깨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함께 온 일행들을 자리에 앉힌 후 내 앞에 앉았습니다. 나는 굳게 채웠던 비밀의 자물통을 풀며 그를 미행했다는 것을 실토했고 그도 내 미행을 알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내 얼굴을 볼 수가 없어 며칠 동안 결석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내가 기도한 대로 잡초처럼 살아나 50년 만에 내 앞에 섰습니다. 그는 창신동의 40평 대 고층아파트에 살며 직원 일곱 명을 데리고 가내수공업을 하는 사장이었습니다.
그날 술값은 그가 지갑 마구리를 열어젖히고 내었습니다. 지평 가는 기차 시간에 쫓겨 그의 집이 있던 청계천 둑방에서 그와 나는 떨어지지 않는 손을 놓으며 작별을 했습니다. 청계천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의 LED 불빛이 마른버짐으로 피어났습니다.
첫댓글 추억의 아스라함
그래도 해후를 하셨군요
얼마나 반갑고 머쓱했을지를
상상합니다
참 다행입니다
아직도 빈 부의 차는
여전한 것 같습니다,
양재기
주근깨
저도 옛 별명이 생각납니다
완두콩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