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색창연한 솟을대문에 비해 격에 맞지 않는 그 중문으로 들어서면 다섯 층계의 돌계단 아래 땅이 우묵하게 꺼진 쉰 평 정도의 너른 안마당이 나섰다. 선례누나 뒤를 따라 잔뜩 주눅이 든 채 내가 그 집 안마당으로 옷보퉁이를 끼고 처음 들어섰을 때, 옆집과 경계를 이룬 흙담 가장자리 수채를 겸한 개골창에는 벌써 잡초가 수북이 자라 있었다. 그 개골창은 중문 층계 아래 판자때기로 지은 변소에서 시작되어 언제나 퀴퀴한 냄새를 풍겼다.
「마당깊은 집」(1998, 문학과지성사)
“볕이 잘 드는 마당이 넓은 이런 곳에서 한번 살아보고 싶은 생각이 드네요.”
‘마당깊은 집 문학 체험 전시관’을 다녀온 어느 블로거의 글이다. 대구를 돌아보려는 이들을 위한 정보에 따르면, 전시관은 약전골목에 있는 문학 체험 전시 공간으로, 6.25 전쟁 이후 대구 중구를 배경으로 한 소설 「마당깊은 집」의 스토리와 등장인물, 대구 피난민의 삶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한 곳이다. 다만 전시관은 소설 속 주소가 아닐뿐더러, 실제의 마당은 ‘볕이 잘 드는 마당’과 거리가 멀다. “여러 가구의 세를 들이려 방 가운데 판자벽을 쳐서 네 칸으로 만든” 그곳은 개골창에 잡초가 수북하듯, 굶주림과 설움이 가득한 공간이다.
태풍 카눈이 한반도를 관통한 날 이 소설을 다시 읽었다. 소설 속 장마 이야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난리는 가난한 이들한테 먼저 닥친다. 주인공 길남은 ‘그해 여름’ 장맛비에 마당깊은 집이 겪은 물난리는 모두 세 차례였노라 회상한다. 그중에서도 7월 하순의 물난리야말로 정말 대단했었다. 마당에 넘실대는 물 위로 장대 같은 빗발이 내려꽂히고, 빨래판과 고무신짝 따위가 물에 둥둥 떠다녔다. 방에까지 물이 들어올 지경이라 아래채 세 든 사람들은 초비상이다. 그러나 다섯 칸 돌층계 위 위채 주인집 사람들은 강 건너 불구경, 아니 다섯 칸 돌층계 아래 물 구경이다. 그 집 아들들은 팔짱을 낀 채 “보트를 띄워도 되겠군.”이라거나, “내가 잡아 온 물고기도 다 떠내려갔겠데이.”라며 호들갑을 떤다. 주인공 길남은 그들의 말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같은 처지가 아니라고 해서 무정한 죄가 없어지지는 않는다. 누군가의 기억이 그들에게 언제나 유죄를 선언해서이다.
「마당깊은 집」은 김원일의 자전적 소설로, 작가가 경험하지 않고는 쓸 수 없는 재미와 깊이를 가진다. 소설은 “시내 중심 거리인 중앙통・향촌동・송죽극장 일대에는 넥타이 맨 양복쟁이와 양장 차림의 굽 높은 뾰족구두를 신은 여자들로 넘치고, 군복 차림의 한국군과 미군도 민간인만큼이나 흔하던” 시절의 대구. “한편, 피난민・실업자・잡상인・지게꾼・거지・구두닦이 또한 발에 차이는 돌멩이만큼이나 널려 있”던 1950년대의 대구를 사진처럼 생생하게 재현한다. 이참에 소설로든 전시관으로든 훌쩍, 시간 여행을 떠나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