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번째 답사지는 문무대왕릉이었다. 신라 30대 왕 문무왕은 29대 왕 태종무열왕의 아들로, 실질적인 삼국 통일을 이뤄낸 장본인이었다. 문무왕의 업적을 간략하게 살펴보자면, 나당 연합을 결성해 백제를 무너트린 후 끝내 고구려까지 무너트리며 삼국 통일을 이뤄냈고, 이후 고구려에 안동도호부를, 백제에 웅진도독부를 세우며 식민 통치를 이루고자 하던 대국 당나라에 맞서 나당전쟁을 일으켜 대동강부터 원산만 이남의 땅까지 한반도를 하나의 국가로 이룩해 낸 인물이었다. 이후 죽음에 이르러서는 스스로 한반도를 수호하는 용이 되기 위해 동해바다에 위치한 문무대왕릉에 자신의 결정으로 안치되었다.
문무왕은 여행을 떠나기 전, 삼국 통일을 주제로 인물을 정해 연극을 했을 때 우리 팀이 연기한 인물이었다. 그때 문무왕을 공부하면서 정세 적으로 의외라 느꼈었던 부분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삼국 통일 이후의 모습이었다. 문무왕 이전 왕인 태종무열왕까지만 하더라도, 오직 삼국 통일에만 혈안이 되어서 몇 대 동안 전쟁을 반복했을 뿐이지, 갑자기 찾아온 평화 속에서 어떻게 민심을 하나로 뭉칠지에 대한 것은 실질적인 고민거리가 아니었었다. 막상 통일하고 보면 얼마 전까지 피 터지게 싸우던 적국의 백성들이 한 나라의 백성이 되는 샘이었으니. 그런 와중 어떻게 민심을 하나로 몹고 민족 정신을 일깨운단 말인가. 사실상 가장 머리 아픈 과제가 물질적 통일이 아닌 심리적 통일이었을 거라고 생각 돼진다. 그러니 이제 와 내가 보기로는 당시 당나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식민 지배 하려 했었던 것이 문무왕의 개인적인 입장으로 보면 분명히 긍정적인 부분 또한 있었을 듯하다. 왜냐하면 당이라는 거대한 외부의 적과 싸움으로써 백제의 백성들과 고구려의 백성들 모두 힘을 합쳐 한반도를 지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외부의 적은 내부를 단결시키는 역할을 하고, 끝내 외부의 적을 무찌르고 나면 백성들 사이에 그어져 있던 경계선은 어느 정도 흐려져 있을 것이다. 이후에는 삼국 모두 국교로 믿고 있던 불교를 번창시키며 백성들의 마음을 모았을 것이고, 문무왕은 소경제를 도입해 나라를 잘 다스려 나갔다.
그렇다 보니 민심이라는 대중의 의지와 이를 잘 이끌어 나아가야 하는 정치 사이에는 굉장히 모순적인 점들이 다양하게 내포 되어있는 듯하다. 정치에는 정답이 없으니, 다양한 상황 속에서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더 나은 방책을 찾아내고, 그 과정을 복습하며 다시 새로운 방안을 제시하다 보면, 이러한 역사를 한 부분 부분으로만 접하는 독자의 입장이 되었을 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이 너무나 많다. 맥락이나 개연성 같은 잣대들을 들이 대는게 결국 무의미한 것이 역사이니. 어느 한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상황에 얽힌 다양한 시각들을 함께 공부해야만 했다.
문무왕은 자신 이전의 몇 대에 이르는 신라 왕들이 절실하게 목을 매었던 삼국 통일을 마침내 이뤄낸 왕이지만, 그러한 업적보다도 내가 개인적으로 문무왕의 이야기에서 더 크게 와닿았던 부분은 바로 새로운 시대를 여는 첫걸음을 내딛었다는 점이었다. 왜냐하면 의외로 당연하다는 듯 지나칠 수 있는 부분을 누구보다 절실히 살아내었던 사람이 바로 문무왕이라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열 번째 답사지는 감은사지였다. 감은사는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이 창건한 절로, 현대에 남아있는 것은 동일한 모습의 삼층석탑 뿐이다. 이 감은사에서 내다보이는 바다에는 문무대왕릉이 보인다. 아무래도 문무왕의 아들이었던 신문왕이 창건한 절인 만큼, 문무왕을 기린다는 의미가 절에 많이 담겨져있다. 감은사의 회랑에는 비가 많이 와 강물이 범람할 경우, 용이 되어 한반도를 지키는 문무왕이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놓기도 했다. 어찌 보면 죽어서 용이 되어 한반도를 지킨다는 이야기는 믿기 어려운 신화에 가깝지만, 그럼에도 이런 상징적인 의지를 이어받는 신문왕의 행동은 그 안에 담긴 한반도를 지키겠다는 문무왕의 뜻 또한 이어받는 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있을 듯하다.
열한 번째 답사지는 월성이었다. 월성은 신라의 왕궁으로, 토성 위에 지어진 반달 모양의 궁이었다고 한다. 현재에는 가파른 토지와 건물이 있던 자리만이 남아있을 뿐 화려한 전각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상징적으로 신라의 왕들이 지낸 장소인 만큼 눈에 보이지 않게 얽혀있는 이야기들은 많았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지리적으로는 월성의 구조가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 아무리 살펴보아도 월성은 수성을 벌이기에 좋은 구조로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궐은 전쟁을 치르는 장소가 아니지만, 그렇다면 왜 성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인가. 겉으로는 물이 흐르고 있는 가파른 경사 위에 궁궐을 지음으로써 지리적으로 유리한 고점을 잡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로는 불화살 몇 발 날리면 전멸당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현곡이 말씀하기로 월성은 역사적으로 전쟁을 치른 적에 없다고 한다. 몽골족이 침략했을 때에도, 나라가 망할 때에도 월성은 전쟁을 치른 장소가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서는 18세기에 제건 한 석빙고만이 유일한 건축물로 남아있었다. 석빙고가 처음으로 세워진 것은 신라 22대 왕 지증왕 때 지증왕이 더위를 워낙 많이 타는 결에 목재로 지은 얼음을 보관하는 건축물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또한 무너지고 현대에는 당시의 모습이 남아있지 않다. 그랬기에 사실 월성지를 찾아가 산책하며 돌아다녀 보아도 딱히 느끼는 점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산책하기 좋은 터라는 감상만이 남을 뿐, 어떠한 역사적 감상은 있지 않았다. 새삼 역사의 현장 위를 걷고 있으면서도, 나는 그저 산책로를 걷고 있을 뿐이었다.
열두 번째 답사지는 동궁과 월지였다. 월지는 신라시대 세자가 살던 궐이 위치한 터로, 현대에는 큰 호수와 멋진 전각이 지어져 있는 아름다운 공원이었다. 특히 우리가 찾아간 밤 시간에는 조명이 신라 시대 풍의 전각들을 아름답게 비추어 굉장히 낭만적인 풍경이 연출되었다. 우리는 월지에서 한시간 가량 자유 시간을 받아 나는 몇 번이고 산책로를 따라 호수를 돌고 또 돌았다. 현곡은 자신이 아직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과 월지를 함께 걸으라고 하셨지만, 나는 별 생각 없이, 혹은 너무나 많은 생각들에 휩싸여서 월지를 홀로 걸었다. 그러다 우연히 금조와 마주쳐서 같이 월지를 걸었다. 사실 솔직히 말해서 그 상황이 그리 만족스럽지만은 않았지만, 그래도 이 또한 현곡이 한 말과 연결되는 지점이라고 나에게 되새기며 총 네 번을 돌고 또 돌았다. 금조와는 굉장히 넉없이 지내는 듯하다가도 요즘은 내가 스스로 너무 복잡한 심정을 가지고 살고 있어서 본래 신경 쓰지 않던 부분들도 자꾸만 되새기고 신경 쓰게 된다. 어떻게 해야 할지, 사실 나는 아직 모르는 게 너무 많다. 그렇게 여행 세 번째 날의 역사 기행도 마무리 되었다.
열세 번째 답사지는 선덕여왕릉이었다. 선덕여왕은 한반도 최초의 여왕이며, 심지어 제위 기간이 삼국의 전쟁이 한창이었던 난세였음을 감안 했을 때 굉장히 이례적인 경우라고 볼 수 있다. 그만큼 자신이 할 수 없는 역할을 역임할 수 있는 유능한 인물들을 적극적으로 기용하고 많은 업적을 남기는 등 훌륭한 명군이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김유신과 김춘추라는 현대에 이르러 한국사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두 위인을 기용하여 신라를 안팎으로 잘 다스렸다는 점에서는 굉장히 인상적으로 느껴졌다. 여왕이라는 입장. 당시 시대에는 굉장히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지위였던 만큼 자신이 능력적으로 채울 수 없는 부분에서 한계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에 알맞는 인물을 신뢰했다는 점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별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함으로써 훌륭한 위인으로 역사에 기록된다는 건 어떤 능력인가. 나는 과연 스스로의 입장을 가지고 남과 비교하고 열등감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수용하고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나아가고 있는가. 선덕여왕이 써낸 역사는 나에게 이러한 물음을 던져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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